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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종교 융합: 바미얀에서 만난 태양신과 미래불

해돋이의 첫 빛이 바미얀(Bamiyan) 계곡을 적실 때, 동쪽을 향한 거대한 불상은 황금빛으로 물들었다. 고대인들은 이 순간을 ‘미래불의 강림’이라 믿었다. 실크로드의 심장부에 자리한 바미얀 석굴은 단순한 종교 유적이 아니다.(그림1) 태양의 궤적과 정확히 맞닿은 대불의 방향, 페르시아 태양신과 불교의 ‘광명(光明)’ 사상이 융합된 독특한 상징체다. 바이얀 대불은 왜 ‘태양형 불상’으로 불릴까? 2001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된 대불이 남긴 메시지를 따라 문명 교차로의 숨은 코드를 해독한다. △ 인도와 그리스-이란 문화의 교차로, 바미얀 바미얀은 힌두쿠시(Hindu Kush) 산맥 사이 해발 2,500미터 고지대 분지에 위치하여 해돋이와 해넘이가 수직 절벽 사이로 비추는 장관을 이루는 지리적 특성을 가진다.(그림2) 『서유기』에서 현장 법사와 손오공이 넘어야 했던 대설산(大雪山)은 힌두쿠시 산맥이며, 바미얀은 아프가니스탄 남부의 인도 문화와 북부의 그리스-이란 문화가 융합되는 실크로드의 핵심 거점이다. 이러한 문명 교차점에서 불교가 전파되기 전부터 인도-이란계 민족인 사카족(Saka) 등에 의한 미트라(Mithra) 신앙이 뿌리내리고 있었으며, "빛의 구원자" 개념을 가진 태양신 미트라는 고대 여행자들이 이곳의 태양 광경을 신성시하며 얻은 종교적 영감과 함께 후일 불교의 미륵 신앙과 결합하는 문화적 토양이 되었다. △ 유럽인의 눈에 비친 바미얀: 오해에서 이해까지 바미얀은 19세기 영국 동인도회사의 중앙아시아 진출 과정에서 발견되었다. 1832년, 영국의 외교관 알렉산더 번스(Alexander Burnes)는 바미얀을 방문하여 불상을 "두 개의 우상(couple of idols)", "우아하지 않고 심지어 추하다(inelegant, even unsightly)”라고 평가했다. 그는 이 불상이 야만인이나 원시적인 믿음을 가진 사람들에게 어울릴 뿐이라고 했다. 이는 서구의 오리엔탈리즘적 시각 즉 아시아 문화를 서구의 틀로 해석하려는 경향을 잘 보여준다. 커다란 전환점은 1858년 프랑스 학자 스타니슬라스 주리앵(Stanislas Julien)의 『대당서역기』 번역이었다. 현장 법사의 정확한 기록이 유럽어로 번역되면서 바미얀의 정체성이 제대로 파악되게 된다. △ 현장 법사와 바미얀 석굴: 실크로드 불교 예술의 증인 현장 법사는 『대당서역기』 범연나국(梵衍那國) 조에서 바미얀에는 수십 개의 가람과 수천 명의 승려가 있었다고 기술했다. 특히 세 개의 거대한 불상에 대한 상세한 묘사를 남겼다. 왕성 동쪽에는 높이 백여 척의 황동으로 만든 부처상이 있었고(城东有鍮石釋迦佛立像,高百余尺), 황금빛 나고 보석 장식이 찬란했다(金色晃曜,寶飾焕爛)고 묘사하여 당시 바미얀 대불의 장엄함을 생생하게 전했다. 또 현장은 현대 고고학자들이 찾지 못한 380미터에 달하는 열반 와불이 왕성 동쪽 2~3리 떨어진 가람 안에는 있었다고 뚜렷이 적어 놓았다. 그런데 2000년대초 아프가니스탄 고고학자 타르지(Tarzi)는 이 열반불을 발견했지만 크기가 불과 10여 미터였다. 거대 와불의 실제 모습은 아직은 미스터리다. △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만남: 동대불 천정 벽화 동대불은 55미터의 부처 입상으로 무릎 한쪽이 약간 나와 있다. 이는 간다라와 그레코로만 조각상의 전형적인 특징이다.(그림3) 지금은 소실되었지만 이 불상의 천정 벽화에는 거대한 태양을 배광으로 전차를 타고 태양 망토를 걸친 채 검과 창을 든 태양신이 묘사되어 있었다.(그림4,5) 태양신 주변에는 날개를 단 전쟁의 여신이 그려져 있었는데, 이는 그리스 승리의 여신 니케(Nike)와 유사하다. 또한 횃불을 들고 태양신의 발아래를 비추는 배화교 신관의 모습도 확인된다.(그림6) 동대불을 마주보는 산비탈에 뚫린 구멍들은 천장묘(天葬墓)의 흔적으로, 이는 불을 숭배하고 태양을 신성시하는 조로아스터교가 이 지역에서 불교와 공존했음을 보여준다. △ 서대불과 미륵 신앙의 융합 서대불 불상은 인도 굽타(Gupta) 마투라(Mathura) 불상과 매우 가깝다.(그림7) 서대불 천정에는 대좌에 앉은 불상을 중심으로 낙천(樂天)들이 악기를 연주하고 천녀들이 춤추며 꽃을 뿌리는 정토 세계가 그려져 있었다.(그림8) 특히 중앙의 보살이 손에 든 불로불사의 묘약 항아리는 미륵보살의 전형적 도상으로, 이는 미래불 미륵이 도솔천에서 하생하여 중생을 구제한다는 "상승 사상"과 "하생 신앙"을 형상화한 것이다. 바미얀에서 태양신과 미륵불의 결합은 우연이 아니다. 고대 이란의 미트라(태양신)가 가진 "빛의 구원자" 개념은 미래불 미륵의 "구세주" 성격과 본질적으로 상통한다. 동대불이 해돋이 방향에, 서대불이 해넘이 방향에 배치된 것은 태양의 순환 주기와 미륵의 미래 하생을 연결시킨 종교적 상징체계를 보여준다. △ 바미얀 석굴의 현재 상황과 복원 노력 바미얀 석굴은 2001년 탈레반의 파괴로 심각한 손상을 입었으나, 유네스코 주도의 국제적 복원 노력을 통해 그 가치가 재조명되고 있다. 고대 실크로드에서 헬레니즘, 간다라, 인도 문화가 융합된 이 석굴군은 태양신 숭배와 미륵 신앙이 결합된 종교적 관용의 독특한 사례이다. 따라서 바미얀은 종교 갈등이 심화되는 현시대에 문화 융합과 공존의 지혜를 전하는 소중한 인류 문화유산이다.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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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6.17 18:0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10) 실크로드의 시각적 강창 설법: 인도 파타에서 한국 땅설법까지

판소리는 본래 '열두 마당'이라 불리며 춘향가, 심청가, 수궁가, 흥보가, 적벽가의 다섯 마당 외에도 강릉매화타령, 배비장타령, 무숙이타령 등 다양한 작품들이 존재했으나, 그중 상당수가 현재는 전해지지 않고 있다. 만약 사라진 것으로 여겨지던 판소리 창본이 갑자기 발견되어 실제 공연까지 이루어진다면, 이는 한국 문화사에서 중대한 사건이 될 것이다. 바로 이러한 문화적 '재발견'의 사례가 불교 전통에서 실제로 일어났는데, '땅설법'이 그 주인공이다. (그림1) △ 사라진 줄 알았던 불교 전통 '땅설법', 삼척 안정사서 생명력 이어가 땅설법은 강원도 삼척 안정사에서 최근 재발견된 불교 속강(俗講)의 한 형태로, 불교 교리와 설화를 시각 자료와 함께 구연하는 독특한 설법 방식이다. 이 전통에서는 승려가 그림이나 특수 제작된 도구를 활용하여 불교 교리의 내용을 청중들에게 보다 효과적으로 전달한다. 학술적 관점에서 이러한 시각적 설법 형식은 인도의 파타(Pata) 전통에서 기원하여 실크로드를 따라 중앙아시아를 거쳐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속강(俗講)이 생겨났고, 변문(變文)이라는 독특한 불교문학 형태로 발전했다. 이 전통은 다시 한반도를 거쳐 일본으로 전해져 오늘날까지 에토키(絵解き)라는 형태로 남아있다. 특히 주목할 점은 한때 사라진 것으로 여겨졌던 이 불교 설법 형식이 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의 안정사에서 살아있는 전통으로 보존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림2) △ 속강(俗講)과 변문(變文): 중국 불교의 시각적 설법 속강(俗講)은 당나라 중기(7세기 후반~8세기) 이후 중국에서 유행한 불교 설법의 한 형태로, 승려들이 일반 민중(속인)을 대상으로 한 통속적인 설법을 의미한다. 이는 불교 경전의 내용을 대중에게 쉽게 전달하기 위해 변상도(變相圖)라는 그림을 보여주면서 진행되었다. 돈황 장경동에서 혜초의 왕오천축국전과 함께 발견된 변문(變文) 문헌 중 펠리오 돈황사본 P.4524 항마변문(降魔變文) 두루마리 그림은 속강이 대중화된 시각적 불교 설법 방식임을 뒷받침한다. (그림3) △ 에토키(絵解き): 일본 불교의 시각적 설법 일본 불교에서 발전한 설법 방식인 에토키(絵解き)는 "그림을 푼다"라는 뜻으로 그림의 장면이나 의미를 설명한다.(그림4) 에토키가 문헌에 처음 등장하는 것은 AD 931년으로 시게아키라(重明) 친왕이 쓴 『이부왕기(吏部王記)』에 『석가팔상화(釈迦八相絵)』의 에토키를 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고대 일본의 에토키는 황실이나 귀족 등 극소수의 상위 신분의 사람들에게 고승이 직접 당탑 내의 벽화나 병풍화를 설명하는 것이었다고 생각된다. 가마쿠라 시대(1185-1333) 이후 에토키는 급속히 대중화·예능화되어 종교적 교화 수단을 넘어 문화적 오락 형태로까지 발전하였다. (그림4) 일본 불교의 시각적 설법 에토키(絵解き) △ 인도 파타와 스투파: 동아시아 불교 그림 설법의 모태 동아시아의 시각적 불교 설법 방식은 공통적으로 고대 인도의 파타(Pata) 전통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다. 인도의 파타는 길이가 종종 3~5미터에 달하는 천이나 종이 두루마리에 신화적 장면, 신들, 영웅, 또는 주요 사건을 연속적으로 그려넣은 시각 자료였다. 구연자는 이 그림을 벽이나 나무에 걸거나 펼쳐 놓고, 손이나 긴 막대기로 특정 부분을 지목하며 노래(chants), 설명(narration), 때로는 대화체를 활용하여 이야기를 생동감 있게 전달했다.(그림5) 이러한 시각 자료를 활용한 구술 전통은 문자 해독력이 낮은 대중에게 종교적 가르침과 서사를 효과적으로 전파하는 수단이었다. 불교와 그림 설법의 본격적인 결합은 스투파(불탑)의 부조 조각에서 나타났다. 스투파를 장식하는 부처님의 생애와 전생 이야기(자타카) 등 불교 설화도를 해설하던 승려들은 고대의 "그림 설법 법사"라 할 수 있다. △ 중앙아시아 불교 그림 설법의 현장: 키질 205굴 벽화 중앙아시아에서 그림 구연 설법이 유행하였음을 보여주는 가장 명백한 증거로는 키질(Kyzil) 205굴 벽화이다. 이 벽화는 제작 연대가 7세기 전반기로 추정되는데, 브라만 출신 바르샤카라(Varṣākāra)가 불교 옹호자인 아자타샤트루(Ajātaśatru) 왕에게 부처님 생애 변상도를 보여주며 설법하는 장면을 담고 있다. 벽화에서 주목할 점은 바르샤카라가 이러한 시각적 내러티브를 통해 부처의 입멸이라는 충격적인 소식을 왕에게 완충적으로 전달하는 방식이다. 왕은 정제된 버터가 담긴 항아리--고대 문화에서 항아리는 자궁과 재생의 상징으로 종종 사용--에서 목욕 중인 모습으로 묘사되는데, 이는 충격을 완화하기 위한 장치로 해석된다. 또한 벽화 아래에는 세계의 축인 메루산(須彌山)이 무너져 내리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부처의 열반이 세계에 미친 영향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고 있다.(그림6) △ 잊혀진 시각적 불교 강창 '땅설법'의 재발견과 의의 한국에서는 '땅설법'이 과거 '삼회향놀이'의 다른 명칭으로 알려졌으나, 1960~70년대 이전에 소멸된 것으로 여겨졌다. 강원도 삼척 안정사에서 다여(茶如) 스님과 신도들이 전승해 온 '땅설법'은 단순한 민속놀이가 아니라 불교 교리를 대중에게 전달하기 위한 체계적인 설법 형식임을 확인할 수 있다. 최근 부처님 오신 날을 맞아 안정사에서 개최된 <세계의 속강과 땅설법 국제포럼>에서 세계적 석학인 펜실베이니아대 빅터 메어(Victor Mair) 교수가 주목할 만한 발언을 했다. (그림7) 메어 교수는 오늘날 땅설법이 실제로 전승되고 있다는 사실에 학술적 놀라움을 표하며, 이 귀중한 문화유산의 체계적 보존과 국제적 공동 연구의 필요성을 강조했다. 이러한 발견은 한국 전통 예술의 계보학적 재고찰을 요구한다. 특히 판소리의 기원과 발전 과정을 불교 속강(俗講)과의 연계성 측면에서 재검토할 필요성이 제기된다. 불교 설법 형식과 전통 공연 예술 간의 영향 관계를 밝히는 연구는 한국 문화사의 중요한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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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19 16:4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9) 경계를 넘는 통치자, 알렉산더의 혁신적 통치 방식

알렉산더 대왕(Alexander the Great 356-323)은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복자 중 한 명으로, 32세라는 짧은 생애에도 그리스에서 인도 북서부까지 이르는 광대한 제국을 건설했다. 그러나 그의 진정한 위대함은 군사적 성취를 넘어 정복지 문화를 존중하고 수용하는 독특한 통치 철학에 있었다. 그는 이집트에서는 파라오로 즉위하고(그림1), 페르시아에서는 현지 전통 의복을 착용했으며, 인도 불교 문화권에서는 금강역사(그림2)로 표현되었다. 이러한 문화적 포용 정책은 단순한 정치적 전략을 넘어, 서로 다른 문명 간의 가교 역할을 자처한 알렉산더의 선구적 세계관을 반영한다. 그는 무력으로 정복한 영토를 문화적 융합을 통해 진정한 제국으로 통합하고자 했다. △ 신의 아들이 된 외국인 왕: 알렉산더의 이집트 정복 전략 알렉산더 대왕은 기원전 332년 페르시아 지배하에 있던 이집트를 정복했다. 당시 이집트는 약 200년간 페르시아의 억압적 통치를 받아왔기에, 이집트인들은 알렉산더를 해방자로 환영했다. 정복 후 알렉산더는 정치적으로 탁월한 조치를 취했는데, 현지 전통에 따라 자신을 '파라오'로 선언하고 이집트 신전에서 제사를 지내며 현지 신들을 공경함으로써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했다. 이러한 문화적 포용 정책은 이집트인들의 자발적 지지를 얻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 이집트 파라오로 변신한 알렉산더: 룩소르 신전 부조의 상징성 필자는 지난 2월 룩소르(Luxor) 신전에서 파라오로 묘사된 알렉산더의 부조를 확인했다. 이 부조는 알렉산더가 태양의 신 아몬(Amon)에게 성수(聖水)를 제물로 바치는 장면으로, 물방울이 떨어지는 모습까지 정교하게 표현되어 있다.(그림1) 알렉산더의 왼손에는 권위의 상징인 와스 홀(Was Scepter)이 쥐어져 있는데, 이 홀은 상단부가 동물 머리 형태이며 하단부는 갈라진 포크 모양으로 권력과 지배력을 상징한다. 아몬 신은 긴 깃털 왕관을 쓰고 있으며, 발기된 성기가 특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는 고대 이집트인들이 성적 표현을 자연스럽게 수용했으며, 이를 자기 재생, 부활, 그리고 생명 창조의 능력을 상징하는 것으로 여겼음을 보여준다. 부조에서 아몬 신은 알렉산더보다 더 크고 위엄 있는 자세로 표현되어 신의 우월적 지위를 시각화했다. 이 파라오가 알렉산더임을 확인할 수 있는 결정적 증거는 부조 좌우에 상형문자(hieroglyphics)로 동일하게 새겨진 알렉산더의 이름이다.(그림3과 그림1 홍색 작은 원) △ 적의 옷을 입은 정복자: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문화 수용 알렉산더는 페르시아 정복 과정에서 상징적 권력 중심지인 페르세폴리스를 불태웠음에도 불구하고, 역설적으로 페르시아 문화를 존중하고 융합하려는 태도를 보였다. 그는 페르시아 다리우스 3세의 왕관과 화려한 로브 등 페르시아 왕실 의복을 착용했는데, 이는 당시 그리스인들에게 충격적인 행보로 받아들여졌다. 알렉산더의 페르시아 문화 수용을 직접 보여주는 유물은 제한적이나, 이탈리아 폼페이에서 발견된 모자이크(BC 100년경 제작 추정)에서 그 단서를 찾을 수 있다.(그림4) 이 모자이크는 알렉산더와 다리우스 3세의 전투 장면을 묘사한 것인데, 알렉산더는 그리스식 갑옷을 입고 있지만, 전체적인 배경과 구성은 페르시아 미술의 영향을 분명히 반영하고 있어, 그의 문화적 융합 정책의 시각적 증거로 해석된다. 그림4. 알렉산더 모자이크(Alexander Mosaic). 나폴리 국립고고학박물관. △ 금강역사가 된 정복자: 불교 수호신으로의 변신 알렉산더 대왕의 진정한 문화적 리더십은 그가 불교의 수호신 금강역사로 재탄생한 예술적 표현에서 가장 극적으로 드러난다. 아프가니스탄 하다(Hadda) 지역의 불교 사원 타파 쇼토르(Tapa Shotor)에서 발견된 조각상은 알렉산더 대왕의 특징적인 얼굴 윤곽, 곱슬거리는 머리 스타일, 그리스식 복장과 자세를 분명히 보여주지만, 흥미롭게도 그는 중앙의 주요 위치가 아닌 불교 사원의 주변부에 배치되어 있다.(그림5) 이러한 위치는 그가 붓다를 보호하는 금강역사(Vajrapani)의 역할로 재해석되었음을 시사한다. 이러한 문화적 변용은 기원전 4세기부터 발전한 간다라 문화권의 특수한 역사적 배경 속에서 이해할 수 있다. 알렉산더의 동방 원정 이후, 현재의 아프가니스탄과 파키스탄 북부 지역에는 그리스-박트리아 왕국이 설립되었고, 이 지역은 그리스 문화와 현지 문화, 특히 불교가 만나는 융합의 장이 되었다. 간다라 미술은 이러한 문화적 혼합의 대표적 산물로, 그리스의 사실주의적 조각 기법과 불교의 정신적 주제가 결합되어 독특한 예술적 표현을 탄생시켰다. 타파 쇼토르의 알렉산더 조각은 이러한 문화 융합의 극적인 예시이다. 전통적인 그리스 영웅의 이미지는 불교적 맥락에서 재해석되어, 세속적 정복자가 정신적 수호자로 변모한 것이다. 그림5. 금강역사가 된 알렉산더. 아프가니스탄 하다(Hadda) 타파 쇼토르(Tapa Shotor) 출토. △ 문화적 포용: 알렉산더의 혁신적 리더십 전략 알렉산더 대왕의 문화적 포용 정책은 고대 세계에서 전례 없는 혁신적 통치 방식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접근법은 당시 일반적이었던 정복자 중심의 문화 이식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것이었다. 오늘날의 관점에서 볼 때, 알렉산더의 다문화 리더십은 현대 글로벌 사회의 리더십 과제와 놀라운 유사성을 보인다. 문화적 다양성을 인정하고 존중하며, 다양한 문화적 배경을 가진 구성원들의 통합을 촉진하는 것은 현대 다국적 조직과 글로벌 사회의 핵심 과제이다. 알렉산더는 2300년 전에 이미 이러한 다문화적 접근법의 잠재력과 도전을 경험했던 것이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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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7 17:2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8) 신성한 모성의 변용: 이집트 여신에서 성모 마리아로

얼마 전 이집트를 다녀왔다. 이집트 남동부 아스완(Aswan) 누비안(Nubian) 박물관에는 이집트 여신 이시스가 어린 호루스(Horus)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표현한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조각상(그림1)이 있는데, 설명판에 다음과 같이 쓰여 있다. “이시스 여신이 어린 호루스 신을 젖먹이는 조각상은 고대 이집트에서 모성의 개념을 상징한다. 후대에 콥트 예술가들은 이 개념을 활용하여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에게 젖을 먹이는 모습을 표현했다.” 무슨 소리일까? 과연 사실이고,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 콥트 미술로 본 성모 마리아와 이집트 여신의 관계 초기 기독교 미술사에서 성모 마리아가 아기 예수를 안고 있는 형상과 고대 이집트 여신이 아기를 안고 있는 조각상 간의 관계는 미술사학자와 종교학자들 사이에서 지속적인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일부 학자들은 두 도상 사이의 직접적 영향 관계를 강조하는 반면, 다른 학자들은 이러한 유사성이 과장되었거나 우연의 일치일 수 있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학술적 논쟁의 맥락을 염두에 두고, 특히 콥트 미술(Coptic Art)이 두 전통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을 가능성을 중심으로 이 관계를 살펴 보자.(그림2) 그림2. 안티노에(Antinoe) 출토 ‘수유하는 이시스’, AD 4세기, Dahlem Museum, Berlin △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모성과 재생의 이집트적 상징 고대 이집트 미술에서 가장 널리 알려진 모자 이미지는 여신 이시스가 아들 호루스를 무릎에 앉히거나 품에 안은 형상이다.(그림3) 기원전 3000년경부터 헬레니즘 시대까지 지속적으로 제작된 이 이미지에서 이시스는 왕좌 형태의 머리 장식이나 태양 원반을 쓰고 있으며, 호루스는 매의 머리나 인간 아이의 모습으로 표현된다. 특히 이시스가 호루스에게 젖을 먹이는 '수유하는 이시스(Isis Lactans)' 도상은 모성과 풍요, 보호와 재생의 상징으로 이집트 전역에서 숭배되었다. 특히 신성한 존재에서 나오는 젖은 생명과 신성의 양분을 나타냈다. 이 모자상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신화적 서사(오시리스의 죽음과 재생)와 왕권 계승의 정당성을 시각화한 정치-종교적 상징체계의 일부였다. 그림3. 수유하는 이시스, BC 664-332, THE MET △ 초기 기독교 성모자상의 양식적 발전 초기 기독교 예술에서 성모 마리아와 아기 예수의 형상은 4세기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기독교 공인 이후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했다. 특히 5세기 에페소 공의회(431년)와 칼케돈 공의회(451년)에서 마리아가 '테오토코스(Theotokos, 하느님의 어머니)'로 공식 인정받은 후 성모자상은 기독교 도상학의 중심적 위치를 차지하게 되었다. 초기 성모자상(그림4,5)은 카타콤(catacomb)과 비잔틴 아이콘에서 발견되며, 마리아는 후광을 두르고 긴 로브를 입은 채 예수를 무릎에 앉히거나 한쪽 팔에 안고 있는 모습으로 묘사된다. 이러한 표현은 점차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길을 보여주는 성모, 그림6)'나 '엘레우사(Eleusa, 자비로운 성모)' 등의 특정 양식으로 정형화되었다. 그림4. ‘수유하는 마리아(Maria Lactans)’, AD 3rd, Catacomb of Priscilla, Rome 그림6. 예수가 구원의 길임을 나타내는 호데게트리아(Hodegetria) △ 콥트 미술(Coptic Art): 이집트 전통과 기독교의 만남 이시스-호루스 형상과 마리아-예수 도상은 모두 어머니가 아이를 무릎에 앉히거나 품에 안은 형태를 취하며, 정면성을 강조한 엄숙한 분위기와 위계적 구도를 공유한다. 또한 신성한 모성, 보호, 중재의 상징으로 기능한다는 점에서도 유사하다. 두 전통 사이의 잠재적 연결고리를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로 콥트 미술을 들 수 있다. 콥트 미술은 이집트에서 기독교가 발전하면서 형성된 독특한 예술 양식으로, 고대 이집트 전통과 기독교적 요소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인다.(그림7) 예컨대, 콥트 미술은 앙크(ankh) 십자가와 같은 이집트 상징을 기독교적 십자가로 재해석하는 등 기존 시각 언어의 의미를 변형시키는 경향을 보인다.(그림8,9) △ 결론: 종교 도상의 문화적 융합 BBC에서 발표한 연구에 따르면, 이시스 락탄스(Lactans)와 마리아 락탄스의 연결성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시작되어 초기 기독교 아이콘에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특히 이시스와 호루스의 이미지가 당시 지중해 세계에 널리 알려져 있었고, 새로운 종교인 기독교가 익숙한 시각적 언어를 통해 자신의 메시지를 전달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기독교가 이집트에서 발전하는 과정에서, 기존 이집트 문화의 시각적 언어와 상징체계를 완전히 무시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며, 동시에 단순한 모방을 넘어 새로운 종교적 의미를 부여하는 창조적 재해석이 이루어졌을 가능성이 높다. 오늘날 우리가 보는 성모자상의 도상학적 전통은 이러한 문화 간 대화와 융합의 복잡한 역사를 반영하고 있다.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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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0 18:51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7)염견(焰肩) 도상의 세계적 전파, 태양신에서 종교 권위자로

교회, 성당, 불교 사찰, 삼성각(三聖閣) 그리고 이슬람 모스크에는 태양신의 흔적이 있다. 그 흔적은 어깨의 화염이다. 무슨 소리일까? 인류 초기부터 태양은 중요한 숭배 대상이었고, 메소포타미아의 샤마쉬(Shamash)는 그 대표적인 신이었다. 그런데 샤마쉬의 모습에는 매우 특이한 부분이 있다. 그것은 바로 신성한 존재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염견(焰肩)' 도상이다.(그림 1) 어깨에서 솟아나는 화염은 원래 신의 권위와 왕의 통치권을 상징했는데, 시간이 흐르면서 이 표현 방식은 문화권과 종교의 경계를 넘어 기독교, 불교, 무속 신앙, 이슬람 등 각 종교의 최고 권위자를 표현하는 보편적 상징으로 발전했다. △ 왕권과 신성: 고대 태양신 숭배의 발전 태양신 숭배는 고대 메소포타미아에서 시작되어 유라시아 대륙 전역으로 퍼져나간 중요한 문화 현상이다. 메소포타미아의 태양신 샤마쉬는 정의와 공정의 상징이었으며, 어깨에서 뻗어나오는 불꽃으로 그려졌다. 특히 함무라비 법전의 조각에서는 샤마쉬가 왕의 통치 권력을 인정하는 신으로 묘사되어 있다.(그림1) 태양신 숭배는 이란 고원에서 미트라교로 변화했다. 미트라교는 태양신의 능력을 화염과 빛으로 나타냈고, 이후 로마 제국에서도 특히 군인들 사이에서 큰 인기를 얻었다. 페르시아에서는 이런 전통이 조로아스터교의 아후라 마즈다 숭배로 이어졌다. 아후라 마즈다는 빛과 선을 상징하는 신으로, 날개 달린 원반과 화염으로 표현되어 왕의 통치력이 신성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상징이 되었다. △ 성스러운 빛의 표현: 기독교와 이슬람의 염견 기독교 초기의 염견 도상은 그리스-로마의 태양신 아폴론과 헬리오스의 영향을 받았다. 4세기 바티칸 지하 무덤의 그리스도 모습은 태양신의 빛나는 형상과 섞여 있다. 이후 비잔틴 시대에는 이 표현이 만돌라(Mandorla)라는 형태로 바뀌면서, 어깨의 불꽃이 온몸을 둘러싸는 거룩한 빛이 되었고, 이것이 그리스도의 신성을 나타내는 대표적인 상징이 되었다.(그림2) 이슬람 미술에서는 예언자 무하마드가 하늘로 올라가는 미라지 장면에 염견 도상이 자주 등장한다. 특히 일칸국 시대의 역사책 필사본들은 무하마드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을 담고 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왕권을 상징하는 전통과 이슬람의 예언자 사상이 하나로 어우러진 것이다.(그림3) △ 빛과 불의 신들: 인도-이란 문화의 연결고리 고대 인도와 이란은 언어와 문화를 공유했는데, 특히 태양신 신앙에서 이런 공통점이 잘 드러난다. 힌두교의 수리야와 페르시아의 미트라는 모두 '빛나다'를 뜻하는 'swar'에서 비롯되었고, 두 신 모두 태양 수레를 타고 하늘을 달리는 모습으로 그려졌다. 불을 다루는 신들의 경우도 비슷하다. 힌두교의 아그니는 제사를 주관하는 신으로, 브라만 사제들이 관리하는 성스러운 불꽃과 관련이 있다.(그림4) 이란의 아타르 역시 조로아스터교에서 마기 사제들이 모시는 거룩한 불로 여겨졌다. 이러한 신들의 모습은 쿠샨 왕조 시기에 이르러 더욱 복잡하게 섞였고, 간다라 지역에서는 힌두교와 페르시아의 전통이 불교 미술과 만나 새로운 예술 형식을 만들어냈다. (그림4) 힌두교 불의 신 아그니 △ 카니시카 왕의 시대: 문화 교류의 황금기 쿠샨 왕조는 월지라는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로, 박트리아에서 시작해 인도 북부까지 영토를 넓혔다. 이 지역은 동양과 서양의 문화가 만나는 중요한 접점이었다. 특히 127년부터 150년까지 통치한 카니시카(Kanishka) 왕 시기에 문화 교류가 절정에 달했다. 카니시카 왕이 만든 동전에는 왕의 어깨에서 불꽃이 피어오르는 모습이 새겨져 있다.(그림5) 이는 단순한 장식이 아니라 왕의 권위가 하늘로부터 왔다는 것을 백성들에게 알리는 상징이었다. 카니시카 왕은 또한 불교를 적극 지원했는데, 이로 인해 간다라 지역의 불교 미술이 크게 발전했다. 특히 가필시(Kapisi)에서 발견된 불상들은 페르시아 미술의 전통과 불교가 만나 만들어진 독특한 불꽃 표현을 보여준다.(그림6) △ 불꽃에서 빛으로: 한국 불교 미술의 염견 수용 간다라에서 시작된 염견 도상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아시아로 전파되었다.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 도시들을 거쳐 중국에 도착했고, 마침내 한국과 일본까지 퍼져나갔다. 키질(그림7), 호탄(그림8), 돈황(그림9), 운강, 병령사의 석굴 사원과 하북 석가장의 불상(그림10)에서 발견되는 어깨의 불꽃은 이 도상이 동아시아에서 부처의 깨달음을 표현하는 보편적인 상징이 되었음을 보여준다. 한국의 불교 미술에서도 이 전통이 이어져, 무주 안국사 칠성탱(그림11)과 미황사 괘불탱(그림12)에서는 팔에서 머리까지 오색 빛으로 표현되었다. 이처럼 염견 도상이 동아시아까지 전해지고 변화한 것은 고대 유라시아의 활발했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다. (그림8) 신강 호탄 부처상의 염견 (그림9) 막고굴 263굴 부처상의 염견 (그림10) 석가장 금동불좌상(300년경) (그림11) 무주 안국사 칠성탱 어깨 주위의 방광(放光) (그림12) 전남 미황사 괘불탱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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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1 13:58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6)후백제 봉황무늬 수막새, 천년을 건너온 실크로드 문양

(그림1) 산치대탑 제1스투파 난간의 ‘원형 패턴 동물문’ 인도 중부 마디아 프라데시(Madhya Pradesh)주 작은 언덕 위에는 기원전 3세기경 마우리아(Mauryan) 왕조의 아소카(Ashoka) 대왕이 불교를 장려하면서 조성한 산치대탑(Great Stupa at Sanchi). 여기서 눈길을 끄는 것은 산치 제1 스투파 난간에 새겨져 있는 원형 주연부 안에 좌우로 날개를 활짝 펼친 공작새이다.(그림1) 한편 1989년 전남 광주 무진고성(武珍古城)에서 주연주가 연주문으로 장식되어 있고 그 속에 봉황을 새겨 넣은 후백제 시대 수막새(그림3)가 출토되었다. 그런데 이 수막새는 산치대탑에 보이는 원형 패턴 새 문양과 흡사하다. 무엇보다 사산조 페르시아 시기에 대유행했고(그림2,4,6,7), 중앙아시아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와 일본에까지 전파된 연주 동물문(連珠動物紋)과 깊은 관련이 있다. 무슨 소리일까?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기 위해서는 실크로드 ‘연주 동물문’의 역사에 대해 살펴봐야 한다. (그림2) 사산조 페르시아 연주 시무르그 문양 [대영박물관] △ 연주 동물문과 연주문의 상징적 의미 무진고성에서 출토된 후백제 봉황무늬 수막새는 연주 동물문(Pearl roundels with animal patterns) 기와이다. 연주 동물문(連珠動物紋)이란 연주문 속에 사자, 맷돼지, 그리핀, 공작, 봉황, 용 등 동물을 새겨 넣은 문양을 말한다. 여기서 연주(連珠)는 '이어진 구슬' 또는 '연결된 진주'를 의미한다. 진주는 고대부터 귀중품으로 여겨져 왔으며, 왕권과 부를 상징했다. 또 둥근 구슬 모양은 해와 달, 별과 같은 천체를 상징하며, 우주의 순환과 영원성을 나타낸다. 특히 연주문은 서아시아 파르티아 시대를 거쳐 사산조 페르시아에서 국왕의 초상화를 연주문으로 장식하여 왕권의 수호를 상징하는 코인을 발행하는 등 크게 유행했다.(그림4) 한편 불교에서 연주는 보배구슬(如意珠)을 상징하며, 깨달음과 지혜를 의미하고 부처의 사리를 상징하기도 한다. 연주문은 실크로드를 통한 동서 문화 교류의 대표적인 예시로서, 각 지역에서 다양한 형태로 발전하면서 동아시아 미술의 중요한 장식 요소로 자리잡았다. 한반도에서는 부여 외리에서 출토된 백제 무늬벽돌이 최초의 연주문인 동시에 연주 동물문이다.(그림5) (그림4) 사산조 페르시아 샤푸르(Shapur) I 연주문 (그림5) 외리 출토 백제 연주 용무늬 벽돌 △ 연주 동물문의 상징성 연주 동물문에 새겨 넣은 여러 가지 동물은 무엇을 상징할까? 먼저 사자(lion)와 맷돼지는 고대 페르시아에서 군사적 힘과 왕권의 상징으로 널리 사용되었다.(그림6) 특히 맷돼지 도상은 죽은 사람의 영생을 기원하는데도 활용되었다.(그림7) 시무르그(Simorgh)는 페르시아 신화에서 불사조로 신성한 지혜와 치유력 그리고 왕권의 신성함을 표현하는 중요한 도상이었다. 그리핀은 수호신적 존재를 상징했으며, 페르시아 예술에서 주로 연주 안에 배치되어 신성한 권위를 나타냈다. 독수리 문양은 초원 지대에서 하늘과의 소통, 힘과 용맹을 상징하는데 자주 사용되었다. 공작 문양은 힌두교와 불교 전통에 깊이 뿌리를 두고 있다. 공작은 힌두교에서 카르티케야(Kartikeya)신의 탈것이자 사라스와티(Saraswati) 여신의 상징이었고, 불교에서는 지혜、자비、치유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공작 문양은 실크로드를 따라 페르시아와 중앙아시아에 전파되어 왕권과 권위의 상징으로 자리잡는다.(그림8) 봉황은 고대 동아시아에서 고귀한 상상의 영물로 황실의 권위와 정통성을 상징했으며, 현명한 통치자가 다스리는 평화로운 시대에만 나타난다고 여겨졌다.(그림 3.12) (그림7) 사산조 페르시아의 연주 맷돼지 문양 (그림8) 중앙아시아 연주 공작 문양 [5-9세기] △ 연주 동물 문양의 동아시아 전파 연주 동물문이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는 데는 소그드 상인들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특히 이들은 호화로운 견직물 무역을 통해 페르시아의 이 문양을 중앙아시아와 중국에 소개했다.(그림9) 특히 당나라 시기 개방적인 국제 문화와 맞물려, 이 문양은 실크로드를 통해 들어온 이국적 요소로서 귀족 사회에서 크게 환영받았다. 경주박물관 연주문 장식 입수쌍조문(立樹雙鳥紋) 석주(그림10)와 일본 호류지(法隆寺)에 전해지는 사자수문금(獅子狩文錦)은 7-8세기 당시 동아시아의 문화적 복합성과 국제적 교류망을 증명한다.(그림11) 또 이 시기 중국의 장인들은 기존의 페르시아 양식을 재해석하여 중국적 미감에 맞게 봉황이나 용과 같은 중국의 전통적인 상상의 동물들을 연주 안에 배치하기 시작했다. 백제 역시 한반도에서 서역풍 연주 동물문을 가장 먼저 받아들였고, 기와에도 새겨 넣었다. 백제를 계승한 후백제도 마찬가지였다. 무진고성에서 출토된 연주 패턴 봉황무늬 수막새는 봉황의 좌우 날개를 화려하게 접고, 몸통을 유난히 튀어나오게 강조하는 후백제인만의 독창성을 발휘하고 있다.(그림12) 여기서 우리는 실크로드의 예술적 유산 연주 동물문이 천년을 건너 동아시아까지 전파되고 후백제인에 의해 창조적으로 수용된 흥미로운 예시를 확인할 수 있다. (그림10) 경주박물관 ‘연주 쌍조문(雙鳥紋)’ 석주 [7-8세기] (그림11) 일본 호류지(法隆寺) 사자수문금(獅子狩文錦) (그림12) 무진고성 출토 후백제 연주 봉황문 수막새 (II) 전홍철 교수 (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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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3 19:57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5)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무용총 수렵도, 페르시아 사냥도에서 나왔나 중국 길림성 집안(集安)현 통구(通溝)에 위치한 고분 널방에 그려진 고구려인이 사냥을 벌이는 장면을 묘사한 무용총(舞踊塚) 수렵도. 특히 몸을 돌려 활을 쏘는 소위 '파르티안 샷(parthian shot)'은 활쏘기와 승마에 능한 고구려인의 기상을 나타내는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새로운 해석이 제기되었다. 사냥도가 무용총 외에 덕흥리(德興里)고분, 약수리(藥水里)고분, 장천1호분(長川一號墳) 등 여러 무덤에 그려져 있을 뿐만 아니라 중국 거주 이란계 민족인 소그드(Sogd)인 석관상(石棺床)과 한대(漢代) 화상석(画像石)에까지 일관되게 나타나 있어 천국으로 가는 길에 맞닥뜨리는 사악한 존재를 물리치는 주술적 의미가 담겨 있다는 주장이 대두된 것이다. 이는 이른 바 ‘사냥 마법론(hunting magic theory)’으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이 사자나 맹수를 사냥하는 국왕의 영웅적 면모와 함께 천국으로 향하는 길에서 거치는 영적 투쟁을 내포했다고 본다. 그리고 이러한 주술적 의미가 실크로드를 통해 광범위하게 유포되어 고구려까지 이르렀다는 것인데 과연 사실일까? △ 페르시아 사냥 도상의 주술적 의미와 그 기원 페르시아 사냥 도상의 주술적 의미는 조로아스터교의 종교적 세계관에 깊이 뿌리박고 있다. 즉 조로아스터교의 선신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와 악신 안그라 마이뉴(Angra Mainyu) 사이의 대립 구도는 사냥 도상의 상징적 의미를 형성하는 근간이다. 특히 사악한 동물들은 악신의 창조물로 여겨졌기에, 이들을 퇴치하는 사냥 행위는 곧 선의 승리를 의미했다. 이러한 종교적 의미는 정치적 상징성과 결합하면서 더욱 강화되었다. 아케메네스(Achaemenid) 왕조 시기부터 '왕의 사냥'은 통치자의 권위와 능력을 보여주는 중요한 도상이었다. 타크이 부스탄(Taq-i Bustan) 암벽의 사냥도 부조에서 볼 수 있듯이, 맹수를 사냥하는 왕의 모습은 그의 영웅적 면모와 신성한 권위를 동시에 표현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이 사냥 도상이 현세와 내세를 연결하는 매개체 역할을 했다는 점이다. 조로아스터교에서는 사후 영혼이 친바트 다리(Chinvat Bridge)를 건너 천국에 도달한다고 믿었는데, 이 과정에서 영혼은 여러 악마적 존재들과 맞닥뜨리게 된다. 사냥 도상은 바로 이러한 영적 투쟁을 상징적으로 표현한 것이었다. △ 페르시아 사냥도: 이란계 소그드인 무덤에 적극 도입 특히 사산조(Sasanian Empire, AD 224-651) 시기에 이르러 이러한 도상 전통은 더욱 체계화되었다. 왕실 사냥 장면을 새긴 정교한 은제 접시들이 제작되어 널리 퍼졌는데, 이는 단순한 장식품이 아닌 실제 의례적 의미를 지닌 물품이었을 가능성이 높다. 이러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 전통은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었다. 특히 소그드 상인들은 이 전통을 자신들의 무덤 미술에 적극적으로 도입했는데, 사군묘(史君墓), 우홍묘(虞弘墓), 안가묘(安伽墓), 일본 미호(Miho)박물관과 프랑스 기메(Guimet)박물관 석관상 등에 그려진 사냥도는 페르시아 도상의 주술적 의미가 얼마나 강력했는지를 보여주는 증거다. 결과적으로 페르시아의 사냥 도상은 단순한 예술적 표현을 넘어, 종교적 신념, 정치적 권위 그리고 사후 세계에 대한 믿음이 복합적으로 녹아든 문화적 산물이었다. 이러한 복합적 성격이 바로 이 도상이 광범위한 지역에서 오랫동안 영향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핵심 요인이었던 것이다. 페르시아 호르미즈드(Hormizd)왕의 사냥도. 소그드 안가묘(安迦墓) 사냥도. △ 한화상석(漢畫像石)의 사냥 주술 중국과 이란의 교류는 파르티아 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한나라(BC 250-AD 224) 황제와 파르티아(BC 206-AD 220)의 미트리다테스(Mithridates) 2세 사이의 사절단 교환은 두 문명 간교류의 시작점이었다. 사마천(司馬遷)은 <대완열전(大宛列傳>에서 “한나라의 사신들이 귀국하기로 결정했을 때, (파르티아 왕은) 자신의 사신들을 함께 보내어 중국이 얼마나 크고 광대한지 직접 보게 했다. 파르티아 사신들은 큰 새의 알과 여헌(黎軒, 알렉산드리아)에서 모집한 곡예사들을 황제에게 선물로 가져왔다. 황제는 이를 매우 기뻐했다."고 기록했다. 이러한 접촉은 점차 확대되어 사냥 모티프를 포함한 것들이 중국에서 널리 사용되고, 특히 파르티안 샷을 모방하여 사냥 장면을 묘사했다. 이러한 융합의 사례는 많은 한화상석에 나타나며 그중 섬서(陝西)성의 흉노 고분인 선무(神木)의 대보당(大保當) 한화상석에서 뚜렷이 확인된다. 대보당 화상석 도상은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지나야 하는 길이 악령들과 야생 동물들로 가득 차 있으며, 원 안의 새 문양은 영원한 천국으로 가는 길의 또 다른 상징이다. △ ‘사냥 마법’의 실크로드 전파 사냥 마법 이론은 1940년대에 프랑스의 고고학자 앙리 브뢰유(Henri Breuil)가 프랑스 남서부의 라스코(Lascaux) 동굴 벽화를 분석하기 위해 처음 제시했다. 이 이론은 동굴 벽화가 사냥의 성공을 위한 일종의 의례적 주술이었다는 점을 강조한다. 소그드인 석관상과 한화상석 그리고 돈황 벽화에 보이는 파르티안 스타일의 사냥 장면에서 주술적 의미를 추출한 후 실크로드를 따라 동쪽으로 전파되었다고 주장하여 고구려 벽화 수렵도를 새롭게 해석할 단초를 제공한 학자는 이란 이스파한(Isfahan) 대학의 하미드 레자 파샤자누스(Hamid Reza Pashazanus) 교수와 미국 코스탈 캐롤라이나(Coastal Carolina) 대학의 레슬리 월러스(Leslie Wallace) 교수이다. 이러한 시각에서 보면, 무용총 등 고구려 벽화에 보이는 사냥 도상은 고인이 천국에 도달하기 위해 싸워야 했던 이 세상과 저 세상 사이의 험난한 여정을 상징한다. 전홍철 교수(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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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5 19:40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4)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페르시아 최고의 암벽 정원, 타크이 부스탄(Taq-i Bustan) 사산조 예술의 전형: 광륜(光輪), 연주문, 생명수 동서 문명 교류의 역사적 증거 고구려 무용총, 소그드 석당의 수렵도와 동일 계열 【전문】 최근 중동 전쟁이 이스라엘과 이란의 충돌로 번지고 있어 현재는 탐방이 불가한 타크이 부스탄(Taq-i Bustan)은 페르시아 사산(Sassan) 왕조(AD 226-651) 때의 유서 깊은 암벽 유적이다. 페르시아어로 '타크(taq)'는 아치를, '부스탄(Bustan)'은 정원을 의미한다. 타크이 부스탄에 새겨진 서임식 부조, 진주의 연주문, 왕권 상징의 광륜, 생명수 그리고 수렵도는 사산 예술의 정수를 보여준다. 특히 수렵도는 고구려 집안 무용총(舞踊塚)에 보이는 벽화와 동일 계열이다. 이는 동아시아와 페르시아 문화 간의 연관성을 보여주는 중요한 예시인데, 필자가 직접 촬영한 드론 영상 자료 등으로 두 차례에 걸쳐 소개한다. △ 타크이 부스탄(Taq-i Bustan)은 어떤 유적? 이란 서부 산악지대인 케르만샤(Kermanshah)에 자리잡고 있는 타크이 부스탄 유적은 암산 단애의 두 곳에 아치형 대암벽과 소암벽을 조성하고, 그 동쪽에 개방형 구조를 조각했다. 좌측의 대암벽은 로마 제국과의 전쟁을 선포하고 사산 왕조 역사상 최대의 영토를 보유했던 호스로 2세(Khosrow II)의 서임식을 묘사한 것이다. 소암벽에는 샤푸르(Shapur) 2세와 그의 아들 샤푸르 3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다. 우측 바깥의 개방형 구조는 아르다시르(Ardashir) 2세의 대관식을 묘사하고 있다. △ 암벽 외곽의 문양 : 광륜, 연주문, 생명수 먼저 대암벽을 살펴보자. 대암벽 외곽의 아치 상단에는 다섯 개의 피라미드형 장식이 세워져 있으며, 하단에는 중앙의 초승달을 중심으로 두 천사가 대칭을 이루고 있다. 이 날개 달린 천사들은 왼손에 은기를 들고 있고, 오른손에는 조로아스터교 신화에 나오는 두 줄의 연주문으로 구성된 광륜을 들고 있다. 이 천사는 그리스-로마 스타일의 승리의 여신 니케(Nike)를 표현한 것으로, 광륜은 왕권을 상징한다. 왕의 고리에 새겨진 연주문은 '쿠바르나(khvarnah)'라고 불렸던 진주에서 유래했다. 진주는 이란 고원에서 탄생한 조로아스터교의 광명을 상징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왕권 신수의 개념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한편 하단의 기둥을 표현한 직사각형 내에는 식물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는데, 이는 신성한 나무 즉 생명수를 표현한 것이다. 생명수의 잔잔한 잎의 형태는 그리스, 로마 그리고 인도의 스타일이 혼합된 것으로 보인다. △ 암벽 내부의 조각 : 서임식 부조와 기마상 내측 후벽 좌우 하단에는 주두 장식이 있는 기둥을 세우고, 중간에 지붕과 같은 선반을 만들어 상하로 구분하였다. 상단에는 호스로 2세의 제왕 서임식 부조를, 하단에는 제왕의 기마상을, 좌우 벽에는 수렵도를 각각 조각하였다. 후벽 상단 우측에 성벽관을 쓰고 있는 인물은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이다. 왼손에 검을 쥐고 있는 인물이 바로 페르시아 제왕 호스로 2세(Khosrow II)이고, 좌측은 아나히타(Anahita) 여신이다. 아후라 마즈다는 원래 두 손에 조로아스터교의 성물을 들고 있었으나, 현재는 훼손되어 있다. 아나히타는 왼손에 주전자를 들고 있으며, 그 주전자로부터 성수가 흐르고 있다. 두 신은 각각 리본이 달린, 왕권을 상징하는 고리를 왕에게 수여하고 있다. 왕은 다수의 대형 진주로 장식한 화려한 복식을 입고 있으며, 왼손으로는 검을 쥐고 있다. 오른손은 아후라 마즈다로부터 리본이 달린 환을 받고 있다. 왕이 쓰고 있는 왕관은 좌우에 새 날개를 붙이고 초승달 문양으로 장식되어 있다. 후벽 하단의 기마상은 머리 부분을 원형의 광배와 리본으로 장식하고 있고, 갑옷 하단 복식에는 페르시아 신화에 등장하는 상상의 동물인 시무르그(Simurgh)와 화려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시무르그는 사산조의 은기나 직물 등에서 많이 볼 수 있으며, 개의 머리, 사자의 다리, 독수리의 날개와 공작의 꼬리로 합성되어 있고 우주를 상징한다. 한편 시무르그는 철갑 원주 안에 그려져 있는데, 바깥 원주에는 연주문이 새겨져 있지 않다. 이 기마상은 위대한 정복자 호스로 2세가 자신의 애마 샤브디즈(Shabdiz)를 타고 있는 모습으로 추정된다. 또한 기마 인물은 당시 페르시아 중무장 기병의 전형적인 모습이다. △ 소암벽 내부와 우측 외부 개방형 부조 소암벽에는 샤푸르(Shapur) 2세와 그의 아들 샤푸르 3세의 모습이 새겨져 있으며, 우측 바깥의 개방형 부조는 아르다시르 2세의 대관식 장면이다. △ 왕실 사냥터와 악사들의 공연 사냥은 페르시아 왕들이 가장 즐기는 활동 중 하나였다. 이 때문에 사산조 왕실 벽화에는 수렵 장면이 자주 등장한다. 늪지에 설치된 장막은 왕실 사냥을 위해 만든 일종의 임시 경기장으로 볼 수 있다. 우측 벽 수렵도는 맨 위에 말을 탄 왕이 단상의 여악사들의 연주를 들으며 일산(日傘)을 든 시종과 함께 사냥터로 향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중간 부분에서는 말을 탄 왕이 질주하면서 사슴 무리를 활로 사냥하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다. 아래 부분은 수렵을 끝낸 왕이 좌측 하단의 장막문을 향해 귀환하는 장면이다. 이 장면에서 왕은 머리에 후광을 띠고 활을 편안히 내려놓고 서 있는데, 이는 사냥이 끝났음을 나타내는 신호다. 결론적으로, 타크이 부스탄 암벽 부조는 사산조 페르시아의 예술적 걸작일 뿐만 아니라, 장대한 유라시아 실크로드의 문화 교류를 보여주는 중요한 유적이다. 특히 수렵도는 중국 집안시 고구려 무용총(舞踊塚) 벽화와 소그드인 석관상의 수렵도와도 긴밀한 관련이 있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회에 상세히 소개한다. 타크이 부스탄 대암벽의 좌측 수렵도 전홍철 교수(우석대 경영학부, 예술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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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0 12:57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3) 흉노 무덤에 웬 그리스 알몸 여인?

흉노 무덤 ‘노인 울라(Noin-Ula)’에서 출토된 은제 팔레라(Phalera,말 장신구)에 새겨진 나체의 그리스 여성이 말한다. “저는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예요. 외설스럽고 색을 밝히는 사티로스(Satyr)가 싫다는데 저를 자꾸 유혹해요. 또 옆에는 흥분한 상태의 남근을 드러낸 헤르메스(Heres)도 있어요. 저는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의례용 고급 식기의 부착물이었는데, 흉노 사람들이 중국 상품과 교환해 가지고 와서는 말 장신구가 되었어요.” △ 흉노 지배층 무덤 ‘노인 울라(Noin-Ula)’ 흉노(匈奴)는 BC 3세기부터 AD 1세기까지 동몽골에서 중앙아시아에 이르는 제국을 건설한 유목 전사들이었다. 노인 울라(Noin-Ula)는 몽골의 수도 울란바토르 (Ulaan Baatar)에서 북쪽으로 약 100km 떨어진 유적지로 200개 이상의 흉노 무덤이 흩어져 있다. 노인 울라 고분들은 도굴당했음에도 불구하고 호화 장신구, 청동 유물, 도기, 직물, 도구, 의복뿐만 아니라 인간과 동물(말, 낙타, 노루)의 뼈와 기장 씨앗 등 많은 물건들이 출토되었다. 또 칠기, 비단과 같은 물건의 존재는 한(漢)나라 시기 중국과 밀접한 관계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한편 은제 팔레라(Phalela), 직물과 같은 물품은 그리스, 박트리아 (Bactria), 중앙아시아 등 다른 지역에서 수입된 것으로 여겨진다. △ 알몸 여인의 은제 팔레라(Phalera) 팔레라(Phalera)는 은으로 만든 말 장신구를 말한다. 나체 여인이 마치 조각처럼 높게 부조된 이 은제 원반은 흉노 시대인 BC 1세기에서 AD 1세기 사이에 주조된 것으로 추정된다. 이 원반의 지름은 143.1mm, 폭의 테두리는 6.4mm이다. 내부 원판은 거의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졌고, 합금하였으며 4개의 은 못으로 판에 부착하였다. 판의 외부 가장자리를 따라 10개의 불규칙한 원형 관통 구멍이 있다. 제작 기법은 판의 뒷면을 두들겨 부조한 후 도금하고 아말감 처리를 하였다. 매장실 내 위치로 보아 말 장신구의 일부였던 것으로 판단된다. 원래 그리스(로마)에서는 장식용 식기나 접시 등에 붙어있던 것을 흉노 고위층은 말 장신구에 사용하였다. △ 알몸 여인의 정체 ‘아르테미스 (Artemis)’ 은제 팔레라에 새겨진 알몸 여인은 도대체 누구일까? 이에 대해서는 그리스 신화에 나오는 ‘팜므 파탈’ 옴팔레 여왕이 헤라클레스를 노예로 부리면서 희롱하는 모습이라는 설이 있지만 헤라클레스 도상은 애당초 꼬리가 없으므로 따르기 어렵다. 이 여인은 출산, 육아 및 순결의 여신인 아르테미스(Artemis)이고, 남성은 금박 말꼬리가 새겨져 있는 것으로 볼 때 사티로스(Satyr)로 추정된다. 이 은제 원반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성기를 드러낸 채 여성을 유혹하는 사티로스의 오른쪽 무릎에 앉아 있는 여성을 높은 부조로 묘사하고 있다. 여성은 왼손으로 사티로스를 밀어내고 있으며, 그녀의 손가락과 손이 그의 턱에 닿아 있다. 이러한 동작 묘사는 꽤 전문적인 것이며, 취한 사티로스의 모습은 위엄 있는 여인 이미지와 대비된다. 그녀의 구부러진 오른쪽 다리를 덮고 있는 베일의 한쪽 끝은 다리 사이로 부드럽게 주름지어 늘어져 있다. 다른 쪽 끝은 그녀의 왼쪽 팔뚝을 두 번 감싸고 등 뒤로 넘긴 후 솟아 있고, 염소 가죽이 여성의 어깨 위로 넘어와 오른쪽 가슴을 덮고 있다. 여인의 입은 작고 도톰한 입술이 꽉 다물어져 있으며, 머리에는 금박 왕관(diadem)으로 머릿발을 묶고 있다. 또 여인 바로 옆에는 솔방울로 장식된 나무 지팡이가 있는데, 이는 갑옷 역할을 한다. 지팡이 옆 작은 금박 인물은 헤르메스(hermes)로 발기된 남근을 보여주고 있다. 한편 운동선수 체격의 수염 없는 젊은 남성은 동물 가죽 위에 기대 누워있다. 그는 왼손을 구부려 기대고 다리를 벌리고 있다. 남자의 얼굴은 고통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으며, 콧마루 옆 두 개의 깊은 주름으로 고통을 표현하고 있다. 남성은 금박 담쟁이덩굴 화환(gilt ivy wreath)을 쓰고 있는데 황금색 뾰족한 끝이 반짝인다. 한편 그의 등 뒤로는 말꼬리의 금박 끝부분이 부조로 선명하게 보이고, 남성은 오른손으로 무언가를 잡고 있는데 아마도 포도주를 담는 가죽 부대일 것이다. △ 흉노 무덤의 다원적 성격 흉노 제국 전성기 약 250년 동안 중국은 당황했고 평화롭지 못했다. 흉노는 중국의 부를 탈취함으로써 존재할 수 있었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많은 중국인들이 흉노에 유입되고, 그들의 기술과 문화가 영향을 미치면서 중국화되는 것 또한 피할 수 없었다. 유목 민족들은 일반적으로 땅을 파는 것을 좋아하지 않는데 18미터 깊이의 노인 울라 고분은 중국 기술과 장례 의식의 영향이었다. 마차, 칠기, 비단 등 흉노 귀족 무덤 출토품의 3분의 2가 중국과 관련된다. 중국은 흉노에 옻칠된 마차를 선물했는데 실제로는 유목 전사로부터 자신을 지키기 위한 공물(貢物)이었다. 한편 흉노는 실크로드를 통제했고, 서방과의 무역에서 중국의 고급 상품을 가지고 중개자 역할을 했다. 중국 상품의 대가로 서방의 희귀품들이 교환되었다. 노인 울라에서 출토된 나체 여신의 은제 팔레라는 그리스(로마) 어딘가에서 제작된 의례용 식기의 일부분이었으나, 흉노에 들어와서는 말 가슴에 걸리게 되었다. 이처럼 흉노 무덤은 중국에 대해서 말해줄 뿐만 아니라 서양 문명의 과거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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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26 15:28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2)

문무왕(文武王) 비문과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신라 김씨의 조상으로 명백히 기록되어 있는 흉노 휴도왕(休屠王)의 태자 투후(秺侯) 김일제(金日磾). 최근 필자는 김일제의 고향이라 할 수 있는 감숙(甘肅)성 무위(武威)시를 답사하였는데 이곳에 금년 8월 김일제 광장이 오픈하고 내년에는 <김일제기념관>이 개관한다. 그런데 이제까지 흉노 출신으로 알려져 온 김일제의 신분에 대해 새로운 주장이 제기되었다. 즉 흉노가 아니라 그리스에서 출발해 파르티아(Parthia)와 중앙아시아를 거쳐 감숙(甘肅)성 일대에서 살았던 그리스-박트리아 왕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파격적인 주장은 둔황(敦煌) 막고굴(莫高窟) 제323굴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에 보이는 황금 조각상이 불상이 아니라 제우스(Zeus)상이라는 새로운 해석을 근거로 하고 있는데 이에 대해 소개한다. △ 김일제(金日磾)는 누구인가? '신라 문무왕릉 비문'에 “투후 [김일제]는 제천의 후손(秺侯祭天之胤)”,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먼 조상 이름은 일제시니 흉노 조정에 몸담고 계시다가 서한에 투항하시어 무제 아래서 벼슬하셨다(遠祖諱日磾自龍庭歸命西漢仕武帝)”는 명백한 기록이 남아 있어 신라 김씨의 시조로 간주되기도 하는 김일제(金日磾, B.C135-85)는 한무제(漢武帝)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해 파견한 장수 곽거병(霍去病)에게 사로잡혀 말을 사육하는 노예가 된 인물이다. 그후 김일제는 한무제의 암살을 막아낸 공적으로 발탁되고, 한무제는 흉노족이 황금을 유난히 숭상하는 것을 고려해 ‘황금’을 뜻하는 금(金)씨 성을 하사받아 김씨의 시조가 된다. 또한 흉노 출신의 그가 사육하는 황실 말들이 살찌고 뛰어나자 대장군 다음으로 높은 직책인 거기장군(車騎將軍)에 임명되고 투후(秺侯)에도 봉해졌다고 알려져 있다. 이후 투후(秺侯)라는 용어는 김일제의 가계 왕국을 의미하는 말로 사용된다. △ 한무제의 군대가 약탈해 온 황금 조각상 BC 121년 한무제(漢武帝, BC 157-87)는 장수 곽거병을 보내 흉노 휴도왕을 토벌했을 때 태자 김일제는 포로로 잡혀와 노예가 되었는데, 그밖에 무슨 일이 있어났을까? 이에 대해 돈황 막고굴 제323굴 벽화 '장건의 서역 사신 출행도(張騫出使西域圖)' 방제(榜題)에는 다음과 같이 명확히 적혀 있다. “한무제가 흉노를 정복하고 10척 높이의 황금 조각상 두 개를 획득하여 감천궁에 안치하였다. 황제는 이를 위대한 신으로 모셔 늘상 참배하였다.(漢武帝將其部眾討匈奴,并獲得二金長丈餘,列之于甘泉宫。帝為大神,常行拜謁時.)” 여기서 흥미로운 것은 한무제가 약탈해 와서 스스로 참배했다는 흉노 휴도왕의 3미터에 달하는 거대한 황금상이다. 이제까지 이 황금상에 대해서는 한서(漢書) 주석가 장언(張晏), 유의경(劉義慶), 위수(魏收) 등이 “불교도들이 섬기는 황금상(佛徒祠金人), 불교의 유통으로 인한 전파(此則佛道流通之漸也)”로 해석하여 불상으로 간주하였다. 하지만 한무제 시기에 간다라 양식의 불교 조각은 아직 중국에서는 유행하지 않았고, 특히 3미터에 달하는 두 개의 불상을 황실에 모셔 놓고 참배했다는 것은 설득력이 떨어진다. 따라서 흉노 휴도왕의 섬겼던 황금상은 불상이 아닌 다른 조각상일 가능성이 크다. 이 조각상은 그리스-박트리아 신상으로 제우스가 니케나 아테나를 들고 있는 조각상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에 귀 기울일 필요가 있다. 애당초 휴도왕과 김일제는 흉노족이 아닌 그리스 박트리아계 외국인으로 이름에서 그 실마리를 찾을 수 있다. △ 휴도왕과 김일제는 외래어의 한자 번역 휴도왕의 '휴도(休屠)'는 외국어를 중국어로 번역한 것이다. 휴(休; '쉬다', '멈추다')와 도(屠; '학살') 두 글자는 중국어로는 '학살을 끝내는 자'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그리스어로 '구원자'를 의미하는 '소테르(Σωτήρ, Soter)'가 휴도의 원래 이름이었을 가능성이 있다. 또 김일제(金日磾)의 ‘일(日)’은 중국에서 ‘rì’로 읽히지 않고 ‘mì’로 읽힌다. ‘일(日)’자가 ‘밀(密)’ 혹은 ‘밀(蜜)’자와 관련되어 ‘mì’로 읽히는 의문을 풀기 위해 많은 학자들이 노력했으나 아직까지도 명확한 해답을 찾지 못하고 있으나 외래어로 해석할 때 실마리가 풀린다. 즉 ‘일(日)’자의 이독(異讀)은 외래어 ‘밀(密)’과 깊은 관련이 있다. ‘밀(密)’은 ‘태양’의 의미를 가지고 있고, 외래의 역일(曆日)과 관계가 있으며, 소그드어에서 태양을 의미하는 ‘mī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 ‘제(磾)’는 고대에 증(繒)을 염색하는 데 사용한 검은 돌을 의미한다. <북사(北史)>의 기록에 따르면, 북방 호인(胡人)들은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고(以增为帽)", "검은 색으로 모자를 만들었다(以皂为帽)" 즉 검게 염색한 증(繒)으로 모자를 만들어 사용한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 휴도왕과 아들 김일제는 흉노 아닌 그레코-사카인 미국학자 루카스 크리스토풀로스(Lucas Christopoulos)의 최근 연구에 따르면, 그레코-박트리아인(Greco-Bactrians)인 즉 그리스-사카인(Greco-Sakas)들이 BC 176-162년경 감숙(甘肅) 일대에 남아 있다 흉노가 통제권을 장악하자 예속되었고, 후에 선비족이 하서회랑 일대를 장악했을 때는 다시 그들의 대열에 포함되게 되었다. 놀랍지만 휴도왕은 그리스 박트리아 왕으로 유티메모스(Euthydemus) 왕조의 창시자였고, 김일제는 그의 아들 데메트리오스(Demetrios)였을 가능성이 있다. 감숙성과 신강 일대에서 출토된 수많은 헬레니즘 문물들은 단순한 상품 거래를 넘어 그레코-박트리아인들이 이 지역에서 종교적 문화적 관습을 유지하며 살았음을 보여준다. 그러면 흉노가 아닌 그레코-박트리아 출신 김일제가 어떻게 신라 김씨의 시조가 되었을까? 이에 대해서는 대당고김씨부인묘명(大唐故金氏夫人墓銘)에 의거해 추론하면, 그레코-박트리아인 김일제 일가가 한나라 때 난리를 피해 요동(遼東) 지역 특히 산동과 한반도 낙랑 지역으로 피신해 왔다가 다시 신라 경주 일대로 옮겨 왔을 것이다. 물론 이에 대해서는 향후 좀더 깊이 있는 연구와 구체적인 실증이 필요하다. (참고 자료: Lucas Christopoulos, 'Dionysian Rituals and the Golden Zeus of China', <SINO-PLATONIC PAPERS>(326), 2022.)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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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9 14:56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실크로드의 미스터리 보물 (1) 사르마티안 황금 왕관

한반도와 그리스는 직선거리로 약 8,150km 떨어져 있다. 두 지역은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과 서쪽 끝에 위치해 있어 문화적으로 큰 차이를 보이지만, 고대 실크로드를 통한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고대 한국은 실크로드 3대 교역로인 초원로, 오아시스로, 해로를 통해 다양한 문물을 주고받았던 것이다. 초원로(Steppe Route)를 통해서는 유목민들의 문화가 전해졌다.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스키토-시베리아(Schytho-Siberia) 계통의 동물 문양, 신수(神樹) 숭배 신앙, 샤머니즘 의례나 축제에 사용된 북과 청동방울, 말 관련 유물들은 초원 유목민들과의 활발한 교류를 보여준다. 오아시스로(Oasis Route)는 초원로의 남쪽, 타클라마칸 사막의 가장자리를 따라 형성된 교역로다. 이 길을 따라 페르시아와 그레코-로만형(Greco-Roman Style) 문화가 한반도에 전해졌다. 한국에서 발견된 사산 왕조(Sasanian Dynasty) 문양, 로만 글라스, 금속 장신구 등은 오아시스로를 통한 문화 교류를 시사한다. 해로(Maritime Route)는 인도양과 남중국해를 거쳐 한반도에 이르는 교역로다. 해로를 통해서는 주로 동남아시아와 인도, 페르시아 등지의 문물이 전해졌다. 이번 연재부터는 필자가 직접 답사해 촬영한 실크로드 3대 교역로의 수많은 보물을 소개한다. 그 가운데 첫 번째로 한반도 금관 특히 신라 수목형(樹木型) 금관과 유사한 사르마티안(Sarmatian) 황금 왕관에 대해 알아 본다. △ 사르마티안(Sarmatian) 왕관이란? 이 황금 왕관은 1864년 러시아 로스토프(Rostov)주 노보체르카스크(Novocherkassk) 변두리에서 수도관 건설 작업 중 우연히 발견된 호흐라치(Khokhlach) 쿠르간의 출토품이다. 이 고분은 크게 도굴되었음에도 다행히 많은 유물이 남아 있었고, 이 왕관은 당시 고분 주변 은신처에 보관되어 있었으나 회수하였다. 이 왕관은 왕관 정면에 새겨진 그리스 여신 아프로디테(Aphrodite)의 흉상이 유난히 독특했지만, 훨씬 세계적인 이목을 끈 것은 아프가니스탄 금관과 신라 금관의 동일 계열로 여겨졌기 때문이다. 즉 세 금관 모두 수목형 왕관으로 성수(聖樹), 새와 사슴 숭배 신앙 등이 뚜렷이 나타나 있다. 한편 특이하게도 왕관의 소유자가 앉았던 것으로 보이는 나무 의자 조각과 장식물도 출토되었다. 이 왕관의 제작 연대는 BC 1세기에서 AD 1세기경이며, 사르마티안 부족의 통치자로 여제사장을 겸했던 여성이 사용했던 것으로 추정되어 ‘사르마티안(Sarmatian) 왕관(Diadem)’이라 불린다. △ 사르마티안족은 누구인가? 사르마티안족은 BC 5세기부터 AD 4세기까지 유라시아에서 활약했던 고대 이란계 민족이다. 중앙아시아에서 시작된 사르마티안인은 BC 6세기 서쪽으로 이주했고 스키타이인들과 대립했다. 사르마티안인은 불의 신을 숭배한다는 점에서 스키타이인과 달랐고, 서기 1세기경 다뉴브(Danube)강과 볼가(Volga)강 지역 및 흑해와 카스피해(Caspian Sea) 연안에서 활약했다. AD 1세기 게르만족과 연합해 로마 제국을 잠식하기도 했으나 4세기 훈족(Huns)의 침략으로 멸망했다. 알란인(Alans)은 사르마티안계 유목민족으로 알려져 있는데 중세 초기까지 북 코카서스(Caucasus)에서 살아 남았다. △ 왕관의 세부 장식과 그 의미 황금 왕관은 쭉 펼치면 세 부분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경첩으로 연결되어 있다. 금관의 파손된 부분을 복원하여 관찰하면, 관대(冠帶) 위 중앙의 성수를 중심으로 두 마리의 사슴이 마주 보는 모습을 하고 있고, 그 옆에서 염소와 사슴으로 여겨지는 신성한 동물이 성수(聖樹)를 향해 나아가는 제의적인 장면이 연출되어 있다. 즉 가운데 생명의 나무를 중심으로 좌우의 신성한 동물 세 마리가 나란히 성수를 향해 행진하는 듯하다. 그리고 신성한 동물 뒤 좌우측 맨 가장자리에는 새 두 마리씩 총 네 마리가 성수를 향해 앉아 있다. 새 부리에는 보요용 고리가 있는데 성수에도 이러한 고리가 달려 있다. 한편 관대의 정면 중앙에는 자수정으로 조각한 여성의 흉상이 있어 이 왕관이 사르마티안 귀족 여성의 소유였음을 나타낸다. 흉상의 주인공은 사랑과 다산의 여신 아프로디테인데 고대 그리스나 로마 여성들이 입던 소매가 없고 무릎까지 내려오는 헐렁한 웃옷인 튜닉(tunic)을 입고 있고, 여신의 머리 위에는 횡타원형의 석류석을 감입하였다. 흥미로운 것은 그리스 여인의 고전적인 머리 모양이다. 여인의 머리 카락은 황금 왕관 뒤에 숨겨져 있고, 두 개의 땋은 머리가 어깨 너머로 떨어져 있다. 이는 장인이 그리스 보석 세공에 능숙한 전문가였음을 나타낸다. 또 흉상 주위 좌우에도 석류석이 상감되어 있으며 그 옆에는 독수리 형상의 맹금 두 마리가 새겨져 있다. 테두리 전체는 훼손된 곳이 많지만 전체가 황금 구슬과 진주 그리고 작은 명판으로 장식되어 있다. 테두리 하단은 장미 꽃잎 무늬가 있는 펜던트가 여럿 매달려 있고, 왕관 소유자가 움직일 때마다 멜로디한 소리가 났을 것으로 추정된다. △ 왕관 외 다른 고분 출토품 왕관이 처음 발견되었을 때 포도 나무 덩굴에는 플루트를 연주하는 작은 큐피드 상이 핀으로 고정되어 있었다. 또 고분에서 왕관 외에 늑대를 연상시키는 상상의 동물이 독수리 머리 그리핀을 공격하는 황금 목걸이, 상상의 동물이 상하 2열을 이룬 황금 팔찌, 제의 때 사용되었을 향료와 독성 물질을 담는 황금 향통(香桶)과 동물 모양의 황금 컵 등이 출토되었다. 특히 무기나 말 장비 같은 남성용 부장품이 전혀 없는 것으로 보아 묘주는 여성임이 확실하다. △ 왕관의 미스터리: 월지인이 이주해 만들었을까? 이 왕관은 제례 의식에 사용되었으며, 다산 숭배와도 관련이 있음이 분명하다. 또 아프로디테 흉상의 정교한 제작 기법으로 보아 이 왕관을 제작한 장인은 분명히 헬레니즘 특히 그리스 보석 세공 기술과 사르마티안 유목민의 샤마니즘에 대한 지식을 모두 갖추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이 독특한 작품은 아마도 그리스 보석 세공사가 지위가 매우 높은 사르마티안 귀족의 주문을 받아 제작한 것일 가능성이 높다. 한편 이 고분 출토품의 또 다른 독특한 특징인 ‘다색 상감 스타일(polychrome-inlay style)’은 왕관과 제작 시기가 BC 1세기에서 AD 1세기경으로 유사한 아프가니스탄 틸랴 테페(Tillya Tepe)의 황금 유물에서도 대거 발견되었다. 이는 사르마티안족과 알란인(Alans) 그리고 중앙아시아 월지인(月氏人)의 연관성(이주) 문제를 다시금 부각시킨다. 황금 유물의 다색 상감 장식에 대한 고찰은 사르마티안-아프가니스탄-한반도 금관으로 이어지는 수목(樹木)형 금관의 전파 루트와 함께 고대 한반도의 미스터리를 풀 수 있는 새로운 실마리를 제공해주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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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17 15:13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그리스에서 완주까지 (4)

완주 송광사와 위봉사. 두 사찰을 비롯한 한국의 모든 불교 사원 입구에는 신성한 공간으로의 진입 그리고 불교의 해탈을 상징하는 산문(山門)이 있다. 이 출입문이 바로 일주문(一柱門)이다. 일주문이란 말은 기둥이 네 개인 가옥과 달리 두 기둥 위에 지붕을 얹은 데서 생겨난 말인데, 이는 고대 인도 건축의 아치형 출입문이었던 토라나(Torana)에서 유래한 것이다. 고대 인도에서 토라나는 힌두교, 불교, 자이나교 등의 종교 건축물에서 의식 용도로 사용되었으며,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 지역에도 영향을 미쳐 중국의 산문(山門), 일본 신사(神社)의 토리이(鳥居), 베트남의 탐꽌(Tam quan), 태국의 대추천(大秋千, Giant Swing) 등의 형태로 나타난다. 한국 사찰의 일주문과 향교 출입문인 홍살문도 바로 인도 토라나에서 유래된 것이다. 그런데 고대 인도의 토라나는 구체적으로 어떤 모습이었을까? 이를 확인하기 위해서는 중인도 산치(Sanchi)와 바르후트(Bharhut) 그리고 남인도 파니기리(Phanigiri)로 떠나야 한다. △ 인도 스투파의 전형, 산치대탑(Sanchi Great Stupa) 인도어인 스투파(Stupa)는 한자로 번역하면 ‘탑파(塔婆)’이고, 이것이 오늘날의 탑(塔)이 되었다. 원래 고대 인도에서 스투파는 유력 인사의 유골이나 유품을 안치한 무덤을 가리키는 말이었는데, 불교가 중국을 비롯한 동아시아에 전파되면서 탑의 형태로 변모되고, 점차 목조 건축의 영향을 받아 다층 구조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산치 스투파는 인도 마디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 의 라이센(Raisen) 마을 언덕 위에 있는 불교 유적지로 인도에서 가장 오래된 석조 구조물 중 하나이다. 기원전 3세기 마우리아(Mauryan) 제국의 아쇼카(Ashoka) 왕이 불사리를 모시기 위해 지은 것이다. 초기에는 단순한 반구형 벽돌 구조물이었지만, 기원전 1세기경 정교하게 조각된 4개의 토라나와 난간이 추가되었다. 토라나 문은 석재로 만들어졌지만, 목재 건축처럼 조각되었다. 토라나에는 부처님 일대기 장면 뿐만 아니라 당시 사람들의 일상 모습도 새겨졌다. 또한 석조 조각에서 부처님은 아니코니즘(aniconism) 즉 우상 금기 때문에 인체로 묘사되지 않고, 말, 발자국, 보리수 등의 상징물로 표현되었다. 인체만으로는 부처님의 위대함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여겼기 때문이다. 지역 주민들은 영적인 공덕을 얻기 위해 돈을 기부하여 스투파를 장식하였다. 기부자들은 돈을 기부한 댓가로 부처님의 삶에서 자신이 가장 좋아하는 장면을 선택해 조각에 새기고 본인의 이름을 새겨 넣을 수 있었다. 스투파에 특정 에피소드가 무작위로 반복되는 것은 이 때문이다. 북문 횡량에 새겨진 유명한 항마성도(降魔成道) 부조를 보기로 하자. 횡량(橫樑) 좌우에 나선형 문양이 새겨져 있어 마치 두루마리 그림을 펼쳐보는 듯하다. 먼저 왼쪽 가장자리에는 보리수 아래의 빈 대좌로 부처를 상징하였다. 가운데는 악마인 마라와 그의 딸들이 등장하여 부처님을 유혹한다. 오른쪽 장면은 악마의 군대가 패배하여 도망가는 모습이다. △ 중인도 바르후트(Bharhut) 스투파 1873년 알렉산더 커닝햄(Alexander Cunningham)이 발굴한 바르후트(Bharhut)는 중인도 마디야 프라데시(Madhya Pradesh) 주의 사트나(Satna) 지구에 있는 마을이다. 바르후트 패널(panel)의 독특한 점은 각 조각판에 브라미(Brahmi) 문자로 무엇을 묘사하고 있는지 명시하고 있는 점이다. 바르후트 조각은 아쇼카 왕조 이후, 산치 2호 스투파 이전의 것으로 인도 불교 예술의 가장 초기 사례를 보여준다. 바르흐투 스투파는 산치와 유사한 배열로 돌 난간과 4개의 토라나로 둘러싸여 있다. 난간은 대부분 복구됐으나 토라나 4개 중 동문만 남아 있다. 토라나에 7개의 카로스티(Kharosthi) 문자 장인 마크가 남아 있는 것으로 보아 조각가들이 인도-그리스 왕국의 핵심 지역인 간다라 출신임을 알 수 있다. 이 장인들은 헬레니즘 기법과 양식을 토라나 제작에 도입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면 동문 횡량(橫樑)에는 무엇이 그려져 있을까? 부처님을 상징하는 중앙의 대좌를 향해 동물들이 귀의하는 장면이 새겨져 있다. 사자 두 마리, 왼쪽에 그리핀 한 마리 그리고 인간 머리를 한 사자(스핑크스 또는 만티코어) 한 마리가 조각되어 있다. 아래 횃돌에는 네 마리의 코끼리와 두 명의 인간 신도들이 부처님을 에워싸고 있는 모습이다. 횃돌 사이에는 기둥들이 있는데, 그 중 일부에는 인도 인물상이 장식되어 있다. 이 기둥 기단에서 전체 8개 중 5개에는 카로슈티 조각가의 마크가 발견되었다. 위쪽과 중간 횃돌 사이에도 이런 기둥들이 있었겠지만 현재는 유실된 상태다. △ 21세기의 신발견, 남인도 파니기리(Phanigiri) 스투파, 스투파로 들어가는 출입문인 토라나는 기원전에 만든 산치와 바르후트 스투파에서만 확인할 수 있고, 기원후 남인도 스투파 유적에서는 찾아볼 수 없었다. 그런데 21세기에 새롭게 조사된 텔랑가나(Telangana) 파니기리의 스투파 유적에서 토라나 부재가 발견되어 주목된다. 이것으로 기원후 남인도 스투파에도 토라나가 있었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파니기리 스투파의 토라나 양끝에는 전설 속의 동물 마카라가 사자, 코끼리 등과 결합하여 탄생한 상상 속의 동물로 장식되었다. 또 긴 문 위에는 모두 석가모니의 인생 이야기가 새겨져 있다. 석가모니는 무우수(無憂樹) 나뭇가지를 짚고 선 마야 부인의 옆구리에서 태어났다. 먼저 석가모니의 탄생 장면이다. 하늘에는 석가모니의 탄생을 기뻐하는 천인들이 음악을 연주한다. 샤카족의 수호신도 석가모니의 탄생을 축하하고 있다. 성장한 석가모니는 성 밖으로 나가 생로병사의 괴로움을 보게 된다. 석가모니가 출가의 뜻을 밝히자 궁의 여인들이 슬퍼한다. 깨달음을 얻은 석가모니에게 사천왕이 다가와 발우를 공양한다. 석가모니가 사르나트의 녹야원에서 5명의 수행자들에게 첫 설법을 하는 초전법륜 장면. 대좌 앞의 사슴이 바로 그 장면을 상징한다. 토라나의 앞부분은 석가모니의 인생 이야기가 시간 순서대로 진행된다. 한편 뒷면의 이야기는 다른 순서로 진행된다. 여기에는 석가모니가 출가하기 전, 왕자 시절의 싯다르타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석가모니가 나가왕과 이야기를 나누는 모습, 코끼리를 타고 가는 모습 등이 새겨져 있다. 그리고 석가모니의 사리를 모신 스투파를 경배하는 모습이 확인된다. △ 일주문, 고대 인도 건축과의 깊은 연관성 토라나는 고대 인도 건축에서 유래한 장식적인 문 또는 출입구를 가리키는 용어로 사원의 경계를 표시하고, 신성한 영역으로의 진입을 알리는 상징적 의미를 지녔다. 토라나는 상징적인 의미와 더불어 신성하고 경외할 만한 입구를 표현하며, 때로는 축제나 왕의 승리를 기념하기 위해 사용되기도 하였다. 송광사와 위봉사의 일주문을 통해 우리는 고대 인도 건축의 영향이 아시아 전역에 미친 흔적과 함께 불교 해탈의 상징적 의미를 되새길 수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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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06 15:19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그리스에서 완주까지(3)

악기가 문화의 혁명을 불러일으킬 수 있을까? 그런 악기가 있다. 바로 비파(琵琶)다. 완주 송광사 대웅전의 천장에 그려진 주악비천도(奏樂飛天圖)에는 동서양의 문명 교류를 드러냄과 동시에 동아시아 음악문화의 패러다임을 혁명적으로 바꾼 악기인 비파가 있다. 사천왕(四天王) 중 다문천왕(多聞天王)이 환하게 웃는 얼굴로 연주하고 있는 악기도 비파다. 동한(東漢:25-220) 시기의 서적 『석명(釋名)』에는 “비파는 본래 호중 즉 외국에서 태어났고, 말 위에서 연주했다(琵琶本出於胡中, 馬上所鼓也)”고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 비파는 외래 악기이고, 원래 말을 타고 연주했었다. 근원을 좀더 추적하면 비파는 활에서 진화한 악기이다. 말의 대퇴골로 울림통을 만들고 말 내장과 힘줄로 현을 만들었던 노마드(nomad) 악기인 것이다. 또 비파라는 말은 페르시아 류트 ‘Barbat’을 한자로 옮기면서 생겨난 이름인데, 손을 앞으로 내밀어 타는 것을 ‘비(琵:枇)’, 손을 안으로 끌어당기면서 연주하는 것을 ‘파(琶:杷)’로 번역했다. 이처럼 한자에서 확인되듯이 비파는 서역에서 건너온 류트(lute) 계열 악기이다. 그러면 비파는 서아시아에서 어떻게 동아시아 완주까지 왔을까? 또 비파가 동아시아 음악문화에서 어떤 혁명을 일으켰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중국 서북부와 중앙아시아 간다라를 거쳐 메소포타미아 방향으로 실크로드 여행을 떠나야 한다. △ 활, 인류 최초의 현악기 인류 최초의 현악기는 활에서 유래되었다. 기원전 13,000년 전 프랑스 남서부의 트루아 프레르(Trois Frères) 동굴 벽화에 “들소를 닮은 모습으로 위장한 사냥꾼이 짐승을 몰면서 활을 연주하는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사냥용 활이 단현 악기로 사용된 가장 이른 음악용 활이다. 음악에 사용된 활은 소리를 증폭시키기 위해 울림통을 달며 다양한 악기로 진화한다. 비파, 기타, 바이올린과 같은 류트(lute)류 현악기 뿐만 아니라 공후(箜篌), 하프, 쟁(箏), 거문고, 가야금과 같은 지터(zither)류 악기도 뮤지컬 활에서 파생된 것이다. 그리스 류트인 판두라(pandura)는 ‘작은 활’을 의미하는 수메르(sumer)어인 판투르(pantur)에서 유래했을 가능성이 높다. 비파는 활에서 파생된 류트계 악기이다. △ 송광사 비파와 동일한 정창원 곡경비파 일본의 보물 창고 정창원(正倉院)에는 세 종류의 비파 즉 완함(阮咸), 오현비파, 사현비파가 보관되어 있다. 먼저 완함은 중국 전통 악기에서 현의 수가 변화하여 만들어진 악기로 진비파(秦琵琶)라고도 불린다. 두 번째는 다섯 줄의 오현비파인데 흔히 나전자단오현비파(螺鈿紫檀五弦琵琶)라 한다. 이 비파는 인도가 원산이며 북위(北魏:386-534) 무렵에 중국으로 전해졌다. 낙타 위 기악인(伎樂人)이 연주하고 있는 악기는 비파인데 직경이 아닌 곡경이다. 세 번째 사현비파가 바로 송광사 비파와 동일한 유형이다. 이 사현비파는 풍소방염나전조비파(楓蘇芳染螺鈿槽琵琶)라고 하는데 현이 네 줄이고 목 부분이 굽어 있으며 배 모양을 하고 있어 사현곡경이형(四弦曲頸梨型) 비파 혹은 곡경비파라 한다. 또 당(唐)비파라고도 한다. 무엇보다 눈길을 끄는 것은 비파에 그려져 있는 코끼리 위의 악무단 즉 ‘기상주악도(騎象奏樂圖)’다. 높은 모자를 쓰고 북을 치고 있는 인물은 심목고비(深目高鼻)의 서역인이 분명하다. 이는 1959년 서안 당나라 무덤에서 출토된 당삼채 낙타 인물용인 삼채유도낙타재악용(三彩釉陶駱駝載樂俑)을 연상시킨다. 또 연이어 물가로 날아가는 새 떼의 뒤편에는 붉은 태양이 빛을 발한다. 이러한 산수 묘사는 극히 드문 것으로 8세기 당대 회화 수준을 보여주는 명작이다. 이러한 점으로 볼 때 이 비파는 중국 당나라에서 제작되어 해외 교역이나 견당(遣唐) 사신을 통해 일본으로 전해진 물건일 것으로 생각된다. △ 류트(lute)의 출현과 전파 비파의 원류를 파악하려면 류트가 어디에서 최초 출현했고, 어떻게 전파되었는지를 살펴야 한다. 류트의 기원에 대해서는 여러 관점이 있는데, 서아시아설과 그리스설이 대표적 학설이다. 고고학 자료에 따르면, 가장 오래된 류트는 메소포타미아에서 기원전 3,000년기에 출현했다. 이 류트는 목이 긴 장경 류트인데 셈족(Semitic)과의 관련성으로 보아 시리아에 있었을 가능성도 있다. 장경 류트는 기원전 2,000년기에 서아시아에서 이집트로 전해져 배 모양 즉 리형(梨型) 류트가 분화하여 그리스-로마 문화권에서 발전한다. 그 후 알렉산더대왕(BC 356-323)의 동방 원정을 계기로 간다라 부근으로 전해지게 된다. 직경 류트는 1-2세기 쿠샨(Kushan) 왕조(AD 30-375)의 간다라에서 드디어 목이 굽은 곡경 류트로 바뀐다. 이것이 사현곡경 송광사 비파의 원초적 모습이다. 간다라에서 처음 출현한 곡경비파는 4세기 이후 거꾸로 페르시아 사산조에 전해져 크게 유행하게 되며, 5세기경에는 서역 호탄(Khotan)에서 중국 내륙으로 유입되고 한반도를 거쳐 일본에까지 전해진다. 【보충 해설】 전문가 길잡이 “호탄(Khotan)에서 출토된 사현 류트 기악 테라코타는 연대가 AD 3세기 또는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이 사현 류트는 가장 초기의 서양 류트 중 하나로 중국 비파와 매우 유사하다. 사진을 보면, 기악 테라코타가 들고 있는 류트는 목 부분이 직경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곡경이었을 것이다. 아마도 조각 기법의 한계 때문에 직경이 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호탄에서 둔황 지역에 이르기까지 비파류의 유물이 많이 출토되었는데, 이는 사현 류트가 호탄 지역을 통해 중국에 유입되었음을 말해주는 확실한 증거들이라 할 수 있다.(和田出土的手持四弦琵琶的伎乐陶猴可以追溯到三世纪,甚至更早。四弦琵琶是西方最早的琵琶之一,与中国琵琶非常相似。从图像上看,这个伎乐陶猴怀抱的琵琶颈似乎是直的,但实际上四弦琵琶的颈是弯的,有可能因为雕刻技术的限制表现为直的。从和田到敦煌地区出土了大量琵琶类型的文物,这些都充分证明了四弦琵琶琵琶通过和田地区传入中国的.)” 따이징(代静, 沧州师范学院,编导教研室主任,講師) △ 제례(祭禮) 악무를 변화시킨 비파 예(禮)와 악(樂)으로써 임금과 신하, 백성이 조화를 이루는 사회를 구현하고자 했던 농경 정착민의 유교 국가 중국. 전통 시기 중국에서 가장 중시되었던 악기는 ‘사직(社稷) 악기’라 불렸던 편종(編鐘)과 편경(編磬)이었다. 이 악기는 종묘제례용으로 왕이나 제후들만이 향유할 수 있는 무거운 악기였고 악무 역시 장중했다. 반면 초원 유목문화를 상징하는 활에서 진화한 비파와 같은 가벼운 현악기는 소그드 상인의 황금기였던 기원후 4-8세기 중국에 전해져 소그드춤 ‘호선무(胡旋舞)’와 함께 선풍적인 인기를 끌었다. 놀랍게도 당 현종(玄宗:685-762)은 본인이 작곡가이자 비파 연주자였으며, 그의 비파 연주에 맞추어 춤추었던 경국지색(傾國之色) 양귀비(楊貴妃)와 소그드인으로 안사의 난(安史之亂)을 일으킨 안록산(安祿山)은 당대 최고 호선무 무용수였다. 비파와 서역 악무가 장안(長安) 궁정 뿐만 아니라 민간에 유입되며 중국 음악문화에 혁명적인 변화를 불러일으킨 것이다. 이렇게 활에서 태어난 혁명적인 악기 비파가 지금은 송광사에서 우리에게 천상의 소리를 들려주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심층 해설】 전문가 길잡이 “비파는 중국의 어떤 악기보다 빠르고 경쾌한 음악을 잘 연주할 수 있는 악기였습니다. 오늘날 젊은이들이 자국음악보다 외국음악을 좋아하는 것과 같이 비파음악은 젊은이들이 환호하는 악기였습니다. 비파는 실크로드를 타고 중국에 들어온 악기로 당시로서는 첨단을 걷는 악기였으며 단숨에 중국인들의 마음을 휘어잡은 악기였습니다. 비파음악은 바로 호악과 중국음악의 교류와 혼융을 결과로 태어난 새로운 음악이었습니다.” 전인평(중앙대 명예교수/아시아음악학회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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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4.09 14:54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그리스에서 완주군까지(2)

타파 칼란(Tapa Kalan) 사원 큐폴라 에로스. 완주군의 천년고찰 송광사(松廣寺). 송광사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것은 무엇일까? 금강역사나 사천왕상이 생각날 수도 있지만 송광사를 대표하는 것은 뭐니 뭐니 해도 대웅전 천장에 그려진 ‘비천(飛天)’도이다. 비천은 부처의 정토에서 공중을 날아가면서 하늘의 꽃을 흩뜨리거나 하늘의 음악을 연주하는 천녀를 의미한다. 그런데 이 ‘비천’은 인도에서 생겨났지만 사실은 서양의 날개 달린 천사가 실크로드를 통해 중앙아시아 간다라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파된 것이다. 도대체 어떻게 된 일일까? 송광사 비천이 어디에서 왔고, 어떤 경로를 거쳐 완주까지 왔을까? 이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먼저 메소포타미아로 떠나야 한다. △날개를 단 최초의 동물, 우룩(Uruk) 그리핀 비천의 기원은 인도로 알려져 있지만, 초기 인도 불교 미술에 등장하기 훨씬 오래 전부터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지역에서 날개를 단 동물과 신(神)이 장식 모티프로 사용되었다. 원래 날개가 없는 인간이나 동물에 날개를 다는 것은 신성(神聖)과 보호의 상징이다. 또한 날개는 신과 인간을 연결하는 메신저로도 기능한다. 날개 달린 최초의 동물 모습은 BC 4100-3000년 메소포타미아 우룩(Uruk) 시대의 원통형 인장에 보인다. 작은 인장 속에는 괴이한 동물들 중 최초의 그리핀(griffin)이라 할 수 있는 사자 머리를 한 독수리와 기다란 목에 사자 머리를 한 신화 속 짐승 세르포파드(serpopard)가 있다. 이러한 날개 달린 신화 속 짐승은 날개를 가진 신인(神人)으로 확산되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 초기 문화에 자주 등장한다. 예를 들어 기원전 2700년 이집트 고왕국 시대의 여신 이시스(Isis)도 커다란 날개를 가지고 있다. 그 외에도 기원전 9세기 아시리아(Assyria)의 도시 님루드(Nimrud) 궁전에 세워졌던 거대한 비석에는 긴 수염과 한 쌍의 커다란 날개를 지닌 신인(神人)이 신성한 나무 좌우에 나란히 서 있다. 이처럼 날개 달린 동물과 인간의 형상이 메소포타미아와 이집트에 널리 확산된 것은 군사적 정복과 무역을 통해서였을 것이다. △ 근동의 신(神), 세라핌과 아후라 마즈다 메소포타미아의 날개 달린 신(神)은 성경 속 천사로도 이어진다. 기원전 8세기에 아시리아가 이스라엘 지역을 정복했었던 때 기록된 이사야(Isaiah)서 6장 1절에 보이는 여섯 개의 날개를 가진 ‘세라핌(seraphim)’이 바로 그것이다. 한편 BC 6세기 페르세폴리스에서는 조로아스터교의 신인 아후라 마즈다(Ahura Mazda)를 날개가 달린 신성한 인물로 형상화되기도 했다. 이러한 날개를 가진 근동(近東) 지역의 신들은 후대에 이슬람의 천사로 계승되는 동시에 그리스로 전해져 헬레니즘 미술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사랑의 여신 에로스(Eros), 승리와 풍요의 여신 니케(Nike), 꿈의 신 모르페우스(Morpheus) 등이 된다. 이처럼 날개를 단 서양의 천사가 늘어나는 것은 지중해 동부를 중심으로 지역 간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지며 생겨난 문화적 융합 현상이다. △초기 인도 불교 미술의 날개 달린 천사 근동 지역에 이웃해 있는 인도. 소위 무불상 시대인 인도의 초기 불교 미술에는 날개를 단 천인(天人)이 많이 보인다. 이 공중을 나는 천녀는 부처님 생애의 주요 사건을 묘사할 때 등장하며, 하늘에서 내려와 신변(神變)을 목격하는 존재로 묘사되고 있다. 예를 들면, BC 2세기경 조성된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불교 스투파인 바르후트(Bharhut) 스투파 토라나(torana)에는 하늘에서 비스듬히 내려온 두 명의 천사가 보리수 위에서 화환을 들거나 꽃을 뿌리고 있다. 이러한 형상은 성수(聖樹)를 가운데 두고 좌우에 인물이 대칭적으로 배치되는 님루드 비석의 양식과 맞닿아 있다. AD 1세기에 만들어진 산치(Sanchi) 스투파 토라나 서문과 북문을 장식한 부조에도 비슷한 양상이 보인다. 보리수 위쪽 좌우에 두 명의 공양인은 비샤푸르(Bishapur) 부조의 천사와 비슷한 날개를 가지고 있으며, 전형적인 페르시아의 입수쌍인(立樹雙人)의 형상이다. 인도 초기 불교에서 확인되는 이 날개 달린 천사는 대승불교의 확산 추세에 힘입어 중앙아시아 간다라에서 헬레니즘과 만난다. △붓다를 수호하는 기독교 아기 천사와 그리스 신 불교와 헬레니즘이 만나 탄생한 간다라(Gandhara) 미술은 쿠샨 왕조(AD 1~4세기) 시기에 가장 번성했다. 이 시기 실크로드는 무역 네트워크로써 활발히 작동하면서 로마와의 연결고리 역할을 했고, 이에 따라 간다라에서는 불상의 탄생 뿐만 아니라 불교적인 모티프가 고대 그리스 예술과 결합하는 문화적 혼합주의로 진화한다. 특히 간다라 그레코 불교 미술(Greco-Buddhist art)에서는 날개 달린 이미지에 한층 친숙해진다. 구체적 사례로 파키스탄 쿠날라(Kunala) 불교 사원의 석조 부조에는 날개 달린 천녀가 많이 보이고, 기독교 신학에서 가장 고귀한 이미지 중 하나인 벌거벗은 아기 천사 큐피드(Cupid)가 신을 숭배하는 화환을 들고 있다. 또 아프가니스탄 하다의 타파 칼란(Tapa Kalan) 사원에서는 3세기의 것으로 추정되는 작은 큐폴라(cupola)가 출토되었는데, 목이 잘린 붓다 위로 화환을 들고 날아다니는 사랑과 섹스의 그리스 신 에로스(Eros)가 그려져 있다. 그런데 이처럼 헬레니즘화된 날개 달린 천사는 간다라에서 한반도를 향하여 차츰 동쪽으로 이동하면서 커다란 변화가 일어났다. 즉 천사의 날개가 차츰 사라지는 것이다. △ 키질 석굴 : 천사와 비천의 과도기 AD 4-7세기에 조성된 중국 신장 키질(Kizil) 석굴. 이곳 벽화에는 날개 달린 천사가 여전히 보이지만 날개 없는 천사들도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키질 38굴 벽화에는 왕관을 쓰고 후광을 두른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와 쓰러지는 한 인물을 붙잡고 있는데 두 개의 푸른 날개가 펄럭이고 있다. 또 키질 227굴 벽화에는 아치 위쪽에 날개 달린 나체 인물 두 명이 그려져 있는데 한 명은 피부색이 하얗고 한 명은 어둡다. 간다라에서 보았던 그레코로만(Greco-Roman) 양식의 천사이다. 한편 키질 8굴 벽화에는 드디어 송광사 비천의 모습과 유사한 날개 대신 스카프를 휘날리는 비천이 등장한다. 머리 뒤에 동그란 광배를 두르고 왕관을 쓴 두 명의 비천은 꽃을 뿌리고 악기를 연주하며 공중을 비행하는데 팔목에 휘감긴 스카프가 펄럭이고 있다. △ 서양 천사의 동아시아적 수용 키질을 지나 돈황 막고굴(莫古窟), 맥적산(麥積山) 석굴과 운강(雲崗) 석굴 등으로 동점(東漸)하여 한반도에 가까워질수록 날개 달린 천사의 서양식 이미지는 점차 동양식 천인(天人)의 이미지로 변해간다. 서양 천사의 날개는 사라지고 천의(天衣)를 길게 나부끼는 형태로 변모하며, 여성의 가슴 같은 섹시한 육체미는 복숭아로 대체하거나 두툼한 옷으로 가려지게 된다. 불교미술 전문가 김은아 교수(우석대 대학원 예술경영학과)는 다음과 같이 해석했다. "공중을 날지만 날개가 없는 송광사 비천은 날개 달린 서양 천사라는 이미지를 동아시아가 어떻게 수용하였는지 보여줍니다. 그러므로 송광사 비천은 동일한 의미를 가지더라도 그것을 표현하는데 동서양의 해석이 다를 수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는 중요한 도상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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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3.06 15:20

[전홍철 교수의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 그리스에서 완주군까지(1)

우석대 공자아카데미 창립 15주년을 맞아 전북일보는 한국돈황실크로드학회, 태원사범대학(太原師範學院) 국제실크로드문화예술연구소(國際絲綢之路文化藝術硏究所)와 함께 동서 문명을 연결시킨 실크로드 유적과 유물을 소개하고 그 속에 남긴 우리 문화의 발자취를 추적하는 ‘영상과 함께 하는 실크로드 탐방’을 기획, 매월 연재한다. △ 금강문에서 만나는 헤라클레스 완주군 종남산 끝자락에 자리한 송광사(松廣寺). 이곳에는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Heracles)의 흔적이 있다. 뜬금없이 웬 헤라클레스일까 싶겠지만, 불법의 수호신 금강역사(金剛力士)가 바로 그리스에서 중앙아시아 간다라 그리고 중국을 거쳐 한반도로 건너온 헤라클레스이다. 송광사 일주문 뒤에 있는 금강문 중앙 통로 좌우에는 사찰을 지키는 두 명의 금강역사 즉 천상의 역사로 괴력의 소유자인 나라연(那羅延)금강과 부처님을 호위하는 야차신(夜叉神)인 밀적(密迹)금강이 있다. 이 금강역사는 그리스 신화의 전설적인 영웅으로 사자를 맨손으로 때려잡은 헤라클레스와 깊은 관련이 있다. 이러한 흥미로운 동서 문명 교섭의 역사적 사건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금강역사의 유래 그리고 간다라 미술에 보이는 헤라클레스 형상의 금강역사가 중국을 거쳐 한반도에 전파된 과정에 대해 알 필요가 있다. △ 고대 인도의 신 ‘바즈라파니(Vajrapani)’ 금강역사는 산스크리트어로는 바즈라파니(Vajrapani)이며, 고대 인도 베다에 나오는 신이다. 바즈라파니의 '바즈라(Vajra)'는 다이아몬드나 벼락 또는 금강저(金剛杵)를 의미하고, '파니(pāni)'는 "손에 쥔"을 의미한다. 초기 인도 불교에서 바즈라파니는 금강저를 손에 든 고타마 붓다의 수호자이자 안내자이다. 동아시아에서 바즈라파니는 한자로 번역되면서 금강역사(金剛力士), 집금강신(執金剛神), 금강야차(金剛夜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여기서 금강야차의 야차(夜叉)는 인도 비아리아계의 신인 ‘약샤(Yaksa)’이며, 고대 인도 민간신앙을 대표하는 토착신이다. 야차는 불교에 흡수되어 붓다의 수호신이 된다. △ 간다라의 금강역사, 헤라클레스 그러면 인도의 신 바즈라파니는 어떻게 또다시 헤라클레스가 되었을까? 바즈라파니가 헤라클레스의 모습이 되는 것은 알렉산더대왕의 동방 원정에 따라 인도의 불교 미술과 그리스 · 로마 미술이 융합되는 간다라(Gandhara) 지역에서였다. 현재의 파키스탄과 아프가니스탄, 그리고 우즈베키스탄 일부 등을 포함하는 간다라는 1세기 무렵부터 불교의 중심지가 되어, 쿠샨(Kushan) 시대에 동서 교역의 요지로서 가장 번영했다. 특히 간다라에서는 헬레니즘 문화의 영향 아래 처음으로 불상이 제작되었고, 그 불교 미술은 인도, 중앙아시아 그리고 중국을 거쳐 한국과 일본에까지 영향을 끼쳤다. 그러나 5세기 중반 에프탈(Hephthalites)에 의해 도시가 파괴되어 불교의 중심지로서의 간다라는 종말을 맞이한다. △ 헤라클레스 도상의 간다라 유입 불법의 수호신 금강역사가 실제 헤라클레스상으로 표현되어 있는 놀라운 장면은 간다라 지역에 해당하는 아프가니스탄 하다(Hadda)의 불교 사원 타파 쇼토르(Tapa Shotor)에서 확인할 수 있다. 타파 쇼토르 유적지는 1992년 탈레반에 의해 파괴되고 약탈당해 사라졌으나 당시 아프가니스탄 고고학자인 제마랼라이 타르지(Zemaryalai Tarzi, 1939년생) 박사가 찍은 사진이 남아 있어 불상이 어떻게 그리스 형식으로 조각되었는지를 생생히 증언하고 있다. 사진을 보면, 불상 조각상 가운데는 붓다가 앉아 있고 우측에는 그리스 신화에서 부와 번영을 관장하는 행운의 여신 티케(Tyche)가 탐스런 과일을 듬뿍 담은 ‘풍요의 뿔’ 코르누코피아(Cornucopia)를 들고 있다. 티케 반대편 조각상이 바로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이다. 구불구불한 머리카락과 수염을 한 헤라클레스는 금강저를 무릎 위에 올려놓고 오른손을 금강저 위에 얹고 있다. 영웅 헤라클레스를 상징하는 물건은 머리에 뒤집어쓴 사자 가죽과 올리브 몽둥이인데, 여기서는 사자 가죽을 머리에 쓰지 않고 왼쪽 어깨에 걸쳤다. 이른 바 ‘견부사교(肩部獅嚙)’ 즉 어깨 위에 있는 사자의 찡그린 얼굴 모양이다. 견부사교는 동아시아에 유입되어 사천왕상은 물론 관우(關羽)상과 같은 무인상 어깨 장식으로 정착한다. 한편 타파 쇼토르에는 놀라운 사실이 하나 더 있다. 그리스 문명과 인도 문명의 운명적인 만남을 이끈 알렉산더 대왕으로 보이는 조각상이 불상 옆에 서 있는 것이다. 이 조각상은 얼굴 옆모습, 머리 모양, 복장, 자세로 보아 알렉산더 대왕임이 분명해 보인다. 당시 마케도니아에서 동방원정을 떠나 이집트, 페르시아, 중앙아시아까지 정복해 대제국을 이룬 알렉산더 대왕. 대제국의 황제라면 정가운데 앉아 있어야 마땅하지만 불상 옆 귀퉁이에 작은 조각상으로 서 있다. 미술사학자 주수완 교수(우석대 경영학부)는 “타파 쇼토르 사원 불상 옆에 알렉산더대왕 조각상이 있다는 것은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이를 통해서 우리는 당시 간다라에서 불교가 얼마나 높은 위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엿볼 수 있고 또 헬레니즘 문명이 불상의 탄생에 커다란 영향을 끼쳤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습니다.”라고 했다. △ 간다라 금강역사의 변모 인도 불교와 그리스 문명이 결합한 간다라 금강역사는 동아시아에 전파되어 변모한다. 붓다 옆에 홀로 서 있던 금강역사가 쌍으로 바뀌고 위치도 안쪽이 아닌 바깥쪽 문의 좌우에 서서 사찰을 지킨다. 또 인도 본토나 간다라 금강역사는 항상 금강저를 들고 있지만, 동아시아의 금강역사는 들고 있는 물건이 다양하다. 간다라에서 탄생한 불상은 대승불교와 함께 4세기 무렵 한반도에 도착하였다. 완주 송광사의 금강역사는 그리스 영웅 헤라클레스가 붓다의 보디가드가 된 흥미로운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 △전홍철 우석대 경영학부(예술경영) 교수=돈황학 전문가로 실크로드에 대한 글쓰기와 영상 제작을 하고 있으며, 세계 최초로 돈황변문집을 완역 출간한 바 있다. 현재 한국돈황실크로드학회 회장, 우석대 공자아카데미·실크로드영상연구원 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와 역서로 『돈황 강창문학의 이해』(소명), 『돈황 민간문학 담론』(소명), 『돈황변문집교주』(1-6권, 소명) 등이 있고, 영상으로는 <백제와 실크로드>(2017.01-2017.06, 전북일보 연재), <타케 보스탄(Taq-e Bostan)>, <소무구성(昭武九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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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1.24 15: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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