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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④ 이용규 <약사> +<김약제일기>

어느 공주 유생이 남긴 동학농민군 기록과 한 해의 세평 – 이용규의 <약사>를 읽는다 어느 공주 유생은 갑오년 3월 15일“이날 대교(大橋)에서 향약(鄕約)을 행하였다”고 하였다. 모임은 3월 10일부터 준비되었는데, 아마 공주지역 유생들이 동학에 대항하기 위한 것이다. 14일 동학당 수백 명이 대교에서 취회를 했지만, 바로 충돌이 일어나지 않고, 15일 비가 오는 가운데 유회를 치뤘다. 다음날 동도 700여 명은 이를 파괴하고 스스로 해산하였다. 이렇게 기록한 이는 충청도 공주 장전리에 살고 있던 이용규(李容珪)였다. 그는 지방에만 은거한 유생은 아니다. 그가 39살 때인 1888년 6월 광무국 주사로 활동하였고, 한때 서울 안동(安洞)에서도 살았다. 그는 1892년까지 광무국 주사, 기기국 위원을 지냈으므로 서울과 지방의 소식을 함께 접할 수 있었다. 갑오 2월 15일 일기에서 의정부 초기를 인용하여 고부봉기의 사실을 전했던 것에서도 알 수 있다. 그는 이전부터 동학당의 취회에 주목하고 있었다. 계사년 말미 세평(歲評)에서는“이 해에는 나라가 평안하였더니 계춘(季春)에 동학도 취당이 보은 땅에서 있었다. 7만여 인이 소요를 일으켰다. (……) 동학당은 본래 여항의 훈련되지 않는 병사였으므로 이내 해산하였다.”고 하였다. 그는 민요(民擾)가 지방관의 가혹한 수탈에서 일어났다고 보았지만, 민중들의 봉기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래서 동학농민군을 시종일관 ‘동비(東匪)’라고 지칭했다. 다만 그는 농민봉기에 대처하는 정부 대응을 중시하고 있었다. 4월 28일 신임 전라감사 김학진의 부임을 기록한 데 이어, 5월 8일 “전주감영을 점거한 비적들이 귀화를 칭하고 나가서 태인 땅으로 향해 갔다고”하여 동도가 쉽사리 해산했다는 점을 의심하고 있었다. 그가 동도와 마주하기 시작한 것은 7월 6일 이후였다. 그는 8일 엽전 400냥을 강제로 빼앗겼으며, 24일 동비의 대교 주둔한 것, 25일 쌀 5섬을 요구해서 1섬을 줄 수밖에 없었던 일, 8월 6일·7일에는 김영국(金榮國) 포의 돈 강탈 등 피해를 빠짐없이 기록해 두었다. 7월 29일 공주 정안면 궁원(弓院)에 대규모 농민군이 모인 기록에서는 임기준(任基準) 휘하의 동학농민군과 공주 감영과의 대치 상황을 알 수 있다. 9월 중순 이후에는 가족들을 금산 땅으로 피신시켰다. 대전 등지에서 동비가 소·짐·돈·양식을 빼앗는다고 했기 때문이다. 10월 23일 경리청 부대와 동학군의 대치국면에 대해,“오공동 서쪽봉우리에 올라 효포 등지를 멀리서 보니 관군과 전주의 동비들이 진을 치고 대치하는 것을 직접 보았다”고 하였듯이 당시 상황을 실감있게 전하였다. 저자는 동학농민군 활동에 동조하던 감사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비판하였다. 전라도의 경우, “전봉준이 홍계훈에게 귀화한다고 속이고 있었고, 홍계훈 역시 동학도의 수가 많음을 보고 감히 손을 쓰지 못했다. 당시 순변사 이원회가 내려오자 홍계훈도 자신이 공로를 차지하지 못할까 염려하여 갑자기 전봉준이 귀화하는 것을 허락하였다.”고 하였다. 또“전라감영의 관문(關文)과 감결(甘結)에 반드시 전봉준의 도장을 찍은 연후에야 여러 읍으로하여금 거행하게 하였다”고 전라감사 김학진의 행태를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호서 동학군이 감사 조병호와 은밀히 부합하여 ‘감사는 우리 편의 사람이니, 누가 감히 우리를 엿보겠는가’라고 행동하였다고 비난하였다. 이러한 기록은 역으로 전라 충청 일대에서 전봉준 등 동학농민군들이 주도하는 집강소 개혁정치의 실상을 전해주고 있다. 그는 갑오년 세평에서 농사가 흉년에는 이르지 않았지만, 가을 추수 때 동학당 봉기를 마련하는 비용으로 민생의 곤궁함이 갈수록 더욱 심해졌다고 하였다. 이러한 언급에서 조선국가의 폐단을 시정하기 위한 동학농민군의 노력에는 동조하지 않으면서 민생 곤궁만 걱정하는 유교지식인의 엇갈린 태도를 엿볼 수 있다. 이 자료는 현재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학교 역사문화학과 교수 --------------------------------------------------------------------------------------------------------------------------------------------------------------------- <김약제일기> <김약제일기(金若濟日記)>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성균관(成均館) 사성(司成)으로 재직하였던 청우(淸愚) 김약제(金若濟, 1856~1910)가 기록한 일기체의 글이다. 1885년 진사시에 입격하고, 이듬해인 1886년 문과에 합격하여 관계에 진출하였다. 그러나 1892년 고금도(古今島)에 유배되었다. <김약제일기>는 바로 이때부터 시작한다. <김약제 일기>는 모두 4권이다. 1권에서는 고금도에서의 유배생활을 기록하였다. 2권에서는 관직 복귀 이후의 일들을 기록하였다. 동학농민혁명이 일어나는 1894년 2월까지 수록되어 있다. 3권은 1894년 2월부터 1895년 10월까지의 일기다.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견문 등이 담겨 있다. 4권은 대한제국 초기까지의 인식을 알 수 있는 자료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기록은 1894년 4월 6일부터 본격적으로 나타났다. 이를 자세히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동학이류(東學異類)가 3월 봄부터 다시 일어나서 지난번보다 심해졌다. 봄에 금산읍(錦山邑)에서 접전을 하여 서로 간에 죽은 자가 제법 많았다. 전라도 고부(古阜)에서는 민란이 크게 일어나서 그 읍 수령인 조병갑(趙秉甲)이 한 없는 곤경을 겪고 달아나 살았다. 여기서 동학이류(東學異類)란 최시형을 중심으로 한 북접 동학교단과 다른 가르침을 추종하는 변혁지향적인 남접 세력을 일컫는다. 일본 지바대학의 조경달 교수는 이에 착안하여 '이단의 민중반란'이라는 연구서를 낸 바 있다. 다들 알다시피 고부민란이 일어나 군수 조병갑이 쫓겨난 사실을 수록하였다. 더욱 특기할 것은 1894년 1월의 고부민란 이후에 일어났지만 3월 20일 무장기포에 앞선 3월 8일 일어난 것으로 추정되는 금산기포를 수록한 것이다. 금산은 남접 세력의 중심인물인 전봉준 등을 지도한 서장옥의 근거지였다. 이 정도 기술만으로도 동학농민혁명 초기 국면 서술에서 많은 논쟁점을 던져주고 있다. 김약제는 성균관 사성을 지내고 있던 관인(官人)이었던 만큼 동학농민군에 대해서는 지극히 부정적인 인식을 가지고 있었다. 1차 봉기 이후인 7월 25일의 일기를 보자. 동학의 소요가 극심해져 내포(內浦) 전체에서 동학에 들어가지 않는 자가 거의 드물었다. 인심이 흉흉해져 가장 먼저 봉변과 봉욕을 당한 자는 양반의 명색을 지닌 사람이었다. …… 동학교도는 떼를 짓고 무리를 이루어서 하지 않는 것이 없었다. 남의 무덤을 파고 남의 집을 허물었으며 결박하여 구타하였는데, 입도하지 않은 양반으로 당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 이런 때에 조정의 명령이 갑자기 내려와서 피색장(皮色匠)이 갓을 쓰고 칠반천인(七般賤人)이 모두 면천(免賤)을 하여 양반과 상놈의 구분이 없게 되었다. 양반 관인이었던 김약제의 입장에서 동학농민군의 위와 같은 활동은 흉악하게 보였겠지만 실제로는 양반을 정점으로 한 신분제 철폐 운동이 일어나는 과정의 일환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마침 갑오개혁을 추진하고 있었던 개화파 정부도 이에 호응하여 칠반천인을 면천하여 신분제 철폐를 법제적으로 마련하고 있었다. 근대 초기에 일어나는 신분제 붕괴 및 국민의 창출 과정이 동학농민혁명과 갑오개혁을 통하여 동시에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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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5:3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 ③<취어> <석남역사>

<취어(聚語)> △보은 장내리 동학집회 1893년 봄에 나라 전체가 흔들리는 큰일이 벌어졌다. 동학도 수만 명이 충청도 보은의 장내리에 모여 시위를 벌인다는 소식이 전국에 전해졌다. 인근뿐 아니라 각지의 양반들이 놀라면서 사태 진전을 지켜보고 있었다. 조정에서는 고종과 대신들이 모여서 숙의한 끝에 보은에 보낸 도어사 어윤중을 다시 선무사로 임명하여 해산시키는 임무를 맡겼다. 이때 고종은 청나라 군사를 빌려서 진압하자는 말까지 꺼냈다.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때처럼 청나라 군사에게 의지해야 한다고 생각한 것이다. 보은군수와 충청감사가 올려보낸 보고문은 위태롭기 그지없었다. 동학도들은 낮에 동네 뒤의 냇가에서 진을 치고 있었고 밤에는 본동 민가와 부근 동네에서 유숙하였는데 날마다 오는 사람들이 연속해서 끊이지 않았다. 이들은 삼가천의 냇돌을 가져와서 돌성을 쌓았고, 주변 야산 봉우리에 깃발을 꽂고 수십 명씩 올라가 있었다. △ <취어>의 사료 가치 보은 관아에서는 이를 제어할 수 없었다. 다만 정탐하는 관리를 보내서 시시각각 동학도들의 동정을 탐지하여 보고할 뿐이었다. 그 내용이 <취어>에 수록되어 있다. 동학도들이 장내리에 집결하기 시작한 날에서 해산한 날까지, 즉 1893년 3월 11일의 탐지 기록부터 3월 29일의 탐지 기록까지 정탐한 보고문을 모은 <취어>는 유일한 관련 기록으로 가치가 있다. <취어(聚語)>라는 이름은 자료를 모아놓았다는 의미이다. 처음부터 계획하여 모아서 편집한 것이 아니라 손에 들어온 자료를 누군가 정서한 것이다. 상소문과 보고문 그리고 전보문으로 구성된 것을 보면 선무사 어윤중이 묶은 것이 아닌가 한다. 주로 시국에 관한 우려가 담긴 내용을 모은 것으로 1893년과 1894년 그리고 1896년에 작성된 자료들이다. 그 내용은 네 부분으로 나눌 수 있다. 1893년의 권봉희상소와 보은 장내리집회, 보은옥사와 청풍민요 조사 보고, 그리고 1894년의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1896년의 상소문이다. 1894년 기록은 모두 8편으로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 때 기록이다. 여기서 흥미 있는 자료가 <무장동학배포고문(茂長東學輩布告文)>이다. 다음에 있는 자료가 4월 11일자 전라감영 전보인 것을 보면 당시 이 <무장포고문>이 나온 즉시 수록한 것을 알게 된다. <취어>의 중심이 되는 것은 1893년 자료로 보은 장내리집회와 관련한 일련의 보고서이다. 분량도 가장 많아서 전체의 30%가 된다. 이 기록은 다른 자료에서 볼 수 없는 유일본으로 높은 사료가치는 여기서 나온다. △보은집회를 경계한 왕조정부와 청국 · 일본 당시 동학도들은 기치는 ‘보국안민’과 ‘척왜양창의’였다. 부패하고 무능한 관리들에게 경고하는 한편 일본과 서양 열강의 침범을 우려하였다. 서양 공사관은 반외세 움직임에 놀라서 보은집회의 동정을 주시하였다. 서울에서 무도한 일을 멈추지 않던 청국의 위안스카이는 청국군을 보내면 일거에 제압할 거라고 큰소리를 쳤다. 일본공사관은 갑신정변 때 물러선 후 조선을 도모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동학도들은 척왜양을 주장했지만 정부에 요구한 핵심 사항이 민씨정권 축출이었다. 척족 민씨들이 온갖 부정한 짓을 하면서 나라를 좀먹고, 백성을 도탄에 빠뜨린 잘못을 지적하며 정권에서 물러날 것을 주장한 것이었다. <취어>는 전국에서 집결한 동학도들의 기상과 새로운 사회로 나아가려는 시대정신을 전하고 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석남역사(石南歷事)> <석남역사(石南歷事)>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전후하여 정읍(당시 고부) 이평면 장내리 석지마을에 거주했던 박문규(朴文圭, 1879~1954, 號 石南)가 자신의 개인사를 73세(1951년)에 회고록 형식으로 정리하여 자손에게 남긴 문집이다. 손자인 박남순(朴南淳, 1938생)이 보관해 오다가 2016년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기탁하였고, 세계기록유산 목록에 포함되었다. <석남역사>는 다섯 단원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셋째 단원인 '박씨정기역사'에 자신의 생애 및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전봉준이 동학농민혁명 이전에 이 지역에서 서당훈장을 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이미 알려져 있다. 그러나 언제부터, 또 정확히 어디서 서당을 열고 있었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그런데 <석남역사>의 다음 기록에서 그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한해 두해 지나가서 8살이 되어 3월 3일 좋은날에 '천자문'을 등고 고개(잔등) 넘어 조솔리로 입학하러 갔다. 선생님 앞에서 인사했는데, 선생님은 고모댁의 웃집으로 동학대장 전녹두 선생님이었다. 선생님은 천자문의 하늘 천, 따 지, 검을 현, 누를 황을 가르쳐주셨다. 서당 아이들 서너 동무끼리 재미를 붙이며 배워갔다. 선생님의 늙은 아버님이 대신 서서 감독하셨으며 ……“ 이 기록에 의하면 갑오년에 박문규가 16세였다고 하였으므로 동학농민혁명 발발 8년 전인 1886년 이전부터 전봉준은 이평면 조소리에서 서당을 운영했던 것으로 보인다. 서당의 규모는 서당 아이들 서너명이 배웠다는 것으로 보아 크지 않았을 것이며, 전봉준의 부친인 전창혁이 서당 운영에 도움을 주었다고 한다. 또한 1886년 이전부터 운영되어 오던 서당이 1889년 기축년에 없어졌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는 “무자(1888)년 대흉년을 만나……40여 호 마을의 대부분 떠나가고 2~3가구만 붙어 있는데……”라는 내용으로 보아 1888년~1889년 있었던 대흉년 때문일 것으로 추측된다. <석남역사<는 특히 고부농민봉기 발발 당시의 상황을 비교적 자세하게 보여주고 있다. 1월 8일 말목장날 봉기를 준비한 ‘통문(通文)’이 말목장터 주변에서 돌았다는 기록이 특별히 주목되며, 봉기의 사전준비가 조직적으로 이루어졌으며, 동네별로 징과 나팔 등 농악이 집결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이 확인된다. <석남역사>에는 황토현 전투와 전투 직후 고부지역의 상황도 알 수 있다. “초엿새날 새벽이 되자 총소리가 콩 볶듯이 요란하여 나는 아버님과 마을 앞 벌판으로 피난하였다.”의 내용에서 황토현 전투가 4월 6일에 있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한편 농민군에 가담하지 않은 일반 고부민들은 전투상황에 대하여 두려워하며 동네 앞 갈대밭으로 피난하고 있었다고 한다. 또한 “초 6일 새벽부터 날이 새면서 소식을 들으니 전주 병정들이 패했다고 하였다. 만약 병정들이 이겼다면 고부는 도륙되었을 것이다. 천운이 망극하여 병정들은 검사봉에 진을 쳤다가 패진했다 한다.”라고 하여 농민군에 참가하지 않은 채 숨어있던 일반 고부민들도 이 황토현 전투의 승패가 고부군민에게 어떤 결과를 가져올 것인지를 염려하면서 농민군의 승리를 고대하고 있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황토현 전투가 끝난 후 상황을 살펴보면 “그 후로 동도가 크게 일어나서 면면촌촌에서 전도가 바쁘고 입도인이 발광하였다. 그들은 술과 안주를 먹고 장을 보았다. 거옥한 치성으로 마을 안에 모여앉아 13자 주문을 외기에 정신 없었다.”의 기록에서 보듯이 농민군의 승리 이후 각 동네에서 동학의 교세가 크게 확장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석남역사>는 당시 농민군에 적대적이었던 관군이나 유림측의 기록이 아닌, 그러면서도 동학농민혁명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겪은 민간인이 남긴 기록이라는 점에서 사료적 가치가 높은 귀중한 자료로 평가받고 있다. 더구나 <석남역사>의 저자인 박문규가 전봉준의 서당에서 천자문을 배운 전봉준에게 직접 배운 제자였다는 점에서 더욱 의미가 있다. <석남역사>가 비록 동학농민혁명의 전개과정과 장소 및 일자의 정확성이 약할 수밖에 없는 후대의 회고기이지만 다른 자료에서 보기 어려운 생생한 표현들을 볼 수가 있다. 이는 아마도 저자인 박문규 스스로 고부농민봉기를 직접 눈으로 보고 겪었을 뿐 아니라 전봉준에게 교육을 받은 바 있는 자신의 특별한 경험에 기반한 글이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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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30 16:3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념물'] ②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

번거로운 인사말은 접어두고 동생 광팔 보시게 (際煩舍弟光八卽見) 나라가 환난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네 (國之患難民之所患) 내가 집을 나와 수년을 떠돌아다니며 집안일을 돌보지 않았으니 (余出家逗遛於數年不顧家事) 자식된 도리를 다하지 못한 것이네 (固然不似子道也) 광팔이 자네가 형 대신 집안을 돌보고 있으니 다행이라 하겠네 (汝光八兄代任齊家爲之幸矣) 우리가 왜군과 함께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이라네 (與之倭軍屢日戰之所以報恩之冡也) 그러나 형편이 극히 어려워 (然而事勢極難故)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 (天衾地席之苦楚則不可狀也)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 (囊者遣財多少要需之) 사정이 어려워져 또 한 번 돈과 비단을 청하니 살펴 주길 바라네 (近況極甚於前故更請錢帛此便通察付送之) 또한 매우 급한 일이라네 (燋眉之急也) 죽고 사는 것은 나라의 운명과 함께하는 것일세 (死生縣命國運) 뒷일은 자네에게 부탁하겠네 (後事所託於昆弟) 예를 갖추지도 못했네 (摠摠不備禮) 갑오년 늦가을 형 광화 (甲午 晩秋 兄 光華) 이 편지는 1894년 전라도 나주에서 동학농민군으로 활동한 접주 급의 지식인 유광화(劉光華)가 고향 집에 있는 동생 광팔(光八)에게 보낸 한문 편지이다. 유광화는 1858년 4월 15일 나주 다도에서 출생한 인물로, 유몽렬과 김해김씨 사이에서 첫째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효성이 지극해 부모를 봉양하는데 온힘을 다했으며, 학문에도 정진해 문장가로 이름을 날렸다고 알려졌으며 성격도 올곧아 불의를 용납하지 않았다고 한다. 유광화는 1894년 37세의 나이에 다섯 살 배기 아들과 갓 태어난 아들을 둔 아버지였음에도 동학농민혁명에 직접 참여하였다. 그는 동학농민혁명 2차 봉기 과정에서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를 거쳐 서울로 북상할 때 여기에 참여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의 동학농민군에 합류하였다. 유광화는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의 군수물자를 마련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1894년 여름부터 동학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 벌어진 나주 공방전이 광주에 근거지를 둔 농민군 지도자 손화중, 최경선의 지휘를 받아 진행되었다. 당시 유광화는 최경선 휘하의 광주 포에 소속되어 있었다. 최경선 부대에서 활약하였던 유광화는 9월 2차 봉기 때 전봉준과 함께 공주로 북상하지 않고 손화중․최경선 등과 협력하여 일본군의 해상상륙에 대비하였다. 공주로 북상하였던 전봉준의 주력이 패전하여 장성 갈재에서 해산하고 은신하게 되자, 광주의 손화중․최경선 부대도 1894년 12월 1일에 군을 해산하고 철수하였다. 이때 유광화도 최경선과 함께 남평을 점령하고 화순으로 이동하였으나, 12월 10일 화순 도곡에서 관군의 추격을 받아 전사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유광화가 동생 광팔에게 보낸 이 편지는 전투가 진행되던 1894년 10∼11월경(늦가을)에 보낸 것으로 추정된다. 급한 전쟁의 상황에서 동생에게 보낸 유광화 편지는 비록 짧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으나 당시의 상황을 알려주는 중요한 기록으로, 위기에 빠진 나라를 구하기 위해 앞장서서 일어났던 농민군의 군자금 모금 상황 등이 잘 반영되어 있다. 또한 편지에서 ‘나라를 위해 자신이 가사를 돌보지 않고 몸을 바친다.’는 뜻을 거듭 드러내고 있어, 당시 농민군 지도자들이 어떠한 의식을 갖고 혁명에 참여하였는지를 알려주고 있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동학농민군의 몇 안 되는 기록 중 하나로, 한문으로 작성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유광화는 유교적 또는 성리학적 사상을 가지고 있는 지식인이었다. 유광화와 같이 농민들이 주를 이루었던 동학농민군에도 상당수의 지식인들이 참여했을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생사가 오가는 전쟁통에서 쓰인 짧은 편지이지만, 자료에 드러난 내용을 통해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들의 실제 상황을 구체적으로 알 수 있다. 편지에서 유광화가 혁명에 직접 참여하며 집에 있는 동생에게 활동 자금을 보내달라고 하여 당시 농민군들은 모자라는 활동 자금을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경우가 많았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는 전쟁 중에라도 부호를 약탈하거나 민폐를 끼치지 않기 위한 농민군의 합리적인 방편이었을 것이다. 전에 보내 준 얼마간의 재물은 유용하게 썼다네.’의 표현을 통해 유광화는 이전에도 동생에게 재물을 조달받은 적이 있었음을 보여준다. 동학농민군은 최대한 자신들이 구할 수 있는 방안을 마련해 자발적으로 제공하도록 하는 등 매우 합리적인 방법을 강구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편지 내용 중 ‘왜군과 오랫동안 싸우는 것은 은혜에 보답하고자 함’ 이라는 표현은 당시 동학농민군의 항일의지가 얼마나 강했던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이와 함께 ‘하늘을 이불삼고 땅을 자리 삼는 고초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네.’라는 표현에서는 당시 어려운 상황에 처해 있는 농민군들의 상황을 단적으로 느끼게 한다. 동시에 유광화라는 사람이 얼마나 문학적인 감수성을 지니고 있었던 인물이었는지도 짐작케 한다. 일본군과의 전투를 앞두고 하늘을 이불 삼고 땅을 자리 삼을 수밖에 없었던 당시 동학농민군의 절박하고 애통한 마음이 고스란히 잘 표현되어 있다. 짧은 편지이지만 동학농민혁명의 현장을 생생히 전해주고 있다. <동학농민군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군이 동학농민혁명 전투과정에서 직접 작성한 편지 원본이라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물 중 대표성을 지니고 있다. 이 편지는 1995년 전남대 이상식 교수의 소개로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으며, 유광화의 후손이 2021년 기증하여 현재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이 편지는 2022년 문화재청의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으며, 2023년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될 때 대표적인 기록물로 목록에 포함되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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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23 14: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①연재를 시작하며

“동학농민혁명은 부패한 지도층과 외세의 조선 침략에 대항하여 정의롭고 평등한 사회를 건설하기 위해 민중이 봉기한 사건이다. 이 과정에서 동학농민군은 집강소라는 민-관 협력 거버넌스 체제를 설립하는데 성공했고, 이를 통해 부패한 관리를 처벌하고 부당한 관행을 바로잡을 수 있었다. 이러한 형태의 거버넌스는 당시 세계 어느 곳에서도 찾아볼 수 없었던 민주주의의 새로운 실험이었다. -중략-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민중이 역사의 주체가 되어 보편적 가치를 달성하고자 전진시켜나가는 역사적 과정을 보여주는 기억의 저장소이다.”(세계기록유산 등재신청서 내용 중) 2023년 5월 10일, 프랑스 파리에서 개최된 제216차 유네스코 집행이사회는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을 유네스코(UNESCO)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하기로 최종 결정했다. 조선 백성들이 주체가 되어 자유, 평등, 인권의 보편적 가치를 지향했던 세계사적 중요성을 인정받게 된 것이다. 등재된 기록물은 총 185건이다. 동학농민군이 생산한 일기와 회고록, 유생들이 생산한 각종 문집, 그리고 조선 관리와 진압군이 생산한 각종 보고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동학농민군이 직접 생산한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농민군이 직접 작성한 편지를 비롯하여 그 최고지도자 전봉준이 작성한 글, 동학 교단의 최고지도자 최시형에 의한 각종 임명장, 그리고 이 사건이 끝난 뒤 동학농민군 자신이 직접 보거나 경험한 내용을 정리한 회고록 등이 있다.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민간기록물은 기록물 생산 주체에 따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사람들의 기록물’, ‘동학농민혁명 견문 기록물’로 구분된다. 1894년 당시 일부에서는 민보군(민병대)을 조직하여 직접 동학농민군 진압에 참여하였는데 그 과정을 일기로 작성한 것도 있고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직·간접적인 경험을 정리하여 발간한 문집 등이 포함되어 있다. 진압에 참여한 이유와 진압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동학농민운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던 사람들이 경험하거나 보고 들은 내용 등을 정리해 놓은 기록물도 있다. 대부분 일기체 형식으로 작성되었으며 후일 개인 문집으로 발간되었다. 조선 정부는 정부군과 지방 행정조직을 동원하여 동학농민군을 무력으로 진압하였다. 이 과정에서 생산된 기록물에는 정부의 논의과정, 진압군이 직접 작성한 공문서와 보고서, 진압에 참여한 사람들의 명단, 체포되어 재판을 받은 동학농민군의 판결문 등이 포함되어 있다. 특히 동학농민군 최고 지도자인 전봉준의 재판기록은 동학농민군의 지향과 인식을 알 수 있는 중요한 기록물이다. 이들 기록물들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을 비롯하여 고려대 도서관, 국가기록원, 국립중앙도서관, 국사편찬위원회, 서울대 규장각 한국학연구원, 연세대 학술문화처, 천도교 중앙총부,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독립기념관, 고궁박물관, 천도교 중앙총부 등 여러 기관에서 소장 관리하고 있다. 전북일보는 동학농민혁명 130주년을 맞아 2023년 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의 가치와 의미를 들여다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사장 신순철)과 공동으로 기획한 이 연재물은 등재된 185건 기록물 중 50건을 선정하여 독자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소개할 예정이다. 대상 기록물은 동학농민군 기록물 10건, 민간진압 기록물 9건, 민간견문 기록물 6건, 조선정부 기록물 25건이다. 현재 국가 지정 문화재로 등록된 관련 기록물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소장 <유광화 편지>와 <한달문 편지>, 고궁박물관 소장 <갑오군정실기> 등 3건이 있다. 동학농민군 자신이 작성한 <한달문 편지>는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여 체포된 한달문이 나주 감옥에서 고향 집의 어머니에게 구명을 요청하면서 보낸 편지다. <유광화 편지>는 동학농민군 유광화가 동생에게 보낸 편지로, 그는 “나라가 환란에 처하면 백성도 근심해야 한다”라고 주장하였다. 두 사람은 모두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갑오군정실기>는 동학농민군 핵심 진압부대인 양호도순무영의 설치부터 폐지까지 각급 기관과 주고받은 공문과 보고서를 모아 놓은 기록이다. 최근에도 가치가 충분한 여타 기관이 소장한 새로운 자료들도 적지 않게 발굴되었다. 이 기획에는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를 비롯해 배항섭(성균관대) 김양식(청주대) 조재곤(서강대) 왕현종(연세대 교수) 유바다(고려대) 교수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이병규 연구조사부장과 전동근 선임 연구원이 필진으로 참여한다. 이 연재를 기회로 개인 소장 자료를 비롯, 앞으로 전면적인 자료의 심층 조사와 발굴정리 작업이 보다 활발히 추진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조재곤 서강대 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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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5.16 15: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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