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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4) 경각영공급기, 소지등서책, 민장초개책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1894년 10월~11월 동학농민군 토벌에 참여한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 등 각 부대에 공급한 물자들을 기록해 놓은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5×26cm이며 전체 15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 〈친군경리청장졸성책(親軍經理廳將卒成冊)〉, 〈선봉진대장진배행장관좌목(先鋒大將陣陪行將官座目)〉, 〈친군장위영장졸실수성책(親軍壯衛營將卒實數成冊)〉, 〈교도소출주장병성책(敎導所出駐將兵成冊)〉, 〈본진별군관차출기(本陣別軍官差出記)〉, 〈창의인명록(倡義人名錄)〉, 〈물금첩기(勿禁帖記)〉, 〈죄인록(罪人錄)〉 등과 함께 〈각진장졸성책(各陣將卒成冊)〉으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는 경리영, 순무영, 장위영, 선봉진 등 동학농민군 토벌에 직접 가담한 각 부대의 비용명세서를 기록한 것이라 볼 수 있다. 〈경각영공급기(京各營供給記)〉에 따르면 갑오년, 즉 1894년 10월 16일 전(錢) 100냥을 일본영사관 종사관 김주사(金主事)에게 지급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당일 기록에는 일본군 출진 시 들어간 비용과 호궤(犒饋), 일본 사관 접대비, 이인 전투 출병 중앙군과 일본군에게 50냥을 지급하고, 능치 전투 당시 30냥을 지급한 사실 등 동학농민군 진압 부대의 비용 지출 내역 등이 들어 있다. 이날 지불한 총 비용은 1,267냥 6전 4푼이었다. 10월 21일부터 11월 7일까지는 경리영(經理營) 799명에게 3,487냥 6전 5푼을, 10월 25일부터 11월 7일까지 순무영(巡撫營)에 325냥 5전을, 통위영에 776냥 3전 8푼을 지급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10월 28일 하루 장위영(壯衛營)에 1,766냥 3전을, 10월 20일부터 27일까지 선봉진(先鋒陣)에 59냥 2전 5푼, 도합 7,682냥 7전 2푼을 지급하였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군 토벌에 나선 조선의 중앙군, 즉 경리영(經理營), 순무영(巡撫營), 장위영(壯衛營), 선봉진(先鋒陣)에서 사용한 비용을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동학농민혁명 제2차 봉기 과정에서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에 이르기까지 민인(民人)의 소지(所志) 등을 모아 등서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2cm이며 전체 6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는〈언문선유방문(諺文宣諭榜文)〉, 〈고시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京軍與營兵以敎示民)〉, 〈공주창의소의병장이유상상서(公州倡義所義兵將李裕尙上書)〉, 〈충청도공주정안면봉엄화촌대소민등정(忠淸道公州正安面鳳嚴花村大小民等呈)〉, 〈전봉준상서(全琫準上書)〉,〈동학당공초(東學黨 供招)〉 등과 함께 〈선유방문병동도상서소지등서(宣諭榜文並東徒上書所志謄書)〉로 합본되어 1996년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실렸다. 이 중 〈고시 경군여영병이교시민(告示 京軍與營兵以敎示民)〉은 전봉준이 동도창의소 명의로 공주전투에서 노성으로 후퇴한 뒤 관군과 이교(吏校), 그리고 시민(市民), 즉 시장의 상인들에게 척왜척양(斥倭斥洋) 전선에 동참해 줄 것을 호소한 글이다.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이 작성된 시기는 1894년 11월부터 1895년 1월까지이며 그 대상지역은 충청도 및 전라도 지역이다. 월일 순으로 기재되어 있다. 1894년 11월 16일 충청도 공주 산하면 두민(頭民)이 수상한 자 10명을 기찰 체포하여 선봉진에 압송한 내용부터 시작한다. 제2차 봉기 이후 패퇴한 동학농민군들을 전국 각지에서 토벌하는 상황을 자세히 알 수 있다. 12월 3일에는 동학농민군으로 추정되는 도인(道人) 수백 명이 전라도 장성군 북이면 금량리 마을에 난입하여 음식과 돈을 탈취하였다. 장성에서는 4월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대관(隊官) 이학승(李學承)과 병정들의 시신을 김중길(金仲吉)이 묻어주었다가 동학농민군에게 곤욕을 치르기도 하였다. 장성의 아전 박전성(朴銓誠)도 500냥의 돈을 출연하여 황룡촌 전투에서 전사한 병정들의 초상을 치르는 데 보태기도 하였다. 한편 장성 북이면 백암구리에서는 접주(接主)라고 일컫는 유동근(劉東根)을 두고 그곳의 유생들이 오로지 동도의 폐단을 막고자 노력하였으나 선처해 달라는 소지(所志)를 올리기도 하였다. 이렇듯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에는 동학농민군을 소탕할 때 옥석(玉石)을 분간해 달라는 소지(所志)들이 많이 수록되어 있다. 물론 장성 북하면의 동학 대접주인 손덕수(孫德秀)와 만화동의 접주 신재일(申在一)을 체포하였으니 이를 처리해 달라는 소지(所志)도 있다. 그밖에 민인(民人)이 동학농민군의 강요로 양곡을 주고 담배 등 물자를 공급해 주고 강제로 인원이 동원된 사연을 적고 처벌을 완화해달라는 호소가 실려 있다. 또 마을 사람들이 동도를 잡아 바치면서 그 포상을 요구하는 내용도 있다. 한 건마다 끝에는 조치를 내린 제사(題辭)가 기록되어 있다. 이 〈소지등서책(所志謄書冊)〉은 단편적이기는 하나 당시 향촌의 여러 사정과 동학농민군 토벌상, 그리고 관군의 조치를 잘 알려준다. 따라서 이와 관련 기록이 희귀한 처지에서 아주 소중한 자료라 할 수 있다. △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 〈민장초개책(民狀草槩冊)〉은 1894년 8월 전라도 보성군에서 작성한 것으로 각 면별로 백성들이 올린 소장(訴狀)과 그 처리 결과를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3cm이며 전체 60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이 자료에는 보성군 용문면, 옥암면, 백야면, 노동면, 미력면, 겸어면, 봉덕면, 복내면, 문전면, 율어면, 송곡면, 조내면, 대곡면, 도촌면 주민의 민원 관련 소장들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는 내용은 잘 보이지 않지만 그 당시 향촌 사회에서 주민들이 접한 피폐한 생활상과 그 과정에서 발생되는 다양한 민원과 지방관의 처리 방안 모색에 대하여 살필 수 있는 자료이다. 향교 집강(執綱)의 결전 납부 독촉, 영저리(營邸吏)의 진상가 배정, 가옥매매, 전세(田稅), 진결(陳結) 징세, 벌전(罰錢), 위토 투매, 결세전의 초과 징수, 소작 관련 처분, 산송(山訟) 관련, 답권(畓券) 위조, 가족 간 재산분배, 고공전(雇工錢) 등 주민 토지 매매와 금전 수수와 채권 채무 관계 분쟁 등에 관한 내용들이 수록되어 있다. 이 외에 호포(戶布)와 동포전(洞布錢) 및 잡역 경감 청원, 세금 미납자와 음주 행패를 비롯한 고을 내의 부랑패류의 처리, 무고, 투장(偸葬), 과부 탈거, 노인 모욕, 잡역(雜役)에 대한 불만 등 보성군 관내 각 면과 리 별로 다양한 사항을 이해할 수 있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을 겪으면서 보성군이 겪은 사회적 변화를 알 수 있게 하는 소중한 자료이다. 유바다 고려대학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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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7 11:2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3)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은 전체 185건이다. 이중에서 낱장으로 된 문서도 존재한다. 이번에는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는 <오면재 통유문>, <구본협 상서>, <박근순 소지> 등 낱장의 문서를 소개하고자 한다. 이 문서들은 1894년 8월 또는 12월에 작성된 것으로 주로 동학농민군에 반대편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정당화하기 위해 지역민에게 보내거나 관에 제출한 문서들이다. 이 문서들을 통해 당시 유교적 소양이 있는 지식인들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인식과 대응방식, 그리고 지역 상황 등을 알 수 있다. 오면재 통유문.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 오면재(吳勉宰) 통유문(通諭文) 이 문서는 전라도 능주군(현 화순군) 오면재(吳勉宰, 1825~1900)의 통유문(通諭文)이다. 이 문서는 3건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양면 괘지 3쪽을 이어 붙여 양면에 필사한 것이나 중간에 누락된 부분이 있다. 맨 앞에 기록된 문서는 <갑오동요통유문(甲午東擾通諭文)>이다. 서두에 오면재의 이름이 있으나, 뒤에 기록된 글의 명의는 그의 아들인 향약장 오준상(吳晙庠) 외 42명의 이름으로 되어 있다. 뒷면에는 단발령에 반대하는 내용의 문서가 제목 없이 수록되어 있고 말미에는 <호암면향약소회맹문(虎巖面鄕約所會盟文)>이 있다. 문서의 형태로 보아 3건 문서의 필자는 오면재이고 후에 누군가가 필사한 것으로 보인다. 통유문은 갑오년(1894년) 8월 작성된 것으로 되어 있다. 오면재가 보낸 통유문의 내용은 능주 호암면 백성들에게 호소하는 내용으로 농민봉기에 대해 매우 논리적인 반박을 가하면서 전통적인 유림들의 충군애민 정신에 바탕하여 동학농민혁명 가담자를 회유하는 내용이다. 주된 논점은 동학도들의 봉기 원인은 관아의 수탈과 억압, 그리고 굶주림에 분개한 것이며 그들은 농민봉기가 성공하기 어려운 이유로 대오의 군기 문제와 무기의 빈약, 식량 부족 등 3가지를 들고 있다. 오면재는 다음과 같이 지역민들을 설득하고 있다. “그대들은 모두 이 나라에 태어나서 우리 임금의 백성 아닌 자가 없다. 집안을 화목하게 하고 처자식에게 자애롭게 해야 하는데 오늘날 이런 일을 저질렀으니, 천하에 나라가 수없이 많지만 의리 때문에 군신(君臣) 관계를 해치는 일이 있다는 말은 듣지 못하였다. 의로써 분별해 보건대, 오직 저 비류(匪類)들이 교화되지 못하고 창궐한 것은 큰 횡액을 틈타 조삼모사(朝三暮四)의 술책을 맘껏 부리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 결과 위로는 정사에 여념이 없는 임금께 걱정을 끼치고, 아래로는 백성을 침탈하는 해악을 자행하여 관가에서는 명령을 시행하지 못하고 백성은 안도하지 못하니, 무릇 혈기가 있는 자라면 누군들 분개하고 탄식하지 않겠는가.” 오면재는 성리학을 기반으로 구축된 조선왕조 체제와 사회질서가 무너져서는 안된다는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그러한 인식의 기반하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전혀 인정할 수 없는 것이었다. 오면재는 현재의 불안정한 상황은 동학농민군이 분수를 알지 못하고 준동하였기 때문이라고 인식하고 있다. 당시 많은 유교지식인의 일반적인 인식의 정도를 보여주고 있다. 다음으로 제목 없이 낙장된 글은 일자가 기재되지 않았으나 단발령에 반대하는 글이 포함되어 있다. 이 내용은 1895년 이후에 작성된 것으로 보여진다. 마지막으로 <호암면향약소회맹문>은 그 내용으로 보아 1904년 한일협약 이후에 봉기한 의병의 해산을 요구하는 내용이다. 면암 최익현이 쓴 오면재의 묘갈명(면암집)에 의하면 오준상은 오면재의 큰아들이다. △구본협(具本協) 상서(上書) 이 문서는 1894년 12월 전라도 능주군 한천면의 구본협, 구익모, 구혁모, 구전모, 구정모, 구달모, 구길모 등이 초토사 민종렬에게 올린 상서이다. 이 상서는 능주군 한천면에 향반으로 거주하는 구씨 문중이 호남 초토사인 민종렬에게 자신들이 동학농민혁명 당시 본분을 꿋꿋하게 지켰음을 말하고 보호를 요청하려 올린 문서이다. 이들은 1893년 봄부터 동학에 대응해서 향음주례(鄕飮酒禮)를 거행하고 향약(鄕約)을 실천하였으며 자신들이 이단을 배척하는 유학도임을 천명하면서 특별히 보호해 줄 것을 호소하고 있다. 이들은 상서에서 “그래서 이듬해 흉험한 저 동학 무리들이 대대적으로 들고 일어났을 때 비단 본면의 인사들이 삶과 의 가운데 어느 쪽을 택할지에 대한 판단을 일찌감치 내렸을 뿐만 아니라 저 무리들 또한 우리들을 협박해도 굴복시킬 수 없고 꾀어도 유인되지 않을 것임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때문에 본읍의 충신의 의에 충실하던 이들을 물들여 인류(人類)를 단숨에 쓸어 없애려 하여 저희들의 거처에까지 화가 미치니 저희는 도망쳐 떠돌며 갈 곳도 없이 지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긴 밤이 찾아들고 단단한 얼음이 언 것과 같았으니 그 누가 이를 위해 큰 자비를 베풀어 거센 파도를 막겠습니까? 다행히도 우리 합하께서 정성을 다해 나라에 보은하고 마음을 다해 백성을 보살피며 바름을 붙들고 이단을 배척하는 것을 자신의 소임으로 삼아서 보루를 견고히 하고 적도들을 사로잡아 그 옛날 강회(강회)의 보장(堡障)이 아름다운 명성을 독차지하게 두지 않으신 덕에 뭍과 물에 도사리던 짐승들이 안개 걷히듯 사라졌습니다. (중략) …… 삼가 바라건데 합하께서는 중한 말씀을 아끼지 말아서 이 면의 규약이 오래도록 후세에 징험이 되게 해주소서. 천만 축원합니다. 분부를 내리실 일입니다. 초토사 합하는 처분에 주소서.”라고 하였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능주는 본래 의관 갖춘 선비의 고장으로 선비들이 모두 제사를 지내고 집집마다 모두 글을 외니 비록 까닭 없이 어지러운 시기를 만났으나 저들의 더러움에 물들지 않았음을 이미 흠모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삼가 여러 군자들에게 크게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답해 주었다. <구본협 상서>는 우선 문중에서 작성했다는 특징이 있다. 문중 차원에서 문중을 보호하고 지역적 영향력을 확보하기 위한 차원에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해서 제출했다고 보여진다. 내용에 따르면 그들은 동학에 대해서 동조하지 않고 적대적이었으며 동학농민군을 피해 도망쳤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에서 합하 즉 민종렬 초토사가 이들을 척결한 것에 대해 대단히 감사하다는 것을 피력하고 있다. 그리고 말미에 자신들이 만든 규약을 인정해 달라고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민종렬 초토사는 인정한다는 취지의 답을 해주고 있다. 이 상서를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1894년 당시 조선사회가 동학농민군이 대규모로 농민봉기를 일으키는 상황이었지만 한편으로 기존 질서를 지키고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사회시스템이 작동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향촌사회 단위 또는 문중 단위에서 관과 유기적으로 관계를 형성하고 이를 시스템화했다고 보여진다. 특히 동학농민혁명이 실패한 1894년 11월 이후 이러한 시스템은 더욱 강고해졌다고 할 수 있다. 박근순 소지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박근순(朴根洵) 소지(所志) 이 문서는 1894년 12월에 수곡리의 박근순, 한기조, 성하주, 강석중, 하룡팔, 양익원, 유의영, 김기순, 성경구, 하현원 등 10명이 진주목사에게 올린 소지이다. 진주목 관할 아래에 있는 수곡리의 주민들이 관군과 일본군이 진주와 하동 일대에서 농민군을 공격할 때 물자를 협조한 일이 있었다. 이곳 농민군들은 1894년 여름 수곡장터에 모여 대대적인 집회를 가지고 진주목을 점령하려 했다. 그때 부산에서 통영으로 상륙한 일본군과 경상감영의 판관인 지석영이 이끌고 온 감영군이 합동으로 농민군 토벌에 나서 하동 고성산성에서 접전을 벌였다. 이때 농민군 수백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런데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뒤 그 경비의 분담금을 두고 수곡리(현재 경상남도 함안군 군북면)와 이웃 마을인 북평리(현재 경상남도 고성군 개천면) 사이에 분쟁이 일어난 것이다. 수곡리에서 북평리에 비용 중 절반을 분담할 것을 요청하였으나 북평리에서 ‘전례없는 규례이다’라고 하면서 거부하였다. 이에 대해 수곡리에서는 진주목사에게 이를 해결해 줄 것을 강력하게 요청하고 있다. 이에 대해 진주목사는 “과연 힘을 합쳐 방어하였으니 방어할 때 들어간 비용은 나누어 담당하는 것이 옳지만, 그 외 다른 비용은 절대 침탈하지 말도록 면에서 일괄적으로 기별할 일.”이라고 하여 수곡리의 입장을 들어 일부 주었다. 이 소지문을 통해 알 수 있는 것은 우선 경상도 남서부 지역에서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활발하였다는 것이다. 이 문서를 통해 보면 경상도 진주, 하동, 함안, 고성 지역까지 동학농민군의 활동이 있었고 이에 대해 향촌 사회 단위로 동학농민군에 대응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 문서에서 특히 주목되는 점은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비용을 조선정부가 담당하는 것이 아니라 조선의 백성들이 담당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소요되는 비용을 지역별로 할당하고 자체적으로 담당하고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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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5.02 11:4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2) <오통절목> <향약장정> <향약안> <제천향약절목>

이 잡듯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라 동학농민혁명을 일본군과 연합하여 철저히 무력으로 진압한 정부는 해산한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단속하고 사회 기강과 질서를 통제할 목적으로 오가작통법과 향약을 재정비하고 전면적으로 시행하였다. 그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들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되었는데, 그 중에 하나가 이번에 다루는 <오통절목>, <향약장정>, <제천향약절목> 등이다. <오통절목>은 1894년 12월 완산(完山) 초안국(招安局)에서 목판 인쇄한 것이다. 작성자는 관찰사 겸 위무사로 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이 기록물은 전라관찰사가 전주에서 인쇄, 전라도 각지에 배포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오통절목>을 통해 동학농민군을 색출하도록 한 전라도관찰사는 바로 이도재이다. 전라도관찰사 이도재가 추진한 오각작통법 시행 목적은 비적, 즉, 동학농민군을 토벌해서 양민들을 편안케 하기 위함이었다. 이는 해산한 동학농민군이 귀가하거나 마을로 잠입하였을 경우 일일이 색출하여 처형하기 위해 시행한 것이다. 그를 위해 5가구마다 통수(統首)를 두고 25가구마다 연장(連長)을 두어 서로 검속(檢束)하여 살피도록 하였다. 만약 한 마을의 가구수가 25가구가 안될 경우, 10가구 이하는 합하여 1리로 만들고 10가구 이상은 1연으로 만들도록 하였다. 연장은 해당 마을에서 관아에 보고하여 임명하고, 통수는 연장이 선정하였다. 5가작통은 모든 주민들을 대상으로 하되, 만약 작통에 들어가지 않으면 비적의 무리로 간주하여 논죄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빈집 역시 통에 넣되, 집주인이 3개월 동안 돌아오지 않는 집은 연장이 관아에 보고하여 가난하여 집이 없는 주민에게 주도록 하였다. 또한 통을 편제할 때, 다른 지역에서 이주한 주민은 어느 지역에서 왔는지 기존에 살던 집 주인은 어디로 이사를 갔는지 모두 기록하도록 하였다. 심지어 산의 움막 토굴 사찰 등과 같은 곳도 가까운 마을에 소속시키고 똑같이 규찰하도록 하였다. 오가작통을 통해 단속할 대상은 정황과 행적이 의심스러운 자, 비적(동학농민군)의 부적과 주술을 지니거나 외우는 자, 무기나 풍물・깃발 등을 감추거나 버리는 자, 그것을 알고서도 보고하지 않는 자, 수상한 자를 숨겨주는 자, 비적의 우두머리가 숨어 있는 곳을 알고도 보고하지 않는 자, 관아의 명령없이 사적으로 서로 모이는 자, 사적으로 통문을 돌리는 자, 하룻밤 이상을 출타할 때 통수에게 보고하지 않고 출입하는 자 등 매우 광범위하였다. 오가작통을 통해 해산한 동학농민군을 이 잡듯이 단속함은 물론 다시 재발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촘촘히 마을을 통제하였음을 알 수 있다. 더욱이 통 내에서 한 집이 법을 어기면 나머지 네 집이 똑같이 연대책임을 지도록 하여 상호 감시하도록 하였다. 향약장정(鄕約章程)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향약장정>은 <오가절목>과 마찬가지로 1894년 12월에 완산 초안국에서 목판 인쇄한 것이다. 관찰사 겸 위무사 명의로 간행된 것으로 보아, 이것 역시 오가작통법과 함께 향약 시행을 통해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고 사회를 통제하기 위할 목적으로 작성된 것이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규장각, 미국 컬럼비아대학교 도서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향약장정> 내용은 향약 시행 규칙으로, 향약사목을 제시한 뒤 향약 덕목을 나열해 놓았다. 향약 시행 규칙은 모두 13조항으로 구성되어 있다. 1읍에는 연장자로 덕망이 있는 자로 도약정(都約正)을 뽑고, 1면에는 약정과 직월 각 1명을 두고 평민 가운데 한 사람을 면장(面掌)을 삼도록 하였다. 면장 외에는 모두 관에 보고하여 지방관이 임명하도록 하여, 사실상 향약이 자치규약으로서의 본래 성격에서 벗어나 관의 향촌 지배수단으로 활용되었다. 그리고 읍과 면에는 각각 회원명부를 두되, 반상을 구분하도록 하였다. 신분 차별을 둔 것이다. 향약 운영은 매년 춘추로 향교에 모여 강약(講約)하였고, 향약 덕목은 전통 그대로 덕업상권, 과실상규, 예속상교, 환난상휼 네 덕목으로 기존의 전통적인 덕목 내용과 큰 차이가 없었다. 그러나 과실상규 내용을 보면, 최근 동학과 불학(佛學)의 무리들이 기도를 하고 주문을 외우는 등 사회질서를 어지럽히고 있으니 철저히 규찰하도록 하면서,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향약 모임에서 벌을 주도록 하였다. 벌은 엄중한 경우 관에 보고하여 엄히 징계하고, 경미한 경우 5에서 20대의 태형을 가하도록 하였다. 이와 같은 <향약장정>은 전라도관찰사가 전주에서 목판 인쇄하여 전라도 각 지역에 일괄 배포한 것으로 보아, 전라도 전 지역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실제 전주 북일면에서 시행된 동종의 <향약절목>이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좌목(座目)>에 들어 있음). 향약이 철저히 관 주도로 이루어졌고, 동학농민혁명을 수습하고 동학농민군을 단속하기 위한 사회통제책으로 활용되었다. 향약안(鄕約案)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향약안>은 향약안서, 방수안서(防守案序), 단자, 능주 유생등 상서, 서간문 등이 필사되어 있다. 1895년 초에 능주에 사는 어느 유생이 작성한 것으로 보인다.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에 소장되어 있다. ‘향약안서’는 일반적인 내용으로 채워져 있으나, 전라도관찰사가 시행하도록 한 향약이 능주에서도 시행되면서 작성된 것으로 보인다. ‘방수안서’ 역시 위정척사를 위해 적당을 방수하겠다는 글이나, 구체적인 내용이 없다. 다만, 을미년에 작성된 단자와 능주 유생들의 상서 등은 초토사 앞으로 보낸 것으로, 능주 방수장(防守將) 전 우후 박종규(朴鐘圭)가 수성군을 조직해 장흥 동학농민군 수백명과 광주 동학농민군 50여명을 격퇴하였을 뿐 아니라, 나주에서 패한 동학농민군이 능주에 들어오자 접주 등을 체포해 나주에 압송시킨 공이 있다고 하면서, 포상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또 다른 단자는 향약 시행과정에서 임원 관련 내용이다. 기타 서간문이 필사되어 있다 이것으로 보아 <향약안>은 실제 능주에서 1895년초 향약 시행과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이 진압된 이후 향촌사회의 움직임을 엿볼 수 있는 기록물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다. <제천향약절목>은 충북 제천에서 시행하였던 향약절목이다. 작성시기는 1894년 6월이며 제천현감 관인이 찍혀 있다.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1905년 3월 제천향약 임원도 메모되어 있다. 내용은 일반 향약절목처럼 향약서, 향약범례가 나열되어 있으며 제천 8개면을 대상으로 시행되었다. 임원은 도약장, 면약장, 동약장, 통수 등으로 구성하며 관의 통제를 받도록 하였다. 특이한 점은 향약과 오각작통법이 결합되어 있는 점이다. 오각작통을 통해 향촌사회를 촘촘히 감시하도록 하였다. 만약 향약을 준수하지 않으면 마을이나 면약장이 다스리되, 중한 경우에는 관에 보고하여 처벌하도록 하였다. 수상한 자는 절대로 마을에 들이지 말고 그 성명을 관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특히 각 통마다 밀통군(密通軍) 5명씩을 뽑아 윤번으로 마을을 단속하도록 한 점이다. 단속 대상 가운데는 적당(賊黨)을 강조하였는데, 이는 당시 정황을 놓고 볼 때 사실상 동학농민군을 염두에 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동학농민군 예방 차원에서 제천향약이 시행된 것으로 보이나, 그 즉시 성과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제천지역은 6월경부터 들고일어난 동학농민군이 7-9월 거의 장악한 상태였으나, 일본군이 충주지역으로 진입한 10월부터는 상황이 역전되었다. 제천 민보군도 조직되어 동학농민군의 근거지를 초토화하는 한편, 전봉준과 함께 재판장에서 사형을 받은 성두한의 아버지, 아내, 아들을 차례로 체포하여 제천관아에 수감시키기도 하였다. 이것으로 보아 제천향약은 비록 즉시 효과를 보지 못하였을지라도 제천 민보군 활동의 기반이 되었을 뿐 아니라,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이후 제천 향촌사회를 통제하는 강력한 수단으로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김양식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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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23 18: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1) 〈검사직제〉〈보방조례조회통첩식〉〈전주부보고서〉〈각부보고서〉

1895년 이후 동학농민군에 대한 법적 조치와 처벌 보고서류 이번에 소개할 자료는 1895년(고종 32) 조선 정부의 공문서식과 재판 관련 자료로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동향과 관련된 전국 각 지역의 각종 보고서이다. ①〈검사직제〉는 1895년 4월 15일 법부령 제2호로 반포된 검사(檢事)의 직제(職制)에 관한 규정을 적은 책이다. 〈검사직제 제정지건〉(1895.4.9.)으로 기안문이 실려 있다. 검사직제는 모두 18조목으로 검사의 범죄 수사권(1조), 형사상 법률의 정당한 적용을 감시해야 하며(2조), 범죄의 고소·고발을 수리해야 하며(6조), 관리의 부당한 행위를 발견하면 증거를 수집하여 관리징계처분을 청구하고 공소(公訴)를 제기해야 하며(7조)‚ 체포나 구류를 마음대로 행하는 자가 없도록 주의하고‚ 피고인이 오래 구류됨이 없도록 주의해야 하며(8조), 검사는 재판소에 대하여 독립하여 그 사무를 행할 수 있다(18조) 등으로 되어있다. 원래 기안에서는 17조였으나 달라진 것은 제4조를 추가했기 때문이다. “검사는 사형판결이 이미 확정할 시에는 조속히 소송기록을 법부대신에게 정(呈)하여 그 지휘를 수(受)해야 이를 집행함이 가(可)하니라”라는 조항이다. 검사직제는 갑오개혁 때 중앙권력이나 지방관의 통제로부터 독립하여 오로지 법에 준거하여 민사·형사사건을 처리하기 위해 도입되었다. 갑오개혁의 법제개혁은 행정과 사법을 분리하여 공정한 법집행을 도모하는 것이었으나 실제 전격 실시하기 어려웠으므로, 이내 1895년 6월 1일 법부훈령 제2호로 당분간 관찰사가 재판소 판사, 참서관이 재판소검사를 겸임하도록 하고 각지방에서도 군수가 관내 재판사무를 겸임하도록 하여 재판소 제도가 크게 후퇴한 바 있었다. 갑오개혁 이후 근대적 소송절차와 법부와 검사의 직제를 규정한 법령으로 대한제국기에도 영향을 끼쳤다. ②〈보방조례조회통첩식〉는 1895년 사법제도를 개혁하면서‘보방조례(保放條例)’와 각 정부기관 사이에 왕래하는 문서 양식을 분류하고 설명한 ‘조회통첩식(照會通牒式)’등 제반 법규 규정을 수록한 자료다. <보방조례>는 전문 25개조로 형사 피고인과 그 보증인될 사람은 언제라도 보방(保放-보석)을 신청할 수 있으며‚ 재판관은 피고인이 도주하거나 죄증(罪證)을 은닉할 우려가 없을 때, 그가 중죄(重罪)에 해당하거나 과거에 중죄형으로 처벌받은 적이 없는 경우에 한하여, 보방을 허가할 수 있다는 규정을 수록하고 있다. 실제 동학농민군의 처벌과 관련해서는 이 규정이 적용되었을 가능성은 거의 없었다. 또한 자료의 뒷부분인〈공문류별급식양〉은 갑오개혁 이후 새로 제정된 공문 양식인 조회·통첩·훈령·지령·고시·보고서·질품서·청원서를 각각 설명하고 작성 지침을 소개하고 있다. 갑오개혁이전의 관문 전령 감결(甘結) 하첩(下帖) 등을 훈령으로 개칭한 것 등이 설명되어 있다. 〈보고서식〉의 경우에는 “보고서 ○호, 본부소관 각군소유정형을 별지에 개록(開錄)하야 보고하오니 사조(査照)하시믈 요홈”이라 쓰고나서 해당 관원의 성명과 관인, 그리고 모부 대신 성명 각하 관인을 찍게 하였다. 새로 바뀐 공문서 문서양식에 따라 작성된 보고서가 각 지역의 보고서자료이다. ③〈전주부보고서(全州府報告書)〉는 1895년 7월 19일 전라도 관찰사 이도재(李道宰)가 법부(法部)의 훈령에 의거하여 올린 동학 농민군의 정배(定配)에 관한 보고서이다. 그해 6월 25일 법부에서는 임피현에 거주한 고장현(高長賢)을 함경도 영흥에 정배했던 경위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그는 1894년 7월에 임피군 남일면(南一面) 상갈영리(上曷零里)의 동학 접주로서 40명 동학군을 거느리고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하였다. 그로 말미암아 그는 체포되어 전주부로 압송되고‚ 1895년 3월에 함경도 영흥에 정배되었다고 보고하였다. 그 후 8월에 이르면,“본부죄인(本部罪人) 83명, 각읍 도인(徒人) 196명 등 279명” 등을 전격 석방하였다(〈관보〉1895년 8월 1일자 기사). 이때 고장현도 포함되었다. 전주부 보고서는 단지 전주부에서 작성한 2쪽짜리 문서이지만, 1895년 당시 동학 농민군 지도자에 대한 사후 처리 등을 알 수 있는 자료다. ④ 〈각부(各府) 보고서〉는 역시 법부에서 편찬한 각종‘보고서철(報告書綴)’이다. 1895년 7월에서 9월까지 전국 23부 지방에서 법부에 올린 보고서 13건과 질품서 5건 등 18건의 문건(文件)을 모아서 묶은 문서철이다. 전체 표지나 제목은 없지만, 편철한 순서대로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우선 해주부 관찰부의 사기 범인 압송 사실, 충훈부 둔토 수취 공문서 위조에 관한 안성군 보고, 개성인 김경구(金景九) 삼포사건에 대한 경무사의 보고서 및 질품서 등이 있다. 안동부 산하 예안(禮安) 거주 김제룡(金濟龍)이 참판이나 판서로 칭하면서 와언과 망설로 통문을 돌려 민인을 선동하여 취당을 한다는 내용으로 그에 대한 공초자료(1895.8.16. 초초. 및 8.17 재초)와 함께 주민들의 소장 전문을 게재하였다. 각 지방에서 올린 범죄인을 체포와 살인사건 조사 보고‚ 도주한 죄수 체포 및 책임자 처벌 등 다양한 사유가 포함되어 있다. 갑오개혁 이후 법부의 지시 사항과 각 지방의 질품서를 통해 당시 지방 법무 행정의 실태를 알 수 있다. 특히 주목되는 자료는 해주부 강령군수 유관수(柳灌秀)가 1895년 8월에 법부에 보고한 <강령군(康翎郡) 비괴(匪魁)의 성명 성책>이다. 강령군에는 김영하(金永夏), 오가인(吳可人), 오헌근(吳憲根), 오원경(吳元京), 현학진(玄學振), 조사여(趙士汝), 조붕도(趙鵬道) 등 동학의 접주와 해당 지역의 하리층인 조순승(曺舜承), 박선희(朴善凞), 성재식(成載植), 강호걸(强豪傑) 등 동학지도자 17명의 활동 내역을 자세히 적고 있다. 이들은 갑오년 10월 동도를 규합하여 황해도 8개 영읍을 점령하여 문부를 불사르고 군기를 탈취하고 공해를 깨트리고 불살랐다. 실제 강령현의 경우에는 1894년 10월 6일 농민군이 관아를 점령하는 과정에서 관아가 불타고 무기를 빼앗겼으며, 민가 400여 호가 불탔을 정도로 치열하였다. 이후 다음 해 1월에도 임종현, 김영하 등은 신천, 재령, 옹진, 강령 등을 재차 침입하였고, 해주성을 다시 공략하기도 하였다가 2월에 일본병의 개입으로 진압되거나 잠시 흩어졌다. 이후 사태를 진정시키고 나서 작성된 군수의 보고서에는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강령 및 해주 일대에서 행한 각종 행태를 상세히 열거하였다. 오원경, 배동명 등 일부 붙잡은 사람도 거론하였지만, 상당수는 잠적하여 신병을 확보하지 못한 상태라고 보고하고 있다. 또한 보고서의 내용과 관련해서 2차례에 걸친 해주성 공략의 주동 인물인 임종현(林鐘賢, 혹은 林宗鉉)의 활동도 주목된다. 임종현이“스스로 감사의 위치에 오르고 기타의 흉악한 무리를 각 부군현(府郡縣)의 수장으로 삼으려고 이미 부사와 군수로 할 인물을 선정하였다고 한다”고 보고하였듯이, 당시 임종현 자신을 감사의 위치로 올려놓고, 성재식을 강령현감으로 삼는 등 농민군 지도자를 각 지역의 부사와 군수 등으로 임명하는 행태를 보였다. 이는 황해도에서 갑오 정부의 지방행정체계를 배제하고 농민군 지도부 위주로 독자적인 지방권력을 실행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 강령 지방의 사회동향은 현재 동학농민혁명 재단에 소장되어 있는〈황해도 강령현민(康翎縣民) 등장(等狀)〉 자료에도 나타난다. 이는 황해도 해주부 강령현에 사는 정성장(鄭聖長) 외 4인이 법부(法部)에 현감 유관수의 억울함을 호소하는 내용인데, 강령 현감이 피감(被監)된 사유가 동학농민군의 피해 복구 비용의 징수 과정에서 탐학이 있었다는 이유였다. 이들의 주장에 의하면, “청렴 공정한 현감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인 오가인(吳可人)과 조카 오헌근(吳憲根)이 무고하여 누명을 썼으니 그 억울함을 밝혀 달라.”라고 하였다. 앞서 소개한 강령지방 동학농민군 지도자인 오가인과 오헌근의 죄상을 고발하는 내용과 맥락을 같이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참여자와 후속조치를 둘러싼 강령지역내 사회세력간의 갈등을 잘 보여주고 있다. 황해도 일대 동학농민군의 동향은 해주성 점령 당시 감사였던 정현석(鄭顯奭)의〈갑오해영비요전말(甲午海營匪擾顚末)〉과 일본군의〈동학당정토약기(東學黨征討略記)〉에 수록되어 있다. 일본군 진압기록에서도 ‘진정 동학당(眞正 東學黨)’, ‘일시 동학당(一時 東學黨)’, ‘가짜 동학당(僞 東學黨)’ 등으로 구분하고 임종현을 비롯한 4명의 동학지도자를 특정하여 거론하였지만, 이들 자료에서는 상세한 활동내용을 찾아보기 어렵다. 반면 위의 각부보고서에는 강령군 지역에서 활동한 동학군 지도자의 활동 내역과 포착 상황 여부 등도 상세히 전달하고 있다. 황해도 일대 동학농민군 활동 연구가 아직 미진한 상태이어서 해당 지역 동학농민군과 지도부의 동향을 구체적으로 규명할 수 있는 자료로서 의미가 크다. 이상 동학농민군에 관한 사법처리와 관련된 각종 보고서류 등 4종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한국학연구원에 소장되어 있다.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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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6 19:59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40)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 묘비명〉

순무선봉진등록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 본 자료는 양호(兩湖) 순무(巡撫) 선봉장(先鋒將) 이규태(李圭泰)가 제2차 동학농민혁명 진압 과정에서 1894년 10월 11일부터 1895년 2월 5일까지 각처와 주고받은 공문들을 수록한 것이다.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정부의 진압 관련 사항을 알 수 있는 핵심 자료로 순무영 보고와 답변, 각 지역 지방관과 주고받은 문서, 장위영 부영관 이두황과 친군 경리청 부영관 성하영 등이 선봉장에게 보고한 문서와 그에 대한 지령 등 다양한 내용들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제2차 봉기 이후 그 진압을 위한 부대로 조선 정부는 양호 도순무영을 편제하였는데 여기에는 기존 통위영·장위영·경리청과 일본군에게 훈련받은 교도중대가 소속되었다. 양호 도순무영은 신정희를 양호 도순무사, 좌선봉 이규태, 우선봉 이두황 등을 주요 지휘관으로 2500여 명의 병력을 동원했다. 당시 이규태는 친군 장위영 정영관이었는데 정부에서 그를 양호 도순무영 별군관 겸 순무 선봉장으로 임명하여 농민군 진압에 종사케 하였다. 그러나 같은 기간 일본군은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 소좌가 지휘하는 후비 보병 제19대대 등으로 동학당 정토군을 편성하여 각 지역의 농민군 진압을 위해 남하하면서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의 지휘를 받게 되어 있었다. 순무 선봉장 이규태는 교도대와 통위영 각 부대를 이끌고 10월 10일 서울을 출발하여 과천을 거쳐 수원에 도착한 뒤 진위로 갔다. 도중 과천에서는 좌수 등에게 해당 경내에 동학농민군들을 혹시라도 숨기고 발설하지 않고 있다가 나중에 드러나면 군령으로 처벌받겠다는 다짐을 받기도 하였다. 이곳에서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 토포사 이두황 부대가 청주성에 도착하였다는 소식을 접했다. 이두황 부대의 본진은 경리청·진남영 부대와 합세하여 보은 장내리에 있는 농민군을 향해 가면서 접주 백학길을 효수하였다. 장내리로 들어가서는 온 마을을 수사하고 농민군 주도자를 처단한 뒤 임시 막사와 집들을 다 태워버렸다. 10월 15일 순무영에서 선봉장에게 전령을 보내 공주의 비도(匪徒)들이 몹시 방자하게 날뛰어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있다고 하니 지원을 늦출 수 없다면서 즉시 전진해 섬멸토록 하고 사정을 보고토록 하였다. 이 무렵 광주에 있던 손화중이 흥덕·고부·무장·정읍·고창 등지에서 농민군을 동원하여 오권선이 이끄는 나주 농민군과 합세하여 나주 동북 방향에 진출하였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규태 부대는 일본군 부대와 함께 행군하여 진위와 성환을 거쳐 20일 천안에 도착하였다. 진위에서는 현령이 거리에 방문을 붙여 선봉진 부대의 도착 사실을 알리고 농민군들은 무기를 거두어들이고 거괴를 붙잡아 들일 것이며 그렇지 않으면 병사를 나누어 보내 토벌할 것을 천명하였다. 이 지역에서는 향약절목(鄕約節目)을 작성하고 오가작통법(五家作統法)을 시행하여 주민들을 철저히 단속하였다. 이규태는 천안의 거리 곳곳에 국한문 공고문을 게시하여 동학도들을 경계하고 유언비어를 만들고 평민들을 선동한 자들은 민회소와 창의소에서 잡아들여 처단할 것을 강조하였다. 천안의 유생들도 이규태에게 특별히 군대를 머물게 해달라는 요청을 하고 있었다. 천안에서는 농민군이 공주·유성·대전 등지와 청주의 관군이 패전한 곳에 수천 명이 모여 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장위영 영관에게 공문을 보내 전진토록 하였다. 이규태는 이두황에게 연기에서 농민군이 출몰함으로 옮겨 주둔하여 이들을 막고 전라도 농민군이 지나가는 후환을 끊으라고 지령을 내렸다. 〈순무선봉진등록〉은 공주공방전과 이후 전라도 지방에서의 동학농민군 진압 상황을 상세히 기록하고 있다. 전봉준은 논산 일대에 다시 결집한 농민군 2만여 명을 규합하여 노성과 경천으로 가서 일본군 및 관군 연합군과의 전투를 준비하였다. 11월 8일 농민군은 이인을 향해 공격해 왔고 다른 한 부대는 판치와 효포를 공격하였다. 그러나 9일 농민군은 우금치 전투에서 하루 종일 치열한 공방전을 펼쳤으나 패배하였다. 11~12일 경에는 능치 등 공주 부근 산봉우리에 남아있던 농민군마저 관군에게 쫓겨 계룡산 등지로 후퇴함으로써 20여 일에 걸친 공주공방전은 동학농민군의 패배로 끝났다. 이후 전봉준이 이끄는 농민군 주력은 전주를 거쳐 11월 25일 금구 원평으로 후퇴하게 된다. 당시 순무 선봉진에서는 원평으로 간 농민군이 3천여 명, 그곳에 집결해 있는 수가 1만여 명 이상인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우금치 전투 이후 농민군은 일본군과 관군 연합군과의 각종 전투에서 연전연패하였다. 이후 순무 선봉진 산하 각 부대는 일본군 후비 보병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의 지시를 받아 각처로 피신하여 항쟁을 지속하던 농민군들을 수색 체포하여 일본 군영으로 압송하였다. 전의현감은 기찰포교와 별초군을 비밀리에 파견하여 성묘를 계기로 체포 계책을 세워 그 우두머리 25명을 체포하여 문초한 바 있다. 옥과현에서는 양호 소모관 부대와 150여 명의 일본군이 전재석 등 농민군 참여자들을 때려죽이기도 하였다. 곡성현에서도 중앙군과 일본군이 사로잡은 우두머리를 매질하여 살해하였다. 그 과정에서 김개남은 11월 23일 전주에서 남원 방면으로 퇴각하였다가 12월 1일 태인 산내면에서 강화 병정과 포교에게 체포되었다. 광주를 다시 점령한 손화중은 12월 1일 휘하의 농민군을 해산하고 떠났고, 교졸에게 체포된 주윤철 등 동학 접주 다섯 명은 곤장을 맞고 사망하였다. 최경선은 귀화한다는 방문을 내걸고 광주를 떠나 남평을 거쳐 동복으로 갔는데 민보군에게 체포되어 순창에 수감되어 있다가 7일에 일본군 진영에 인도되어 나주로 압송되었다. 12월 2일 밤에는 순창 피로리에서 전봉준이 민보군 한신현 등에게 체포 수감되어 있다가 7일 최경선과 함께 일본군에게 인도되어 초토영이 설치되어 있던 나주로 압송되었다. 〈순무선봉진등록〉에는 미나미 고시로가 농민군 우두머리의 인도를 요구하는 이유로 “동학의 비당(匪黨)을 조사하는 일은 귀국의 반역에 관계될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관계된 것이 적지 않습니다. 무릇 비적 괴수를 붙잡으면 서울로 속히 압송하여 죄상을 국문하여 형법대로 시행해야 합니다”라고 주장한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동학농민군의 활동은 일본의 조선 정책에 큰 장애라고 이해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호남 농민군 주력이 완전히 진압되자 이듬해인 1895년 1월 11일 군무아문은 순무영을 철폐하고 여러 곳에 파견한 참모관·참모사·소모사·소모관·별군관 등을 모두 혁파하고 선봉진도 원대로 복귀하라는 공문을 하달하였다. 〈순무선봉진등록〉은 2월 5일 계엄 태세 발령을 해제한다는 군무아문 전령으로 끝을 맺고 있다. 이 자료는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양호순무선봉장 이공(李公) 묘비명〉 양호 도순무영 순무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 1841~1895)의 묘비명이다. 경주를 본관으로 누대 무과 출신 집안에서 태어난 이규태는 1894년 차례로 훈련도정·총어영 별장·장위영 정령관 등에 임명되었다가 동학농민혁명이 발발하자 양호 도순무영 선봉장으로서 충청도와 전라도 지역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하였다. 그는 장위영 영관 이두황을 목천 세성산으로 보내 동학농민군을 토벌케 하였고, 경리청 영관 홍운섭 등에게는 공주 농민군 토벌을 지시하였다. 이후에는 퇴각하는 농민군을 강진과 해남까지 추격하여 섬멸하였다. 그러나 당시 개화당 정부의 동학농민군 진압의 기본방침은 일본군의 무력과 그들의 지휘를 받아 이를 해결하고자 하였던 것이었기 때문에 최종 지휘는 일본군의 명령을 따를 수밖에 없었던 한계가 있었다. 후비 보병 제19대대 대대장 육군 소좌 미나미 고시로(南小四郞)는 조선군 일선 최고 수뇌부인 좌우 선봉장 등을 ‘휘하’에 두고 지령을 내리는 사실상 농민군 진압을 위한 조⋅일 연합군 지휘관 중 최고 책임자였던 것이다. 일본군 지휘에 거부감을 가진 이규태는 여러 차례 불만을 토로한 바 있다. 이규태는 동학농민군이 완전히 진압된 직후인 1895년 6월 54세로 서울에서 사망하여 경기도 고양군 벽제면 선유동 선영에 안장되었다. 이 묘비명은 〈일성록(日省錄)〉 편집관 이승욱이 1915년에 쓴 것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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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9 17:3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9) 선봉진서목과 상순무사서,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양호도순무영은 동학농민군 진압하기 위한 총지휘관으로 선봉장 이규태(李圭泰, 1841~1895)를 임명했다. 홍경래난 때의 양서순무영과 병인양요 당시의 기보순무영은 순무사 다음 직위인 중군(中軍)이 선봉장을 겸하거나 출전 장졸 전체를 이끄는 총지휘관이었다. 그러나 갑오년의 양호도순무영은 중군이 출진하지 않아서 선봉장이 경군 병영과 지방병영 그리고 지방관아의 진압 병력 전체를 통제하는 총지휘관이 되었다. 따라서 선봉장 이규태가 순무영과 군무아문 등에 각종 보고를 올렸고, 휘하 병영의 전투보고서가 선봉진에 전해졌다. 또한 각급 관아와 주고받은 공문 등 선봉 이규태와 관련한 문서가 매우 많이 작성되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와 우금치전투를 전해주는 〈공산초비기(公山剿匪記)〉 등 직접 쓴 기록도 적지 않다. 진중일기인 선봉진일기는 시간순으로 여러 사건을 기록해서 진압군의 대책과 동학농민군의 동향을 전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이러한 문서들은 장신(將臣)인 순무사 신정희(申正熙, 1833~1895)에게 모아졌고, 순무사 신정희의 후손이 고려대학교에 기증해서 현재 그 대부분의 문서를 고려대 도서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선봉진서목(先鋒陣書目) 서목(書目)은 상관에게 올리는 첩정 등의 원본에 핵심 요점만 따로 적어서 첨가하는 문서를 말한다. 선봉 이규태는 상세한 사정을 설명한 수많은 보고문서를 올리면서 그 요점을 간략히 적은 선봉진서목을 첨부하였다. 출전 병영의 행군과 숙영 그리고 군량 조달 등 시시각각 달라지던 출전 병영의 실정이 이 서목으로 확인된다. 선봉진서목의 항목으로 분류되어 있지만 몇 가지 다른 형태도 있다. 선봉 이규태가 휘하 병영에서 보고한 첩정을 그대로 베껴 순무사에게 올리면서 선봉이 서명한 서목이 있다.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부사 이두황의 첩정이나 안성군수 홍운섭의 첩정과 같은 것이다. 그리고 휘하 병영의 지휘관이 직접 순무사에게 올린 서목도 있다. 갑오년 11월 1일자 순무영 별군관 최일환의 서목이거나 11월 3일자 출진 장위영 부영관 겸 죽산진토포사 이두황의 서목이 그것이다. 또 충청도 온양군수 서목도 있다. 온양군수의 서목에는 경내에서 활동한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빼앗아서 공을 세운 교리(校吏)에게 상으로 준 내용도 나온다. 당시 각종 보고문서는 적지 않았다. 순무선봉진등록(巡撫先鋒陣謄錄)에 포함된 문서를 보면 그 수와 양을 알 수 있다. 그에 비해 서목의 수는 적은 편이다. 현존하는 서목은 그 일부에 불과하다. △선봉진상순무사서 부잡기(先鋒陣上巡撫使書(附雜記) 선봉진상순무사서는 1894년 10월 22일에서 1895년 3월 5일까지 선봉 이규태가 순무사 신정희에게 올린 편지이다. 편지는 모두 11편이고, 첨부한 잡기는 31편이다. 이 편지는 출전 장졸의 현지 지휘관으로서 이규태가 순무사에게 전한 갖가지 내밀한 사정을 볼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공무를 맡고 있는 무관이 공문서가 아니라 사신으로 실정을 전하는 것은 당시 관례처럼 보인다. 충청감사 박제순도 총리대신 김홍집과 외부대신 김윤식에게 충청도 동학농민군의 진압과 관련한 편지를 주고 받았다. 그것을 모은 자료가 금영내찰(錦營來札)이다. 이규태의 편지는 처음부터 절박한 심정을 담거나 어려운 내용을 전하는 것이 많다. 일본군과 관련한 것이 가장 심각한 내용이었다. 출전 초기부터 일본군 장교의 지휘를 받으라는 지시는 선봉장으로서 황당하게 여겼던 것 같다. 더구나 일본군과 동행해야 해서 천안에 도착해서 3일이나 머물렀다고 한다. 충청도 내포 일대의 상황이 심각해서 경군 병력을 보내려고 했으나 독자적으로 보내지 못했다.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서 드러나는 심각한 상황은 탄환 부족 사태였다. 일본군은 6월 21일 새벽 경복궁을 점령할 때 경군 병영을 기습해서 무기와 탄약을 몰수해서 일본군이 주둔한 용산 막영으로 보냈다. 이 무기의 일부는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경군이 파견될 때 돌려받았지만 문제는 탄환이었다. 일본군이 준 탄환은 부족했고, 성환에서 패배한 청국군에게 몰수한 탄환을 받았지만 보유한 총의 구경과 달라서 쏘아도 명중률이 떨어졌다. 편지모음에 덧붙인 잡기(雜記)는 여러 실상을 전해준다. “탄환은 일본군의 진중에서 1만개를 가져왔는데, 겨우 경리청의 병정이 가진 총에는 쓸 수가 있었으나 사거리가 200보에 지나지 않아 단지 포 소리만 낼 뿐입니다. 또한 20개를 나누어 주는 데에 불과하여 그 사이에 내포에서 쓴 것이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통위영의 진중에는 몇 십개가 남아 있었으나 천안에서 가져온 탄환은 애초에 모양이 맞지 않았기 때문에 따로 의견을 내어 모양을 바꾼 것이 거의 수 만개나 되었습니다. 이처럼 긴요하게 쓸 것이 이와 같이 구차한데다가 넉넉하지 않아 걱정스럽고 안타깝습니다.” 그래서 새 탄환을 보내달라고 거듭 요청하고 있다. 12월 1일 순무사에게 보낸 편지에는 전봉준 장군을 추적하는 상황을 전하고 있다. 피신하는 전봉준 장군을 30리 정도로 뒤쫓고 있고, 11월 29일에는 입암산성에서 머물고 아침밥을 먹은 뒤에 바로 떠났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다. 공식 문서에는 나오지 않는 내용들이다. 선봉장 이규태는 우금치전투를 함께 치룬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제2중대장 모리오 마사이치(森尾雅一) 대위와 극히 사이가 나빴다. 중대장급 대위가 경군 총지휘관인 선봉장 이규태를 아랫사람처럼 다루는 것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모리오 대위는 온갖 트집을 잡고 선봉장 이규태를 견제하였다. 전라도로 남하한 후 만난 제19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는 모리오 대위의 보고를 듣고 선봉장 이규태를 매도했는데 그 도가 지나쳤다. 순무사에게 올린 편지 귀절은 참담한 것이었다. “ 어제 이 읍에 들어온 뒤에 비로소 일본군 대대장을 만났는데 책망을 당하는 것이 노예보다 심했습니다. 살아서 명(命)을 더럽혔고 죽어서도 이름이 없겠으니 어찌 하겠습니까?”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先鋒陣各邑了發關及甘結) 이 자료는 선봉장 이규태가 충청도와 전라도 일대를 순회하면서 예하 각 병영과 각 군현 또는 면리 단위에 보낸 각종 공문을 묶은 것이다. 상급관청의 공문인 관문(關文)과 아래관청에 보낸 감결(甘結), 그리고 선봉장의 전령과 방시문(榜示文) 등을 수록했다. 선봉진각읍료발관급감결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당시 경군이 지방에 파견될 때 어떤 방식으로 행군했는지 보여주는 내용이 처음에 나온다 과천과 수원에 보낸 관문에 “본읍의 포군(砲軍)과 토병(土兵) 중에서 50명 한도로 각각 그 지경에서 미리 준비하고 기다렸다가 차례차례 향도”하라는 명을 내렸다. 그리고 경기도 광주, 용인, 죽산, 안산, 안성, 남양, 양성, 진위와 충청도와 전라도 각 군현에 보낸 관문에는 거괴를 잡아서 바치고, 스스로 안정시킬 수 없으면 선봉진에 알려서 토벌할 수 있도록 하라고 했다. 이런 식으로 행군하는 군현의 동학농민군을 제압하면서 그 사실을 충청도와 전라도 전역에 알리도록 했다. 이 자료에는 각 지역에서 활동하던 알려지지 않은 동학농민군 이름이 나오고 있다. 이를테면 천안 방축동(현 아산 온양)의 김치현(金致鉉), 장인보(張仁甫), 김영석(金永石), 이원장(李元章)이다. 특히 직산과 평택 및 성환역에 보낸 감결을 보면 동학농민군의 재산 몰수가 처음부터 행해진 사실을 알 수 있다. “이번에 본 지방에서 붙잡혔거나 붙잡히지 않은 자는 죄가 사면을 받지 못할 죄목에 해당하므로, 당해 마을에 안접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이 가진 집안 살림살이와 땅을 법전에 의해 적몰할 것.”이라고 한 것이다. 여러 물자의 강제 징수와 인마의 동원, 그리고 뒤로 갈수록 동학농민군을 함부로 죽이지 말라는 지시 등이 거듭 나오고 있다. 갑오년의 구체적인 실상이 선봉장 이규태와 관련한 자료에 풍부히 기록되어 있는 것이다. 신영우 충북대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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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2 16:2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8)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관지책(官旨冊)·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1월부터 6월까지 작성한 세금에 관한 장부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30×19cm이며 전체 34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정부 산하 각 관청의 비용 징수와 지출 관련 내용 등이 수록되어 있는데, 1월 8일 전세(田稅)와 전운영(轉運營)의 세금 납부 관련 내용으로 시작한다. 징수 대상처별로 기술되어 있으며 전운영 징세 관련 내용이 비교적 상세하다.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봉기와 관군의 농민군 체포 및 침학에 대한 단속 내용이 다수를 차지하고 있다. 관감치부책 1894년 1월. /고려대 도서관 제공 동학농민군에 대한 첫 기사는 1894년 4월 2일 등장한다. 호서(湖西), 호남(湖南), 영남(嶺南) 등지(等地)에서 협잡(挾雜)한 무리들이 작당(作黨)하여 기뇨(起鬧)한 수창(首倡)은 체포할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3월 20일 전라도 무장기포 이후 호남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난 동학농민군의 활동을 두고 호서, 영남 지역까지 아우르는 전국적인 항쟁으로 이미 인식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밖에 같은 날 기사에서 부랑무뢰배(浮浪無賴輩) 천백(千百)이 군집을 이루어 농사를 그만둔 후 지경을 벗어나면 즉시 각 면의 유사(有司), 훈장(訓長)을 초치하여 효유(曉諭)할 것을 당부하는 주문도 있었다. 4월 11일에는 동학농민군을 토벌하러 간 초토사(招討使)가 동도배(東徒輩),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수교(首校), 수형리(首刑吏)의 명단을 보고할 것을 명하였다. 4월 17일에도 각 면에서 민심을 선동하는 자를 체포하여 보고하라는 지시가 떨어졌다. 이때 패류배(悖類輩)를 동학당(東學黨)이라 칭하고 체포한 무리들은 결박하여 압송하라는 지시도 떨어졌다. 한편으로는 동도(東徒)가 취당(聚黨)하여 기뇨(起鬧)한 것 외에는 모두 평민(平民)이니 병정(兵丁), 보상(褓商), 관속(官屬)은 물론 이유 없이 체포한 자들도 보고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4월 26일에는 동학농민군의 활동에 대한 더욱 구체적인 정황이 알려졌다. 이날 초토사 전령(傳令)에 40~50명 혹은 60~70명이 무장(茂長) 굴치(屈峙)로부터 각자 부안(扶安), 흥덕(興德), 고부(古阜), 정읍(井邑) 등지로 나아간 정황이 포착되었다. 5월 6일에 이르러서는 귀화(歸化)한 백성은 구휼을 더할 것을 명하기도 하였다. 이미 동학농민군 중 귀화, 즉 투항한 이들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때는 완산 전투로 인하여 전주성도 큰 피해를 입었던 시점이었는데, 전주성 안에 있던 조경묘(肇慶廟), 경기전(慶基殿)의 위패(位牌)와 영정(影幀)을 위봉진(威鳳鎭), 즉 위봉산성에 옮기라는 명이 떨어지기도 하였다. 전주화약이 임박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관감치부책(關甘置簿冊)은 1894년 3~5월 간 동학농민군의 제1차 봉기 및 완산 전투의 정황을 알 수 있게 하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임을 알 수 있다. 관지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관지책(官旨冊) 관지책(官旨冊)은 전라도 임실현에서 1894년 10월경부터 1895년 1월까지 각종 업무 처리 상황을 순영과 병영 등 상급관청에 보고한 내용을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서장되어 있다. 크기는 19×30cm이며 전체 26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문서의 첫 시작일은 26일로 되어 있어 몇 월인지 명확히 알 수 없으나, 그 다음이 11월 10일과 을미 정월 초6일 순서로 작성되어 있다. 문서 내용은 세금 관련 내용, 현감 부임건, 도망죄인건, 경내에 아이를 유기한 일이 없다는 보고, 소·술·소나무 3금(禁) 조치 이행건, 혼기 넘겨 결혼 못한 남녀가 없다는 보고, 사학(邪學) 금단 조치건, 동학농민군에게서 무기를 회수한 일 등을 순영에 보고한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 그리고 임실현 향약장정이 수록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군현의 행정업무와 동학농민군 대응책 등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구체적으로 들어가 보면은 을미(乙未) 정월 초6일, 즉 1895년 1월 6일 이전의 기록으로 추정되는데, 임실현 경내에서 동도(東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 중 조총(鳥銃)이 20자루에 이르렀음을 알 수 있다. 1895년 1월 6일 기사에는 죄인(罪人)들, 즉 동학농민군을 체포한 교졸(校卒)의 성명(姓名) 성책(成冊)을 수정하여 올렸다는 내용이 들어 있다. 한편으로는 지난달, 즉 1894년 12월 내린 사학금단(邪學禁斷)의 조치가 강조되기도 하였다. 1월 7일 기사에는 비도(匪徒), 즉 동학농민군으로부터 몰수한 군기(軍器)의 성책(成冊)을 만들 것을 지시하는 내용이 들어 있다. 마지막으로 임실현 향약(鄕約) 장정(章程)이 수록되어 있는데 도약장(都約長), 부약장(副約長)부터 각 면의 약정(約正)에 이르기까지의 명단이 수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 임실현이 동학농민군의 활동 직후 지역 사회를 어떻게 종래의 방식으로 재편성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 표지. /고려대 도서관 제공 △진안현각양상납월당전목수효납미납성책(鎭安縣各樣上納月當錢木數爻納未納成冊) 1894년과 1895년 전라도 진안현에서 작성한 것으로 상급기관에 납부해야 할 세액을 납부액과 미납액으로 정리한 자료이다.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크기는 20×30cm이며 전체 17면으로 이루어져 있다. 갑오년(甲午年), 즉 1894년 정월 예방(禮房)이 선납한 의정부 약채전(藥債錢) 10냥 5전부터 기재되어 있다. 이때 납부 대상은 종친부, 중추원, 기로소, 중진영(中鎭營)이고 그 외에 속오색(束伍色)이 선납한 속오방번전(束伍防番錢) 14냥도 있다. 3월에는 호조, 사포서, 내수사, 균역청, 전주부, 중진영, 병조(兵曹) 등이 대상으로 납부액과 미납액을 각각 기록하였다. 4월에는 선혜청, 호조, 중진영, 순영(巡營), 호조, 5월에는 양향청, 중진영, 충익부, 병영(兵營), 6월에는 중진영, 속오방번, 순무영(巡撫營), 7월에는 기로소, 중추부, 군산진, 병조, 8월에는 순영, 사복시, 좌수영, 병영 등이 대상이었다. 10월에는 병조, 양향청, 어영청, 금위영, 공조, 군기시, 장악원, 선혜청, 수어영청, 균역청, 은언궁, 사포서, 순영, 병조, 11월에는 순영, 육상궁, 12월에는 병조가 대상이었다. 자료 말미에 을미년 2월 제사를 위한 전세미태(田稅米太) 마련기(磨鍊記)가 상세하기 기재되어 있고 이를 주관한 좌수와 호방, 이방의 이름이 수록되어 있다. 여기에 언급된 기관 중 중진영(中鎭營)은 전라도 전주에 설치된 중진영(中鎭營)을 의미한다. 중진영은 지금의 초록바위에 자리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서 김개남을 비롯한 상당 수의 동학농민군이 처형당하였다고 한다. 중진영과 함께 병조, 병영, 순무영(순영) 등도 동학농민군을 진압하는 조선왕조의 군사기구였다. 동학농민군이 활동하던 시기에도 진안현의 이들 기관에 대한 상납이 이루어진 만큼 조선왕조 당국의 조세 행정은 그런대로 작동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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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6 15:5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7) 〈춘당록(春塘錄)〉, 〈의산유고(義山遺稿)〉

〈춘당록(春塘錄)〉 : 여산 유생이 겪은 동학농민혁명 〈춘당록〉은 전라도 여산의 선비 양평(楊枰)의 남긴 문집이다. 여기에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흥미로운 기록들이 적지 않다. 저자의 내력은 문집 내용 속에 단편적으로 드러나고 있으나 분명하게 기재되지 않았다. 본문의 내용을 통해 그의 아버지 양재우(楊在佑)는 철저하게 이단을 배척한 전통적 유교지식인이었음을 미루어 짐작할 수 있으며, 양평 자신도 유학자로서 정체성을 강하게 드러내면서 동학과 서학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글은 “갑오년에 읊다[甲午吟]”,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 등 다섯 편으로 구성되어 있다. 물론 〈춘당록〉에 실린 이 글들은 체계적으로 수집되거나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새로운 사실과 희귀한 문서들도 많이 포함되어 있어 자료로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주요 내용을 보면 “갑오년에 읊다[甲午吟]”에서 그는 전주성이 농민군에게 점령당할 무렵, 여산 부사 유제관이 군사를 삼례에 보내 전주 외곽을 방어했다고 밝히고 있다. 이어 농민군이 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관군을 격파한 사실과 전주성을 점령한 뒤 홍계훈과 공방전을 벌인 과정을 기록하였다. 또 신임 감사 김학진이 전주로 들어가지 못하고 여산에 머문 사실과 순변사 이원회가 파견된 일, 자신이 전주로 달려가서 장군봉에 올라 직접 전주 성내가 불타는 모습을 보고 그 감상을 적은 시를 남겼다. 그 다음 “학술에 대한 변[學術辨]”에서는 동학을 포함하여 이단을 설파하는 장문의 글을 실었다. 이어 “성지를 받들며 감격하는 말[奉旨感激辭]”에서는 1894년 8월 자신이 소모사 이건영의 종사관으로 임명된 사실을 기술하면서 이건영에게서 전달 받은 임금의 유지(諭旨)를 옮겨 놓았으며, 그에 대한 자신의 의견을 제시하였다. 이에 대해 그는 ‘소모사를 보낸 건 바로 도적의 무리를 보듬어 회유하여 그들로서 몽둥이를 만들어 섬나라 왜적들을 매질해 내쫓기 위함이고 소모사가 온 것 또한 왕실에 충성을 바치고 도적의 무리를 교화하기 위함일 것입니다.’라고 밝혔다. 또 여기에는 여산 부사 유제관도 이건영이 포섭했음을 시사하는 내용도 들어 있다. 다음에는 그가 소모사의 종사관으로 군사 모집을 위해 쓴 글인 “소모를 위해 쓴 격문 초고[爲召募草檄辭]”를 실었다. 이 글은 소모사 이건영의 부탁을 받고 쓴 초안이다. 무엇보다도 ‘섬나라 오랑캐’들에 대한 비판으로 시작하여 임진왜란을 겪은 사실, 하나부사 요시모토(花房義質)와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 등이 개화파와 음모를 꾸며 갑신정변을 일으키고, 1894년에는 경복궁을 강점한 사실을 설명하였다. 또한 박영효· 서광범, 서재필 등 개화파 3적의 행패를 지적하고 개화 정권의 수립을 비판하였다. 철저하게 일본 침략 세력과 이에 동조한 개화파를 매도하고 있었다. 마지막으로 1894년 8월에 호남의 여러 고을에 보낸 통문인 “호남의 여러 읍에 보낸 통문[湖南列邑通文辭]”이라는 글을 실었다. 이 글은 여산향교에서 작성해 호남의 모든 향교에 보낸 것이다. 이 통문에서는 동학농민군 토벌에 대해 전혀 언급하지 않았다. 이것은 동학농민군을 끌어들이려는 이건영의 의사가 반영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소모사 이건영이 동학농민군과 연합작전을 모색한 사실을 시사하고 있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의산유고(義山遺稿)〉 : 동학농민군 진압 선봉에 섰다가 의병을 창의한 인물의 기록 〈의산유고〉는 문석봉(文錫鳳, 1851~1896)이 남긴 문집으로 동학농민혁명과 을미‧병신의병에 관련된 내용이 많이 담겨있다. 문석봉은 1894년 양호소모사로 임명되어 진잠, 금산, 고산, 회덕 일대의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섰으며, 그 이듬해인 1895년 8월에는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시해되자 가장 먼저 을미의병을 창의한 인물이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문석봉은 경상도 현풍군의 한미한 집에서 태어났다. 일찍부터 무과를 준비하였던 것으로 보이지만, 40이 넘은 1893년에 무과에 급제하여 곧 경복궁 오위장(五衛將)이 되었으며, 같은 해 12월 충청도 진잠 현감이 되었다가 모친상을 당해 집으로 돌아왔다. 1894년 11월 양호소모사(兩湖召募使)가 되어 충청도 연산, 고산, 진잠, 회덕 일대의 농민군 토벌에 나섰다. 〈의산유고〉상순영.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의산유고〉에는 소모사로 임명된 다음 관찰사와 도순무영(都巡撫營)에게 올린 글들이 실려 있다. 특히 문집의 권1에 실린 〈토비략기(討匪略記)〉에는 공주 우금티 전투 이후 퇴각하여 곳곳에 둔취해 있던 연산 고산 완주 금산 일대의 동학농민군들을 진압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여기에는 동학농민군의 최후 전투로 알려진 대둔산 정상 남서쪽 형제바위 일대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이 비교적 상세하게 실려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해서는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실린 내용이 알려져 있었으나, 〈의산유고〉는 그 내용을 다시 확인해준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대둔산 전투는 동학농민전쟁 최후의 전투로도 알려져 있지만, 사실 어린 아이와 임신한 여성 등 가족까지 데리고 피신한 농민군과 그 가족에 대한 일방적 학살로 보는 편이 타당할 것이다.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 기록된 이들의 최후는 매우 참혹하기 짝이 없다. 고산 완주 일대의 동학농민군과 그의 가족들은 대둔산 정상 남서쪽의 형제바위(720m)에 초막 3개동을 구축하고 1894년 12월 중순부터 진지가 함락되는 이듬해 1월 24일(음력)까지 이곳에서 피신해 있었다. 일본군 3개 분대와 조선 관군 30명으로 된 특공대(모두 60명)가 이들에 대한 대대적 최후의 공격을 시작한 것은 1895년 1월 24일(음력) 새벽 5시였다. 이들은 세 방면으로 나누어서 사다리 등 장비를 이용해 형제 바위로 진격하며 맹렬히 사격을 퍼부었다. 완연한 화력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농민군은 지형지물을 활용하여 9시간 동안이나 버틸 수 있었지만, 결국 어린 소년 1명만 남고 25명이 전사하는 비극적 최후를 맞을 수밖에 없었다. 피신해 있던 농민군 가족 가운데는 28~29세쯤 되는 임신한 부인이 있었는데, 일본군과 관군이 난사한 총알에 맞아 죽었다. 또 접주 김석순은 한살쯤 되는 핏덩이 어린 딸을 안고 깎아지른 바위 절벽 아래로 뛰어내리다 암석에 부딪쳐 즉사하였다. 그 참상은 이루 형언할 수 없었다. 일본군은 이런 참상을 뒤로하고 ‘천황폐하 만세’를 삼창하고 퇴각하였다. 의산유고에는 거짓으로 귀화한다고 한 김공진을 이용하여 대둔산에 주둔해 있던 농민군 사이를 이간질하여 내분을 일으킨 다음 일본군과 함께 공격하여 쉽게 진압할 수 있었다고 쓰고 있다. 그러나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이런 이야기가 없다. 고산, 진잠, 금산 일대의 농민군 지도자 최공우에 대해서도 〈주한일본공사관기록〉에는 별다른 내용이 없고, 전사한 농민군 명단 가운데도 최공우의 이름이 없다. 그러나 〈의산유고〉에는 최공우가 대둔산 농민군을 지휘하고 있었으며, 도중에 피신하여 고산 염정동으로 피신한 후 거기서 다시 농민군을 규합하여 활동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대둔산 전투에 대한 사실은 〈주한일본공사관기록〉, 〈의산유고〉 등에 기록되어 있었지만 현장이 확인되지 않다가 1999년 원광대 사학과에서 현장을 발견하여 일반에 공개되었다. 2001년 10월 10일 〈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완주지부〉에서 최후의 항전을 기념하여 기념비를 건립하였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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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00:3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6) <시문기>와 <기문록>- 충청지역 유생이 바라본 동학농민혁명

<시문기(時聞記)>와 <기문록(記聞錄)>은 충청지역 유생이 작성한 기록물이다. 당시 유생들의 동학농민혁명 시대인식과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 관련 여러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특히 이 두 기록물은 각각 1862-1895년, 1894-1897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기 때문에 큰 시대적 흐름 위에서 전개된 동학농민혁명의 역사적 위상을 엿볼 수 있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시문기>는 충남 공주지역에 살던 유생 이단석(李丹石)이 동학농민혁명의 배경과 혁명의 진행과정에 대해 듣고 경험한 바를 기록한 글이다. 필사본 1책으로 서문과 본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저자가 이 기록물을 작성한 것은 1896년 7월이다. 서문에 의하면, 그 이유가 1862년부터 시작되어 1894년 동학농민혁명 때 절정을 이룬 국난을 기록하여 후대 증거로 삼고자 한데 있었다. 그런 만큼 이 기록물은 한 시골 지식인의 시대인식과 관련 사실을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높다. 〈시문기〉 1894년 1월. /국립중앙도서관 제공 <시문기>의 시간범위는 삼남 농민항쟁이 일어난 1862년부터 1895년까지 편년체 형식으로 매년 연월일별로 기록하였고(8개년 누락), 공간범위는 충남 공주지역을 중심으로 한 충청도지역이다. 주요한 내용은 1862년 삼남 농민항쟁을 시작으로 사학의 폐단, 천주교의 탄압과 병인양요, 당백전의 폐해, 임오군란, 갑신정변 등을 기술한 뒤, 갑오년 동학농민혁명 관력 사실을 정리해 놓았다. 특히 5월에 이미 공주지역에 동학 접이 수십개 설치되어 있었다는 점, 공주, 이인, 금산 등 충남 일대에서 벌어진 동학 접주들의 부민 수탈에 대해 기록한 점, 7월 5일 이인 반송에 설치된 동학 도소의 활동 등이 주목된다. 특히 7월 이인 반송에 설치되었던 동학농민군 도소의 실체를 구체적으로 엿볼 수 있어 사료적 가치가 높다. 당시 이인 반송 도소는 흰 포장을 넓게 펼쳐 더위를 피하였고 수백명이 모일 정도로 큰 규모였는데, 동학농민군 지휘부가 있는 곳은 병풍을 두르고 돗자리가 깔려 있었다. 반송 도소를 이끌던 동학농민군 대장은 임기준이었다. 이를 통해 7,8월 충청도 곳곳에 설치되어 있었던 동학농민군의 도소의 실체를 엿볼 수 있다. 도소는 동학농민군들의 활동 거점이자 지휘부 역할을 한 곳이기 때문에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또한 8월초에는 보은집회를 주도한 서병학이 경병에 잡혔다는 사실, 충청감사가 이헌영에서 박제순으로 변경된 내용, 10월 이후에는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의 전투와 사상자 등이 주목된다. 전봉준이 이끄는 남북접 연합군이 본격적으로 공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한 10월 23일에는 동학농민군 1만여명이 신소마을에 유숙하면서 소 12마리를 도살하고 다음 날까지 마을 주민들이 2만개의 밥상을 제공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10월 24일에는 동학농민군의 행렬이 물고기를 꿴 것과 같이 몇 리까지 길게 연이어 이어졌다고 한다. 그 규모도 10여 만명에 이르고 효포, 태봉, 오곡, 이인 등지에 주둔하면서 일본군 및 정부군과 전투를 벌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11월 9일 있었던 공주 우금치전투 때의 상황으로 보이기도 하는 만큼 사료 비판이 요구된다. 특히 종일 접전하였고 콩을 볶는 소리처럼 들린 총소리가 밤낮으로 끊이질 않았다고 한 것으로 미루어 볼 때, 우금치전투 때의 상황을 말해주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10월 24일 이인에서 있었던 동학농민군과 정부군·일본군과의 전투는 밤낮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그밖에 금산군수의 동학도 처형, 청주병영군 73명의 전몰, 김개남부대의 청주성 공격, 7, 8월 공주지역 동학농민군을 이끌던 임기준의 체포 등 단편적인 사실들이 기록되어 있다. <시문기>는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새로운 정보를 많이 제공하고 있지만, 사실 오류도 많아 주의해서 보아야 한다. 예를 들어 홍계훈이 전주에서 동학농민군과 싸운 시기를 3월에 기술해 놓거나, 전봉준을 김봉준으로 표기하고 서일해(서인주)와 손화중이 김개남과 같이 청주성전투에 참여한 것으로 기록한 부분 등은 모두 오류인 만큼 자료 내적 비판이 요구된다. 이 글에서 저자는 충남 일대 동학농민군의 동향에 대해, ‘곳곳에서 봉기하니, 봉기하지 않은 고을이 없었다. 모두 척왜(斥倭)를 명분으로 하지만 실은 화적이었다’고 하듯이, 지방 유생의 비판적인 입장에서 경험한 바를 직접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이 기록물을 남긴 이단석은 동학농민군을 ‘천한 도적떼’에 비유할 정도로 동학농민혁명에 비판적이다. 당시 보수적인 지식인의 인식을 엿볼 수 있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시문기>가 1862-1895년에 걸친 편년체 역사기록물인 반면에, <기문록>은 1894-1897년에 걸쳐 작성된 일기이다. 저자는 본문에서 나오는 지명인 용산과 초강 등이 충북 영동군에 있는 것으로 보아 충북 영동에 살던 어느 유생으로 보인다. 작성된 일기 내용은 일기체 형식으로 그날 그날의 날씨나 일상생활과 농사일, 그리고 시국에 관해 견문한 내용을 날짜별로 기록하였다. 1894년 6월 7일부터 1897년 4월 13일까지 근 3년에 걸쳐 있으나, 전체 분량의 절반은 동학농민혁명이 전개된 1894년 6월부터 12월까지이며 내용도 자세하다. 1895년부터는 내용이 소략하다. 1894년 기록은 6월 27일자에 6월 21일 있었던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을 시작으로, 6월 28일 대구에 온 일본인들이 소를 팔지 않는 두 부녀를 살해한 사실을 언급하였다. 또 7월 14일 마을 주민과 동학도들이 충돌한 사건, 7월 18일 동학도들의 옥천 이원집회, 7월 19일 이씨 집의 노복이 동학도를 때려죽인 사실, 7월 22일 동학도들이 초강에 집결한 뒤 전곡을 거두어간 사실, 7월 25일 동학도 천여명이 검촌 민씨 집의 사랑채를 부수고 주민들을 결박한 사실 등을 전하고 있다. 이처럼 7월에 들어와 사실상 영동지역은 동학도들이 장악한 상태였고 그 때문에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다투어 동학에 가입하였는데, <시문기>의 저자가 살던 마을 주민들도 8월 1일경에는 모두 동학에 들어갔고 자신도 8월 17일 동학에 입도하였다. <시문기>에 따르면, 충북 영동은 9월 26일 대대적인 첫 기포가 있은 뒤 몇 차례 더 기포가 있었으며, 10월 14일 동학농민군 대군이 해월 최시형이 있던 청산으로 이동함에 따라 마을에서 밥상 700개를 준비하였는데, 실제 10월 16일 진천과 충주 등지에서 온 동학농민군들이 마을로 들어왔다. 10월 18일에는 동학 지도자 청주 출신 손천민이 부녀를 겁탈한 동학도를 직접 징계하기도 하였다. 그렇지만 11월에 들어와 상황은 역전되었다. 정부군과 일본군이 영동에 들이닥치고 남아 있는 동학도들을 색출하여 처형하기 시작하였다. 심지어 경북 상주의 민보군도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해 영동으로 들어왔다. 그리하여 12월 17일 동학농민혁명기 마지막 대전투였던 보은 북실전투에 관한 일기를 끝으로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은 거의 모두 일본군이나 민보군 등에 의해 동학농민군이 체포, 처형된 내용만 일기에 남아 있다. 이와 같이 <시문기>는 갑오년 6월부터 12월까지 충북 영동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가장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이 기록은 저자 자신이 보고 듣고 경험한 내용을 요일별로 정리해 놓아 진정성이 있을 뿐 아니라, 역사 사실을 정확히 보여주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도 매우 높다. 반면에 <기문록>은 동학농민혁명이 끝난 1896년에 저자가 1862년 이후 30여년의 사실을 보수적인 시각에서 편향적으로 기술해 놓았기 때문에 활용시 주의를 요한다. 김양식 전 청주대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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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05 20:2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5) 우금치 전투 이후 지방통제의 실상을 보여준 북하면보

세계기록유산으로 등재된 〈북하면보(北下面報)〉는 총 12건으로 현재 모두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이 소장하고 있다. 북하면장 홍순철은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북하면의 상황을 상부인 청양현에 보고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한가지 정정해야 할 내용이 있다. 그동안 북하면이 충청도 예산에 속하였다고 알려져 있었으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북하면은 충청도 청양현에 속하였다. 〈여지도서(輿地圖書〉(1757)에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있으며, 〈호구총수(戶口總數)〉(1798)에서도 역시 북하면이 청양현에 속해 있음이 확인된다. 이후 1914년 행정구역이 개편되면서 청양현 북하면과 북상면이 운곡면으로 합쳐졌다. 1894년 당시 북하면은 현재 운곡면 영양리, 미양리, 광암리, 추광리 및 신대리 일부 지역이다. 이는 그림에서 확인할 수 있다. 현재까지 남아있는 〈북하면보〉가 12건이지만 당시 상황을 고려하면 이외의〈북하면보〉가 더 있다고 짐작된다. 이 〈북하면보〉의 작성자 또는 보고자는 북하면의 면장 홍순철이었고, 수급자는 청양현이다. 먼저 눈여겨 보아야 할 점은 바로 작성 시점이다. 이 〈북하면보〉는 현재까지 남아있는 것으로 보면 1894년 11월 10일부터 12월 15일까지 작성되었다. 가장 빠르게 작성된 것은 바로 11월 10일(음력)에 작성된 〈북하면보〉이다. 이 시기는 바로 전봉준이 이끄는 동학농민군 주력이 공주 우금치에서 패배한 직후이다. 즉 우금치 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배 하자마자 행정단위의 기본조직인 면의 책임자가 고을 현감에게 해당 면의 상황을 매우 상세하게 보고하고 있다. 이는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 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청양현 북하면은 공주 우금치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농민군 토벌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특히 보고가 빈번하게 그리고 상세하게 이루어졌다고 보여진다. 12건의 〈북하면보〉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북하면보〉 현황 <북하면장 홍순철이 작성한 보고(1894년 11월 15일)> 북하면의 첩보[北下面報] 다음과 같이 면(面)에서 첩보합니다. 그간 찾아서 얻은 병기는, 길이 1장 5척인 장창(長鎗) 1개로, 위아래가 구리로 장식되어 있고 고리를 잇닿아 꿴 사슬이 달려 있어 쟁쟁하게 울리니 창 가운데 특이한 것입니다. 그리고 환도(環刀) 한 자루, 등자(鐙子)가 없는 말안장 1건입니다. 지금 이에 관아에 납부하기 위해 이날 보냅니다. 추동(秋洞)에 거주하는 최원재(崔元在)는 바로 동도(東徒)들의 수괴로 이른바 ‘대정(大正)’의 직임을 맡은 자입니다. 일전에 대흥(大興) 백성들에게 잡혀갔는데, 무슨 교묘한 언변으로 별난 농간을 부렸는지 처벌을 피하고 나와 끝내 징계받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추동에 사는 백성들을 위협하여 장차 재앙의 그물 가운데에 묶어 던져 버리려고 하여 추동의 백성들이 장차 버티기 어려울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그를 잡아와서 자백하게 하니 스스로 말하기를, “10여 년간 동학 수백 명에게 포덕(布德)하였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일삼은 것을 캐 보니, 다른 사람의 무덤을 파고 다른 사람의 집을 훼손시키며 다른 사람을 묶어 놓고 돈을 바치게 하는 등의 일에 매번 앞장섰습니다. 그리고 만약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는 자는 밟아 죽이네, 불을 지르네 하는 말로 위협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일단 동(洞)의 민가(民家)에 감시하에 잡아 두고서 관아에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어제 미시(未時)쯤에, 공주(公州) 신촌(新村)의 백성들이 배대일(裵大一)을 마을 안에 잡아 두고 사람을 시켜 급히 기별하기에 면의 백성을 보내 데려와서 또 동의 민가에 묶어 두고 또한 어떻게 처분할지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러한 연유로 첩보합니다. 갑오년(1894, 고종31) 11월 15일 묘시(卯時) 북하면장 홍순철(洪淳喆) [제사] 보고한 것 중에 창 한 자루는 잘 도착했는데, 환도, 말안장 그리고 수동(受洞)에서 옮겨 온 화포(火砲) 한 자루는 무슨 이유로 오지 않는 것인가? 동도(東徒)들이 혹여 오면 즉시 첩보한 대로 조사하여 찾아내 들여보내라. 그리고 최원재와 배대일에 관한 건은, 착실한 군인을 따로 정해서 모조리 속히 압송하고, 여러 가지 사무들은 모두 이전의 영칙(令飭)의 내용대로 별도로 자세히 살펴서 실행하되, 촌마을 사람들과 반드시 의지하면서 안정되기를 힘쓰도록 할 것. 15일 관(官) (서압) (『동학농민혁명신국역총서』11권,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2019, 81∼82쪽) 위의 내용은 1894년 11월 15일 묘시(오전5시∼7시)에 북하면장 홍순철이 청양현감에 보고한 내용이다. 주요 내용은 북하면에서 수거한 병기인 장창 1개, 환도 1자루, 말안장 1건을 청양현에 보낸다는 것과 추동에 거주한 동도 수괴 대정 최원재와 배대일을 잡아 두고 어떻게 처분할 것인지를 묻고 있다. 즉 북하면 차원에서 과거 동학에 참여했던 수괴 최원재와 배대일을 임의로 잡아 그 잘못을 따지고 있다. 당시 면 조직 차원에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일을 자체적으로 자발적으로 진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 보고서를 받은 청양현은 제사(백성이 관부(官府)에 제출한 소장(訴狀)·청원서·진정서에 대하여 관부에서 써주는 처분)를 통해 병기가 아직 도착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최원재와 배대일을 압송하라고 지시하고 있다. 이는 청양현이 북하면에서 자발적으로 동학농민군을 토벌하고 색출하는 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에 대해 인정하고 있는 것이기도 하다. 이밖에 중요한 내용은 동학농민군으로 참여한 사람들에 대해 그 재산을 몰수하고 있다. 1894년 12월 15일 〈북하면보〉에 따르면 “동적(東賊)의 물건은 관아에서 몰수하는 것이 자연스러운 이치이다”라고 하여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는 것이 매우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상에서 〈북하면보〉의 내용을 종합해보면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고 토벌하는 상황에 대한 보고, 동학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결성된 유회군의 활동, 북하면의 동학농민군 토벌 활동, 동학농민군의 재산을 몰수하고 그것을 사용한 현황 등이 〈북하면보〉의 주요 내용이다. 당시 동학농민군 토벌과 진압활동이 지방행정조직을 통해 매우 치밀하고 조직적으로 이루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으며, 또한 당시 지방행정조직이 체계적으로 운용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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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6 22:13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4) 〈남정일기(南征日記)〉, 〈갑오실기(甲午實記)〉

〈남정일기〉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남정일기(南征日記)〉 1894년 동학농민군 진압차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 영접사 이중하(李重夏)의 비망기로 ‘남정(南征)’이란 일기 제목에서 알 수 있듯이 남쪽 전라도 동학농민군 정벌 관련한 내용 중심으로 되어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조선에 진주한 청국군의 경로와 조선 정세에 대한 인식을 살펴볼 수 있다. 5월 1일 조선 정부는 공조참판 이중하를 대표로 하는 영접사를 파견하여 무기 수송과 통신ㆍ치안 등을 위한 인력과 양식, 우마와 선박ㆍ뱃사공 및 이에 소요되는 각종 비용 등 그들의 요구사항에 적극 협조하였다. 아산에 상륙한 청국군의 인력과 우마ㆍ양식ㆍ선박 제공 등과 관련하여 직명ㆍ용도별 동원 인원 및 금액 지출 내역 등을 매일매일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이중하는 서울을 출발하여 평택과 둔포를 지나 당일 저물녘에 아산 백석포에 도착하였는데, 아산현감과 온양군수ㆍ직산현감 등이 와서 청국 군함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이들과 함께 우마와 운송 선박 마련과 제반 응접에 관한 일들을 준비하는 한편, 각 읍에 각별히 경계하라는 훈령을 내렸다. 다음 날 인천 주재 청국 영사는 영접사에게 태원진 총병 니에시청(聶士成)과 직례제독 예지차오(葉志超)를 비롯한 청국 군대의 도착 일정을 설명하고 아산의 포구는 물이 얕은 까닭에 병선은 앞바다의 내도(內島)에 정박하고 작은 배로 운반할 것이라고 예시하였다. 이후 니에시청의 병선 1척과 소륜선 1척이 아산만에 도착하였다. 이중하는 작은 배로 병선으로 가 니에시청과 그 일행에게 위로와 문안의 뜻을 전하고 잠시 대화하였다. 니에시청 부대의 아산 상륙은 새벽 조수가 밀려 들어왔을 때부터 시작되어 작은 배로 군량과 군기를 운반하느라 종일 부산하였다. 니에시청도 군대를 거느리고 백석포에 내려 아산읍으로 들어왔다. 다음날 예지차오의 병함 1척이 내도의 앞바다에 도착하였는데 니에시청의 경우와는 달리 배와 말의 준비 문제로 상륙이 지연되는 상황이었다. 다음 날 아침 일찍 조수가 밀려올 때 예지차오의 대군은 배를 타고 백석포로 향했다. 이중하는 초토사가 ‘비류(匪類)’를 크게 이겨 도망가고 흩어졌다는 충청감사의 전보 내용을 예지차오에게 설명하고 ‘적도(賊徒)’들이 이미 흩어졌으니 진군할 필요가 없다는 뜻을 말하였다. 그러나 예지차오는 이를 따르지 않았고 니에시청은 내일, 자신은 모레 행군할 것이라고 답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며칠 만이라도 쉬면서 피곤함을 풀고 잠시 정탐한 사실을 기다린 후 행군할지 머물지를 결정하자고 완곡히 제안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공주에 도착하여 친히 적들의 형세를 살펴본 연후에 행군할지 말지를 결정하겠다’면서 일축하였다. 이중하는 ‘읍촌에서 짐을 질 백성들은 뽑아 군에서 필요한 땔감과 말먹이 등 각종 물건의 짐을 지도록 하는 것 등은 모두 값으로 쳐서 지급할 것이다’는 내용의 포고문을 내걸었다. 한편 예지차오도 별도로 전주의 농민군들이 흩어져 달아났다는 정탐 내용을 확인하였지만, 북양대신 리훙장(李鴻章)의 지시를 받은 후 수군과 육군의 거취를 정하겠다고 우리 측에 회답하였다. 전주의 동학농민군들이 철수했다는 조선 정부의 보고에도 불구하고 ‘적당(賊黨)은 그래도 몇몇 군데에 둔을 치고 모여 있다’는 전보를 받은 청국군 진영에서는 관원을 전주에 파견하여 상세히 탐지토록 하였다. 예지차오는 ‘여비(餘匪)가 아직도 많이 몰려 있다’는 전주 파견원의 정탐 보고에 따라 군사를 보내 그들의 근거지로 들어가서 ‘비도의 우두머리’를 잡아들이겠다고 하였다. 이에 대해 이중하는 ‘이미 흩어진 여비들은 저들 스스로 귀화할 것인즉, 이와 같이 사람을 파송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고 전하였다. 이중하의 건의에 따라 청국군은 당분간 아산 일대에서 머물고 있었다. 그러나 며칠 후 예지차오는 농민군 진압을 위한 출동을 결정하고 실행에 옮겼다. 그는 ‘비당(匪黨)이 아직도 장성ㆍ고부 등지에 남아있고 다시 방자하게 미쳐 날뛰고 있다’고 판단하고, 병사들을 진군시켜 이들을 쓸어버릴 것이라고 호언장담하였다. 이에 이중하는 지금 초토사를 철수시켰고, 남은 ‘비도’들도 이미 흩어졌으니, 근심할 것이 못 된다면서 정탐한 내용이 반드시 사실과 부합된다고 보기 어려우므로, 다시 정확하게 탐지한 후에 병사들을 진군시키자는 신중론을 여러 차례 피력하였다. 그럼에도 예지차오는 이미 북양대신으로부터 속히 ‘남비(南匪)’를 쓸어버릴 일에 대하여 전보로 영을 받은 것이 지엄하므로 감히 잠시도 늦출 수 없다고 일축하였다. 그 결과 니에시청으로 하여금 소속 병용 900명과 진마(陣馬) 100필을 거느리고, 각 영과 각 역에는 말 150필의 대기를 지시하고 전주를 향하여 출발시켰다. 이 기간 일본군의 인천 출병과 서울 도성 밖 진입상태에서 청국군 주력은 전라도 행을 중지하고 다시 아산으로 되돌아오면서 사태의 추이에 촉각을 세우고 있었다. 또한 예상되는 일본군의 남하에 대비하여 니에시청은 6월 13일 아산을 출발하여 성환역을 지나 다음날 진위와 수원 등지를 정찰하고 15일에는 평택을 거쳐 아산으로 되돌아왔다. 23일 새벽 니에시청은 일본군과의 본격적인 전투 즉, 성환 전투의 준비를 위해 성환으로 부대를 옮겼다. 당시 황현(黃玹)의 기록에 의하면 그 과정에서 서울로부터 삼남 가는 도로변의 성환 100여 개 마을이 청국군에 유린되었고 노인과 어린이의 사망자가 이어졌다고 한다. 남정일기는 6월 27일 성환전투까지 기록하고 있다.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문서이다. 〈갑오실기〉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갑오실기(甲午實記)〉 1894년 3월부터 12월까지의 중요 사실을 정부 입장에서 날짜별로 기록한 것으로 필자는 확인할 수 없다. 동학농민혁명 관련 내용은 3월 26일 자 의정부 초기부터 시작한다. 최근에 호서ㆍ호남ㆍ영남 등지에서 협잡의 부류들이 무리를 모아 멋대로 못된 풍습을 자행하고 난동을 부린다고 하니 3도의 관찰사에게 명하여 엄하게 단속하고 만약 고치지 않고 예전과 같은 폐단이 있다면 그 괴수를 잡아서 효수해 경계하고 뒤에 보고하도록 하라는 내용이다. 그 결과 29일 장위영 영관 홍계훈을 전라 병사에 제수하고 현지에 파견토록 하였다. 4월의 기사는 양호초토사 홍계훈의 호남지역 파견, 고부민란과 군수 조병갑의 도주, 안핵사 이용태의 파견과 불법 행위 등을 거론하고 있다. 이후는 고부ㆍ금구 농민군의 활동과 전주 점령 내용까지 이어진다. 5월 1일에는 청국 원병의 조선 파견 요청에 관한 조정 내의 논의 내용을 상세하게 기술하고 있다. 원임 대신 입궐 시 고종은 청국군의 구원을 요청하는 일로 하교하면서, “총리 위안스카이(袁世凱)가 말하기를 만약 전보로 통지하면 며칠이 안 되어 군함이 내박한다”고 하였다. 이에 여러 대신이 모두 사세가 어쩔 수 없다는 뜻으로 상주하자 고종은 일본이 같이 움직이지 않을까 걱정하였다. 그런데 궁궐에서 물러난 뒤 이 일로 민영준이 영돈령부사 김병시에게 편지와 사람까지 보내어 문의하자 “비도(匪徒)의 죄는 비록 용서할 수 없지만, 모두 우리 백성입니다. 어찌 우리 병사로 소탕하지 않고서 다른 나라 병사를 빌려 토벌하면, 우리 백성의 마음이 어떠하겠습니까? 민심이 따라서 쉽게 흩어질 것이니, 이것은 정말 신중하게 살펴야 합니다”라면서 잠시 관망하자는 의견을 피력하였다. 이에 민영준이 궁궐에 들어가 이 말을 상주하니, 고종은 “이 논의가 매우 좋다. 그러나 닥쳐올 일을 헤아릴 수 없는 데다 여러 대신들의 논의 역시 (청병의)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 마땅하니, 청관 조회의 발송을 재촉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성기운을 위안스카이에게 보내 이 내용을 전달하니, 위안스카이는 곧장 톈진으로 전보하여 며칠 되지 않아 청병 군함이 연안에 정박하고 예지차오가 2천여 병을 거느리고 아산에 상륙하였다는 것이다. 6월의 기사에서 주목되는 점은 일본군의 경복궁 점령 관련 내용이다. 갑오실기에 따르면, 6월 21일 “새벽에 일본 병사 몇천 명이 와서 경복궁을 지키고 영추문 밖에 이르렀는데, 자물쇠가 열리지 않자 나무 사다리를 타고 궁궐 담장을 넘어 들어왔다. 또 동소문은 불을 질러 돌진하여 자물쇠를 부수어 문을 열고, 임금이 계시는 집경당(緝敬堂)의 섬돌 아래로 곧장 들어와 빙 둘러 호위하고 각각의 문을 지켜서고 조정 관리와 액속(掖屬)은 모두 들어오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평양 병정 중에 신남영(新南營)에 있던 자는 곧장 건춘문으로 들어와서 일본 병정을 향해 발포하였다. 안경수는 안에서 나와 서둘러 중지시켰다. 평양 병사는 분한 마음으로 군복을 벗고 나와서 돌아갔다”고 되어 있다. 이로 보면 최초의 교전은 사다리를 타고 궁을 넘은 일본군과 수비병 간에 궁 안에서 시작된 것은 분명하다. 그 과정에서 이미 궁 안에 있던 안경수가 일본군과 내응하여 전투 확산을 저지하였던 사실을 알 수 있다. 이후부터 8월까지의 기록은 군국기무처 설치와 이 기구에서 입안 시행한 각종 개혁안과 정부의 직제 개편 내용 등에 관한 것이다. 원훈(元勳)이자 전 총리대신 이노우에 가오루(井上馨)를 조선에 공사로 파견하였는데, 총리대신에게 전임 공사 오토리 게이스케(大鳥圭介)가 궁궐을 핍박한 것은 매우 불경한 것이었고 지금까지의 의안 대부분은 급하지 않은 일을 미리 행한 것 뿐으로 매우 한심스럽기에 대개 ‘개화에 관한 법’은 하루 이틀에 급하게 논의할 수 없고 점차 실시하고 서서히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고 한다. 10월의 기사는 성주와 하동의 소요로 인한 민가 소실, 수원 및 용인 동학농민군 지도자 효수 및 수색 체포 처단, 법부 협판 김학우 암살 등의 내용이다. 이어 충청도와 전라도ㆍ경상도에 위무사를 파견하여 백성들을 달래게 한 내용도 상세하다. 11월에는 정부군과 일본군의 호남 농민군에 대한 연합 토벌 작전과 지역별 농민군 체포 차단 상황, 공주 효포전투에 관한 선봉장 이규태의 보고, 회덕전투에 관한 교도 영관 이진호 보고, 직산과 목천ㆍ공주ㆍ노성ㆍ논산 농민군 체포 처단에 관한 선봉장 보고 등을 기록하였다. 12월에는 패잔 농민군 체포 처형, 금구 원평 농민군의 동향, 홍산ㆍ서천 농민군 토벌과 함께 김개남 처단, 전봉준 체포 압송 소식을 기술하고 있다. 갑오실기에는 청일전쟁과 청국군의 동향도 상세하게 언급하고 있다. 예지차오는 부하 병사 다수를 이끌고 관동과 관북으로 우회 퇴주했고 흩어졌던 청국군은 평양에서 합류했다. 원래 청국군이 압록강을 넘어 평양으로 들어올 때 의주부터 평양에 이르는 여러 고을의 백성들이 도시락밥과 국을 싸들고 와서 맞이하였고 쌀과 소고기 등 양식이 떨어지지 않았다고 할 정도로 처음에는 우호적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특히 웨이루쿠이(衛汝貴)의 성자군(盛字軍)은 오합지졸로 통솔이 되지 않았고, 그들이 지나는 곳은 노략질로 넘쳐나 백성들이 견딜 수 없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는 이 시기 평양 이북부터 의주까지의 지역 사정을 ‘십실구공(十室九空)’의 형세로 비유하고 있다. 당시 평양은 인구 2만여 명의 도시로 1만 5천여 명인 청국군의 군량과 군수 등을 대기는 쉽지 않았고 질고는 상상을 초월하였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국제한국학연구소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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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1 12:14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3) 1894년 이후 중범죄의 처벌은 어떻게 이루어졌나? -〈정배안〉 〈중범공초〉에 실린 관료층과 민중에 대한 차별

〈정배안〉는 1895년 3월경에 작성한 것으로 1885년부터 유배된 자의 죄목과 유배지 등이 기록된 책이다. 원 제목은 〈도유배안(島流配案)〉(1책)이며, 내지에는 ‘정배안’이라고 했고, 대조선국 법부 형사국의 인신이 찍혀있다. 조선정부는 새로운 재판소 제도가 시행하기 이전에 중범죄 죄인의 경우 유배형에 처하도록 하였다. 첫머리에는 평안도 용천부에 유배된 백은수(白殷洙)에 대한 기록이지만, 이는 1885년 을유년의 백성 침학죄로 유배된 것이기 때문에 농민전쟁과는 관련이 없다. 3번째 기록된 경상도 금산군에 유배된 이용태(李容泰)로부터 관련 사항이 등장한다. 그는 1894년 4월 21일 승정원의 전언에 의해 유배형에 처한 것으로 “고부 안핵사로 전내(傳內)의 명을 받아 안핵(按覈)하라는 법의(法意)가 있었지만, 하등 긴급하지 않고 아무런 사계(查啓)도 하지 않고 오히려 소요를 일으켰으며 이미 분함과 잘못을 많이 저질렀”다고 사유를 설명하고 있다. 다음으로 경상도 거제부에 안치된 김문현(金文鉉)의 경우, 5월 14일부터 승정원의 명에 의해 위리안치(圍籬安置)하여 가극(加棘-귀양간 사람의 집 둘레에 가시나무를 둘러서 왕래를 하지 못하게 함)의 벌을 받았다. 그는 전라감사로 있으면서 농민봉기를 막지 못하고 도리어 전주성을 버리고 월경했기 때문이었다. 이렇게 가중 처분된 이유는 김문현이 직접적으로 전주성 함락의 책임을 지게 된 것이었지만, 그해 5월 20일에 이설(李偰)의 상소에 의하여, 전운사 조필영, 균전사 김창석, 전고부군수 조병갑, 안핵사 이용태, 전라감사 김문현, 영광군수 민영수 등 처벌이 가중되었다. 고부민의 원흉이었던 고부군수 조병갑에 대해서도 5월 17일 엄형 1차로 신장(訊杖) 30도 후에 원악도 안치의 죄를 처분하였다. 이어 조만승, 민영준, 민형식, 김세기, 조필영, 임치재, 이소영, 신학휴 등이 수많은 부패관료들이 그해 말까지 계속해서 처벌되었다. 전총제사 민응식과 전전 개성유수 김세기도 포함되었다. 또한 오석영(吳錫泳)의 사례도 눈에 띈다. 그는 전 성주목사로 성을 비워 비적들에게 넘겨준 죄로 갑오년 11월 10일에 귀양을 보내졌다. 정배안의 기록은 1895년 3월이후에도 추가되어 4월 20일 제주 등지에 유배를 떠난 종신죄인 서주보 등 9명에 대한 처분을 기록하였지만, 나머지 부분은 백지로 남아있다. 당시 유배형을 처벌하게 되는 사유를 설명하면서 고종은 반복적으로“이것은 내가 백성을 위하는 것이고 또한 세신(世臣)을 보전하려는 고심에서 나온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러한 국왕의 태도는 관료들을 배려하고자 하는 차별적인 언사였다. 이들 부패무능 관료들의 유배형은 1895년 6월 27일 전격 중단되었다. 고종은 도형(徒刑)과 유형(流刑)의 죄인들인 민영준을 비롯하여 조병식, 민영주, 민형식, 김세기, 민병석, 이용태, 김문현, 이용직, 조필영, 조병갑, 민응식, 김창렬, 조만승. 임치재, 서정철, 심능필, 조준구, 민영순 등 19명외 260명을 방송(放送)하는 조치를 내렸다. 이는 갑오개혁의 출범 1주년을 맞이하여 취한 대사면의 결과였다(〈고종실록〉 1895년 7월 3일 기사). 당시 사안을 한 걸음 들어가 보면, 내부대신서리 유길준이 ‘대소죄인 방석하는 사’라는 안건을 제의하였다. 1895년 4월 1일 이전(신식 재판소제도 시행)에 국사범 이하 정치상 관계 및 기타 유형(流刑)에 처한 자는 모두 석방하자는 안이었다. 이렇게 되면 농민전쟁과 관련되어 재판을 받거나 구속된 농민들도 석방조치에 포함될 수 있었다. 그러나 법부대신 서광범은 이에 반대하여 적용 예외대상을 절도, 강도, 통간, 편재 등 파렴치한 범죄자 이외에도 모반과 살인자를 포함시켰다. 법부는 주로 유배된 주요 관료들만에 한정하는 사면조치를 취했다(〈구한국관보〉 106호, 1895년 7월 5일, 1072∼1073쪽). 결과적으로 유배형 관료의 석방조치는 1894년 동학농민군이 죽음을 무릅쓰고 제기했던 조선국가의 정치 개혁과 부패 관료의 청산과제가 1년 만에 물거품으로 돌아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다음 자료는 〈중범공초(重犯供草)〉다. 이는 1895년(고종 32)부터 1899년(광무 3)까지 전국 각 지역에서 발생한 민요(民擾) 등에 가담한 중범(重犯) 죄인을 심문한 공초 자료이다. 모두 9책으로 되어 있다. 중범죄 사례는 대부분 민란 관련, 사주(私鑄)‚ 사굴인총(私掘人塚) 등의 죄와 관련된다. 동학농민혁명과 직접 관련된 기록은 제5~6책, 그리고 9책에 수록된 부분이다. 먼저 제5책은 황해도 지방의 동학 잔존 세력의 병란 모의와 관련된 기사이다. 장연군 신화방(薪花坊) 산포수를 조직하여 다시 봉기를 일으키고자 한 것이다. 주모자는 백락희(白樂喜)와 김재희(金在喜) 등이었다. 백락희는 당시 38세로서 1894년 7월 동도(東徒)에 들어가 교장 명색으로 활동하다가 1895년 봄에 귀화하였다가 그해 11월에 산포수 도반수인 김재희와 공모하게 된 것이었다. 이들은 1895년 12월 12일에 해주 김창수(金昌守) 가를 방문하여 김형진(金亨鎭)을 만나 모의하게 되었다. 김형진은 청국 심양에 가서 마대인(馬大人)을 만나서 심양자사 연왕 이대인(李大人)에게 ‘진동창의(鎭東倡義)’인신과 직첩을 받아 조만간 병사를 거느리고 출래할 것으로 알려주었다. 그리하여 자신은 평안, 전라, 황해 3도 통도총관이 되고, 백락희는 장연 선봉장이 되어 각군병을 이끌고 취회하여 먼저 군기를 탈취한 후 관장과 관속을 도륙해서 오면, 검단방 유학선, 안악 대덕방 최창조, 문화 차담동 명부지 이가(李哥) 등과 힘을 합쳐 해주부를 소탕하겠다는 계획이었다. 다음에는 황해도 제군을 소탕하면 청병이 올 것이니 이와 합세하여 도성을 도륙한 후에 정(鄭)씨로서 왕을 삼으면 대사를 다스릴 수 있다고 선동하였다. 봉기예정일은 1896년 1월 초 1일이었으나 사전 탄로가 났다. 그래서 붙잡힌 백락희를 비롯하여 전양근(24세), 백기정(38세), 김계조(41세), 김의순(30세), 백락규(31세) 등 6명 공초가 수록되어 있다. 6책에는 해주부 장연군수 염중모(廉仲模)의 보고서와, 앞서 수록된 공초가 중복되어 첨부되어 있다. 황해도 장연 일대의 봉기 모의는 이전 정감록을 차용하여 대규모 민란을 일으키려고 했던 1812년 홍경래란과 유사한 형태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전쟁의 2차 봉기가 황해도 지역에서 실패한 이후 황해도 장연군 일원에서 동학의 잔당 인사들이 대규모로 반정부 봉기를 추가로 계획하고 있었던 정황을 알 수 있다. 제9책은 〈흥덕난민공초(興德亂民供草)〉라는 제목이 붙여진 자료로 1899년 1월 7일 장성군수 김성규(金星圭)가 흥덕군 민란을 조사하여 관찰사에게 보고한 기록이다. 1898년 12월 28일 새벽에 난민 수백 명이 흥덕 동헌에 난입하여 일으킨 사건을 수서기 박우종(朴佑鍾)이 조사하였다. 보고서에는 민란 두목 이화삼(李化三)과 수종 이이선, 이복환, 정계술, 박기수, 채기엽 등 6명을 전달 30일에 해군의 관속과 각촌민이 합세하여 순교청에 잡아들였고, 이어 31일에 난민이 해산되었다고 간단히 요약되어 있다. 봉기의 주모자는 이화삼이었다. 그는 당시 서울에서 진행되었던 만민공동회를 모방하여 민회(民會)를 개최하였다. 그는 “흥덕 원(군수)을 여기에 두고 재판하는 게 가(可)하냐, 월경을 시키고(군수를 내쫓고) 우리거지(행동거지) 공사(公事)하는게 가하냐”는 극단 질문을 해서 흥덕군민들을 선동하여 마침내 봉기를 일으켰다. 이 공초 내용은 주로 주모자들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지만, 이후 미흡한 사후 조처로 인하여 5월 4일 흥덕민란을 재차 일어나기도 했다. 1899년초 흥덕민란의 주모자들은 ‘갑오동학여당(甲午東學餘黨)’‘갑오누비(甲午漏匪)’라고 지칭되듯이, 1894년 동학농민봉기 이후 잔여세력들이었다. 이들은 서양 종교 영학(英學)을 이용하여 고창과 고부, 흥덕지역을 거점으로 고창, 고부 등지에서 세력을 확대하고 동학농민 재봉기를 잇고자 하였다. 이처럼 보국안민과 척왜양의 구현이 여전히 미완의 농민적 개혁이념이라는 것을 확인해 볼 수 있다. 앞서 소개한 정배안과 더불어 중범공초는 모두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의 경우, 실록을 편찬하기 위해 별도로 정서한 필사본이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중범공초〉 9책 흥덕민란에 대한 정부 보고서. 서울대 규장각 제공 왕현종 연세대 역사문화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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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2 13:3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2) 경상도 상주와 김산소모영의 동학농민군 진압 자료인 〈소모사실〉

〈소모사실(召募事實)〉이라는 동일한 이름을 붙인 사료가 1895년에 경상도 상주와 김산 두 지역의 소모영에서 나왔다. 상주의 〈소모사실〉은 상주 소모사 정의묵(鄭宜默, 1847~1906)이 상주소모영을 설치해서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기간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건곤(乾坤) 두 권의 자료이고, 김산의 〈소모사실〉은 김산 소모사 조시영(曺始永, 1843~1912)이 김산소모영을 설치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을 지휘한 기간에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단권 자료이다. △소모사 선임 과정 소모사는 왕조정부가 외적이 침입하거나 병란이 일어나서 위기에 처했을 때 민간에서 사람들과 재물을 모아 대처하도록 군권을 부여한 임시 관직이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몇 차례 소모사를 임명한 사례가 있었다. 먼저 영조대에 이인좌의 난을 진압할 때 민간 자원을 동원하기 위해 소모사를 임명하였다. 19세기에 들어와서는 순조대에 서북지역에서 일어난 홍경래 세력을 진압하기 위해 소모사를 임명하였다. 가장 많은 소모사가 임명된 것은 1866년 병인양요 때였다. 불과 28년이 지난 1894년 9월에 다시 소모사를 임명한 것은 왕조정부가 삼남을 중심으로 거의 전국에 걸쳐 대규모로 봉기한 동학농민군을 자체 무력만으로 진압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는 9월 22일 임시 군사지휘부인 양호도순무영을 설치해서 경군을 파견하도록 하였다. 그 직후 경기도의 전감역 맹영재를 소모관에 임명하였고, 경상 감영의 남영병을 이끌던 대구판관 지석영은 토포사에 임명하였다. 호남의 장성부사 이병훈은 소모사를 겸하도록 했고, 금산유학 정두섭도 소모관에 임명하였다. 9월 29일에는 삼남 요지에 각각 2명씩 현직 지방관을 선정하여 소모사에 임명하였다. 영남소모사에는 창원부사 이종서와 함께 상주의 향리에 있던 전 승지 정의묵을 선임하였다. 상주 목사는 9월 22일에 상주 읍성이 동학농민군에게 점거될 때 도피해서 공관 상태였다. 영남 북서부 일대는 8월 말부터 격동하고 있었다. 예천에서 동학농민군과 읍내 민보군이 격돌하여 공방전을 벌였고, 9월 18일 동학 교단의 기포령 직후 상주와 선산 읍성을 동학농민군이 점거하였다. 그러자 상주 낙동과 태봉, 선산 해평에 설치된 일본군 병참부의 주둔병이 기습해서 읍성에서 물러나게 되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상주성에서 물러난 동학농민군 지도자를 집중 추적해서 경내를 안정시켰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이 임명된 날은 11월 21일로 일본군과 남영병이 동학농민군을 평정해서 경상도 지역에서 봉기 상황이 종료된 시기였다. 바로 그때 충청도에서 우금치전투를 치른 손병희 통령의 북접농민군이 전라도를 거쳐 김산 인근까지 북상해왔다. 김산과 상주소모영이 최대 위기에 처한 것이었다. 두 편의 〈소모사실〉에 실린 마지막 문서들은 그 내용을 생생하게 전해준다. △〈소모사실〉의 공문서와 소모영의 관할 군현 상주의 〈소모사실〉 건은 10월 16일부터 12월 11일까지 주고받은 92건의 공문서를 모은 것이고, 〈소모사실〉 곤은 12월 12일부터 다음해인 1895년 정월 25일까지의 130건을 모은 것이다. 김산의 〈소모사실〉은 11월 21일부터 1895년 정월 22일까지 주고받은 138건의 공문서를 모은 것이다. 김산소모영에서 공문서를 주고받은 날은 모두 56일이고, 상주소모영은 모두 69일이다. 상주소모사의 임명 날짜인 9월 29일보다 17일이나 늦게 공문서 편집이 시작된 것은 임명장이 뒤늦게 왔기 때문이다. 경상도의 동학농민군 진압을 위한 군권 부여자는 더 임명되었다. 창원부사 이종서, 그리고 거창부사 정관섭도 소모사가 되었고, 대구판관 지석영과 인동부사 조응현은 토포사가 되었다. 따라서 책임 소재를 위해 관할지역을 정할 필요가 있었다.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경상감사 조병호를 만나서 이를 제의하였고, 이에 따라 경상감사는 60개 군현을 나누어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북부 15개 읍, 대구토포사 지석영은 대구에 인접한 12개 읍, 인동토포사 조응현은 중부의 9개 읍, 거창소모사 정관섭은 지리산에 인접한 12개 읍, 창원부사 이종서는 남부의 12개 읍을 분장하도록 했다. 상주소모사는 상주 함창 문경 의성 용궁 예천 예안 안동 풍기 봉화 순흥 영천 청송 진보 영양을 관장하였다. 이런 조치 직후 다시 조시영이 김산소모사에 임명되자 인동토포사가 관할하던 9개 읍인 인동 칠곡 선산 개령 김산 군위 의흥 비안 성주 고령과 의흥을 관장하게 하였다. 1894년에 전국에 임명된 소모사 소모관 토포사 조방관 등이 많았지만 현재 전해지는 공문서집은 오로지 상주와 김산소모영에서 편찬한 것뿐이다. 상설이 아닌 임시로 운영된 기관은 관련 문서를 남겨둘 필요가 있었다. 활동 실적을 알리면서 운영 경비를 적절하게 사용했다고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상주소모영의 기록은 처음부터 철저히 편집해서 상주 〈소모사실〉의 내용은 매우 중요하다. 양호도순무영 등에 보고한 문서를 남김없이 수록하여 〈갑오군정실기〉나 〈고종실록〉 등에 들어가지 않은 여러 사건을 보여주고 있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은 먼저 소모영을 운영한 상주의 선례를 직접 알아본 다음에 김산소모영을 설치하였다. 공문서를 보관해서 책자로 만드는 내용도 직접 들었을 수도 있다. △〈소모사실〉의 주요 내용 상주 〈소모사실〉에 전재한 공문서를 왕래한 대상에 따라 모아보면, 다음 표와 같이, 상주목과 각 면리에 보낸 공문이 91회로 가장 많다. 상위 기관인 의정부와 순무영 그리고 군무아문과 주고받은 공문은 14회이고, 경상감영과는 36회를 왕래하였다. 이 자료에 전재된 소모영막하파임기(召募營幕下爬任記)와 소모절목, 그리고 군문규획(軍門規劃) 등은 소모영의 편제와 운영 방침에 관해 자세히 알 수 있다. 김산 소모영의 편제와 운영 등을 전하는 상세한 기록은 없다. 그런 까닭에 이 내용으로 추정해야 한다. 김산 〈소모사실〉에 전재한 공문서의 왕래 대상은 상주와 다르다. 북접농민군이 김산으로 행군해올 것에 대비해서 추풍령을 방어하던 군관과 병정에게 보낸 공문이 눈에 띈다. 김산소모영 활동 기간에서 가장 황급하게 보낸 시기가 북접농민군 대군이 경상도로 들어올 것을 우려하던 때이다. 공문의 표현을 보면 그 실상을 짐작하게 한다. “전라도 무주의 적당 수만 명이 둔취하여 이미 황간읍의 성을 함락시키고 여러 날 청산현 지역에 진을 치고 있다가 장차 괘방령과 추풍령의 두 재 사이로 향하려 하는데, 그들 명성과 위세가 워낙 거세므로 비단 누차에 걸쳐 해당 읍에서 구원을 청할 뿐이 아니고 이 적당이 만일 재를 넘는다면 재 밖의 모든 군현은 어떤 지경에 이를지 모릅니다.” 김산소모사 조시영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이 공문을 통해 다른 의견을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 흥미롭다. 북접농민군을 막기 위해 추풍령에 경상도 각 군현의 민보군을 집결시켜야 한다고 김산소모사 조시영은 주장을 했고,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상주성이 가장 위험하니 보은에서 상주로 오는 길목을 집중해서 지켜야 한다고 했다. 결국 합의를 하지 못하고 각 소모사가 관할하는 군현의 민보군을 불러들이게 되었다. 상주에는 안동 민보군 370명, 예천 민보군 516명, 용궁 민보군 21명, 함창 민보군 20명, 대구 남영병 50명이 집결하였다. 외지에서 온 관군과 민보군이 모두 977명이었다. 여기에 상주 민보군을 합하면 그 수는 적지 않았다. 김산에서 추풍령을 막던 병력은 규모가 정확하게 파악되지 않는데, 대구 남영병 150여 명과 선산포군 150명, 개령포군 95명, 인동포군 100명, 성주포군 10명 등 500여 명으로 나온다. 북접농민군이 보은으로 행군하자 추풍령 방어군은 이들을 뒤따라서 보은까지 들어갔다. 김산소모사 조시영이 경영(京營)에 보낸 공문에는 김산의 실상이 잘 드러난다. 김산은 교통의 요지로 보은과 영동, 무주와 진안 등과 쉽게 연결된다. 동학 교단의 영동포 등의 조직이 김산에 이어지고, 무주와 금산 등과 오가면서 김개남 장군과도 연계된 기록이 나온다. 김산 〈소모사실〉에 그러한 내용이 같이 전해지고 있는 것이다. 보은의 동학과 연결해서 활동하던 김화준과 김순필은 동학교주 최시형의 혈당이라고 하였다.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는 증언이다. 보은을 거점으로 충청도와 경상도에 조직이 있는 충경포가 활동했는데 김산 일대에서 확인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김산 동학농민군의 거두가 4인인데 그중 5 ~ 6만명을 거느린 남홍언과 편사흠은 “전라도 한 도는 거의 다 성을 함락하였고, 충청도와 경상도 두 도는 장차 도륙(屠戮)할 것이니, 통일하는 계획은 손바닥을 뒤집는 것처럼 쉽다.”라고 전하고 있다. 특히 이들은 남원에 주재하고 개남왕을 칭하던 김개남 처소에 가서 신하라 일컫고 이런 뜻을 담은 소초(疏草)를 올렸는데 그 글을 그들의 집에서 찾아냈다고 하였다. 전봉준 장군과 관련된 내용도 나온다. 무주에서 활동하던 전천순과 김원창을 체포했는데 이들은 ‘전봉준의 폐부(肺腑) 역할을 하는 괴수로, 영남에 출몰하면서 기포를 독려’했다고 하였다. 상주 〈소모사실〉은 개인 소장이고, 김산 〈소모사실〉은 동학농민혁명 기념재단에서 소장하고 있다.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는 공공기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김산 〈소모사실〉이 등재되었다. 신영우 동학농민혁명연구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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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5 17:1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1) 〈이복영일기(李復榮日記)〉, 〈남유수록(南遊隨錄)〉과 이용규(李容珪)의 〈약사(若史)〉

△〈이복영일기(李復榮日記)〉 이 자료는 부여의 유생 소정(小亭) 이복영(혹은 李遇榮 : 1870~?)이 1889년부터 1934년까지 45년 동안 매일의 대소사를 기록한 일기이이며, 전체 39책의 방대한 분량이다. 이 가운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내용은 〈일기 속5(續五)〉 제6권(1893.1.1~4.8), 〈남유수록〉 제7권(1893.4.9~4.19), 제9권(1893.8.30~1894.4.29)과 〈일기 제10〉 (1894.4.29.~1895.윤5.25)에서 기록되어 있다. 일기에는 그가 살고 있는 부여 대방면(大方面)에 동학농민군 도소가 설치되는 과정과 동학농민군의 활동뿐만 아니라, 이웃한 홍산, 공주 등 충남 일대 농민군의 활동과 집강소의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다. 먼저 1894년 6월 27일조에 호남에서 동학이 크게 일어난 사실을 기록하고 있으며, 6월 29일에는 인근 남당에서 농민군 수십 명이 말을 타고, 창과 칼을 가지거나 총을 쏘고 들어오자 이복영이 이웃 마을로 피신한 사실을 기록하였다. 이곳에서 농민군 도소가 설치된 것은 7월 12일이었다. 흥미로운 것은 농민군 도소가 이 지역 ‘유지’들과 동학농민군 간의 협력적 관계 속에서 설치되었다는 점이다. 마을의 유지인 민참의(閔參議)와 임함종(林咸從, 함종 도호부사를 지낸 임씨) 등이 논의하여 농민군들에게 후강(後岡)에 도소를 설치하여 다른 우환에 대비하고자 했고, 농민군들도 이러한 의견에 동의한 것이다. 농민군들은 후강의 산 위에 차일(遮日)을 겹으로 쳐서 도소를 설치한 후 총을 쏘고 진법을 연습하며 모양을 갖추었다. 이때 농민군 도소에서는 군중들이 모여 주문(呪文)을 암송하는 소리가 사방의 마을에까지 들렸다고 한다. 도소를 주도한 농민군은 접주 장봉한(張鳳翰)과 접사 최천순(崔天順)이었다. 장봉한 등의 농민군은 산송(山訟), 고리대 및 소작관행 등을 ‘합리적’으로 조정해나가는 등 농민군과 마을 ‘유지’ 간의 중재 역할을 충실히 수행해나갔으며, 일기에는 이러한 사실들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예컨대 인근 마을의 농민군이 이복영의 집에 쳐들어와서 지난해에 바쳤던 지대를 돌려달라고 하자, 장봉한이 나서서 상황을 정리해주기도 했다. 물론 이 마을과 이웃 마을에서 농민군들의 다양한 토재 활동 등도 일어났으며, 이에 대해서도 많은 내용이 서술되어 있다. 집강소의 권력은 접주, 접사, 접동들로 구성된 집행 실무기관과 농민군의 대중집회인 도회(都會)라는 의결기관으로 이원화되어 있으며, 집강소 등 농민군 조직의 운영방침은 농민군 전체집회인 도회에서 결정되었다. 접주, 접사들은 그러한 방침 하에서 주로 경제적 문제 등 각종 분쟁에 대한 중재자로서, 나아가 일정 범위에서의 재결권을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들도 일기에 기록되어 있다. 예를 들어, 7월 24일 이 지역 농민군들은 대방면 가속리 장터에서 농민군 전체 집회인 도회를 열어 접주, 접사들의 타협적인 행위를 비판하고, 도소를 가속 장터로 옮긴 사례도 있었다. 한편 〈남유수록〉에는 제2차 봉기 때 전봉준과 합세하여 공주 전투에 참여한 이유상(李裕尙)에 대해 흥미로운 몇 가지 사실을 전하고 있다. 8월 1일조에는 이유상(李裕尙)이 논산 건평(乾坪)에서 민준호(閔俊鎬)가 유회를 모으고 진법을 가르친다는 소식을 듣고 달려와서 토왜보국(討倭報國)하자고 권했으나, 민준호는 본디 그럴 마음이 없었기 때문에 거절하자 이유상은 추종자 백여 명을 거느리고 떠났다고 하였다. 10월 22일조에는 이유상이 전도사(前都事)로 정산 사람이며 원래 전봉준 휘하의 논산 건평(乾坪) 접주였는데, 유회를 가탁하여 무리를 모아 전봉준과 합세하였다고도 하였다. 부여 인근 충청도 지역 농민군 활동을 잘 알려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연세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용규(李容珪)의 〈약사(若史)〉 이 책은 공주 유생 이용규(1850~?)가 1888년(고종 25)부터 1897년(광무 원년)까지 매일마다의 대소사를 기록한 일기이다. 모두 필사본 4책으로 되어 있는데,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내용을 담은 갑오년 부분의 내제(內題)에는 〈甲午 日史 七〉로 되어 있어서 연도별로 분책되어 있던 일기를 한 데 모은 것임을 알 수 있다. 일기의 내용은 그리 풍부하지 않으나, 매년 말 그해 전체의 세평(歲評)에 볼만한 내용들이 많이 들어있다. 먼저 〈癸巳 日史 六〉의 마지막 부분에 1893년의 사정을 요약적으로 정리를 해둔 세평을 보면 흥미로운 기사들이 적지 않다. 그 가운데는 우선 1893년 3월(음력)에 일어난 보은집회에 대한 내용이 있다. 이용규는 보은집회 당시 7만여 명의 동학교도들이 모였고, 이를 해산하기 위해 조정에서 선무사 어윤중을 보낸 사실, 또 홍계훈에게 300명의 병사를 거느리고 가서 동학교도들을 해산시켰다고 한 사실 등을 기술하고 있다. 이어 동학교도들과 함께 서교(西敎)가 양호 지역에서 확산되어 날마다 달마다 번성해져 간 사실을 전하면서 몇 년 전에 프랑스와 맺은 조약 가운데 천주교를 전교하는 선교사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조항이 들어 있었기 때문에 수령들이 천주교도들로부터 모욕을 당하여도 금지할 수 없게 된 사정을 개탄스러워하며 기록하고 있다. 또 당시 빈발하던 ‘민요(民擾)’의 원인과 양상,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요인 등에 대해 일목요연하고 정리해 두고 있다. 곧 민요는 백성들이 방백 수령들의 부당한 수탈을 견디지 못하여 일어나는 것이며, 한 사람이 부르짖으면 수백 수천 명이 모여 관아를 공격하여 수령을 쫓아내거나 혹은 두들겨 패서 상처를 입히는 것이라고 하였다. 또 무리가 결집하여 해산하지 않으면 안핵사(按覈使)를 파견하여 그들의 청을 들어줌으로써 비로소 해산할 수 있었기 때문에 동서남북 어디에도 민요가 없는 고을이 없었다고 하였다. 1894년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먼저 1894년 2월 16일조 상단에 의정부 초기(草記)를 인용하면서 ‘고부민요(古阜民擾)」에 대해 기록해두고 있는 점이 눈에 띈다. 또 4월 28일조에는 새로 부임하는 전라감사 김학진(金鶴鎭)이 완영(完營)으로 내려간 일, 5월 8일조에는 완영의 농민군이 귀화를 핑계로 빠져나와 태인 지방으로 향하고 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7월 8일에는 동학농민군이 이용규의 집에 들이닥쳐 400량을 빼앗아 갔다는 사실, 7월 24일부터 동학농민군이 공주 대교(大橋)에 모였으며 29일에는 궁원에서 대도회(大都會)를 설치했다는 사실 등 당시 공주 인근에서 벌어진 농민군 활동과 관련한 사실을 간략하게 기록하고 있다. 또한 갑오년 세평에서는 동학농민혁명과 관련한 주요 사실들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4월에 신임 전라감사로 발령받은 김학진이 전주 인근에 도착하고도 겁을 먹어 감히 들어가지 못하고 여산(실제로는 삼례)에 이르러 체류하였다가, 전봉준이 전주성을 떠난 후에야 비로소 감영에 들어간 일을 전하고 있다. 특히 세평에는 집강소와 관련한 흥미로운 내용들이 적지 않다. 예컨대 전봉준은 귀화하였다고 일컬으면서 단신으로 감영에 들어와 감사의 일을 맡아 수행하였는데, 순영의 관문이나 감결(甘結)은 반드시 전봉준의 결재를 받은 후에야 열읍으로 보내어 행하도록 하였음을 전하고 있다. 또 전봉준이 여러 날 행정을 실시하면서 ‘형살(刑殺)은 없었으나 양호의 큰 화가가 양성(釀成)되었다’라고 하여 집강소시기에 대한 총평을 내리고 있다. 〈약사〉는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배항섭 성균관대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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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5 19:46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30) 염기(廉記)

염기(廉記)란 염탐 기록을 의미한다. 1996년 편찬된 〈동학농민전쟁사료총서〉에 수록된 〈염기(廉記)〉는 1900년 경자년(庚子年) 10월 전라남도 순천(順天)·여수(麗水)·광주(光州)·영광(靈光)·담양(潭陽) 등지의 효자(孝子)와 토호(土豪)·향유(鄕儒)들의 성명 및 이들의 민간에 대한 토색을 염탐하여 행패를 부리는 자와 포상해야 할 자들에 대한 조사 내용을 기록한 자료이다. 표지에 “庚子十月 日”이라는 기록이 있고‚ 본문 중에 동학에 관련되는 기록들이 기재되어 있으므로 이 문서의 편찬 시기는 1900년 10월임을 알 수 있다. 전체 10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크기는 22.1×23.6cm이다. 서울대학교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염기〉에는 동학농민혁명 당시 각 지방 접주층들이 민간 토색(討索)을 일삼았으며 동학농민군 진압 시 대개 뇌물을 주고 살아나 이후 더욱 치부(致富)하였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전라도 남부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층의 경제적 기반을 알 수 있으며 이후 지방사회의 동향을 알 수 있는 자료이다. 이 중 구체적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순천 주암면 용촌(龍村)에 사는 조귀성(趙貴星)과 그 아들이 모두 접주(接主)와 거괴(巨魁)가 되어 평민(平民)을 토색(討索)한 사례가 수록되었다. 1900년 봄에 이르러서도 다시 사통(私通)을 하여 그 무리를 궐기시키려고 한 것이 여러 차례임이 포착되었다. 마찬가지로 순천 남문밖에 사는 서백원(徐白元)은 접주를 핑계 삼아 재물을 토색질하여 백성의 원한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순천 송광면 낙수동(洛水洞)에 사는 이사계(李士繼)도 본래 부자로 갑오년(甲午年)에 접주가 되어 평민을 침탈하여 더욱 부유해졌다고 한다. 이를 통해 보면 염기의 작성자는 동학농민군 접주들이 민가에 대하여 토색 및 침탈을 하여 치부하였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다른 한편으로 보자면 순천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1894년 동학농민혁명 이후에도 1900년에 이르기까지 활발히 활동을 진행한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언급한 순천 주암면 용촌의 조귀성도 1900년 봄에 이르러서도 궐기 움직임을 보였을 뿐만 아니라 순천 별량면(別良面)에 사는 심능관(沈能冠)도 더욱 구체적인 활동을 전개하고 있었다. 염기 본문-순천지역. 서울대 규장각 제공 〈염기〉에 따르면 그는 갑오년 거괴로 거부(巨富)가 되었으나 지난날의 버릇을 고치지 못하였다. 1899년 전주(全州)의 병정 1명을 청탁하여 오게 하고, 그의 족인(族人)이라고 일컬으며 그의 사채를 무난히 거두어 들였다고 한다. 이때의 행동이 수상하였기 때문에 면(面)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갑오년에 죽은 자가 살아나서 지금 도리어 그 화를 받는다”라고 하였다. 그리고 이들이 원망하여 말하기를 “어찌 하늘의 도가 있는가”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보면 1900년까지도 순천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는 활발한 활동을 지속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어서 여수 화양면(華陽面) 봉오동(鳳梧洞)에 사는 심송학(沈松鶴)은 도집강(都執綱)의 이름으로 무리 수천명을 모아 고진(古鎭)·방진(方鎭)·봉화(烽火) 3곳의 군기를 탈취하였다고 한다. 하동(河東)에서 싸울 때에 민간의 돈과 곡식을 무수히 탈취한 일이 있다고 하였는데 동학농민혁명 당시 하동 전투를 의미하는지는 보다 자세한 추적이 필요한 것으로 보인다. 다시 시선을 돌려 광주군(光州郡) 중옥리(中玉里)에 사는 지중화(池仲化)는 접주 거괴로 지난날의 버릇이 아직도 남아있어 의기가 양양하여 늘 동도(東徒)가 다시 일어나기를 바랬다고 한다.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죽일만한 자이다”라고 하였다.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를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그밖에 광주 방산리(方山里)에 사는 문영보(文永甫)는 접주로 백성의 재물을 토색질하여 그 집이 부유해졌다고 한다. 광주 송정리(松亭里)에 사는 우치옥(禹致玉)도 접주로 민간을 토색질하여 그 돈으로 재산을 모았다고 한다. 전라도 내륙 지역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활동도 눈에 띈다. 임실(任實) 이인면(里仁面) 독산촌(獨山村)에 사는 김내칙(金乃勅)은 동학의 거괴로 난리를 일으킨 것이 비할 데가 없었다고 한다. 갑오년 왕사(王師), 즉 관군이 내려왔을 때에 간사한 아전에게 붙어 속전(贖金) 수천금을 내고 풀려나 목숨을 건진 일이 있다고 한다. 임실 하동면(下東面) 계월리(桂月里)에 사는 전경서(全京瑞)도 본래 진안(鎭安)사람으로 갑오년 동학의 거괴이고, 어지럽게 작난질 한 것이 보통이 아니었다고 한다. 난리가 가라앉은 뒤에 진안에서 지낼 수가 없어 임실 하동면 계월리로 이사한 기록이 있다. 임실은 김개남의 근거지인 남원 인근의 고을이다. 따라서 임실 신안면(新安面) 낙천(樂泉)에 사는 한흥교(韓興敎)는 거괴 김개남(金開南)의 친사돈으로 무리 수만명을 인솔하여 이르는 곳마다 성(城)을 함락시켰다는 기록이 〈염기〉에 남아 있다. 또한 이 사람의 사촌인 韓東敎도 접주가 되어 수없이 많은 침탈을 하여 백성의 원망이 길에 가득하였다고 한다. 그밖에 영광 염소면에 사는 정훈직(丁熏直)은 본래 갑오 동학의 거괴로 난리를 일으킨 것이 심상하지 않았다고 한다. 남의 농사 짓는 소를 빼앗아 멋대로 도살하고, 남의 집을 부수었으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삼아 모은 재산이 수만냥이 된다고 하였다. 영외면(嶺外面) 대월리(大月里)에 사는 이중구(李重九)는 거괴로 기포대장(起炮大將)을 자칭하고 소 10마리를 잡았다. 여기서 기포대장(起炮大將)이 동학의 기포대장(起包大將)을 의미하는지는 확실하지 않다. 마지막으로 담양(潭陽) 서면(西面) 간리(間里)에 거주하는 박관기(朴寬基)는 본래 읍속(邑屬)으로 전량(錢兩)의 이자를 받는 날이 만약 기한을 넘기면 그 부요(富饒)를 기대고 권세에 의탁해서 사람을 무수히 때려 죽을 지경에 이른 자도 많았다고 한다. 특히 갑오년 동학의 거괴로서 남원 등지를 돌아다니며 토색질을 하다가 임산부를 구타하여 바로 낙태를 하게 하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뒤에 목숨을 도모하는 일로 속전 수백 냥을 내었다고 한다. 이 또한 〈염기〉 작성자의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가 엿보이는 대목이다. 이와 같이 〈염기〉에는 전라도 순천, 여수, 광주, 임실, 영광, 담양 지역에서 활동하였던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동학농민혁명 당시의 활동 및 1900년에까지 이어진 활동들이 수록되어 있다. 전반적으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민간 토색을 일삼고 치부한 내용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서 소개된 각종 토색질은 동학농민혁명을 진압하고자 하였던 관군 혹은 이들과 호응한 사람들이 동학농민군에 대한 증오를 토대로 작성된 것이기에 그대로 신뢰할 수 없는 내용들이다. 특히나 동학란으로 지칭되어 탄압당한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이 지역 사회에서 그대로 남아 치부에 이르렀다고 보기는 어렵다고 본다. 대부분의 동학농민군은 죽거나 지역 사회를 떠나야 했던 것이 당시의 실정이었다. 따라서 염기는 동학농민군 지도자들의 동학농민혁명 당시, 그리고 그 이후의 행적을 추적하기 위한 방증 자료로 활용해야 할 것이고 여기에 나온 기록 모두를 사실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음을 유념해야 한다.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부교수 유바다 고려대 한국사학과 부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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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8 15:08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9)<금번집략>과 <금영래찰>-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록물

2023년에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의 하나로 등재된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잘 보여주는 기록물이다. 특히 동학농민군을 진압한 충청감영의 움직임을 자세히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동학농민혁명 기록물로서의 가치가 크다.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의 공통점은 저자가 동학농민혁명기 충청감사를 지낸 이헌영(1837-1907)과 박제순(1858-1916)이란 점이다. 이헌영은 이른바 집강소기로 불리어진 6월부터 8월까지 충청감사로 재직하였고, 이헌영의 뒤를 이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이 재봉기하여 공주 우금치전투를 벌인 시기에 충청감사 임무를 수행하면서 동학농민군 진압에 앞장을 서다 1895년 5월에 퇴임하였다. 따라서 두 기록물은 충청지역에서 전개된 동학농민군의 동정을 엿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그에 대응한 정부쪽 동향을 파악하는데 없어서는 안되는 기록물이다. <금번집략>의 저자 이헌영은 34세에 과거에 급제한 뒤 1881년 조사시찰단의 일원으로 일본을 방문한 이후 통리기무아문경리사가 되었고, 부산항 감리, 의주부윤을 거쳐 주일공사를 지냈다. 1890년 귀국하여 교섭통상사무 협판에 재직하다가 경상도 관찰사를 지내고 1894년 4월 충청감사로 임명되었으나, 6월 20일에 가서야 공주 충청감영에 부임한 뒤 8월 25일까지 재임하였다. 이 시기는 충청도에서 청일전쟁과 동학농민혁명이 맞물려 나타나면서 매우 위중한 때로, 그 실상이 <금번집략>에 잘 나타나 있다. <금번집략>의 구성은 일록(日錄, 11면), 별계(別啓, 32면), 별보(別報), 별감(別甘, 19면), 시구(詩句) 다섯 부분으로 나누어져 있다. 총 51면으로 크기는 29x30cm이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일록’은 이헌영이 충청감사로 제수받은 4월 25일부터 신임 감사 박제순과 교체되는 8월 29일까지 쓴 일기체 형식의 기사로 주로 동학농민군의 동향과 청일양국 군대의 동정에 대해 서술하고 있다. 이헌영은 6월 10일 고종 임금께 부임인사를 드릴 때, 동학농민군을 잘 타일러 귀화시키라는 명을 받은 만큼 충청도 동학농민군 해산에 적극 나섰다. ‘별계’는 중앙 정부로 올린 계문들로 구성되어 있다. 특히 6월 27일에 발발한 청국군과 일본군의 성환전투와 전투 이후 두 나라 군대의 동향을 기록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환전투에서 패한 청국군이 공주에서 청주・충주를 거쳐 평양으로 북상하는 일련의 과정과 그에 따른 민폐, 그리고 충북 연풍・충주를 거쳐 북상하는 일본군 제5사단의 행군 움직임 등이 계문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 7, 8월 충청지역 동학농민군의 동향도 기록으로 남아 있는데, 예를 들어 7월 7일자 기록에는 서천포·청양·이인·보은 등지의 동학농민군들이 ‘사유창의(士儒倡義)’라는 제목의 녹명기(錄名記)를 마련하고 관아를 습격하여 군기를 마련한 내용이 자세히 실려 있다. 그밖에 ‘별보’는 태안의 세미를 육상궁(毓祥宮)의 하인에게 빼앗긴 사건에 대해 의정부에 보고하는 글 등이 실려 있다. ‘별감’은 충청감사 이헌영이 충청도 각 지역으로 보낸 효유문이나 전령 등을 모아 놓은 것이다. 그 가운데에는 충청도 각지의 민회소(民會所), 유회소(儒會所)에 내린 감결 등이 수록되어 있어, 당시 동학농민군은 물론 유생층의 움직임에 관한 소중한 정보를 제공하고 있다. 예를 들어 부여 유생들은 ‘훈신들이 구름처럼 모였다’라고 하면서 의병을 일으키려 하였으나, 이헌영은 경솔한 거사라고 하면서 만류하기도 하였다. 특히 <금번집략>에 따르면, 7,8월 사실상 충청지역은 충청감영이 위치한 공주를 비롯해 거의 대부분 지역이 동학농민군의 해방구나 다름 없었고 선무사 정경원이 제시한 집강안도 거부한 채 독자적으로 활동하였다. 충청도 지역 중에서도 동학농민군이 왕성하였던 곳은 공주를 비롯해 이인, 부여, 임천, 연산, 정산, 서천, 보은, 영동 등지였다. 심지어 8월 1일에는 1만여 명이 공주 정안면 궁원에 모여 창의를 하였고, 다음 날에는 깃발을 앞세우고 총칼로 무장을 한 채 충청감영 안으로 들어왔어도 충청감사 이헌영이 제어할 수 없었을 정도였으니, 7,8월 충청도에서의 동학농민군 위세를 엿볼 수 있다. <금영래찰>은 ‘금영(충청감영)에 온 편지’란 뜻으로, 충청감사인 박제순과 개화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 사이에 주고받은 편지를 모은 기록물이다. 세 사람은 당시 친일개화파정부의 주역이었다. 충청감사 부임 당시 박제순은 36세의 젊은 나이였다. 그는 25살인 1883년에 문과에 급제한 뒤 요직을 거쳐 1894년 6월에 전라감사에 발탁되었으나, 전라도에서 전봉준과의 협상을 통해 집강소체제를 이끌어낸 전라감사 김학진이 유임됨에 따라 충청감사에 임명되었다. 나이가 젊은 박제순은 동학농민군에 다소 유화적이었던 전임 충청감사 이헌영과는 달리 동학농민군 진압에 더 적극적이었다. 더욱이 8월 25일 충청감사 이헌영과의 임무 교대로 공주감영에 부임한 박제순은 동학농민군 진압에 적극 나서는 한편, 중앙정계와도 적극 소통하였는데, 그가 바로 친일개화파정부의 총리대신인 김홍집과 외무협판인 김윤식이었다. 이들은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면서 시국을 논하고 동학농민군 진압책을 논의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금영래찰>로 남아 있는 것이다. <금영래찰>은 모두 2책 총 75면 분량이다. 크기는 33x23cm이고, 고려대학교 도서관에 소장되어 있다. 1책에는 김홍집이 1894년 8월 2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수록하였다. 여기에는 대책을 지시하거나 당부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박제순은 사건의 전말을 알리는 답신을 간간이 보내기도 하였다. 2책에는 김윤식이 1894년 8월 11일부터 12월까지 보낸 편지를 담고 있다. 김윤식은 “동학도의 소요는 복심의 고통이므로 서양의 소요보다 심하다”고 말하는 등 동학농민군을 철저히 적대하는 문구들이 많다. 김홍집의 편지에는 일반 대책을 알리기도 하고 당부를 하는 내용을 주로 담았으나 김윤식의 편지에는 자신의 견해를 많이 드러내고 있어 대조를 보인다. 여러 내용 속에는 충청도와 전라도의 동학농민군의 사건 전말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현상을 살필 수 있다. 특히 일본군의 동정과 외국 공관의 대책도 아울러 전해준다. 김윤식의 12월 14일자 마지막 편지에는 프랑스 선교사가 피해를 입었는데 2천원의 배상금을 주지 않으면 후환이 있을 것이라고 하여 배상할 것을 당부하는 등 기밀에 속하는 사실을 적고 있어 흥미롭다. 따라서 기밀을 유지하기 위해 전보를 이용하지 않고 개인 편지형식을 빌은 것으로 보인다. 이와 같이 <금번집략>과 <금영래찰>은 충청지역 동학농민혁명의 실상을 알 수 있는 귀중한 기록물일 뿐 아니라, 당시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정부의 인식과 동향을 파악할 수 있는 많은 정보를 저장하고 있어 사료로서의 가치가 높다. 특히 훗날 철저한 친일반민족자의 길을 걷는 박제순이 동학농민혁명에 어떠한 인식과 행위를 보였는지를 엿볼 수 있는 기록물이다. 김양식 청주대학교 영화영상학과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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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8 16:42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8)유회성책(儒會成冊) -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성분조사서

〈유회성책〉은 1894년 청면 천동 유회에서 작성된 문서이다. 표지에 갑오년 11월 일 청면(靑面) 천동(泉洞) 유회성책(儒會成冊)이라고 써진 이 문서는 표지까지 포함하여 10쪽으로 되어 있다. 청면 천동은 1894년 당시에는 정산현(定山縣)이었으며, 현재의 행정구역은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문서에 관인이 있는 것으로 보아 천동 유회(儒會)의 리회장(里會長) 김학현(金學鉉)이 현감에게 보고한 문건으로 보인다. 문서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그림 1) 유회성책 표지. 갑오십일월 일(甲午 十一月 日) 청면천동유회성책(靑面泉洞儒會成冊)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3) 유회성책 4면. 김휘오 귀화(金輝五 歸化), 솔자 명규 불입(率子 明奎 不入), 김휘찬 귀화(金輝瓚 歸化), 윤영백 귀화(尹永百 歸化), 솔제 영락 불입(率弟 永樂 不入), 김창규 귀화(金昌奎 歸化), 솔자 태현 불입(率子 泰鉉 不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4) 유회성책 5면. 김홍규 귀화(金鴻奎 歸化), 솔자 종하 불입(率子 鍾夏 不入), 소휘직(蘇輝稷 歸化), 김성규 불입(金聖奎 不入), 김학현 불입(金學鉉 不入), 솔제 태현 불입(率弟 台鉉 不入)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이 문서의 작성 시기는 1894년 11월이며, 작성지역은 정산현 청면 천동이다. 여기서 가장 궁금한 점은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하는 것이다. 몇 가지로 나누어서 설명할 수 있다. 먼저 시기와 장소의 문제이다. 시기는 동학농민혁명의 우금치전투가 있었던 때이며 장소인 청면 천동은 우금치전투지와 매우 가까운 위치에 있다. 이것으로 보아 동학농민혁명과 관련된 문서로 보인다. 그리고 우금치 전투 이후 조선정부의 지방통제책이 강화되고 있는 상황과 맞물려 있다고 생각된다. 즉 동학농민군을 색출하여 토벌하는 동시에 5가작통제와 향약을 통해 향촌사회를 강력하게 통제하는 상황에서 작성되었다고 보여진다. 다음은 내용의 문제이다. 속오(束伍) 4명을 포함한 29가호의 아버지와 아들 39명을 대상으로 ‘불입(不入)’과 ‘귀화(歸化)’로 구분하여 기재되어 있다. 여기서 불입은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의미이며, 귀화는 동학농민군에 참여하였다가 돌아왔다는 의미이다. 그렇다면 왜 이러한 문서가 작성되었을까? 그 이유는 청면 천동의 유회가 자신들의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작성한 것으로 짐작된다. 즉 강력한 통제가 이루어지는 상황에서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러한 문서를 선제적으로 만들었다고 보여진다. 즉 일부 마을 공동체 구성원들이 동학농민군에 참여했지만 그들을 모두 귀화시켰기 때문에 그들을 더 이상 잡아가거나 체포하지 않아도 된다는 것을 정산현감과 토벌군에게 알리기 위해 작성한 것이다. 말하자면 마을 공동체를 지키기 위해서 이러한 문서를 작성하였다고 보여진다. 각각 가호별로 보면 25가호의 불입과 귀화의 양상을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서 눈여볼 대목은 10가호에서는 부자 또는 형제가 함께 기재되어 있는데, 이들의 경우 부자 또는 형제가 모두 귀화한 경우는 없다는 것이다. 즉 아버지가 불입이면 아들은 귀화, 아버지가 귀화면 아들은 불입 등으로 기재되어 있다. 형제도 마찬가지이다. 이는 자신들을 보호하기 위한 장치가 아닌가 생각된다. 다음으로 궁금한 것은 이들은 누구인가 하는 것이다. 이에 대한 실마리는 청면 천동에서 찾으면 된다. 이곳은 현재 행정구역으로 충남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이다. 이 마을은 예안김씨의 집성촌이다. 그래서 성책을 보면 속오를 제외하고 김씨 27명, 윤씨 4명, 소씨 1명, 이씨 1명, 전씨 1명, 복씨 1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김씨가 대부분이다. 이 김씨가 바로 예안김씨참판공파로 대대로 집성촌을 이루고 이곳에서 살았다. 이러한 사실은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그림 10)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2003) 김휘홍, 김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제공 그림 9)는 유회성책 내지 첫장이다. 처음 등장하는 인물은 유학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이다. 김휘홍은 불입이고 아들 김병규는 귀화이다. 그런데 이를 그림 10)의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와 비교해 보면 김휘홍과 그의 아들 김병규가 확인된다. 한자도 같다. 김휘홍은 1826년에 태어나서 1907년 사망하였고, 김병규는 1854년 태어나서 1906년에 사망하였다. 이들은 모두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해 있었다. 즉 유회성책에 기록된 인물들이 대대로 청면 천동, 지금의 청양군 청남면 천내리에 살았던 예안김씨라는 것이 확인된다. 그림 9) 유회성책 첫장의 김휘국, 김원규도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확인된다. 김휘국은 귀화이며 그의 아들 김원규는 불입이다. 김휘국은 1836년에 태어나서 1904년에 사망하였고, 김원규는 1856년에 태어나서 1930년에 사망하였다. 이들도 1894년에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생존해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그림 12) 유회성책 김학현 그림 13) 유회성책 리회장 김학현 그림 12)와 13)은 리회장 김학현에 관한 기록이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의 리회장으로서 이 문서를 작성하여 상부에 보고한 당사자이다. 그런데 그림 14)와 15)에서 알 수 있는 것처럼 김학현은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이기도 하다. 김학현은 그의 동생과 함께 불입이다. 그는 1852년 출생하여 1915년 사망하였다.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 생존하고 있었던 것이 확인된다. 김학현은 청면 천동에서 대대로 살았던 예안김씨참판공파 종손으로서 그리고 리회장으로서 우금치전투에서 동학농민군이 패하자 마을과 종중 구성원들을 보호하기 위해 이 유회성책을 작성하였다. 유회성책에 예안김씨는 27명으로 추정되는데, 〈예안김씨참판공파세보〉에서 1894년 동학농민혁명 당시에 사망한 사람은 없는 것으로 확인된다. 청면 천동에는 과거에 150가구가 살았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런데 이 마을의 예안김씨들은 자신들의 조상이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했다는 사실을 거의 알지 못하고 있었다. 조사과정에서 이를 알고 매우 놀라면서도 자랑스럽게 생각하였다. 마지막으로 그렇다면 우리는 이들을 어떻게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남는다. 우선 귀화한 이들은 적극적으로 해석해서 동학농민혁명 참여자로 봐야 한다고 생각한다. 마을에서 집단적으로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이 확인된다. 비록 귀화하기는 했지만 이들은 동학농민혁명에 참여한 것을 부정할 수는 없다. 그리고 이러한 성분조사서를 작성한 주체의 경우,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서 선재적으로 작성하였고 이 때문에 희생을 당한 사람은 없었다. 따라서 이들의 행동은 매우 현명하고 적절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동학농민혁명이라는 매우 혼란스럽고 엄혹한 상황에서 마을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한 이러한 문서 작성은 매우 지혜로운 행동이었다고 생각된다. 이병규 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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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2 18:2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7)찰이전존안과 계초존안

△찰이전존안(札移電存案) 찰이전존안은 1894년 음력 8월 10일부터 1896년 1월 21일까지 의정부와 지방관아, 조선 주재 일본공사관 사이에서 주고받은 공문서와 전보문을 의정부 기록국에서 보관용으로 작성한 문서철이다. 도찰원(都察院)에 보낸 찰위(札委), 학무아문 내무아문 탁지아문 등에 보낸 공이(公移), 각 감영에 보낸 전기(電奇), 각 감영·감사에 보낸 전문(電文)과 조회(照會), 각 감영·감사가 의정부로 보낸 전문, 일본공사가 의정부에 보낸 전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이 문서는 동학농민군 토벌 내용이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데 제2차 봉기 이후 전국 각지 동학농민군의 활동, 공주 우금치전투 이후 전봉준·김개남·손화중 등 농민군 핵심 인사들이 체포되는 상황 등을 이해할 수 있다. 이 외에 청일전쟁 관련 사실도 많이 기술되어 있다. 조선에 출병한 일본군이 군표(軍票)를 지불하고 개인의 토지를 수용하는 사례도 확인된다. 일부 지역에서 일본군의 토지사용료 미지급이 문제였다. 예컨대 9월 부산을 통해 북상하는 일본군은 경북 달성에 머물던 기간 주민의 밭을 차용하여 매 1두락에 도조(賭租)로 6냥씩, 즉 전(田) 38두락에 228냥을 주기로 하고 대구사령부에서 증표를 만들어 주었다. 이 표는 정식 발매된 군용수표라기보다는 일종의 약속어음 형태의 보증서로 보이는데, 지역 병참사령부에서 그마저도 태환해 주지 않아 민원으로 남았다. 다음 해 1월까지도 지불하지 않아서 주민들이 달성 판관에게 소장을 올린 바 있다. 찰이전존안에서는 특히 충청도와 전라도 동학농민군의 성세는 중앙군과 지방 감영병으로서는 ‘이과적중(以寡敵衆)’의 형세로 기록하고 있다. 경상도의 경우 이와 마찬가지로 11월 21일 진주 토포사에 의하면 하동·곤양·단성·진주 일대는 마치 “밥에 파리가 몰려드는 것과 같다”고 비유하고 있듯이 농민군의 세력이 강하여 지방관이 일본 군대의 주둔을 ‘엎드려’ 원할 정도가 되었다고 한다. 농민군 토벌차 현지에 출동한 중앙정부군이 일본군에 의지하는 모습을 알 수 있는 내용도 많이 보인다. 예컨대 10월 21일 자 영남 토포사가 관찰사에게 보내는 전보에, “일본군이 철수하려고 하는데 이곳에는 지킬 군대가 없습니다. 한마디로 말씀을 드리면 하동과 곤양 등지에 주둔하는 일본군이 없다면 재앙이 이어질 것이니 이 전보를 의정부에 전달하여 죽을 지경에 처한 수많은 생명을 구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는 내용 등이다. 관찰사도 의정부에 “지금 일본군이 주둔할 때 잠시도 고개를 돌릴 수가 없는데, 더욱이 일본군이 철수한 뒤에는 어떠하겠습니까?”라는 전보를 보냈다. 그는 11월 초 10일 전보에 “(일본군이) 아직 내려오지 않아 근심스럽습니다”라고 하였다. 11월 17일 전라좌수영도 정부에 전보하여, “군량은 준비하였으나 일본군은 오지 않고 동도(東徒)가 와서 포위하여 위태로움이 조석 간에 있습니다. 부산에 있는 일본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신속하게 동도를 토벌해 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간청한 바 있다. 조선 정부의 일본군 의존 정책은 이듬해까지 이어져 1895년 1월 전라감사는 “지금 이노우에 공사가 일본군 진영에 보낸 전보를 보니, ‘일본군을 철수시키고, 경군도 모두 돌아간다’라고 하였습니다. (중략) 지금 군사를 철수한다면 재앙이 뒤를 잇는 것은 불을 보듯 분명합니다. 다시 3~4개월 동안 연장하여 인심이 조금 진정되기를 기다렸다가 지방관이 제자리에 선 뒤에 점차 철수하는 것이 타당합니다. 이노우에 공사와 의논하여 대대장에게 다시 전보를 해주시기를 바랍니다”라고 정부에 전보하기도 하였다. 농민군 핵심 지도자 김개남과 전봉준·손화중의 체포 상황도 생생하다. 강화 진무영 병사가 전라도 태인에서 체포한 김개남은 참수하여 그 수급(首級)을 순무영에 보냈고, 순창에서 사로잡은 전봉준은 임실 수령과 일본군이 압송하여 금강을 건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에 정부에서는 “김개남은 무슨 이유로 (목을) 베었는지 상세하게 알려 달라. 전봉준이 잡혔다고 하는데, 반드시 수레로 데려와서 유지(有旨)를 받들어라”고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고창에서 체포한 손화중은 옥에 가둔 후 일본군에게 보내 압송토록 전라감사에게 전보하였다. 농민군 주력이 진압될 무렵 충청도에서는 남학(南學)과 그 다른 일파인 북학(北學)·서학(西學, 천주교) 등이 성행하여 충청감사가 이를 금지하자고 주장한 사실도 기록하고 있다. 일본군의 농민군 토벌에 편승하여 과거 농민군과 계급적 대립 관계를 형성하고 있었던 지방 양반과 유생을 중심으로 한 민보군(民堡軍)·유회군(儒會軍), 스스로 ‘의병’이라 칭하는 무리 및 보부상(褓負商) 등 수많은 반농민군(反農民軍) 그룹이 형성되었다. 이들은 도처에서 패잔 농민군을 색출하여 살해하고 있었다. 이에 대해 충청감사는 이들이 동학을 토벌한다면서 양민을 침탈하는데도 불구하고 막을 수가 없다고 토로하였다. 또한 향약(鄕約)과 5가작통·10가작통의 작통제(作統制)를 실시하여 패잔 농민군을 숨겨주거나 이들에 협조하는 기미가 있는 사람들까지 모두 얽어매었음도 이 자료를 통해 알 수 있다. 청일전쟁과 관련하여 청국으로 보내는 인부의 징집 사실도 이해할 수 있다. 갑오개혁 이후 새로 임명된 평안감사 김만식은 의주에서 일본 군대를 영접하고 군수품 수송과 인부의 차출을 끝마치고 평양으로 되돌아온 사실을 정부에 보고하였다. 「시모노세키 강화조약」 직전인 1895년 4월 12일까지도 주롄청(九連城)으로 보내는 인부 1,081명과 안동현 행 선박 10척 등 조선인 인부와 조선 선박 동원은 오랜 기간 지속되고 있었다. 한편 청국 관내로 진입한 일본군 위문 사절로 군부대신 조희연 일행이 청국 진저우(金州)에 도착하여 뤼순(旅順)·웨이하위웨이(威海衛)를 거쳐 다롄만(大連灣)에 돌아왔다는 전보 내용도 수록하고 있다. 이후에는 잉커우(營口)로 향한다는 군부대신의 전보도 수록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계초존안 표지. /서울대 규장각 제공 △계초존안(啓草存案) 계초존안은 의정부에서 1894년 7월 21일부터 같은 해 11월 20일 사이의 계초(啓草)를 의정부 기록국에서 모아서 베껴 놓은 것이다. 중요 내용을 보면, 먼저 8월 1일 전주의 사민(士民)들이 연명으로 전라감사 김학진에게 올린 소장의 여러 조항 가운데 국가 재정과 관련하여 처분을 바라는 7개 조항을 제시하고 있다. 이는 1. 엽전 5만 냥을 불에 탄 가호에 빌려주어 5년을 기한으로 나누어 갚는 일. 2. 계사년(1893) 각 면의 세미(稅米) 중 아직 거두지 못한 5,516석을 전례에 따라 매석 당 25냥씩 거두어들이고, 부내(府內) 4개 면에서 거두지 못한 520석은 특별히 감면하는 일. 3. 과거 각 연도의 미납한 쌀과 콩을 상정가(詳定價)로 대신 징수하고 군포(軍布)는 돈으로 대신 징수하는 일. 4, 보세(洑稅)와 잡세(雜稅)를 혁파하는 일. 5. 진결(陳結)에 대한 조세를 기한을 정하여 다시 감면하는 일. 6. 전운소(轉運所)에서 새로 만든 잡비와 양여미(量餘米, 정량을 넘게 거두는 쌀)를 시행하지 않는 일. 7. 균전답(均田畓, 결세를 고르게 하는 전답)에서 도조를 지나치게 거두는 것과, 마름과 하인들의 폐단을 금하는 일 등이다. 이에 대한 김학진의 처분 제안과 국왕으로부터 윤허를 받았다는 내역까지 소개하고 있다. 9월 15일 경상감사 조병호의 장계 내용도 수록하였다. 이는 1. 도내 환곡의 총액 가운데 포흠(逋欠)이 누적된 11개 고을과 역참의 포흠은 탕감해 주고, 통영의 환곡 폐단은 모두 바로잡는 일. 2. 진결(陳結) 1만 1,703결을 영구히 탈급(頉給)하는 일. 3. 결가(結價)는 금전으로 납부하고, 운반비는 될수록 적게 납부하며, 정비(情費)와 잡비는 받지 않는 일. 4. 진상(進上) 물품과 전문(箋文)을 올릴 때 거두는 정비 징수를 금지하는 일. 5. 재해를 입은 50여 고을의 공납(公納)은 내년 가을까지 미루고, 양호의 세미(稅米) 수만 석을 우선 이전하는 일. 6. 각 역에서 사복시(司僕寺)의 입파(入把)에 보충할 말의 세전(貰錢)은 수량을 줄여서 정식으로 삼고, 공조(工曹)의 도롱이와 언치[言赤]는 혁파하는 일. 7. 전운소에서 징수하는 것을 대전(代錢)으로 징수하면 운반비 및 여러 가지 폐단이 변통될 수 있다는 일. 8. 어세(漁稅)·염세(鹽稅)·선세(船稅)를 사실대로 조사하여 바로잡는 일. 9. 남영(南營)의 병사에게 지급하는 급료의 부족액을 모종의 공전으로 지정해 붙이는 일. 10. 도내 백성들의 소요 원인은 규정 외에 추가로 징수하는 데에 있으니, 여러 폐단을 차례로 바로잡는 일 모두를 의정부에서 아뢰어 처리하도록 요청한 것이다. 계초존안에는 집강소와 제2차 봉기와 관련한 동학농민군 활동 상황을 자세히 기재하고 있다. 예컨대 수천 명이 전라우수영의 군기와 금전을 빼앗아 간 일, 전라감영 군사마 송인회와 군관 김성규가 농민군을 타이르고 귀화에 힘쓴 공으로 수령으로 임명하라는 전라감사 김학진의 건의, 경상도 성주와 예천 및 경상도 서남부 지역의 농민군 상황, 전라도 남원과 경기도 지평 농민군의 활동 상황 등이다. 이 기간 동학농민군의 활동과 달리 전개되던 민란 상황도 소개하고 있다. 경상도 영천 민란으로 영천 안핵사 이중하는 이 지역 백성들의 소요는 원인이 3가지로, 첫째, 결세(結稅)가 지나치게 무거운 것이며, 둘째, 관아의 정사가 탐오한 것이며, 셋째, 명례궁(明禮宮)의 보세(洑稅) 때문이라는 것이다. 조선에 출병한 청국군의 동향도 기재되어 있다. 즉, 성환 전투에서 일본군에게 패한 청국군이 우회로로 평양으로 가는 기간 새로 집권하게 된 갑오 개화파 정부는 우마와 군량·마초 등을 민간에 배당해서 거두어 청국군에게 제공한 강원도와 함경도 관찰사 등의 추고(推考; 죄상을 심문하여 추궁하는 일)를 계안으로 청하여 국왕의 윤허를 받게 된다. 지방관에 대한 정부의 이와 같은 징계 조처는 사후 미봉책에 불과했는데, 이 내용은 조선 정부가 자발적으로 행한 것이 아니라 원산 주재 영사의 보고를 받은 일본 정부의 훈령에 따라 일본공사관에서 조선 정부를 강박하여 진행된 것이다. 한편 청일전쟁 기간 서북 지역 지방관 처벌 관련 문제도 이 자료를 통해 파악할 수 있다. 예컨대 서흥부사 홍종연은 조선과 일본이 체결한 「양국 맹약」을 위배하고 일본군을 모함하였다는 혐의로 일본군 제5사단에 일시 구금되어 있다가 외부대신 김윤식의 항의로 풀려났다. 그러나 곧바로 조선 정부로부터 공식 파면된 내용의 전말이 계초존안에 수록되어 있다. 신임 평안감사 김만식은 평양중군 이희식, 강동현감 민영순과 숙천부사 신덕균, 영변부사 임대준, 안주목사 김규승, 성천부사 심상만, 상원군수 이국응, 병우후 김신묵과 대동찰방·자산부사 등 평양 전투 전후 청군에 협조하거나 관인을 버리고 임지에서 이탈하여 도망간 지방관의 파직 처벌을 청원하여 윤허를 받았다. 제1군 사령관 야마가타 아리토모(山縣有朋)는 일본 공사 이노우에 카오루(井上馨)에게 늦가을로 접어드는 상황에서 마료(馬料)의 보충과 방한용 신탄(薪炭) 조달이 필요함에 조선 정부를 통해 선유사 권형진에게 특별한 직권을 부여하고 충분히 효력을 발휘할 수 있도록 청구할 것을 조회한 바 있었다. 야마가타는 공사 이노우에에게 현재 ‘대징발’ 중이므로 권형진이 의주를 떠나면 큰 지장을 일으키게 되므로 계속 체류시키도록 조선 정부에 조회토록 하였다. 그 결과 권형진은 반접관(伴接官)으로, 전 사과 김응옥을 반접종사관(伴接從事官)으로 임명하여 관서 지역에 주둔한 일본군을 접대하면서 그들의 전쟁 수행을 위한 협조에 전담토록 하였다. 이 자료는 서울대 규장각에 소장되어 있다. 조재곤 서강대학교 학술연구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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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05 13:00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6)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2부

정부를 고무시킨 맹영재의 지평 민보군 양호도순무영이 막하 진용을 구성하던 9월 26일 고무적인 보고가 올라왔다. 경기도 지평의 맹영재가 관포군과 사포군 100여 명을 거느리고 강원도 홍천에서 동학 근거지를 소탕했다는 것이다. 이어 금산에서도 유생들이 포수 300명과 무사 700명을 뽑아서 읍내를 방비하는데 그 비용은 민간에서 돈과 곡식을 거둬 비용으로 충당했다는 보고가 올라왔다. 전국에서 봉기한 동학도를 막을 방도가 없었던 양호도순무영은 이런 보고에서 유력한 방안을 찾게 되었다. 지평과 금산의 사례처럼 민보군을 조직하는 방안이었다. <갑오군정실기> 첫 부분에 그 과정이 자세하다. 먼저 동학농민군 진압에 공을 세운 관리들에게 군직을 부여했다. 9월 25일에 대구판관 지석영을 토포사에 임명하고, 안의현감 조원식을 조방장에 임명했다. 다음날인 9월 26일에는 지평의 맹영재와 금산 유학 정두섭을 소모관에 임명했다. 해당 지방관에게는 화약과 연환, 그리고 군량을 지원하도록 지시했다. 9월 30일에는 삼남에 각각 2명씩 소모사를 임명하여 자력으로 민보군을 만들어 운영하도록 했다. 호남소모사는 나주목사 민종렬과 여산부사 유제관, 호서소모관은 홍주목사 조재관과 진잠현감 이세경, 영남소모관은 창원부사 이종서와 전 승지 정의묵이었다. 이때부터 군직 임명이 빈번해졌다. 강원도의 관동토포사로 횡성현감 유동근을 임명하고, 하동부사 홍택후를 조방장에 임명했다. 11월에는 전 승지 조시영을 김산소모사로 차하하고, 김산군수 박준빈을 조방장으로 임명했다. 보은군수 이규백도 조방장에 임명했다. 이어서 천안군수 김병숙과 목천현감 정기봉이 소모관이 되었고, 호남소모관에는 전동석 백낙중 임두학을 모두 임명했다. 고부군수 윤병도 소모사가 되었다. 이런 군직은 민보군을 지휘하는 권한뿐 아니라 처형권을 준 것을 의미한다. 사로잡은 동학농민군을 소모사 등이 처형해도 사후 보고만 하면 문책이 따르지 않았다. 지방관은 관아의 무기와 식량을 주는 방식으로 민보군을 지원했다. 그런 사실이 <갑오군정실기>에 생생히 기록되었다. 경군 병영의 출진 병력과 비용 9월에 재봉기한 동학농민군의 1차 목적은 척왜(斥倭)였다. 부산에서 서울로 연결된 일본군 전신소와 병참부가 공격 대상이 되었다. 일본의 히로시마대본영은 즉각 후비보병제19대대를 증파하는 동시에 서울 주둔군을 충청도 일대에 보내서 동학농민군의 공세를 막으려고 하였다. 조선 정부도 대규모 동학농민군의 봉기를 막으려고 하였다. 정부가 금지하는 사교 집단이 일으키는 병란이란 판단도 거두지 않았다. 양호도순무영의 지휘 아래 통위영 · 장위영 · 경리청 병력을 출전시켰다. 그 규모가 <갑오군정실기> 제10책에 자세하게 나온다. 선봉장 이규태가 지휘한 통위영 장졸은 337명이고, 이들을 지원한 참모사와 참모관 그리고 별군관 등이 65명이었다. 모두 402명의 행군 속에 기마 17필과 짐말 13필이 있었다. 경리청은 홍운섭이 이끈 장졸 358명과 성하영이 이끈 370명이 동원되어 모두 728명이 출진하였다. 짐말은 각각 27필과 34필이었다. 경리청 병대가 가장 많은 군수 물자를 가지고 다녔다. 장위영은 가장 먼저 출진한 병영이었다. 이두황이 거느린 381명과 원세록이 지휘한 351명이 동원되어 모두 732명이 동원되었다. 1893년 봄 보은 장내리집회를 해산시키려고 청주까지 간 홍계훈의 병대도 장위영이었고, 1차봉기 당시 장성 황룡촌전투와 전주 완산전투를 치룬 경군도 장위영이었다. 일본군 후비보병 제19대대의 중로군과 동행한 경군은 장졸 255명의 교도중대였다. 여기에 별군관과 참모관 12명을 지원받았다. 영관 이진호가 인솔한 교도중대의 실제 지휘관은 19대대의 대대장 미나미 고시로 소좌였다. 처음 편성할 때부터 일본군 장교에게 훈련받고 그 지시에 따라서 정찰과 경계 등 맡았다. 이노우에 가오루 공사는 교도중대를 일본 협조자로 만들라는 명령을 미나미 소좌에게 몰래 내렸다. 경군 병력의 군량을 책임진 운량관으로는 경기도의 양성현감 남계술, 충청도의 노성 신창 온양 회덕 충주의 지방관을 선정했다. 이들은 공금을 전용하거나 세금으로 거둔 곡식을 보내서 군수전과 군수미로 쓰도록 했다. 고종의 내탕금과 운현궁의 하사금, 또 대신들의 성금도 경비로 사용했다. 경군의 행군로에 위치한 지방관에게는 식량과 땔감, 그리고 말먹이로 쓸 건초를 미리 마련하도록 했다. 갑오년 참혹상을 전하는 기록 동학농민군이 처했던 참혹한 실상을 전해주는 자료는 드물다. 진압기록을 보면 여러 내용이 확인된다. 첫째가 재산 탈취 사례이다. 소모관 정기봉의 10월 19일자 보고에서 양성의 유성옥을 잡지 못하자 그의 재산을 적몰했다고 하였다. 총과 창 등이나 깃발과 염주뿐 아니라 재산을 빼앗았다고 한 것이다. 동학농민군 참여자의 재산을 탈취하는 사태는 갈수록 심해졌다. 그러자 양호도순무사 신정희는 이를 엄격히 금지하였다. 12월 9일자 전령에서 동학농민군을 잡아들일 때 먼저 그 재산을 적몰하는 실상을 말하면서, 재산을 모두 잃은 자들이 의지할 곳이 없어 결국 모여서 도적이 될 것이라고 했다. 이에 항명하는 강원도 홍천의 사례도 나왔다. 이미 죄인의 가산을 적몰하여 민가를 나누어 주었으니 다시 환급받기가 어렵다며 항명을 한 것이다. 그러자 도순무사는 해당 향리를 엄히 곤장을 때리고 옥에 가두며, 적몰한 재산을 찾아서 돌려주고 그 결과를 보고하라고 했다. 고부군수 윤병과 상주소모사 정의묵은 “적몰한 재산을 가지고 납속하는 일은 영구히 중지”하라는 전령을 잘 따르겠다고 보고하고 있다. 이 문제가 매우 심각했던 당시 사정을 전해주는 기록들이다. 동학농민군이 전투를 벌일 때 초가를 불태우거나 읍내에 방화한 사건은 <고종실록> 등 여러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러나 일본군과 관군의 방화 사건은 심각하였다. 특히 일본군의 방화 사건은 도처에서 일어났다. 관군의 방화 사건 중 가장 큰 것이 이두황의 장내리 방화사건이다. 장위영을 이끌고 보은에 간 이두황은 민가 200채와 초막 400채를 불태웠다. 이 때문에 커다란 마을이 폐허로 변했고, 마을터에는 다시 집이 들어서지 못했다. 일본군의 방화는 더욱 심했다. 스즈키 아키라의 일본군 지대는 황해도 강령에서 11월 19일 밤에 민호 400여 호를 불태워버렸다. 금구 원평으로 가던 일본군이 길가의 민가를 방화해서 참혹한 상태가 되었다. 이런 사태는 너무 많아서 관군의 보고에도 일일이 쓰지 않을 정도였다. 매우 추웠던 갑오년 겨울에 다행히 살아남은 동학농민군은 살던 마을로 돌아와도 추위를 피할 거처가 없었다. 여러 곳에 움막을 짓고 숨어 살았다는 증언이 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록을 그런 실상이 생생하게 드러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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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7 16:41

[세계기록유산이 된 '동학농민혁명기록물] (25)-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인 <갑오군정실기> 1부

새로운 사실이 쏟아진 동학농민혁명 사료 갑오군정실기. /국립고궁박물관 제공 <갑오군정실기>는 1894년 9월 22일(양력 10월 20일) 조선 정부에서 호위부장 신정희(申正熙)를 도순무사에 임명하고 양호도순무영(兩湖都巡撫營)을 설치할 때부터 이해 12월 27일(양력 1895년 1월 22일) 폐지될 때까지 95일 동안 주고받은 공문서를 모은 사료이다. 모두 10책으로 9책은 공문서집이고, 마지막 10책에는 순무영의 지휘 아래 활동한 장졸의 인원과 전공을 기재했다. 유일 필사본으로 국립고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도원수에 해당하는 양호도순무영의 위상 조선왕조의 군사제도에서 순무영은 상설기구가 아니었다. 영조 4년(1728년)에 무신란이 일어나자 긴급히 오명항을 4로도순무사(四路都巡撫使)에 임명해서 진압하도록 했다. 4로는 군대의 진군과 후퇴 등이나 사방의 길을 의미하는데 또 4도순무사(四道巡撫使)로 말한 것을 보면 경기도 충청도 경상도 전라도 4도의 의미로 보이기도 한다. 순조 11년(1811년)에 서북 일대에서 홍경래난이 벌어지자 양서순무영(兩西巡撫營)을 설치했는데 양서는 관서와 해서를 의미한다. 고종 3년(1866년)에 병인양요가 일어나자 다시 기보연해순무영(畿輔沿海巡撫營)을 설치했는데 기보연해는 경기도 해안지역을 의미한다. 임시 군사지휘부인 순무영은 군무 활동지를 명시해서 운영하였다. 정부는 동학농민군의 1차봉기를 호남과 호서에서 일어난 사건으로 보았다. 그래서 홍계훈을 양호초토사에 임명해서 경군을 이끌고 진압하도록 했다. 전국에 걸친 2차봉기가 일어나자 위기 상황을 파악한 왕조정부는 호위부장 신정희를 양호도순무사에 임명해서 진압군을 지휘하도록 했다. 도순무영은 경군 병영과 지방 병영만 지휘하지 않았다. 진압에 관련된 군사상 기밀은 해당 군현에서 곧바로 순무영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신정희에게 내린 국왕의 교서는 도순무사가 ‘품계로는 도원수에 비교’되고, ‘재상의 반열에 해당’한다고 했다. 최고 군사지휘부의 위상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하여 경기감사 · 충청감사 · 전라감사 · 경상감사 · 황해감사 · 강원감사도 도순무사에게 직접 보고하고 지시를 받았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갑오군정실기> 조선왕조는 커다란 사건을 겪으면 백서와 같은 기록을 남겼다. 양서순무영과 기보연해순무영은 그런 전례에 따라 전란 종료 후 각각 5책씩 <순무영등록>을 만들었다. 이 등록은 홍경래난과 병인양요를 생생한 사실을 알려주는 자료가 된다. 그러나 양호도순무영의 등록은 발견되지 않았다. <등록>은 공문서를 모은 형태를 띤다. 주고받은 공문을 날짜별로 편집해서 각종 사건을 알려주는 것이다. 물론 모든 공문서를 모은 것은 아니다. 양호도순무영의 문서 담당 인원은 11명이었다. 이들은 공문서를 분류하고 묶어놓은 일이 책무가 된다. 이런 직책이 있으면 틀림없이 공문서집을 만들었을 터이지만 그것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이 공문서집의 존재는 2011년 12월에 실체가 확인되었다. 이때 일본 궁내청 소장 조선도서 1205책이 반납되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약탈해간 고도서가 중심이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일본 궁내청 소재 조선왕조 도서 환수기념 특별전’을 열었는데 ‘국내에 없는 유일본’인 <갑오군정실기>가 포함되었다. <갑오군정실기>를 검토한 결과 그 체제가 기존 <순무영등록>과 같은 것을 알게 되었다. 선례에 따라 도순무영의 설치 근거인 국왕의 윤허 기록을 첫 부분에 실었고, 날짜별로 일어난 사건과 수발한 공문을 전재하였다. 오직 이름만 다를 뿐이었다. <갑오군정실기>의 기구한 이력 배경 양호도순무영은 설치 목적을 완수한 이후 잔무까지 처리하고 해산하지 못했다. 일본공사의 압력을 받아 중도에 폐지된 까닭이었다. 양호도순무영이 일본공사관과 협조하지 않자 일본공사 이노우에 가오루는 외부대신 김윤식을 공사관에 불러 지침을 내리는 등 간섭을 자행하였다. 마침내 일본공사는 조선정부에 압력을 가해서 도순무영을 와해시켰다. 도순무사 신정희는 12월 23일에 강화유수로 전임되었고, 같은 날 중군 허진은 경기도 통진부사로 좌천되었다. 좌선봉 이규태도 전라도 파견 현지에서 소환되었다. 이런 까닭에 양호도순무영의 공식 기록을 도순무사와 중군이 관여하는 형태로 만들 수가 없었다. <갑오군정실기>는 잘 정서한 필사본이지만 중앙관서에서 만든 책으로는 체제가 번듯하지 않다. 우선 이름도 <순무영등록> 또는 <양호도순무영등록>이 아닌 <갑오군정실기>라고 붙였다. 유일본 여부도 알 수가 없다. 정서를 한 것을 보면 서사가 베낀 것으로 보이나 몇 벌을 필사했는지 확인할 수 없다. 도순무영에서 공식으로 만든 보고서라면 더 필사를 해서 여러 권을 만들 수도 있다. 그리고 어디에도 주도한 사람에 관한 기록이 없다. 도순무영의 종사관이든 참모사이든 이름이 나와야 하는데 성책한 담당자의 이름이 없다. 도순무사 신정희의 가전 장서에도 이 책이 존재했다는 증언이 나오지 않는다. 일본과 대신이 협력한 군부가 소장했다가 이토 히로부미가 반출한 도서에 포함되었을 수가 있다. 무려 한 세기 이상 <갑오군정실기>는 일본 궁내청에 소장된 상태로 알려지지 않았다가 반환도서에 들어가서 되찾게 된 것이다. <갑오군정실기> 10책의 구성과 주요 내용 각 책에 공문을 정리한 날짜와 면수는 다양하다. 1책 (118면) : 갑오 9월 22일 – 10월 11일 2책 (87면) : 갑오 10월 11일 – 10월 20일 3책 (92면) : 갑오 10월 21일 – 11월 2일 4책 (98면) : 갑오 11월 3일 - 11월 15일 5책 (72면) : 갑오 11월 16일 - 11월 21일 6책 (95면) : 갑오 11월 21일 - 11월 30일 7책 (76면) : 갑오 12월 1일 – 12월 10일 8책 (67면) : 갑오 12월 10일 - 12월 15일 9책 (104면) : 갑오 12월 16일 – 12월 28일 10책(114면) : 유영장졸(留營將卒) 출진장졸(出陣將卒) 기공(紀功) 합계 923면 날짜로 보면 짧을 경우 6일치 공문서를 모았고, 길 경우 20일에 달하는 기간의 공문서를 모았다. 각 책의 면수도 모두 다르다. 8책의 67면에서 1책의 118면에 이르기까지 차이가 난다. 내용에 따라서 구분하지도 않았다. 같은 날에 해당하는 내용이 앞책의 마지막과 뒷책의 첫부분에 이어져 있기도 하다. 정서를 한 후 일정한 기준을 두지 않고 면수와 관계없이 책으로 묶었다. 도순무영에 속해서 활동한 사람들의 직책과 이름 그리고 인원수를 기록한 10책의 유영장졸(留營將卒)은 서울의 도순무영 본부에서 활동한 장졸을 의미한다. 유영장졸 중 일부는 전라도와 충청도로 파견을 나가기도 했고, 뒤에 군사를 거느려서 동학농민군과 전투를 벌인 인물도 있다. 여기에 전재된 주요 공문서는 <고종실록> <순무선봉진등록> <순무사각진전령> <선봉진일기> 등에 실린 각종 자료와 동일하다. 1959년에 국사편찬위원회에서 간행한 <동학란기록> 2책에 포함되어서 일찍 알려진 것들이 많다. 하지만 이런 자료에 나오지 않는 새로운 공문서가 포함되어 있다. 특히 전국 여러 지역의 동학농민군 지도자와 활동상이 처음 나와서 연구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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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전북일보
  • 2024.11.20 17: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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