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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공감 2022 시민기자가 뛴다] 일본의 참회가 담긴 곳, 군산 동국사

1899년 5월 1일, 일제에 의해 군산항 개항이 이루어지면서 일본인 전용 주거지역이 지금의 영화동과 장미동 일대를 중심으로 형성되었다. 이로부터 10년 후인 1909년, 일본인 승려 우치다 붓칸(內田佛師)이 일본 불교의 포교소를 짓고, 1913년에 지금 동국사의 자리에 정식으로 사찰을 지었다. 오늘날 우리가 동국사라 부르는 사찰의 옛 이름은 ‘금강사(錦江寺)’였다. 

군산에서는 일본 불교 종파 가운데에서도 조동종(曹洞宗)의 포교 활동이 두드러졌는데, 일제강점기 당시 조선에 160여개의 사찰과 포교소를 운영한 거대 종단으로, 조선에 들어와 다섯 번째로 사찰을 건립한 것이 금강사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의 배후 인물로 지목된 다케다 한시(武田範之)이 이 종단 소속으로 알려져 있다. 

금강사의 2대 주지였던 나가오타 겐테이(長岡玄鼎)가 쓴 당시 명문에는 “우리들은 함께 일한 병합을 하였고 제1차 세계대전이 끝나 평화의 아름다운 시대에 이르렀기에 그 은혜에 감사하는 바이다”라고 적혀 있어 일제강점기 일본 불교가 조선 합병을 위한 침탈 도구로 기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사원 창립을 할 때 30명의 일본인 신도들의 기부가 있었는데, 이들은 월 평균 30원, 특정 행사가 있을 때에는 월 40원 정도를 기부하였다. 당시 고급 관리의 한 달 월급이 30~40원 정도였으니 기부의 규모를 짐작해 볼 수 있다. 신도 가운데에는 일본인 농장 지주도 많았는데 군산의 대표적인 수탈자로 알려진 구마모토 리헤이(熊本利平)도 그 중 한 명이었다.  

금강사는 일제강점기 36년 동안 일본인 승려들에 의해서 운영되다가 해방 이후 미군정의 재산이 되었다. 한국전쟁 때는 인민군이 정렴하여 임시거처로 쓰기도 했고, 국군이 수복한 후 진지의 하나로 이용되었다. 전쟁 직후인 1955년, 전북 불교 종무원장이었던 남곡 스님이 금강사를 인수하였고, 이 때 비로소 사찰 이름을 동국사(東國寺)로 개명하여 오늘에 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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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대웅전 전경. 사진제공=문화재청

동국사는 전형적인 일본식 사찰의 형태를 띠고 있다. 사찰 입구에는 한국 전통 사찰에서 보이는 사천왕문이나 일주문이 없고, 경사로를 오르면 바로 사찰 앞마당에 진입한다. 입구 양쪽에는 대리석 돌기둥이 서 있는데, 한 쪽에는 ‘소화 9년(1934년) 6월 길상일’이라는 음각 기록이 아직도 선명하게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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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대웅전 내부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앞마당 앞에는 급경사 지붕을 하고 있는 대웅전이 있다. 일본의 해양성기후에 맞게 비가 많이 내려도 고이지 않는 형태로 에도시대의 건축양식을 그대로 따르고 있다. 한국 사찰에서 늘 마주치는 단청도 없다. 벽에도 장식이나 문양, 벽화도 없다. 대웅전 뒤로는 사찰 중건 때 일본에서 직접 가져온 대나무로 조성한 숲이 울창하다. 대웅전 옆의 범종각과 석조 불상도 모두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인 승려와 신도들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일본 전통불교의 형식을 따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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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국사 대웅전 창호 모습. 사진제공=문화재청

일제의 옛 모습을 상당부분 유지하고 있는 동국사는 단연 관광객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 실제로 많은 사람들이 군산 여행에서 ‘일본스러움’을 체험하기 위해 빠지지 않고 들르는 곳이 동국사이기도 하다. 그러나 ‘일제잔재’로 바라보는 시각에서는 반드시 청산해야 할 치욕의 역사로 지탄한다. 남겨서 잊지 말아야 할 문화유산으로 후대에 물려줄 것인가, 아픔의 역사를 지우고 새로운 땅으로 거듭나게 할 것인가 하는 치열한 시대의 고민이 이 사찰에 맞물려 있다. 

이보다 중요한 사실이 있다. 오늘날 동국사가 한일 양국의 관계 회복을 위한 가교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일본의 조동종은 2010년과 2012년 두 번에 걸쳐 동국사에 방문하여 태평양전쟁과 일본 홋카이도 강제 징용 때 희생된 조선인들을 추모하는 위령제와 다례제를 올렸다. 특히 2012년 9월에는 일본 종단에서 그들의 과오를 참회하는 뜻의 참사문비를 제막했다. 참사문에는 “우리는 과거 해외 교포의 역사 속에서 범했던 중대한 과실을 솔직하게 고백하면서 아이사인들에게 진심으로 사죄하며 참회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담겨져 있다. 

참사문비는 1992년 조동종이 발표한 참사문 내용을 발췌하여 조각한 것으로 발표 당시 일본 내에서 많이 알려지지 않은 것에 대한 안타까움으로 한국에 다시 건립한 것이다. 일본 불교종단의 진정성 있는 참회의 뜻이 한국으로 건너오기까지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지만, 참사문비 제막을 통해 일본의 진정성 있는 사과를 받아들일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일제 침탈, 한국 전쟁, 한국 불교의 부흥, 근대역사 탐방의 산실 등 1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동국사는 무수한 역사를 응축했다. 수많은 소멸 위기를 넘기고 동국사는 2003년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되었다. 동국사는 일본의 진정성 있는 참회를 바탕으로 과거의 아픈 역사를 느끼고 공감하는 것을 넘어, 한일 간 새로운 관계를 만들어 갈 수 있는 새로운 역사적 공간으로 거듭났다. 머지않은 날, 한국과 일본 양국 간 기념비적인 화해와 소통의 순간이 이곳 동국사에서 열리기를 기대해본다.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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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석훈 문화재청 국립무형유산원 학예연구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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