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철제 선정비가 즐비한 전라감영도시 전주
11월 10일 11시 8분 전라감영에서 10리 떨어진 가리내(Kari-na) 마을 주막을 지난 포크는 전주의 지역 정보를 급히 기록하며 진입하였다. 먼저 전주의 공간 지형이 진입로가 있는 북쪽을 제외하고 동, 서, 남쪽지역이 산으로 둘러 쌓인 분지형 공간이며 주변산 중 가장 높은 산은 900-1000여m에 달한다고 보았다. 이 산은 전주 북서방향에 있는 모악산(795m)을 설명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길 옆에 있는 많은 돌과 쇠로 된 선정비들을 언급하였다. 특히, 쇠로 된 선정비가 훨씬 많았다는 기록이 주목된다.
“지난 15분 동안 나는 치장이 잘된 돌들(선정비)을 꽤 많이 봤고 철제 선정비는 더 많이 봤다. ”
철비(鐵碑)는 철로 제작한 비(碑)를 말한다. 그리고 철은 부의 상징이자 나무나 돌에 비해 강하고 영원하다는 믿음이 있어 공덕비 건립이나 맹세의 상징으로 철로 만든 비를 건립했다. 조선 후기 실학자 정약용은 『목민심서』에서 목비. 석비. 철비를 언급하면서 철비는 선정을 베푼 관리를 잊지 않기 위해 마을 주민들이 세운다는 기록을 남겼다. 이는 철비가 청백리에 대한 백성들의 최고 찬사이고 철비가 건립된 가문은 최고의 영광이었음을 보여준다. 현재 전국에 철비는 전국 23지역에 총 47개가 남아있는데 전북지역에는 7기가 남아있다.(군산 3기, 전주 2기, 김제 2기, 고창 1기, 정읍 1기 등 7기) 그런데 전주지역 2점중 국립전주박물관소장 철비는 남원지역 이전품으로 포크가 보았던 수많은 전주지역의 쇠로 된 선정비 중 현재 남아있는 것은 1개밖에 남아있지 않다. 이 철비는 전라관찰사 이헌구가 재직 시절(1837년 1월-1838년 12월) 선정을 베푼 것을 기념한 ‘관찰사이헌구청간선정비’로서 전북대학교 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이같이 돌로 된 선정비보다 더 많았던 철제 선정비등이 현재 극소수만 남은 것은 일제가 1941년 9월 ‘금속류 회수령’을 공포하고, 조선에 남아 있는 온갖 쇠붙이를 약탈해 식기, 제기와 같은 그릇은 물론이고 농기구를 비롯해 교회의 종이나 절의 불상까지 빼앗아 무기로 만들었을 때 이들 쇠로 만든 선정비들도 대부분 약탈되어 사라진 것으로 보인다. 즉, 일제는 1940년대 침략전쟁을 확전시키면서 물자부족에 시달리던 일본이 식민지 조선의 모든 쇠붙이들을 약탈하여 전쟁 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하였던 상황에서 대부분 사라졌을 가능성을 보여준다.
△길에서 멀리 떨어진 의도된 마을 배치와 열악한 도로
포크가 전주로 들어서며 쓴 기록 중 주목되는 또 다른 내용은 지방의 마을 위치를 의도적으로 중요 도로로부터 떨어트려 배치한 상황에 대한 것이다. 즉, 조선 정부가 지방 마을들의 위치를 의도적으로 도로에 인접시키지 않고 있는 정황을 기록하고 있다.
산비탈에 위치한 마을이 무척 많았다. 늘 그렇듯이 길에서 떨어져 있었다. 조선의 고을과 마을은 서울과 연결된 큰길에서 떨어진 곳에 위치하고 샛길을 통해서만 접근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장터는 큰길이나 근방에서 열리는 것이 허용됐다. 이는 중요한 사실이다. 많은 마을을 볼 수 있지만 외국인이 선택할 만한 큰길만을 여행해서는 절대 실제 마을에 들어가 볼 수 없다. ...내가 보기에는 정부가 장터를 마을로 옮긴 후 큰길을 수리하는 것이 나을 것 같았다.”
이 같은 상황은 조선 정부가 잦은 외적의 침입에 대응하는 방법 중에 서울의 경우 도심 내부에 좁은 길을 만들어 외적의 작전활동을 제한하였다는 견해와 연결되는 것이다. 즉, 지방의 마을들을 큰 길에서 떨어진 곳에 구성해 외적 침입시 피해 축소 및 백성 보호를 위한 소극적 대응법을 추측케 한다. 또한 포크는 도로 사정에 대해 좁고 진창흙과 자갈이 섞여있는 불편한 상황에 대해 기록하고 있다. 이는 이미 17세기 중반에 나온 유형원의 『반계수록』에서 “수레의 이용에 관심 있는 사람이 없기 때문에 누구도 도로가 좁고 구불구불한 사실에 대해 불평하지 않는다”고 했다. 이는 19세기 조선을 찾았던 많은 서양인들도 조선의 지방도로에 대해 매우 좁고 불편함을 기록한 것과 같은 입장이었다. 즉, 1883년 미국을 방문한 보빙사의 외국인 고문으로 참여한 후 외국인으로서는 최초로 고종의 초청을 받아 포크보다 6개월 먼저 조선에 왔던 퍼시벌 로웰이 “조선의 도로는 도로라는 이름이 과분할 정도로 빈약하다....계획적으로 길을 닦는 것이 아니라 어쩌다 생겨났다고 말하는 편이 옳다.”라고 적고 있다.
포크의 요청으로 1886년 7월 조선에 온 미국 선교사 호머 헐버트 또한 『한국견문기』(The Korean Review1901-1906)에서 “전 국토의 어느 곳을 가 봐도 도로라는 것이 말이나 겨우 다닐 수 있는 정도”라고 지적했다. 1885년-1896년사이 조선에서 근무한 러시아 장교 카르네프는 『내가 본 조선 조선인』에서는 “조선의 가장 심각한 문제점이 도로 사정이다. 모든 길은 대단히 좁고 구불구불하며 더러웠다...조선의 서울에서 지방으로 가는 모든 길은 논과 밭사이로 나있었다.” 라고 기술하고 있다. 이는 전주로 진입하는 도로의 상황과 거의 비슷하였음을 알 수 있다. 포크는 이같은 상황 개선을 위해 마을로 교역 중심 공간인 시장터를 옮기고 도로를 재정비하자는 의견을 제시하였다.
△포크가 처음 본 큰 키의 전주사람들과 7-8000여채 건물로 꽉 들어찬 전주
포크는 조선의 각 지역을 다니며 당시 유행하던 인종학적 지견을 바탕으로 지역별로 조선사람들에 대한 인종 특징 확보에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리고 전주로 들어가는 길에서 마주친 180cm에 육박하는 큰 키의 전주 사람들을 주목해서 기록하고 있다. 포크는 전라도 사람들의 특징이 타 지역과 다른 점이 보일 때 마다 특별히 신경써서 기록을 남겼다. 한편, 기온 기압을 측정해 가장 오래된 전주의 온도측정 기록을 남겨 놓았다. 1884년 11월 10일(양력) 11시18분 가리내 주막 근처의 측정값 기록은 “기압은 30.42, 온도는 53F°(11.6℃), 바람은 남서풍이고 춥다.”였다. 이는 1961년-1990년까지의 11월 10일 전주 평균 기온 8.6℃(최고13.5℃~최저3.9℃) 자료와 비교할 때 큰 차이가 없는 날씨 상황임을 보여주고 있다.
이후 포크일행은 11시 50분 멋진 나무들이 우거져있는 숲(전주 숲정이)과 자갈이 많고 거의 경작이 되지 않은 평지를 지나, 몇 개의 누각과 오래된 비석이 많은 길을 지나 12시 10분에 전주의 남문에 도착해 임시 숙소로 안내되었다.
“이 도시는 성벽 안에 2,000여 채의 집이 있었다. 고을 전체는 7,000-8,000여 채에 달했다. 거리는 비좁았고 정리가 안되어 있었다. .... 동쪽 끝의 커다랗고 추레한 방이 있는 허름한 관아로 꺾어져 들어갔다.”
포크가 전주성에 진입한 길은 현재 전주천변 길을 따라 덕진구청과 숲정이숲이 있었던 해성중고등학교자리(현 동국해성 아파트)일대를 거쳐 서문쪽을 지나쳐 전주 남문시장쪽으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남문으로 들어와 동쪽 끝에 위치한 허름한 관아에 잠시 쉬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는 경기전과 조경묘 근처의 공간으로 추정된다.
얼마후 포크일행은 빨간 겉옷을 입은 길나장이 6-8명이 호기심에 휩싸인 거친 무리들을 마구 밀쳐내는 소란과 함께 전라감영입구에서 의장을 갖춰 대기중인 수백 명의 군졸들을 헤치며 전라감영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포정루문과 중문을 거쳐 안쪽에 가마가 내려지고 마지막 문(내삼문)이 한 가운데서 열려 젖혀졌다.
“내 앞에 거대한 관아가 나타났다. 매끈한 기와를 올린 높은 지붕과 기둥은 높고 당당한 기운이 서려 있었다. 본관에는 화려하게 옷을 입은 하급 관리들이 거대한 무리를 이뤄 서 있었다. 전체적으로 놀라운 풍광을 만들었다. 지금까지 조선에 있는 어떤 외국인도 보지 못했을 광경이었다. 동양의 오만스러움과 전제 권력의 느낌이 강하게 풍기는 장면이었다. ”
/조법종(우석대 교양대 학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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