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과 돌봄, 주민이 함께 짓는 지속가능한 공동체
전북 익산시 성당면 회선마을. 가을이 오면 넓은 들녘은 황금빛으로 옷을 갈아입고, 붉은 노을이 마을 위에 천천히 내려앉는다. 하루의 끝자락, 논과 논 사이로 스며드는 햇살은 이곳의 시간을 한 박자 늦춘다. 고선지라 불리는 이 마을은 신선이 머물다 갔다는 이름처럼 풍경이 고요하고, 삶의 결 또한 단정하다. 계절의 변화가 고스란히 드러나는 들판과, 사람 손길이 닿아 정돈된 마을 골목은 농촌이 지닌 본래의 모습을 차분히 보여준다.
하지만 회선마을의 시간은 여기에 머물러 있지 않다. 81가구 161명이 사는 작은 농촌이 전통문화와 공동체를 중심에 두고 스스로의 미래를 설계하며, ‘작지만 강한 마을’의 또 다른 가능성을 만들어가고 있다. 인구 감소와 고령화라는 농촌의 공통된 과제를 안고 있으면서도, 회선마을은 이를 피할 수 없는 현실이 아닌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는 출발점으로 삼았다.
△ 전북 무형문화재 1호, 익산목발노래를 ‘현재’로 살리다
회선마을을 상징하는 가장 중요한 자산은 전북특별자치도 무형문화재 제1호인 ‘익산목발노래’다. 익산 농민들의 노동요인 이 노래는 지게를 멜 때 사용하는 목발을 두드리며 부르는 소리로, 농사일 속에서 공동체의 리듬과 호흡을 맞추던 삶의 언어다. 삼기면 고 박갑근 선생이 채록한 삼기농요 가운데 지게목발 공연을 위한 9곡으로 구성돼 있으며, 농민들의 노동과 연대의 기억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회선마을은 이 전통을 단순히 ‘지켜야 할 문화재’로 두지 않았다. 2023년 주민 주도로 결성된 ‘고선지목동’ 동아리는 익산목발노래 전승의 중심축이다. 단순한 공연단을 넘어, 마을 주민들이 직접 배우고 익히며 세대 간 전승을 이어가는 공동체 조직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종수 이장은 고 박갑근 선생의 익산목발노래 1호 이수자로, 교육과 연습, 공연 전반을 이끌며 마을 전승 활동의 구심점 역할을 하고 있다.
이 같은 노력은 분명한 성과로 이어졌다. 고선지목동은 지난해 제6회 익산삼기농요 전국국악경연대회에서 일반부 단체 대상을 수상했고, 올해는 농림축산식품부 행복농촌만들기 콘테스트에서 마을만들기 분야 동상(장관상)을 받았다. 전통문화가 마을의 상징을 넘어 외부로부터 인정받는 경쟁력으로 자리 잡은 것이다. 회선마을에서 익산목발노래는 과거의 유산이 아니라, 지금 이곳 사람들의 삶과 함께 호흡하는 현재형 문화다.
△ 주민이 만든 경관과 공동체, ‘네 바퀴’로 굴러온 마을
회선마을의 변화는 문화에 국한되지 않는다. 주민들은 스스로 마을을 가꾸고, 함께 결정하며 공동체의 틀을 차근차근 다져왔다. 2018년 농촌현장포럼을 통해 마을발전계획을 수립한 뒤, 생생마을만들기 사업으로 야생화동산과 고선지 소공원을 조성했다. 행정 주도가 아닌 주민 참여형 사업이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후 마을단위 자율개발사업을 통해 주민복지관을 조성하고, 이를 거점으로 평생교육과 공동체 프로그램을 운영해왔다. 고선지 가을음악회 ‘저 노을처럼’은 주민들이 직접 기획하고 운영하는 마을 자체 행사다. 외부 공연에 의존하지 않고, 마을이 가진 이야기와 재능으로 채운 무대는 공동체 결속을 더욱 단단하게 만들었다.
주민들은 회선마을을 이끌어온 힘을 ‘네 바퀴’에 비유한다. 원칙을 지키는 리더의 뚝심, 민주적인 의사결정과 투명한 운영, 먼저 손을 내민 주민과 그 손을 붙잡은 귀농·귀촌인의 화합, 그리고 말보다 행동으로 옮기는 실천의 힘이다. 이 네 가지가 균형을 이루며 마을은 흔들림 없이 굴러왔다.
출향민과 함께 조성한 ‘고선지 인재육성장학금’도 이런 공동체 철학의 연장선에 있다. 마을을 떠난 이들과 남아 있는 주민들이 다시 연결되며, 회선마을은 공간을 넘어 관계로 확장되는 공동체로 변화하고 있다.
△ 전통과 돌봄으로 설계하는 회선마을의 다음 10년
회선마을 역시 고령화와 인구 감소라는 농촌의 현실을 피해갈 수는 없다. 이종수 이장은 “안 줄고 있다고 말하면 거짓말”이라면서도 “다른 마을에 비해 귀향하는 분들은 늘고 있는 편”이라고 말했다. 부모 세대가 살던 고향으로 돌아오는 중장년층이 늘면서, 마을은 또 다른 전환의 국면에 들어섰다.
회선마을이 설정한 미래의 핵심 키워드는 ‘돌봄’이다. 최종 목표는 노인 복지의 완성이다. 걱정 없는 마을 돌봄 체계 구축, 공동생활홈 조성, 마을자치연금 도입 구상 등은 고령화 시대 농촌이 선택할 수 있는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전통문화와 공동체 활동이 돌봄과 자연스럽게 맞물리는 구조다.
앞으로 회선마을은 농산물 가공을 통한 소득사업 확대와 함께, 농림축산식품부·문화체육관광부 등 정부 공모사업을 연계해 마을평생학습관 운영과 문화역량 강화를 추진할 계획이다. 동아리 활성화, 경관 개선, 공동체 돌봄이 함께 작동하며 사람이 떠나지 않고, 오히려 찾아와 머무는 마을로의 전환을 꾀하고 있다.
이 마을이 선택한 해법은 거창한 개발도, 외부 자본에 기대는 방식도 아니다. 주민이 주인이 되는 공동체, 세대를 잇는 전통문화, 그리고 삶을 지탱하는 돌봄을 마을의 중심에 놓는 일이다. 행정이 설계한 계획을 수동적으로 따르기보다, 주민 스스로가 논의하고 결정하며 실천해온 과정이 오늘의 회선마을을 만들었다.
회선마을의 가장 큰 자산은 여전히 사람이다. 전통문화를 배우고 가르치며 함께 노래하고, 마을 환경을 스스로 가꾸고 지키며, 이웃의 삶을 자연스럽게 살피는 문화가 이곳에 자리 잡았다. 전통문화 계승과 경관 관리, 공동체 돌봄까지 이어지는 이 흐름은 언제나 주민의 선택과 참여에서 출발했다.
회선마을이 보여주는 모습은 오늘날 농촌이 처한 현실에 대한 하나의 답이다. 빠르게 성장하지 않아도, 화려하지 않아도, 함께 살아가는 힘만으로도 마을은 충분히 지속될 수 있다는 메시지다. 황금빛 들녘 위에 내려앉은 노을처럼, 회선마을의 변화는 조용하지만 분명하다. 이곳에서는 오늘도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자신들만의 속도로 마을의 내일을 만들어가고 있다.
이 이장은 “회선마을의 가장 소중한 힘은 주민”이라며 “전통문화도, 경관도, 그리고 사람 모두가 이 마을의 진정한 주인공”이라고 말했다. 황금빛 들녘 위에 울려 퍼지는 익산목발노래처럼, 회선마을은 오늘도 흔들림 없이 자신만의 길을 걷고 있다.<끝>
이준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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