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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마주보기] 인공지능 시대, 예술의 출발점은 어디인가?

허정선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장

이미지는 넘쳐난다. 몇 개의 단어만 입력하면 인공지능은 순식간에 그럴듯한 그림을 만들어낸다. 속도는 놀랍고 결과는 정교하다. 알고리즘은 학습된 데이터를 바탕으로 가장 적합한 형상을 추출한다. 우리는 그 기술의 편리함과 효율성에 감탄하며 살아가고 있다.

그러나 항상 질문이 남는다. 그렇게 생성된 이미지는 과연 ‘예술’일까.

내달 초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에서 열리는 기획전 《김병종의 드로잉: 그럼에도》는 이 물음에 대한 하나의 방향을 제시한다. 드로잉은 단순한 선(線)이 아니라, 오랜 사유와 반복된 몸짓이 겹겹이 스며 있는 시간의 흔적임을 보여준다. 일필휘지로 그어진 한 줄의 선은 순간의 번뜩임처럼 보이지만, 그 안에는 수십 년에 걸친 수행과 숙련의 세월이 응축돼 있다. 그것은 계산된 결과가 아니라 사유의 깊이를, 속도가 아니라 밀도를 드러낸다.

나는 오래전 한 평론에서 드로잉을 “몸이 기억하는 언어”라고 쓴 적이 있다. 생각이 완성된 뒤에 그려지는 선이 아니라, 그리는 과정 속에서 사유가 형태를 얻는 행위라는 뜻이었다. 손은 머리의 지시만을 따르지 않는다. 축적된 시간과 감각이 손끝에서 스스로 길을 찾는다. 그래서 한 줄의 선에는 주저함과 결단, 망설임과 비약이 동시에 스며 있다. 그 복합적인 시간의 결이 화면 위에 고스란히 남는다.

인공지능이 데이터를 조합해 이미지를 산출한다면, 인간의 손은 체험과 감각, 망설임과 결단을 거쳐야만 작품을 남긴다. 화면에 남은 미세한 압력의 차이, 호흡의 흔들림, 멈칫한 흔적들은 완벽하지 않기에 오히려 더 생생하고 가치 있다. 그 불완전성은 오류가 아니라 살아 있음의 증거다.

예술은 데이터의 축적만으로 탄생하지 않는다. 예술은 손의 밀도가 켜켜이 스며든 자리에서 비로소 생명력을 얻는다. 이른바 ‘손맛’이 살아 있는 작품에는 한 인간이 살아온 시간의 층위와 감각의 온도가 담겨있다. 그 온도는 보는 이의 마음에 잔잔한 파동을 일으켜 설명하기 어려운 감동을 주고, 때로는 위로와 치유를 안겨준다. 감동을 주지 못하는 예술은 아무리 형식이 완결되어 있어도 생명력이 없다. 생명력이 있는 예술만이 우리의 마음을 흔들고 우리 내면의 결을 다시 다듬는다.

기술은 점점 더 정교해지고 인간의 표현 방식을 모방한다. 그러나 예술의 출발점은 여전히 인간의 몸에 있다. 손끝의 감각은 계산될 수 없는 생명의 떨림을 만들고, 그 떨림은 단순한 형상을 넘어 생기를 획득한다. 닫히지 않은 형상은 미완이 아니라 생성의 과정이며, 여백은 결핍이 아니라 가능성을 품은 사유의 장이다. 이는 채움보다 비움을 통해 본질에 다가가려는 한국적 미의식과도 맞닿아 있다.

물론 기술을 거부할 수는 없다. 알고리즘은 이미 우리의 일상이 되었고, 예술 은 언제나 동시대 매체와 호흡해왔다. 인공지능은 붓이나 물감처럼 예술가가 다루는 또 하나의 창작 도구일 뿐이다. 백남준이 당대의 보편적 기술이던 영상과 텔레비전을 새로운 예술언어로 전환했듯, 예술가가 디지털 시대는 디지털 기술을 인공지능 시대는 인공지능을 활용하는 것은 당연한 흐름이다. 예술가가 동시대의 기술로 창작에 임할 때 동시대의 삶과 당면 문제를 가장 직접적인 방식으로 드러낼 수 있기 때문이다.

문제는 기술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예술의 출발점이다. 예술은 계산에서 비롯되는가, 아니면 몸짓과 사유가 축적된 손의 밀도에서 시작되는가. 인공지능이 아무리 정교한 이미지를 생산할지라도, 한 줄의 선에 깃든 인간의 떨림까지 재현할 수 있을까. 남원시립김병종미술관의 《김병종의 드로잉: 그럼에도》는 ‘생명의 화가’ 김병종의 드로잉을 통해 예술의 기원을 다시 묻는다. 예술은 어디에서 시작되는가. 그 시작은 속도나 계산이 아니라 시간과 사유가 켜켜이 쌓인 손의 밀도에 있음을. 그리고 그 한 줄의 선이야말로 존재의 깊이를 드러내는 자리임을 말하려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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