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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품되기 VS 사람되기

세계화의 열풍과 IMF의 혹풍 이후, 대한민국을 지배하고 있는 신자유주의는 이 땅의 젊은이들을 비정규직으로 삶을 연명해야하는 ‘88만원 세대’로 만들었다. 결국 그들은 연애, 결혼, 출산을 포기한 ‘3포세대’가 되었다. 그래도 아직 삶을 포기할 수 없는 젊은 청춘들은 바늘구멍과 같은 취업관문을 뚫고자 노력하고 있다. 그들은 인터넷 사이트와 SNS를 통해 수많은 정보들을 공유하는데, 그 중에 ‘대기업 인사팀 18년차의 조언’이라는 글이 있는 것을 보았다. 그 글을 거칠게 요약하면 ‘대한민국의 재벌은 수출위주 제조업 중심이므로 공대를 가라.’, ‘문과는 서강대 경영이 대기업 입사 커트라인.’, ‘수도권 대학 못 갈 거면 차라리 지방 국립대 공대가 낫다. 대기업에서는 지방의 공단에 인력수요가 있기 때문.’, ‘경영, 영문 같은 학과는 포화상태라 이젠 나와도 의미가 없다. 차라리 희귀한 전공의 틈새학과를 가라.’, ‘여자는 이대나 숙대를 추천한다.’ 등등의 내용이 있다. 참으로 대한민국의 지금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는 ‘현실적인 조언’이 아닐 수 없다. 하지만 갖은 노력 끝에 대기업에 들어간다 해도, 결국 소모되고 대체되는 ‘부품’이 된다는 또 다른 현실은 간과한 조언이다. ‘공밀레’라는 농담 아닌 농담이 단적으로 보여준다. 이 말은 아이를 쇳물에 넣어 종을 완성했기 때문에 ‘에밀레’하고 울린다는 성덕대왕신종에 얽힌 설화에서 나왔다. 즉, ‘공돌이’를 갈아 넣어 물건을 완성한다고 할 정도로 착취당하고 버려지기에 ‘공밀레’라고 하는 자조적 표현이 나온 것이다.하지만 우리는 부품이 아니라 사람이고, 부품으로 착취당하며 살아가기 위해 태어난 게 아니다. 게다가 우리의 삶은 단 한 번뿐이다. 호스피스 전문의가 암 말기 환자들을 상대한 경험을 정리해 적은 ‘죽을 때 후회하는 스물다섯가지’라는 책에서도 ‘진짜 하고 싶은 일을 했더라면.’이라고 후회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그러니 단 한번뿐인 인생, 돈 벌려고 취직하는 게 아니라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그러나 이것 역시 말처럼 쉬운 일은 아니다. 첫 번째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이 뭔지 찾는 것 자체가 어렵다. 내가 좋아하는 일은 자신이 선택하는 게 아니라, ‘주어지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많은 경험을 하면서 자기에게 맞는 일을 찾아야 한다. 그러나 학창시절에는 ‘좋은 대학’만을 강요하고, 대학에 들어가고 나서는 ‘취직’만이 전부인 한국에서, 다양한 경험을 하면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찾다가는 자칫 ‘낙오자’ 혹은 ‘패배자’ 취급받기 쉽다. 두 번째로 하고 싶은 일을 하려면 경제적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이상하게도 ‘너는 네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거니 돈을 적게 받아라.’라는 논리로 노동력을 착취한다. 이게 바로 ‘열정 페이 계산법’이다. 상식적인 자본주의 사회라면 있을 수 없는 괴상한 논리이지만, 우리나라에는 버젓이 통용되고 있는 ‘상식’이다.단 한 번뿐인 인생, 하고 싶은 걸 하고 살기도 참 힘들다. 하지만 어렵다고 해서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포기하지 않고 늘 자신을 성찰하며 꾸준히 노력한 결과,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행복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젊음과 미래가 가능성과 희망이 아닌, 불안함과 절망을 가리키는 시대라 할지라도, 우리는 사람답게 살아가기를 포기해선 안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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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4.02 23:02

2014년 결혼방정식

2014년에 들어서서 벌써 결혼식만 다섯 번 째다. 주말마다 늘 남의 결혼식만 이리 줄기차게 다니고 있는 내가, 정작 버진로드를 행진할 수 있는 날이 오기나 할지. 아무래도 30년이라는 물리적인 시간의 경과 때문인지, 나보다도 내 주변 사람들의 성화가 더욱 나의 서른을 힘들게 한다는 생각이 든다. 거기다가 유행가 가사의 첫 구절이 서른의 나이를 더 쓸쓸하게 만든다. “서른이 넘기 전에 결혼을 할는지….”어쨌든 올해만 다섯 번의 결혼식을 다녀오면서, 결혼에 대한 ‘환상과 현실의 이면’도 다섯 번을 더 생각하게 되었다. 대다수의 사람들이 평생 딱 한 번 가지게 되는 통과의례인 결혼식. 그만큼 누구에게나 특별하고 의미 있는 시간이 되는 것만은 분명하지만, 안타깝게도 보는 이들의 시선에서는 결혼식장으로 출발하면서부터 시작되는 전쟁 같은 시간이다. 뭘 입고 가야할지 며칠을 고민하다가 고른 불편한 옷을 입고, 겨우겨우 결혼식장 인근을 뒤져 주차에 성공. 주례사는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 않지만 마지막 단체사진을 찍기 위해 자리를 보전하고 있다가, 식사를 하기 위해서는 또 겨우겨우 자리를 잡고 앉자마자 음식을 가져오기 위해 접시를 들고 수많은 사람들 틈을 비집고 뷔페 순례를 다녀와야 한다.두 시간도 채 되지 않는 시간동안에 진행되는 이 과정들이 내가 다녀 온 다섯 번의 결혼식에서 반복되었다. 그 날 그 결혼식이 누구 결혼식이었더라, 헷갈리기까지 한다. 하지만 결혼식의 장본인들은 이 결혼식을 위해 몇 달을 준비했을까. 결혼한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우린 뺄 건 다 빼고 꼭 필요한 것만 했다고 이야기 한다. 나는 사실 아직도 모르겠다. 뺄 건 뭐고, 꼭 필요한 건 또 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몇 달이라는 시간과 몇 천만원이라는 비용이 필요한 건지. 혼인은 두 사람의 약속이고 사랑의 결실이지만, 이것이 사회 안에서 하나의 제도가 되면서 수학문제를 풀듯이 똑같은 방정식에 대입된다. 그 당연한 방정식들은 결혼식에 드는 ‘비용’으로 산출되어 양가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기도 한다. 그래서인지 오히려 요즘은 작은 결혼식, 두 사람만의 특별한 결혼식도 심심치 않게 모습을 드러낸다. 혼인신고를 마치고 나온 구청 앞에서 두 사람만의 세레모니로 결혼식을 대체하거나 지인들과의 작은 결혼식을 올리는 것이 다만 연예인들만의 이야기가 아니었다. 지난 3월 15일, 경인여대 학생들이 가진 재능을 통해 형편이 어렵거나 작은 결혼식을 추구하는 이들을 위한 특별한 결혼식이 진행되기도 했단다. 어릴 때 엄마 손 잡고 따라갔던 막내 삼촌의 결혼식은 지금 생각해 보면 참 촌스러운 흑백사진 같은 기억으로 남아 있다. 하지만 진지하고 경건하게 결혼식을 지켜봐 주었던 하객들과, 지금처럼 화려한 뷔페는 아니지만 뜨끈한 불낙전골과 오가는 소주잔으로 기쁜 마음을 나누었던 밥상 위의 경치가 왠지 모르게 그리워진다. 결혼식만 끝나고 나면 모든 게 다 끝날 것만 같다는 친구의 이야기에 마음은 더 씁쓸해진다. 내 나이 서른, 직장생활 3년차, 집이 있을 리도 만무한데다가 대학원까지 다니면서 마일리지처럼 쌓여온 학자금까지 생각하면, 새로운 출발을 준비해야 하는 결혼이라는 과정에 너무 많은 에너지와 자존심을 쏟아 붓게 되는 것은 아닐지, 또 지레 겁부터 먹게 된다. 그나저나, 다음 주 결혼식에는 또 뭘 입고 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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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26 23:02

March 15, 2014

생각해보니 내가 미국에 가 있었던 3년을 제외하곤 우리 가족은 항상 대가족이었다. 아기때부터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부모처럼 날 키워주셨기 때문이다. 아파트에 살때도 지금 주택에서도 이층에는 나와 부모님이, 아래층에는 할머니 할아버지께서 사신다. 거기다 동물 가족들도 열마리나 산다. 이렇다 보니 우리집은 항상 북적북적 소란스럽다. 아마 식구들 밥 챙기고 강아지 고양이들 식사 준비 하는것이 우리집에서 가장 큰 일과가 아닐까. 빨래도, 바닥의 먼지도 끝이 없고, 현관은 치워도 치워도 신발들로 넘쳐난다. 가끔 셔츠나 양말 몇 켤레가 주인을 잃고 헤매기도 한다.사실 집에 항상 사람들이 있다 보면 불편할때가 있다. 나는 지극히 개인적인 성향을 가진 사람인지라 조용히 혼자 시간 보내기를 좋아한다. 당연히 우리집에서 그런 시간을 바라기란 조금 힘들다. 또 집에 혼자 있고싶은 날도 있기 마련이다. 하지만 모든 일에는 양면이 있는 법. 나는 우리 가족이 서로 부대끼며 살아가는 모습이 참 보기 좋다. 아프고 힘들때 서로 도울 수 있고, 언제나 든든한 내 편이 있다는 것에 감사한다. 이렇게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밥을 먹고, 하루의 끝에 다 같이 모여 영화를 볼 가족들이 있어 참 다행이다. 나의 어머니께서 지난 며칠간 건강 문제로 병원에 입원하셨다. 일주일은 그리 긴 시간이 아니지만, 어머니의 빈 자리가 크게 느껴졌던 한주였다. 다행이 가족들이 있었기에 빈 자리를 조금씩 나눠 채울수 있었다. 강아지들 고양이들 밥은 내가, 운전 기사 역할은 할아버지께서, 그리고 청소는 여러 사람이 돌아가면서 했다. 내가 없을때 내 자리를 누군가 채워줄 수 있다는 것은 정말 다행스러운 일이다. 3년간 외국에 살면서 가장 힘들었던 순간은 가족의 빈자리가 느껴졌던 때였다. 가족과 멀리 떨어져 이리도 긴 시간을 보낸 건 처음이었다. 더이상 응석 부리거나 떼 쓸 처지가 아니었다. 갑자기 철없는 아이가 어른이 된 기분이었다. 바보같게도 텅텅 빈 집이 한동안 무서웠다. 학교에서 학예회를 하거나 내가 속한 동아리 공연에 오시는 친구들의 부모님이 부럽기도 했다. 그때 외삼촌이 안계셨으면 참 외로운 3년이었을 것이다. 외삼촌께서 나머지 가족들의 빈자리를 채워주셨기에,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었다. 이제 2주만 지나면 다시 외국 생활을 한다는 사실이 조금 섭섭하기도 하다. 나 뿐만이 아니라 굉장히 많은 사람들이 가족들과 떨어져 산다. 요즘에는 대가족도 찾아보기 힘들다. 기숙사에 머무는 학생들, 타지에서 일하시는 아버지들…솔직히 나는 약과가 아닐까? 나 하나 바다 건너가도 우리집은 여전히 붐비겠지만, 핵가족에서 아이나 아버지가 없다면 집이 꽤 쓸쓸할 것이다.이 밤중에 왜 우리나라엔 유독 갈래 갈래 찢어져 사는 가족들이 많은지 생각해 본다. 너무나 성공적인 미래에 대해서만 생각해서가 아닐까. 함께하는 시간보다 나중을 바라보며 앞으로 달려가는 일을 더 중요하게 여기는 것 같다. 일단 좋은 대학에 들어가야 하고, 같이 하는 저녁식사 보단 일과 학업이 우선이다. 개인의 문제만이 아니다. 학교에선 한밤중까지 보내주지 않고 회사는 야근에 회식까지. 하지만 자꾸 미루다 보면 영영 못 이룰지도 모른다. 티비에 근사한 여행지가 나올때마다 ‘나중에 시간나면 가야지’ 혹은 ‘돈을 더 벌게되면 가야지’ 하고 말만 하지 않는가? 미래에는 어떤 일이 생길지 아무도 모른다. 그러니 현재에 충실하는게 맞지 않을까. 사랑하는 가족들과 후회하지 않도록 지금! 시간을 보내는게 중요하다. 더 늦기 전에 좋은 추억을 많이 만들도록 하자(나 자신도 포함해서). 나중에 이미 떠나버린 시간을 후회하지 않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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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9 23:02

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

해가 떨어지자 공기가 더 추워졌다. 코쿠코엔(航空公園)역 근처의 마트에 들러 맥주 여섯 캔과 냉동 춘권을 사들고는 마을버스에 올라 조금 더 구석진 곳으로 들어갔다. 예고 없이 내린 두 번째 폭설 때문에 인적이 드문 곳은 이미 허벅지 높이만큼 눈이 쌓여 있었다. 아무런 계획 없이 무작정 찾아간 일본에서의 두 번째 날 밤이었다. 현지에서 예술을 공부하는 유학생 친구를 만나 10여 분을 눈밭에서 뒹굴다시피 하며 걸었을까, ‘짱구는 못말려’에서나 봤을 법한, 꽤나 깔끔하고 넓어보이는 집에 도착했다. 근방의 모든 친구들이 편하게 들락날락하는 ‘아지트’라고 했다.그날도 정작 집주인은 영화촬영을 나가 자리를 비운 상태였다. 빈 술병이며 담배 꽁초가 여기저기 널려 있고 그 사이사이로 동년배로 보이는 몇 명이 앉아 있었다. 외관만 봐도 모두 하늘을 뚫을 듯한 개성을 자랑하던 그들에게 나를 한국의 영상학도 쯤으로 간단히 소개한 뒤 사온 맥주를 나눠 마시며 서로의 이야기를 조금씩 털어놓기 시작했다.콧수염을 적당히 기른 요시키는 가끔씩 질문에 답하는 때만 빼면 거의 말이 없었다. 휴먼 다큐멘터리를 찍고 있다고 했다. 덧붙여 그 무리 중에서 가장 주당이라, 일본주 한 병을 자기 몫으로 따로 가져와 혼자서 여유롭게 입에 털어넣고 있었다. 춤을 좋아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가끔 혼자 몸을 흔들곤 했다.훈이는 일본의 드라마에 빠져 대학까지 일본으로 진학해버린 별난 유학생이었다. 빨갛게 물들인 머리를 한쪽으로 넘긴 탓에 인상이 꽤 강렬했다. 사서 고생하는 것을 좋아하는 친구라 요즘은 현지에서 막노동부터 영화 엑스트라까지 다양한 경험을 쌓고 있다고 했다. 친구들 사이에서 요리를 잘 하기로 정평이 나 있어서, 그날의 안주는 모두 그의 책임이었다.아츠키는 어렸을 때부터 현장에서 활약했던 아역배우였다. 한국 영화에도 출연한 경험이 있다고 했다. 경험에 비해 꽤나 겸손한 친구라 절대 먼저 자신의 자랑을 늘어놓는 일은 없었지만 새로운 화제거리가 나올 때마다 항상 그에 관한 방대한 지식을 쏟아내어 모두를 놀라게 했다.기껏 일본까지 왔는데 이런 촌구석에서 시간을 보내도 되냐, 며 누군가 장난스레 물었다. 어차피 이러려고 왔다, 고 답했다. 일거리를 내팽개쳐두고 일본행 비행기에 오른 데에는 사실 ‘다른 나라의 청춘은 뭔가 다를까’ 하는 막연한 기대감이 있었던 터라, 그 어떤 것보다 사람 만나는 자리가 고팠으니까.지금 생각해보면 너무나도 당연한 이야기지만, 그 기대감은 그날로 인해 보기 좋게 무너져 버렸다. 며칠 밤을 샌 촬영으로 고생했다던가, 이번 수업의 교수가 어떠했다던가 하는 푸념을 늘어놓으며 모두가 비슷한 불안감을 공유하고 있었고, 자신의 작품에 대해 이야기할 때면 하나같이 눈을 반짝이며 열띤 토론을 펼쳤다. 서로의 시행착오를 나누는 낯익은 풍경, 어쩌면 국가를 막론하고 젊은 날은 그래서 더 아름다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예상치 못했지만 그만큼 만족스러운 결론이었다. 그날 밤은 결국 이런저런 이야기에 모두 취기가 올라 꽤 시끌벅적한 자리가 되었다. 가끔씩 내가 공감할 수 없는 그들끼리의 이야기가 오고가는 와중에 요시키의 춤사위는 더 격해졌다. 영화의 한 장면 같아 아무 말 없이 한참을 멀뚱히 보고만 있었다. 눈은 끝없이 내렸고 우리들의 목소리는 높아져만 갔다. 만국 공통, 청춘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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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12 23:02

21세기 대한민국 절양가

우리 집에는 감나무가 세 그루 있다. 각각 맛난 홍시와 단감이 열리는 감나무였다. 그러나 집 앞에 건물이 들어서 햇빛을 가리고 땅이 습해지면서, 이제 감도 잘 열리지 않고 열리는 감도 예전의 맛이 나지 않게 되었다. 맛난 감이 열리기에 적합하지 않은 환경이 되었기 때문이다. 엉뚱하지만, 그런 감나무를 보고 있자니 정약용이 지었다는 〈애절양(哀絶陽)〉이라는 시가 생각났다. ‘절양(絶陽)’은 남자의 생식기를 자른다(!)는 뜻이다. 이 시는 정약용이 강진으로 유배당해 지내던 1803년에, 가혹한 군포(軍布) 징수를 감당할 수 없었던 남자가 다시는 아이를 낳지 않겠다며 자신의 생식기를 자른 이야기를 듣고 슬퍼하며 지은 시이다.이런 현실은 조선 후기 군역(軍役)과 세금수취제도의 변화가 원인이라고 한다. 먼저 조선시대의 군역은 지금의 징병제처럼 모든 양민이 군역을 져야 했다. 하지만 군역은 예나 지금이나 고되고 힘들었다. 그래서 조선후기에 포를 내고 군역을 회피하는 폐단이 성행하자, 결국 나라에서도 군역 대신 포(布)를 받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세금수취제도의 경우, 본래 조선초기에는 개인이나 토지에 직접 세금을 부과하려고 했다. 그런데 이것이 조선후기가 되면서 지방 군현에 일괄적으로 일정액을 부과하여 징수하는 비총제(比摠制)로 변화하였다. 이러한 군역제도 및 세금수취제도의 변화는 구조적 부패를 낳았다. 즉, 직접 노동력을 제공하는 군역은 착복할 수 없지만, 포로 내는 세금은 착복이 가능했다. 그리고 중앙정부에 올려 보낼 세금은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지방 수령과 서리는 많이 걷은 뒤, 정해진 양만 서울에 바치고 나머지를 착복했다. 그래서 군포 징수의 대상이 아닌 갓 태어난 어린아이에게조차 군역을 씌워 포를 받아내는 황구첨정(黃口簽丁), 이미 죽은 사람도 군적에서 빼지 않고 계속 수포하는 백골징포(白骨徵布)가 자행되었다. 〈애절양〉의 주인공은 그런 구조적 부패의 희생양이었던 것이다.문제는 자신의 생식기를 스스로 잘라야했던 조선시대 양민의 이야기가 그저 옛날이야기만은 아니라는 것에 있다. 비록 원인은 다르지만, 21세기의 ‘대한민국’을 살아가는 청년들도 사실상 〈애절양〉이 지어지던 시절과 비슷하게 아이를 낳아 기르기를 포기하고 있다. 과학이 발달해 스스로 성기를 자르지 않아도 피임을 할 수 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2013년 현재 ‘대한민국’의 출산율이 1.19라는 사실이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다.개인의 입장에서 스스로의 선택으로 아이를 ‘낳지 않는 것’이 아니라, 환경적, 구조적 문제로 아이를 ‘낳지 못하는 것’은 무척 불행한 일이다. 게다가 이런 낮은 출산율이 해결되지 않으면 대한민국의 미래는 무척 암울해진다. 2060년에는 노년층 비율이 40.1%가 되는 사회가 된다는 예측도 있다. 이렇게 구조적인 문제가 복잡하게 얽혀 있어, 쉽게 해결할 수 없는 난제가 출산율에 관한 문제이다. 하지만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유전자를 남기는 생물 본연의 본능적 의무를 포기할 수 없다. 물론 단순히 아이를 많이 낳자는 말이 아니다. 포기하지 말고, 조건과 환경을 개선하기 위해 노력해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는 식물인 감나무와 달리, 좋지 않은 환경을 벗어날 수도, 개선할 수도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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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3.05 23:02

어느 젊은 예술가 이야기

얼마 전, 경주에서 벌어진 부산외대 신입생 환영회의 참사. 온 국민을 안타깝게 했던 불의의 사고는 채 피지도 못한 아깝고 아까운 열 송이의 목숨을 앗아갔다. 동계 올림픽의 열기 속에서도 사고 소식과 더불어 사고의 경위를 밝히는 기사들, 세상을 떠난 아홉 명의 부산외대 학생들에 대한 애도의 물결이 연일 보도되었다. 그리고, 시들어버린 열 송이의 중에 이벤트 회사 직원으로 알려진 또 한 사람, 최정운씨. 그의 나이는 올해로 마흔 셋이었다. 세상이 보내는 그에 대한 관심은 딱, 여기까지였다. 고인이 된 최정운씨는 사고가 일어나던 날 밤, 부산외대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의 레크레이션을 진행하고 있었던 그의 직업은 예술강사였다. 그의 죽음에 주목하며 엄숙하게 목소리를 내는 이들 역시, 예술강사들이었다. 예술강사란, 한국문화예술교육진흥원에서 문화예술교육 활성화를 위해 학교로 강사를 파견하는 지원사업이다. 연극뿐만 아니라 공예, 디자인, 만화, 애니메이션, 국악, 무용, 영화, 사진 분야의 강사들을 선발하여 전국의 초·중·고교로 배정하고 있다. 필자가 몸담고 있는 곳이 이러한 예술강사들을 광역단위에서 관리하고 있는 곳이다 보니, 자연스레 주위의 예술강사들로부터 어렵지 않게 최씨의 안타까운 소식을 접할 수 있었다. 예술강사라는 직업은 예술을 통해 사회와 소통하고 아이들을 만나는, 참 매력적인 직업이라고 생각했다. 예술적 재능을 타고났다는 것만으로도 큰 축복인데, 이들은 예술하는 교육가이자, 교육하는 예술가가 아닌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학교로 파견되는 예술강사들의 생활은 그리 예술적이지도, 우아하지도, 그리고 녹록하지도 않다. 현재 예술강사를 직업으로 활동하고 있는 이들을 유심히 보면, 예술강사 한 직종의 벌이만으로 생활을 이어나가는 사람은 거의 없다. 배정받을 수 있는 수업 시수가 제한되어 있기 때문에 한 달 임금이 최저임금에도 미치지 못하는 경우가 허다하고, 1년 중 2개월은 실직상태이며, 아이들이 방학을 맞으면 예술강사들의 통장도 방학을 맞은 학교처럼 텅 비어버린다. 고(故) 최정운 선생님이 그 날 밤 대학 신입생들의 레크레이션 강사로 마우나리조트에 있었던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예술 한다는 사람이 무슨 돈타령이냐며, 아이들 가르치는 사람이 돈 때문에 알바를 한다는 게 말이 되냐며 의문을 던지는 사람들이 있다. 문화를 매개하는 일. 예술을 창조하고 예술로 사회와 소통하는 일, 이것은 도덕적 기준도 아니고 종교적 신념도 아니다. 선악을 가늠하는 눈이 아니라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눈을 가진 것이 예술이다. 그런데 누가 이들의 현실적인 고통 앞에서, 그리고 결국 그 현실 때문에 다 피우지도 못하고 시들어버린 최정운 선생님 앞에서 도덕적 가치관의 잣대를 갖다 댈 수 있겠는가. 그러나 오늘은, 이토록 머리가 어지럽게 아픈 마음보다는, 떠나간 최정운 선생님을 기억하는 이들의 이야기를 통해 가만히 그의 지난 삶을 되새겨보려 한다. 10여년 동안 어린 학생들에게 연극을 가르치는 일을 기쁨으로 여겼다 했고, 극단 생활을 할 때도 늘 열정적이었지만 교육자의 삶을 더 소중히 여겼다 했다. 유쾌하고 다정한 선생님이었다는 그 분의 넋을 기리며, 고인이 먼 곳에서나마 늘 평안하길 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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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26 23:02

생명에 대한 예의

2010년 미국에 유학을 갔던 해 여름, 외삼촌 친구 분들이 멀리 공부하러 온 것을 환영한다며 나를 그들 집으로 초대를 받은 적이 있다. 처음으로 외국인 집에 가서 받은 인상은 우리네와 많은 것이 달랐다. 도심생활에 익숙했던 나에게는 빽빽한 숲들과 그 숲 사이에 있는 친구분 집은 외관이 주는 느낌도 달랐지만, 특히 자유롭게 집안과 마당을 왔다 갔다 하는 작은 강아지, 집 마당에 놀러오는 새를 위해 먹이를 주는 나무 위의 먹이통, 자기 집처럼 들락거리는 고양이, 그리고 가끔씩 사슴도 집 주변에 나타난다고 하니 동물을 대하는 그들의 배려가 재미있고도 한국의 일상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그분들의 초대는 어린 나에게는 놀라움의 연속이었다. 간단한 점심 후 우리는 카약을 가지고 근처 강으로 나갔다. 처음 손으로 노를 젓는 카약을 타는 것도 무척 재미있고 마음 속 모험심을 자극하는 것이었지만 나를 놀라움 속으로 빠지게 한 것은 바다 물개와의 멋진 만남이었다. 바다 근처 폐목 위에서 햇볕을 받으며 낮잠을 즐기던 자연 속 물개를 나는 태어나서 처음 보았다. 그들은 우리를 경계하지 않고 호기심어린 눈으로 관찰하며 우리 주변을 떠나지 않았다. 외삼촌 친구 분의 초대는 나에게 자연 속 다른 생명에 대한 나의 생각을 다른 방향으로 바꿔놓았다. 처음으로 세상은 사람들 것이 아니란 생각을 해보았다. 전주에 우리 집 역시 다른 집과는 사뭇 다른 환경이다. 마당을 누비는 4마리의 강아지, 2층 베란다와 거실을 점령하고 있는 6마리 고양이, 아침이면 시끄럽게 우는 산새무리, 가끔 나타나 햇볕을 즐기는 작은 꽃뱀, 어쩌다 출몰하는 고라니까지. 이렇게 우리집에 동물 가족이 많은 것은 우리 엄마의 동물권 활동의 결과이다. 동물권 활동가이신 엄마는 다른 동물과의 공존이 얼마나 중요한지 매번 기회가 될 때마다 나에게 얘기하신다.요즘 AI 관련 뉴스를 보면서 ‘생명’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다. 우리가 잡아먹는 동물들이기에 언젠가는 죽임을 당하겠지만 요즘 뉴스를 장식하는 대량 생매장에 대해서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느낌이 강하게 든다. 고병원성 AI는 결국 인간이 값싼 고기를 원하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라는 생각에 우리가 바꿔놓지 않으면 또 다시 이런 대량 살처분은 하게 될 것이라는 것은 불 보듯 뻔하다. 아무리 우리의 먹거리 식재료로 길러지는 동물이지만 그들은 나와 똑같이 살아있는 생명체 이다. 우리는 너무 이 사실을 잊고 사는 것 같다. 또한 나는 우리는 합리적인 의심을 해야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기르는 동물들이 왜 이렇게 쉽게 병에 걸리는지에 대해서.결국 싼 고기를 위한 공장식 밀집사육이 그 문제라고 본다. 최소비용을 들여 최대한 이익을 내고자 하는 극단적인 인간의 이기심으로 인해 공장식 밀집 사육은 다른 생명에 대한 예의가 없는 ‘지옥’일 수 밖에 없다. 문제를 알았다면 합리적이고 성숙된 사회라면 어떻게하면 공장식밀집 사육을 줄여나갈 것인지 모두가 고민해서 답을 찾아야 한다. 동물권 활동가인 엄마와 많은 이야기 속에 나름대로 내가 찾은 해결책은 세 가지이다. 첫째는 먹거리를 선택하는 소비자들이 싼 고기소비를 최대한 줄여야 한다는 것이다. 의식적 소비활동이 시장상황을 바꿀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 방법이 한꺼번에 변화를 이끌지는 못하겠지만 가장 근본적인 해결책임이 분명하다. 둘째는 동물보호법 등 동물을 대하는 법과 행정이 바꿔야 한다. 이 방법은 가장 효과적인 해결책이지만 이를 위해서는 많은 사람들의 이해를 이끌어 내야하기 때문에 시간이 걸릴 것이다.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우리와 같은 청소년기에 다른 생명에 대한 고민을 할 수 있도록 교육받는 것이다. 그래야 우리 세대가 어른이 되었을 때 다른 동물에게도 좀 더 아름다운 세상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어서 빨리 AI확산 뉴스가 잠잠해 지기를 바라며, 아침이면 나를 잠에서 깨워주는 산새들의 노래가 들리는 세상을 그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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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9 23:02

'노킹 온 헤븐스 도어'와 바다·데킬라

부산에서 짧은 강연이 있었다. 행사가 끝나고 관계자 분들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자리를 빠져나와 곧바로 자갈치시장으로 향했다. 하루종일 아무것도 먹지 못했던 터라, 때마침 좋은 돔이 들어왔다던 97호 횟집 아저씨의 말을 도저히 흘려들을 수 없었다. 꽤 저렴한 가격에 배를 빵빵히 불리고 나서 천천히 걸을 겸해서 바다로 나갔다. 노을을 받아 주황빛으로 넓게 펼쳐진 바다는 내륙 토박이인 내게 있어 좀처럼 보기 힘든 장관이었기에 한동안을 눈에 꾸역꾸역 담아넣느라 애를 먹었다.그날 밤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혼자 자주 가던 바를 찾았다. 데킬라 반 병을 앉은 자리에서 깔끔히 비웠다. 저마다 떼를 지어 왁자지껄하게 수다판을 벌이는 사람들 중에서 내게 왜 데킬라를 혼자 마시냐고 물어보는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조금 유감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누가 내게 왜 데킬라를 처량하게 혼자 마시고 있느냐고 물었다면 나의 대답은 아마 이러했을 것이다- 그야 물론 바다를 봤으니까. 토머스 얀의 1997년작 ‘노킹 온 헤븐스 도어(Knocking on Heaven‘s Door)’는 그런 영화다. 음악을 하는 지인의 소개로 영화를 처음 접했다. 한 번 보면 머리 속에서 제멋대로 바다와 데킬라가 하나로 꽁꽁 묶여 일종의 조건반사를 만들어 버리는, 조금은 곤란한 영화다.이 영화는 어딜 봐도 ‘없어보이는’ 두 남자의 이야기다. 루디는 세상을 너무 무겁게 살아서 없어보이는 남자다. 평생 자신을 규율에 끼워맞추며 바르게만 살다 보니 융통성이라고는 눈을 아무리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다. 반면 마틴은 세상을 너무 가볍게 살아서 없어보이는 남자다. 그에게 있어 규칙은 당연히 깨라고 있는 것이고, 진지함은 메마른지 오래라 어딜가나 여자를 홀리고 다니기 일쑤다.완벽히 상반되는 두 사람에게는 공통점이 두 가지 있다. 각각 골수암과 뇌종양으로 죽음을 목전에 두고서 같은 병실에서 서로를 만났다는 것과, 태어나서 단 한 번도 바다를 본 적이 없다는 것. 병실에서 우연히 발견한 데킬라를 마시며 가까워진 둘은 술김에 병원을 탈출해 바다로 향하는 마지막 여정을 떠난다.사실 ‘노킹 온 헤븐스 도어’가 다루고 있는 스토리- 죽음을 앞두고 자신의 마지막 꿈을 이룬다는 주제의 이야기는 ‘버킷 리스트’ 등 여러 영화에서 익숙하게 찾아볼 수 있는 소재다. 더군다나 이 영화가 연출에 있어서 섬세하고 깔끔한 모습을 보여주는 것도 아니다. 참신한 컷연출이나 시각효과보다 거칠고 투박한 구성이 영화의 주를 이룬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작년 국내에서 재개봉될 정도로 아직까지 대중의 사랑을 받는 것은 작중 최고의 백미로 알려진 마지막 씬 때문이 아닐까 싶다. 비슷한 류의 로드 무비가 늘 그렇듯 둘은 결국 바다에 도착하게 되는데, 스크린을 꽉 채운 바다를 바라보며 조용히 데킬라를 들이켜는 둘의 모습과, 그 뒤로 흐르는 밥 딜런의 동명의 노래 ‘Knocking on Heaven‘s Door’가 어우러진 이 장면은 말 그대로 압권이다. 만약 당신이 그 뒤 자연스레 올라가는 크레딧 롤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게 된다면, 축하드린다. 필자가 그러했듯, 당분간 바다를 보면 자연스레 데킬라가 떠오르는 후유증을 얻게 되셨다.다음에 바다에 가게 됐을 때는, 친구를 데리고 데킬라 한 병을 따로 챙겨가야겠다. 어릴 적 즐겨 듣던 휴대용 CD 플레이어에 밥 딜런 아저씨 노래를 담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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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12 23:02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

칼럼 제목이 마치 사랑을 다룬 드라마 제목 같지만, 하고자 하는 말은 요즘 젊은이들의 현실이다. 90년대 초반만 해도 당시 젊은이들을 ‘X세대’라고 했다. 1980년대의 정치적 민주화와 경제적 풍요 속에서 자라나, 당시의 기성세대와는 다른 사고방식을 보였기에 그렇게 불렀다. 하지만 지금 우리 시대의 젊은이들은 ‘3포 세대’라고 불린다. 이는 ‘연애, 결혼, 출산’, 이 세 가지를 포기한 세대라는 뜻이다. 연애결혼이 일반적인 현대에 있어, 연애의 포기는 자연스레 결혼과 출산의 포기로 이어진다. 늦은 나이에 결혼하는 풍조와 낮은 출산율 등의 통계가 이런 현실을 잘 보여주고 있다.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하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중에서 가장 비참한 이유는 아마도 비용의 증가 때문일 것이다. 연애의 경우, 아마도 가장 흔한 데이트 코스가 아마도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차를 마시는 것일 텐데, 모두 돈을 써야만 한다. 어찌어찌 연애과정을 넘어가 결혼을 한다고 해도 내 집 마련을 위한 부동산 문제가 신혼부부의 발목을 잡는다. 출산도 마찬가지이다. 분유 값, 기저귀 값은 물론 병원비도 만만치 않다. 이런 비용의 문제를 악화시키는 것은 그들이 충분한 돈을 벌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는 젊은이들이 무능해서가 아니다. 기업과 자본의 이윤 증가가 더 이상 직원의 임금상승으로 이어지지 않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한다. 때문에 ‘3포 세대’는 빈익빈 부익부와 노령화 등 대한민국의 음울한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하지만 거시적인 사회·경제 문제는 일단 차치하고, 미시적으로 개인의 삶이라는 관점에서 3포 세대를 살펴보자. 어떤 사람이 연애와 결혼, 출산을 포기한다는 것은 ‘사랑’을 포기한다는 뜻과 같다. 그것이 남녀 간의 사랑이든, 부모자식간의 사랑이든 말이다. 그러나 우리가 사랑을 포기하고 살아갈 수 있을까? 해리 할로우(Harry F. Halow)라는 심리학자의 실험은 간접적으로나마 그에 대한 답을 준다. 그는 차가운 철사로 만들어졌지만 젖을 주는 어미 원숭이와 부드럽고 따뜻하지만 젖을 주지 않는 어미 원숭이를 만들어 우리에 집어넣었다. 그 우리 안의 새끼 원숭이는 오랜 시간동안 부드럽고 따뜻한 어미 원숭이와 지내다가 배가 고플 때만 잠깐 차가운 철사로 만든 어미원숭이에게 가서 젖을 먹으러 갔다고 한다. 이렇게 부드러움과 따뜻함을 갈구하는 새끼 원숭이의 본능은 인간에게도 있다. 때문에 몸과 몸의 접촉을 통해 이루어지는 사랑표현은 남녀 간은 물론 부모자식 간에도 매우 중요하다. 게다가 사랑을 해본 사람은 알 것이다. 사랑 없는 삶이 얼마나 삭막하고 우울한지를. 따라서 현실이 아무리 힘들고 어렵다고 해도 사랑은 포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가기 위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결국 앞서 제기한 ‘우리 사랑할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 ‘우리는 사랑해야만 한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우리는 구조적 문제에서 기인하는 비용의 문제를 넘어 어떻게 사랑할 것인가를 고민할 필요하다. 하지만 이는 쉽게 해결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상상력이 부족해 적절한 해답을 찾지 못할 수도 있고, 연대(solidarity)가 약해 세상을 바꾸려는 시도가 실패할 수도 있다. 그래도 사랑은 사치가 아니라 필수다. 우리는 사랑하기를 포기할 수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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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2.05 23:02

바로 지금, 청춘의 찰나

누구에게나 있지만, 누구나 똑같은 깊이로 또는 길이로 보내지는 않는 시절, 청춘. 우리는 무얼 하며 보냈을까? 혹은, 무얼 하며 보내고 있을까? 보통은 10대에서 20대 정도의 젊은 나이를 일컬어 청춘이라 부르지만, 이에 대한 이견을 내놓는 세 남자가 있다. 이름 하여 청춘 사진관! 올해로 서른 살을 맞은 나에게, 이들의 청춘 스토리가 더할 나위 없이 큰 자극제가 되었다. 스튜디오, 포토그래퍼, 이런 세련된 이름들 놔두고 구지 ‘사진관’이라는 아날로그적 감성을 추구하는 데에도 뭔가 이유가 있을 듯싶다. 그 아날로그적 감성을 한 번 이해해 보자는 취지로, 필자도 노트와 연필을 꺼내 한 글자, 한 글자에 힘을 주어 귀찮아져보기로 했다.말은 사진관이긴 한데, 사실 이 세 남자의 사진관은 사진관이라 부를만한 공간도, 그럴싸한 장비도 갖추지 않은, 이상한 사진관이다. 세 남자 자체가 청춘사진관의 실체이며 그저 나이만으로도 청춘이기에 충분한, 20대 대학생들이다. 대학에서 같은 수업을 들으며 만나게 되었고, 마음 잘 맞는 청춘들끼리 뭔가 의미 있는 일을 작당해 보자는 취지에서 이 ‘거창한’ 프로젝트는 시작되었다. 세 청년들이 카메라라는 작은 기계 하나로, 사람들의 어떤 찰나를 담아낸다는 것. 청춘 속에 수많은 찰나의 순간들이 있고, 돌아보면 너무나 아쉽고 소중한 순간들이지만, 꼭 지나고 나서야 깨닫게 된다는 모순이 있다. 그런 ‘찰나’를 사진으로 담아, 평생 잊지 못할 추억의 순간을 되돌려주는 이 세 남자의 청춘의 시절. 얼마나 신나는 청춘들인가. 청춘사진관의 활동에 동경을 느끼는 이유는, 나의 청춘을 더 신나게 즐기지 못한 데에 대한 반성이라고 하겠다.누구나 머릿속에 한 장면쯤은, 평생 간직하고 싶은 소중한 순간이 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교복을 입었던 열아홉 살의 졸업식, 어렵게 공부한 끝에 선생님이 되어 첫 제자들을 만난 날, 살면서 흔하게 다가오지 않는 감동의 순간들. 하지만 그 찰나의 순간은 지나가버리면 다시 되돌릴 수 있는 시간의 흐름 위에 있어, 더욱 소중하고 아깝게 느껴지곤 한다. 필자가 가장 되돌리고 싶은 순간이 있다면, 대학시절 풍물패에 들어가 첫 공연을 했던 날이다. 몸집보다도 더 커다란 장구를 둘러메고 뭐가 그리 신났는지 벌건 얼굴로 이리 저리 뛰어다니는 나를 보면서, 객석에 있던 엄마는 조용히 울었다고 했다. “왜?” 하고 물으니, “그냥, 너무 예뻐서.”란다. 그 때 눈물 그렁했던 엄마의 눈으로, 나의 모습을 다시 담아보고 싶다. 지금이라면 다시 못 할 것 같은, 그 때 그 순간의 나였기 때문에 보여줄 수 있었던 그 표정이, 내 청춘의 표상이었을지 모른다. 어쩌면 불평 투성이었던 나의 청춘. 하지만 조금만 비틀어서 생각해 보면, 미래가 빤히 보이는 인생은 얼마나 재미없고 절망적인가. 알 수 없는 인생이라 더욱 아름다운 거라고, 이문세 아저씨도 노래하지 않던가. 같은 청춘의 시대를 살아가고 있으면서도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에 연연하거나 미래를 걱정하면서 현재를 또 아깝게 흘려보냈던, 우리의 청춘에게도 이제는 고하고 싶다. 좀 더 용기를 내 보자고, 그래서 부끄럽지 않은 청춘의 시절을 다시 시작해 보자고. △ 김주희 코디네이터는 문화재청 무형문화유산 온라인전수조사 보조연구원, 전북발전연구원 전라북도 관광객 실태조사 보조연구원 등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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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9 23:02

January 17, 2014

나는 시험 기간에 선생님의 따가운(!) 눈총을 받는 일이 종종 있다. 아니, 교칙을 어겨서도, 버릇없게 군 것도 아니다. 우리의 미래 인생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시험 기간에 책을 꺼내 읽는다는 이유다. 처음에는 그 이유를 전혀 몰랐기 때문에 그려러니 하고 넘겼으나 하루는 선생님께서 내 머리를 탁! 치며 말씀하셨다. “다를 애들 다 공부하는데 너만 딴짓하냐? ” 그런데 생각해보니 조금 이상하다. 독서도 당연히 공부의 한 부분이다. 모든 교과 수업의 시작은 교과서를 읽는 것으로 시작한다. 또한 복습과 시험공부도 책을 읽으며 다시 되짚어보는게 기본이다. 그런데 책 읽는 것은 공부가 아니라니! 참으로 모순되는 말이다. 한국에서 초등학교를 마치고 미국에서의 중학교 졸업, 그리고 고등학교 일학년 과정을 수료하면서 배우고 느낀게 정말 많다. 물론 미국이라고 다 좋은게 전혀 아니었다. 사회적인 문제들도 한국에서 간간이 듣는 것과 그 속에서 직접 체험하는건 다르다. 교육도 마찬가지다. 현재 미국의 공립학교는 맘놓고 갈 곳이 아니라는건 확실하다. 하지만 내가 다녔던 사립학교(유학생 신분으로는 공립학교 입학 불가)에서 ‘와 이런건 정말 괜찮은 방법이구나’ 했던 것이 몇가지 있다. 하나를 꼽자면 독서의 중요성 이다. 아무것도 모르고 어리버리한 한국 중학생이 처음 한게 ‘그룹 독서 활동’ 이었다. 소설책 다섯권 중에서 그룹마다 한 권씩 골라 같이 읽으며 수업을 진행하는 방식이었다. 선생님께선 우리가 매일 밤 한 단원씩 책을 읽어오게 하셨고 그 내용을 토대로 토론을 하고, 발표도 하며, 단어도 배우고, 문법도 공부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말하기도 늘고, 쓰기도 늘었다. 그럼 시험은 어떻게 보냐고? 시험은 내가 한국에서 보았던 시험이랑은 사뭇 다르게 진행된다. 어찌보면 대학교에서 보는 시험을 연상시키는 시험이었다. 번호를 고르는 문제와 단답형 문제도 조금 있었지만 진짜 핵심 문제는 많아야 세개였다. 요구하는 바는 간단했다. ‘당신이 읽은 책이 말하고자 하는 요점은 무엇이며, 그에 대한 당신의 의견은 무엇인가?’ 혹은 ‘당신의 의견이 그러하다면 왜 그렇게 생각하는지 이유와 증거를 서술하라’ 등의 질문이었다. 당시 나는 그 첫 시험을 망쳐버리고 말았다. 수업, 시험공부, 시험과 소설책, 나의 의견을 완전히 다른 분야로 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매서운 첫 경험 이후에도 몇번 더 넘어지고 깨진 후에야 공부는 그저 정도껏 외우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에 익숙해졌다. 나는 책이 나에게 알리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깊이 이해하고 시간을 들여 생각하는 일이 공부라고 생각한다. 내용물을 완전히 내 것으로 만들었는지 알아보는 일이 시험이란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으로 되돌아온 지금 또 다시 암기 전쟁을 하고 있다. 수 많은 공식들을 외우고, 조선시대 시조들을 외우면서 정말로 그것들을 제대로 ‘공부’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는다. 꼭 시험 보는 방법을 배우는 것 같다. 문제들을 풀고 나면 벌써 암기한 내용들이 가물가물 해져간다. 나 스스로 느끼는 우리나라 학생들의 학력 수준은 정말이지 대단하다. 오죽하면 한국에서 수학을 잘한다는 소리를 한 번도 듣지 못한 내가 미국에서는 수학 천재라는 칭찬을 들었을까. 나 뿐만 아니라 미국 학교에 다녔던 거의 대부분 한국 학생들도 항상 미국학생들은 우리를 ‘역시 한국인이다! 쟤내들은 천재야!’ 라고 평했다. 하지만 이런 한국천재들은 책을 읽고 진행하는 수업에는 언제나 취약했다. 발표나 글쓰기도 마찬가지. 모두들 독서는 마음의 양식이고 인생에 도움이 되니 무조건 읽으라고 한다. 하지만 학교에서 독서를 “딴 짓” 이라고 한다면 책이 어떻게 삶을 풍족하게 바꿀 수 있는지, 진짜 인생 공부가 무엇인지 경험하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든다.△ 온태현 학생은 미국 워싱턴주 올림피아시 소재 NCHS 고등학교 1학년을 수료하고 일본 후쿠오카 야나가와 고등학교를 입학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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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22 23:02

막걸리 아저씨 예찬

스무살의 봄, 홍대에서 저녁 술약속을 잡았다. 상대는 홍대 바닥에서 8년 정도 밴드생활을 한 잔뼈 굵은 음악가. 부스스하게 늘어뜨린 긴 머리가 한때 그의 트레이드마크였기에, 나는 그를 ‘예수 형’이라 불렀다. 예수 형은 직업이 음악을 만드는 사람인지, 술을 마시는 사람인지 헷갈릴 만큼 애주가셨고, 나는 술김에 털어놓는 그의 소싯적 밴드 무용담을 무척이나 좋아했다. 길가에서 가벼운 인사를 나눈 우리는 캔맥주 하나씩을 들고 근처 놀이터로 향했다.밤의 홍대 놀이터는 여느 때처럼 길거리 음악가들의 공연으로 시끌벅적했다. 적당한 곳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로 서로의 안부를 묻는데 저만치서 낯선 모습의 남자가 다가왔다. 다 늘어나고 색이 바랜 옷차림이었지만 그가 끼고 있던 면장갑만큼은 유독 깨끗했고, 그가 끌고 온 커다란 리어카는 온통 막걸리 병으로 가득했다. 내가 태어나서 처음 본 그 괴이한 존재에 깜짝 놀라 바라보고 있는 동안 예수 형은 자리에서 일어나 그에게 다가가고 있었고 나는 그 모습을 멀찍이서 지켜보았다.마치 오랜 친구를 만난 듯 예수 형과 그의 대화는 편하고 즐거워 보였다. 그 내용은 잘 들리지 않았지만 쩌렁쩌렁하고 쾌활한 그의 목소리는 멀리서도 확실히 느낄 수 있는 독특한 음색이었다. 악수에 포옹까지 요란한 인사를 치루고 돌아오는 예수 형의 손에는 검은 봉지가 들려 있었다. 막걸리 세 병이었다. 다 마신 맥주캔을 내려놓고 종이컵에 갓 사온 막걸리를 따르며 예수 형으로부터 그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다.통칭 막걸리 아저씨. 그가 홍대에 처음 모습을 나타낸 것은 10년도 더 전의 일로,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항상 막걸리로 가득한 리어카를 끌고 홍대를 누비는 명물이라고 했다. 이름도, 고향도 불명. 일이 끝나면 벤츠를 몰고 다닌다느니, 근처의 건물 몇 채가 그의 소유라느니 하는 출처 모를 소문들이 무성하지만 워낙 베일에 싸인 인물이다 보니 진위여부를 가릴 수도 없다. 멀어지는 그의 모습을 바라보며 막걸리를 한 잔 들이켰다. 기막힌 맛이었다.그 후에도 홍대에서 가끔 막걸리 아저씨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신출귀몰한 사람이라, 찾으려 하면 절대 나타나지 않다가 생각 없이 홍대 거리를 걸을 때면 불쑥 나타나곤 했다. 그와 마주친 날이면 항상 그의 막걸리를 두어 병 사들고 집에 돌아갔다. 그의 막걸리가 탁월한 맛을 자랑하는 것도 있지만, 무엇보다 그와 대화를 나눈 뒤에는 항상 이상하게도 기분이 좋아졌던 것이 가장 큰 이유였다. 그는 항상 웃고 있었다. 잔뜩 쉰 그의 목소리는 항상 격양되어 있어서, 같이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끝자락에 가서는 서로의 목소리 싸움이 되기 일쑤였다. 그것이 그와 대화를 나누는 방법인 듯 했다. 한 병에 3000원, 두 병에 5000원. 세워서 보관하고, 취객 되기 싫으면 반 병만 마실 것. 총알같이 쏘아대는 아저씨의 유쾌한 상품 소개에 정신이 혼미해질 무렵이면 어느새 손에는 막걸리가 들려 있고(어째선지 절대 한 병만 사는 일은 없다), 뭐가 좋은지 배시시 웃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집에 돌아와서 생각했다. 내가 산 건 사실 5000원어치의 웃음이고 서비스로 막걸리 두세 병 얻어온 거라고, 횡재한 거라고. 그러면서 혼자 킥킥대다 기분좋게 취해서는 간만에 행복한 숙면을 취했다. 스무살의 봄, 이것이 내가 나의 청춘을 예찬하는 방법이었다.△이신혁씨는 서울국제초단편영상제 최연소 초청감독을 맡았으며, 현재 아티스트 창작브랜드 Project SH대표, 총괄감독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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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15 23:02

'지니어스' 이준석과 홍진호

한 고려대 학생이 쓴 아날로그적 감성의 ‘안녕들하십니까’라는 대자보가 유행했다. 스마트폰과 SNS로 대변되는 21세기에 손으로 직접 쓴 대자보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였다는 점이 독특하다. 이러한 ‘안녕들하십니까’ 대자보에 대한 반응들 중, 전 한나라당(현 새누리당) 비상대책위원이었던 이준석이 한국경제신문과의 인터뷰에서 “청년들의 고단한 삶과 철도 민영화 문제를 연결시키는 것은 논리적 비약”이라고 비판한 것이 눈에 띄었다.먼저 이준석이란 사람은 ‘지니어스’라고 말할 수 있다. 서울 과학고를 졸업하고 하버드대를 나왔으며, 20대의 젊은 나이에 한나라당 비상대책위원을 역임했다. 하지만 내가 이준석이란 사람을 처음 본 것은 TVN의 예능 프로그램인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이다. 이 프로그램은 연예인을 포함한 각계각층의 13명이 플레이어로 참가해, 매주 게임을 통해 대결하여 1명씩 탈락시킨 뒤, 최종우승자를 가리는 프로그램이다. 그는 1회에서 프로게이머 홍진호와 연합해 비상한 전략을 세우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그러나 탈락자를 가리는 데스매치에서 자기가 1회 메인매치 우승자로 만들어준 홍진호에 의해 탈락하고 만다. 다만 이런 홍진호의 배신은 의도적인 것은 아니었다. 룰라의 리더였던 이상민이 홍진호가 잃어버린 가넷(지니어스 게임의 화폐)을 주워 다른 탈락 후보인 김민서에게 줬고, 김민서는 홍진호의 것을 마치 자신의 가넷을 주는 것처럼 속여 홍진호를 회유했기 때문이었다. 결국 자신을 우승하게 도와준 이준석과 자신에게 가넷을 준 김민서 사이에서 고민하던 홍진호는 이준석을 탈락시키는 선택을 했다. 이는 홍진호가 이상민과 김민서에게 속은 탓이기도 하지만, 이준석이 김민서보다 위험한 경쟁자이기 때문이기도 했다. 결국 모략과 배신이 판치는 현실의 축소판인 ‘지니어스 게임’에서 ‘지니어스’ 이준석은 가장 먼저 떨어졌다.반면 1회에서 그를 떨어뜨린 홍진호는 이준석과 대조되는 사람이다. 일단 편모슬하에서 성장했고, 일반인은 ‘게임폐인’ 정도로 생각하는 프로게이머로 활동했다. 게다가 정규 리그에서 대부분 준우승을 해, 2등으로 유명한 프로게이머였다. 더군다나 1회부터 남에게 속아 넘어가는 어수룩한 모습도 보였다. 하지만 프로게이머 시절의 실패와 고난을 통해 단련된 그는, 3번이나 떨어질 뻔 했으나 자신의 실력으로 끝까지 살아남아 ‘더 지니어스 : 게임의 법칙’에서 최종우승을 했다. 물론 이렇게 글을 썼다고 해서 이준석이라는 사람을 싫어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새누리당 계열의 정치인이지만, 엘리트다운 자신감과 젊은이다운 열정을 방송에서 보였다. 또한 결승전에서 자신을 떨어트린 홍진호를 지지하며 그의 우승을 돕기도 했다. 하지만 이렇게 현실의 ‘지니어스’ 이준석과 ‘더 지니어스 게임’ 우승자 홍진호를 나란히 놓고 보면, ‘안녕들하십니까’에 대해 이준석이 지적한 ‘논리적 비약’은 사소한 것에 불과하다고 생각한다.서로 ‘안녕들하십니까’라고 물어야만 하고, 청년들이 고단한 삶을 살아야 하는 것은 철도민영화와 똑같이 ‘구조적인 문제’에서 비롯된 현실이기 때문이다. 즉, 그가 ‘더 지니어스’에서 1회만에 탈락한 것처럼, 현실의 ‘지니어스’ 이준석조차도 안녕하다고 말할 수 없는 세상인 것이다. 결국 우리는 눈앞의 현실과 그 이면의 구조적 문제를 제대로 봐야한다. 그들의 문제가 곧 우리의 문제이기 때문이다.△문경득씨는 고려대 한국사학과를 졸업하고 전주대 사학과 박사과정을 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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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4.01.08 23:02

잠시 내려놓기

헤라클레스에 대해 모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그는 그리스신화의 영웅으로 신과 인간 사이에서 태어난 엄청난 힘의 소유자였다. 신의 땅인 올림푸스에 올라가기 위해서 해라가 그에게 주어준 12가지 과제를 수행해야 했고 결국 누구보다 힘든 생애를 보내야만 했다. 헤라클레스는 자신에게 주어진 과제들에 대해 의심하지 않고 해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알고 보면 그에게 주어져 그의 일생을 힘들게 만든 12가지 과업이 모두 헤라 여신의 속임수였는데도 말이다. 심리학자인 타이비 킬러는 헤라클레스 이야기가 인간의 중요한 심리적 태도를 보여준다고 했다. 사람들은 흔히 무엇인가를 이룬 다음에 자신이 원하는 것을 하겠다는 말을 많이 한다. “일단 집을 장만한 뒤에, 대학에 들어간 뒤에, 아이들이 좀 큰 후에 내가 하고 싶은 일을 하자” 등과 같이 말이다. 사람들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을 하는 것은 욕심이고 현재의 어려운 상황을 이겨내야만 나중을 즐길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끊임없이 자신의 현재를 희생하고, 하고 싶은 일을 미래로 미루며 살아간다.대학생들도 마찬가지다. “지금 공부하지 않으면 취직을 하지 못한다. 지금 대외활동, 봉사활동을 해 놓지 않으면 내게 밝은 미래는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라고 생각하며 자신의 정신을 옥죄고 몸을 한시도 가만히 두지 않는다. 쉴 수 있는 시간이 생기거나 친구와 잠시 여행을 떠날 시간이 생겨도 또 다시 자신의 미래를 위해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하는 무엇인가를 찾아 나선다. 물론 보다 나은 미래를 위해 어느 정도의 희생은 필요하다. 하지만 지금 꼭 내 젊음의 한 순간을 포기하면서 단순히 스펙을 위한 봉사활동이나 대외활동을 한다고 해서 혹은 1박 2일 동안의 여행 대신 TOEIC 책 한 번 더 본다고 해서 미래가 더 나아질 것이라는 보장도 없는 것이다. 학생들에게 하고 싶은 것이 무엇이냐고 물어보면 정말 다양한 대답들을 들을 수 있다. 기타를 배우고 싶다. 여행을 가고 싶다.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것도 안 하고 싶다와 같은 말들이다.어느 대학에서 교수님이 학생들에게 자신이 이틀 후에 죽는다면 지금껏 하지 못해 아쉬울 것 같은 일들을 종이에 적어보라고 했다. 학생들은 교수님의 말대로 내일모래 죽는다고 생각하고 못했던 것 하고 싶었던 것 들을 종이에 적기 시작했다. 학생들이 모두 적고 난 후 교수님이 학생들을 향해 “종이에 적은 것들을 지금 당장 실행 하세요”라고 말했다고 한다.사실 지금 당장 바빠서 하지 못하거나 위 사례처럼 죽기 이틀 전에 후회할 만한 일들은 그리 거창한 것이 아닐 가능성이 크다. 아마 언제든지 할 수 있다고 생각해 잠시 미뤄둔 것들도 많을 것이다. 기타를 배우고 싶었다면 지금 당장 친구, 선배 혹은 학원이라도 찾아가서 배우면 되고 하루 종일 누워서 아무 것도 하기 싫다면 잠시 하던 일들을 멈추고 방에 누워 천장을 바라보면 된다.앞으로 더 멀리 나아가기 위해서는 한걸음 물러나거나 멈추어서 숨을 고르는 것도 필요하다. 이제 2013년이 얼마 남지 않았다. 잠시 하던 일을 멈추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일이 이 소중한 시간을 희생하면서 꼭 해야만 하는 일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고 지금껏 미래를 위해 포기하고 옆으로 미뤄놨던 일이 있는지 생각해 보자 나중에 후회하지 말고 지금 당장 시행해 보는 것은 어떨까. 지금이 아니면 할 수 없는 것들이 당신을 기다리고 있을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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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25 23:02

실력으로 다가올 인맥·정보력 쌓기

‘민생조례 공모전에 우리학교 정치외교 석권’지난 달 18일 시상식이 진행된 ‘전주시 민생조례안 공모전’에 대한 내용이 담긴 전북대신문의 한 기사 내용이다. 이 공모전의 총 수상자 8명 중 무려 7명이 전북대학교 정치외교학과 학생들이었다.지방자치와 관련된 전공인 정치외교학을 이수하는 학생들이었던 만큼 이들은 이 공모전과 관련된 지식이 많았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이 글에서, 이들이 어떻게 이 공모전을 알게 됐는지에 대해 중점적으로 이야기 하고자 한다.이들 중 일부는 지난 하계 방학 중 산학협력현장 실습으로 전주시의회에 파견돼 다양한 실무를 경험했다. 또 다른 일부는 전주시 의정 서포터즈 활동을 하며 시 의회에 대한 다양한 정보를 습득하고 있었다. 이 과정에서 전주시의회에서 위와 같은 공모전을 주최한다는 사실을 알게 됐고, 각 활동들로 얻은 내공을 활용해 응모, 당당히 입상할 수 있었던 것이다.결과적으로 이들에게는 ‘정보력’이라는 실력이 크게 따랐다고 할 수 있다. 이들은 평소 지방자치에 관심이 많은 정치외교 학생들이었고, 따라서 관련 분야의 경험을 하기 위해 다양한 활동을 해 왔다. 그 결과, 해당 활동으로 얻은 경험을 활용하기에 최적인 공모전을 알 수 있었던 것이다. 아무리 지식이 많아도, 이를 활용할 기회를 알지 못한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이겠는가!물론 이 ‘정보력’이라 하는 것 역시 규정하기 나름이다. 이를테면, 시험에서 우수한 성과를 내기 위해 주변 인물들에게 식사를 대접하며 ‘족보’를 얻는 것은 정보력이라기보다는 ‘요행’이라고 평하고 싶다. 그러한 행위는 해당 시험 과목이 ‘식사대접학 개론’이 아닌 이상, ‘시험’이라는 분야와 관련된 활동과 경험이라고 볼 수 없기 때문이다.이와 관련해, 퇴폐적인 놀이문화와 술자리를 좋아하면서 학구적인 이들에게 ‘인맥이 가장 중요한 것이다’라고 비아냥거리는 이들에게도 일침을 놓고 싶다. ‘인맥도 실력이다’라는 속설은 술자리에서 아부를 떨어가며 친해진 이들에게 덕을 봤을 때 쓰는 말이 아니다. 자신이 관심 있는 분야, 그리고 생산성 있는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동하며 알게 된 이들과 서로의 능력을 공유하며 시너지를 내는 것이 바로 실력으로서의 인맥이라고 필자는 생각한다.물론 인맥과 정보력은 능력이라는 다른 실력이 있어야 보다 큰 시너지를 낼 수 있다. 하지만 다른 맥락에서, 인맥·정보력이라는 실력은 부족한 능력을 보완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한다. 다시금 ‘공모전’이라는 주제로 예를 들어보자. 만약 누군가가 능력은 높지만 정보력이 떨어진다면 그는 흔히 알려져 있고 경쟁률도 높은 공모전에 참여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입상 가능성도 떨어질 것이다. 반면 능력은 비교적 떨어지지만 정보력이 높은 이는 잘 알려지지 않았지만 실속 있는 공모전을 찾아 비교적 낮은 경쟁률로 입상할 수 있을 것이다.이처럼 당신의 경쟁력을 높여줄 진정한 의미의 인맥과 정보력을 키우기 위한 방법은 사실 다른 능력을 키우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저 열심히 노력하고 관련분야 정보를 꾸준히 습득하는 것이다. 그러한 노력 끝에 얻게 된 정보로 조그마한 행운을 갖게 됐다면, 그때 당당히 말하라! 이것은 운이 아닌 실력이었다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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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18 23:02

오빠가 돌아왔다

외투를 사러 객사에 나갔더니 “오빠라고 불러다오, 오빠라고 불러다오”가 쉼 없이 반복되는 노래가 상점마다 울리고 있었다. 무한도전 가요제에서 장미하관(장미여관, 노홍철)이 부른 이 노골적인 노래는 히트를 했고, 덩달아 장미여관은 유명한 밴드가 되었다. 장미여관의 꽤 오래된 팬인 나는 장미여관의 노래 ‘봉숙이’가 가요 프로그램에서 무려 12위를 차지하고, 장미여관이 각종 TV 프로그램에 출연하고, 많은 사람이 장미여관의 멤버들을 별명으로 부르며 이야기하는 모습에 복잡한 마음이 되고 말았다. 좋은 밴드가 세상에 알려졌으니 기뻐해야 하는가, 나만의 밴드를 빼앗긴 것 같은 기분에 화가 나야 하는가. 옆에서 엄마는 “오빠라면 역시 조용필 오빠”라고 했다. 내가 “지금도 오빠야? 60대라고 하던데”라고 하니, “영원한 오빠지”라고 대답한다. ‘오빠’라는 것은 그러니까, 생물학적 나이 범위 내의 남자를 손위 아래 여자가 정답게 칭하는 것 외에, 오래도록 동경하고 선망하는 남자를 이르는 말인 것이다.그런 의미로 나에게 오빠가 있다면 백민석이다. 그는 10년 전 〈죽은 올빼미 농장〉을 마지막으로 절필한 소설가였다. 그의 소설을 처음 읽은 것은 그가 절필하고도 3년 후인 2006년이었다. “아흐 다롱디리”와 “얄리얄리 얄라셩”같은, 거창해 보이지만 사실 아무 뜻 없는 말들을 계속 읽고 외워야하는 17살의 여름이었다. 교과서에는 도무지 재밌는 이야기라고는 없었다. 장마가 오면 물이 새는 집에 살거나, 노모가 눈길을 걸으며 아들 생각을 하는 이야기들은 슬프고 장황했다. 나는 좀 재미있는 이야기가 읽고 싶었고, 도서관에 갔고, 우연히 그의 책 〈목화밭 엽기전〉을 대출했다. 소설 속에는 훗날 ‘그로테스크’라고 불리는 끔찍하고 흥미로운 이미지들이 있었고, 주인공과 주변 인물들은 자주 화를 내고 이성을 잃었다. 나는 아무 뜻이 없는 “얄리얄리 얄라셩”의 세계에서 너무 빨리, 모든 행간과 문장에 뜻이 있는 세계로 넘어왔다. 인물들이 서로 사랑하고 다치게 하는 점을 빼고 그의 소설은 지금껏 읽어왔던 어떤 이야기와도 비슷하지 않았다. 그 이유 하나로 나는 그의 팬이 되었고 책을 사 모으기 시작했다. 여고생들이 좋아하는 연예인과 관련된 물품을 모으는 것과 성질이 비슷했으나, 힘든 일이었다. 당연히 서점에 남은 그의 책은 근간 한 두 권이 전부였다. 다른 책들은 모두 절판이었다. 출판사에 전화해도 소용없었다. 그의 소설 서평을 올린 블로거들에게 일일이 쪽지를 보내 책을 팔아 달라고 부탁했다. 대부분은 거절이었다. 그럴 것이 쪽지는 섬뜩하게 느껴질 정도로, 사막에서 물을 찾는 사람의 절박하고 기이한 느낌을 가득 담고 있었다. 몇 년에 걸쳐 단 두 권을 뺀 나머지 책을 모두 구했다. 마지막으로 〈내가 사랑한 캔디〉와 〈불쌍한 꼬마 한스〉를 책장에 꽂기 위해 헌책방이 많이 있다는 도시들을 방문했다. 불행하지만 그 책들은 구하지 못했다. 나는 부산 보수동 헌책방 골목의 뙤약볕 밑에서 눈물을 뚝뚝 흘릴 수밖에 없었다.전주의 한 서점에서 〈불쌍한 꼬마 한스〉를 구한 것이 몇 달 전인데, 돌연 그의 새 책이 나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각종 신문에 기사가 나고 그의 책을 내는 출판사에서도 홍보에 열심이었다. 절필한 ‘소설가였던’ 백민석이 갑자기 ‘소설가’ 백민석으로 나타난 것이다. 예전보다 살이 좀 쪘고, 좀 너그러워졌고, 새 소설 역시 완전히 새롭게 써졌고 읽혀야 하지만, ‘오빠’에게 그런 것은 상관없다. 드디어 오빠가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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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2.04 23:02

로마가 흥할 수 있었던 이유

수레는 앞에서 끌어도 뒤에서 밀어도 움직인다. 그러나 앞에서 끄는 사람이 방향을 잘못 잡으면 엉뚱한 곳으로 가고 만다. 한 집단에서 지도층은 앞에서 수레를 끄는 사람들이다. 지도층에게 사회에 대한 책임이나 의무를 요구할 때 “귀족성은 의무를 갖는다”는 의미의 프랑스어 노블레스 오블리주가 사용되곤 한다. 한때 세계를 지배했던 로마의 귀족들은 모범적인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한 것으로 유명하다.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중요한 덕목 중 하나는 모범이다. 사회 지도층이 먼저 희생하고 모범을 보인다면 시민들은 그들을 존경하기 마련이다. 기원전 218년, 전쟁이 10년째에 이르렀을 때 로마의 인적, 물적 자원이 고갈됐다. 이때 콘술 라이비누스는 다음과 같이 연설했다. “우리가 먼저 부담을 집시다. 원로원들이여 우리의 신분을 나타내는 징표인 반지를 제외한 모든 금, 은, 주조한 동전을 모두 내일까지 국가에 바칩시다. 국가를 잃는다면 개인들의 재산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이비누스의 연설이 끝나자 원로원 의원들은 대대적인 재산헌납 운동을 펼쳤다. 모두들 앞 다투어 각종 귀금속을 국가에 바쳤다. 이때 원로원 의원들이 자발적인 재산 기부로 인해 로마는 해군을 양성하고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최근 이건희 삼성그룹 회장의 건강보험료가 직장가입자 최고보험료의 절반 아래인 것이 공개돼 세간의 이목을 끌었다. 이에 대해 네티즌들은 불평등하다고 말하기도 하고 잘못 되도 한참 잘못된 상황이라며 안타까움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실 이 회장이 그룹에서 보수를 받지 않아 지역가입자로 돼 있는 것도, 건강보험공단이 정해놓은 지역가입자 보험료 상한이 219만원인 것도 거짓이 아니기에 이 회장의 건보료가 법적으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다.그럼에도 많은 사람들이 이 회장의 건보료에 이의를 제기하는 이유는 무엇일까? 이는 대중이 거대 그룹의 총수이고 우리나라 최고의 재력가인 이 회장을 사회지도층으로 인식하고 있기 때문이다. 대중은 사회지도층에게 작은 것이라도 사적 이익보다 공공의 이익을 위해 움직여 줄 것과 대중에게 모범이 돼 줄 것을 요구한다. 지도층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해 대중에게 모범을 보일 때 집단은 바람직한 방향으로 발전하게 된다.사회보장제도의 일환인 건강보험료로 인한 문제는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00년부터 2002년까지 이명박 전 대통령 건강보험료 납부를 회피하고자 편법을 사용했다는 논란이 있었고 상대적으로 수입이 높은 건축사, 변호사 등 전문직 종사자가 건강 보험료를 내지 않고 버티는 경우가 일반 직장인보다 훨씬 많은 것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지속적으로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면 국민들은 모범을 보이지 않는 사회 지도층에 실망하고 계층 간 갈등만 더욱 심해지기만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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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7 23:02

소비의 '눈치'

누구나 타인 앞에서‘눈치’를 보는 일이 있을 것이다. 대학생의 입장에서는 교수님들 앞에서, 또는 친구들 앞에서도 많은 눈치를 살피기 마련이다. 눈치를 본다는 것은 썩 나쁜 것만은 아니다. 자신과 함께 있는 사람의 심기를 살핀다는 뜻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헌데 필자는 부쩍 이 ‘눈치’ 때문에 고민이다. ‘소비’에 대한 눈치가 필자의 심기를 크게 불편하게 만들기 때문이다.이렇게만 말한다면 소비의 양이 많아 가족이나 지인의 눈치를 본다고 해석할 수도 있겠지만, 사실 속사정은 정 반대이다. 필자는 오히려 소액의 소비를 할 때 눈치를 보고 있다. 새는 돈을 줄이기 위해 체크카드를 주로 사용하고 있는 입장에서, 금액이 크지 않은 물건을 구매할 때의 심정은 그야말로 좌불안석이다.실제로 체크카드로 소액의 물건을 구매하며 면박을 받은 경험도 적지 않다. 분식점에서 식사를 한 후 체크카드를 내밀었다가 사장님으로부터 ‘염치도 좋다’는 비아냥을 들은 바도 있고, 한 중국집 사장님은 체크카드로 계산을 하자 마치 들으라는 듯 ‘이놈에 카드 때문에 장사 못 하겠다’는 말을 전하셨다.택시를 탈 때에도 이러한 눈치는 이어진다. ‘단거리’로 인한 눈치이다. 유동인구가 많은 황금시간대에 단거리 이동을 위해 택시를 자칫 잘못 탄다면 호된 면박을 당하기 십상이다. 이 때문에 필자는 단거리를 이동하기 위해 택시를 타야하는 상황에서 기사 분께 죄송스러움을 전하고, 요금을 계산할 때 잔돈 정도는 받지 않으며 극도의 눈치를 본다. 아울러 대기 중인 택시는 절대 타지 않고 반드시 지나가는 택시만을 탑승하는 센스도 발휘한다. 고객이 서비스 제공자에게 눈치를 보는 ‘주객전도’가 바로 이것이 아니겠는가.적은 금액을 판매하고도 카드수수료로 인해 마진을 적게 봐야 하는 영세 상인들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아울러 사납금 인상 등으로 인해 어려움을 겪고 있는 기사 분들을 비하하겠다는 의도도 더더욱 아니다. 다만 내 돈을 지불하고 재화를 구매하는 입장에서, 서비스 제공자에게 면박을 당하고 눈치를 봐야한다는 것이 썩 유쾌하지는 않다는 말을 하고 싶은 것뿐이다.아울러 소액 계산자에 대한 그러한 면박은 서비스 제공자 당사자들에게도 큰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된다. 큰돈을 시원시원하게 긁을 수도 없는 대학생의 입장에서, 그리고 체크카드 사용에 큰 편의를 느끼는 입장에서 필자는 면박을 받은 가게를 방문할 때 현금을 구비하기 보다는 해당 가게를 방문하지 않는 대안을 선택한다. 그러다보니 자연스레 프랜차이즈 편의점이나 대형 할인마트를 선호하게 되는 것이다.앞서 언급했듯, ‘눈치’를 본다는 것은 함께 있는 상대방의 심기를 고려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따라 소비자가 카드수수료로 인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영세 상인들을 위해 약간의 현금을 구비하는 센스를 발휘할 수도 있을 것이다. 반대로, 서비스 제공자 역시 소액 소비자의 심기를 보다 고려해줄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고객과 서비스 제공자 서로가, 서로의 ‘눈치’를 조금만 살핀다면 불필요한 언쟁과 갈등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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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20 23:02

너 '응답하라 1994' 보니?

요즘 금요일, 토요일이 되면 유난히도 기다려지는 드라마가 있다. 그 드라마는 tvN에서 방영되고 있는 '응답하라 1994(이하 응사)'이다. 작년에 고등학생들의 풋풋함을 다룬 '응답하라 1997'에 이어 이번에는 대학생들의 청춘을 아름답게 영상으로 담아내고 있다. 대체로 본편에 이어서 다시 작품을 제작할 경우 흥행하는 사례는 드물다. 그러나 '응사'는 전편보다 보다 더 많은 사람들을 텔레비전 앞으로 모이게 하고 있다. 더 신기한 것은 그때 당시의 배경인 1994년도 신촌을 경험하지도 못한 많은 20대들이 이 드라마에 열광하고 있다는 점이다.그렇다면 우리는 왜 이 드라마에 열광하는 것일까? 첫 번째, 우리와는 달리 정이 있기 때문이다. '응사'에서의 대학생들은 하숙을 한다. 그러나 단순히 하숙집생들과 주인의 관계가 아니다. 그들은 진짜 가족처럼 식탁에 앉아서 다 같이 모여 함께 식사를 한다. 심지어는 하숙집생들이 주인 아주머니에게 옷을 제대로 안 다려놨다며 엄마에게 하듯이 투정을 부린다. 하지만 지금의 현실은 어떠한가. 하숙집보다는 원룸이 더 생기며 여럿보다는 혼자살기를 원하는 학생들도 점점 많아진다. 이처럼 우리는 누구에게서 간섭 받기 싫어하고 점점 개인주의화가 심해지는 세대이다. 하지만 마음 한구석에 있는 사람에 대한 그리움은 존재한다. 다만 어느 누구라도 맘 놓고 터놓지는 않을 뿐이지, 사회적 동물로서 느끼는 외로움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어쩌면 많은 대학생들이 이 드라마를 보면서 하숙집에 대한 로망을 꿈꾸는 건지도 모르겠다.두 번째는 현재와는 달리 과도한 경쟁이 없다. 현재의 많은 대학생들은 취업난에서 취직을 하기 위해 하루에도 몇 장씩 자기소개서를 써내며 영어 인증 점수를 올리기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한다. 솔직히 말해 대학생은 놀 수 있는 나이라고 하는 것은 옛말이다. 그러나 '응사'의 드라마 속은 우리가 꿈꾸는 대학생활을 담고 있다. 그들은 라이브 카페에 가기 위해 수업이 끝남과 동시에 가게 밖에서 줄을 서 있는가 하면 실습도중 학교 체육대회에 참가하는 여유도 있다. 또한 과도한 경쟁이 없다보니 대학 친구들 사이에서도 끈끈한 우정들로 뭉쳐져 있다. 이러한 모습은 수업이 끝나면 바로 도서관으로 직행해야 하고 경쟁 때문에 동기들과 선을 긋는 우리와는 사뭇 다르다. 비록 그들도 불분명한 미래에 대해 불안해하기도 하지만 그들의 불안은 청춘이면 누구라도 겪을 성장통과 같은 것이지 냉혈한 현실 속에서 다른 사람을 제치고 성취해야 할 목표같이 보이지 않는다. 그러기 때문에 여전히 취업난과 고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회 속에서 살고 있는 현재의 대학생들의 눈에는 그들이 무척이나 부럽게만 느껴진다.10년이 지난 후에는 이렇게 지극히 평범한 이 순간도 드라마의 한 장면이 될 수 있다. 앞선 드라마들과 마찬가지로 미래의 제작자들 역시 2013년에 향유했던 청춘들의 문화, 배경, 사랑 등을 드라마 속에 담아 낼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청춘들이 1994, 1997년도와 같이 마냥 아기하게 그려질 수는 없을 것 같다. 물론 시대를 막론하고 20대에게는 불안함, 불안정함이 따라다니기는 하지만, 지금처럼 타의에 의해 또는 군중에 의해 휩쓸리는 청춘의 현실들은 그리 아름답게 포장될 수 없는 것들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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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13 23:02

다 사람 사는 똑같은 곳

시험기간에는 어쩐지 딴청을 피우고 싶어진다. 무려 신문의 경제기사도 재밌다. 1면의 큰 기사부터 텔레비전 프로그램 소개 기사까지 꼼꼼히 읽은 뒤 다시 전공서적을 편다. 필기하려고 연필을 잡았더니 글씨를 쓸 때마다 손톱이 거추장스럽다. 일단은 손톱부터 손질하고 공부해야겠다고 마음먹는다. 나는 본격적으로 손톱을 다듬고 매니큐어를 바르는 것도 모자라 여행사진을 정리하기 시작한다. 10월에 다녀온 여수, 순천 여행사진을 정리하다 사소한 기억이 떠올랐다. 이렇게 되면 이제 공부는 뒷전이다.서울 사는 친구와 여수의 유명한 장어탕 식당에 갔을 때였다. 친구는 식당에 들어서며 대뜸 서울에서 왔으니 많이 달라고 했다. 나는 서울에서 오지 않았으나 부끄러워서 가만히 있었다. 그저 친구가 넉살이 참 좋다고 생각했다. 장어탕을 배불리 먹고 난 뒤에는 돌산대교에 가기로 했다. 택시기사 아저씨는 지금 돌산대교는 못 간다고 딱 잘랐다. 마침 태풍이 여수 바다를 지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는 우리에게 어디서 왔냐고 물었다. 그도 그럴 것이 전라남도는 말투부터 무척 달라서 우리는 말을 할 때마다 이방인이라고 광고하는 꼴이었다. 나는 충남 논산에 살았지만 주춤주춤 하다가 서울이라고 대답했다. 무언가 굉장히 찝찝하고 이상한 기분이었다. 사소하지만 중요한 무엇을 놓치고 지나간 느낌. 아무튼, 우리는 돌산대교에 내렸고 태풍에 가로등이 휘청거리고 있었다. 생각해보면 그 느낌은 부끄러움이었다. 우리 동네가 아닌 서울을 발음한 순간 스스로 지방 콤플렉스에 시달리고 있다는 사실을 말한 것이었다. 나는 같은 동네에 살다가 천안으로 이사 간 친구가 동네를 가리켜 시골이라고 할 때마다 뜻 모를 화가 나곤 했다. 시골이라는 단어에서는 촌스러움이 느껴졌고 불편함, 동떨어진, 뒤늦은 등의 이미지가 차례로 떠올랐다. 나는 몰래 그 친구의 험담을 하고 다니기도 했다. 다행인 것은 뒤늦게 시골의 뜻을 찾아본 일이었다. 시골의 뜻은 고향을 떠난 사람이 고향을 가리켜 부르는 말이었다. 또, 나는 서울에 무슨 공연이나 전시가 있을 때마다 자주 들락거렸다. 거리낌 없이 용산행 기차에 오를 때마다 내가 덜 촌스럽고 오히려 멋진 문화인으로 느껴졌기 때문이었다.예전에는 서울과 지방의 차이가 컸다. 유행이 퍼지는 속도가 그랬고 교통수단이 지금처럼 편리하지 않아 서울을 자주 오갈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요즘은 서울뿐 아니라 전 세계의 예술, 문화, 패션, 문화의 최신을 인터넷으로 빠르게 접한다. 또 도로와 다양한 교통수단은 서울과 부산의 거리까지 2시간 이내로 줄였다. 바야흐로 전국 어디든 반나절이면 충분히 오갈 수 있게 된 것이다. 그럼에도 느끼는 이 서울에 대한 동경은 뭘까.여행 다니듯 오가다 보니 서울을 추억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다. 추억은 좋지 않았던 순간들은 나도 모르게 지워버리고 즐거움과 행복만 남겨놨다. 그래서 시간 관계없이 붐비는 지하철 2호선의 짜증도, 볶음밥 맛집을 찾아 헤맸던 한여름 마포의 아스팔트 열기도, 새벽 홍대 앞의 택시 승차거부도 기억 속에 봉인되어 있었다. 이것들은 내가 논산에 살며 느끼는 불편함에 비하면 어마어마했다.아, 나는 비로소 서울 사는 친구가 그 많은 재미를 내버려두고 오직 학교와 집만을 오가는지 이해할 것 같았다. 겨우 한 두정거장 차이를 줄이기 위해 출근 루트를 다시 짜는지, 전주 한옥마을의 밥집들과 객사의 커피집들에 열광하는지 알 것 같았다. 서울이든 전주든 논산이든 다 사람 사는 동네라 똑같다던 친구의 말이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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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13.11.06 23: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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