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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수필] 거울 속의 거울

백문불여일견(百聞不如一見)이다. 일단 눈으로 보면 확인이 된다. 보지 않고서는 믿을 수 없고 확정할 수도 없다. 앎과 인식의 첫 단계가 바로 보는 것. 거울에 비춤과 거울이 다시 되비추는 것이다. 이를 '미러링'이라 한다. 몽골에서의 시간은 초원과 야생과 사람에 대한 미러링의 경험이었다. 단체생활을 가장 오래 해본 여행길, 열악한 환경에서 한솥밥을 먹고 같이 자고, 움직이면서 사람들의 거울로 내가 대비되어 비쳤다. 그동안 무지로 차폐되었던 것들이 내 앞에서 파다닥 깨어나 거울처럼 나타났다. 여행은 대면의 시간, 타자를 만나고 시공간을 만나는 일이다. 길든 관습에서 벗어나 자신을 발견하기 위한 길트기 행위이다. 보고, 듣고, 즐기고, 사귀기 위하여 인간은 여행이란 채널을 가동하는지도 모르겠다. 서로의 민낯을 보는 데는 여행만큼 좋은 것이 없다. 나와 다른 것을 접하면서 나를 객관화시켜 볼 기회이다. 타지에서의 삶은 일 상의 가면이 벗겨지기 쉽다. 지극히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던 낯익은 사람의 낯선 모습, 천사가 되기도 하고 비호감이기도 했다. 타자의 부 정성과 변모가 경험을 만들어 낸다. 먼발치에서 피상적으로 좋게만 보였던 사람이 그것이 아님을 보았고, 나름 선입견을 품고 있었던 사람이 내 좁은 편견이었음도 알겠다. 선입견으로 오류를 범한다. 선입견은 안개의 눈이다. 적당히 포커 페이스 하는 일상의 사람들, 그건 진실을 숨긴 얼굴이다. 그러나 일상 의 바깥에서는 몸의 실체를 만나기 일쑤이다. 그래서 여행은 언제나 익숙한 것에서부터의 일탈이다. 사람을 만나는 일은 실험일 수 있다. 나는 노점상 앞에서나, 고위 간부 앞에서나 똑같은 인성과 태도를 지니는지? 그럴싸한 분장으로 내 본성을 감추지는 않았는지? 나는 내 관점에 규정지어 놓고 동전의 양면처럼 한쪽만 보아도 얼마짜리인지 다 알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한데 그것은 큰 오산이었다. 사람을 알고 이해한다는 것은 그 사람의 주름 까지 펼쳐보는 일이 아닐까? 아름다운 마네킹 뒷면에 수많은 핀이 꽂혀있듯이 뒷면의 숨겨져 있는 것까지 다 읽어내야 제대로 그 사람을 본 것이다. 사람들이 보고 이해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나의 속성을 알게 되고 나는 성장해갈 수 있으리라.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보듯 타인에 비친 나를 본다. 거울은 외면뿐 아니라 내면의 상태를 비추는 창이기도 하다. 거울을 단순히 사물 그러니까 물리적 세계를 그대로 보여주는 유리막 정도로 간주하면 그 사람은 거울을 모르는 사람이다. 나 스스로는 제대로 볼 수 없지만, 타인을 거울에 비추어 그 거울 속에서 나를 들여다보는 일은 나를 성찰하는 작업이다. 외출할 때 거울 앞에서 화장한다. 밖에서도 한두 번은 거울을 본다. 그 봄은 외관의 매무새를 확인하는 것으로 그친다. 내면은 별로 점검하지 않았다. 진실을 마주하자. 내·외면 모두를 들여다 보는 거울 보기를 하자. 타인의 거울에 나의 단면을 속속들이 비추어 보자. 거울아, 거울아 나를 훤히 비춰다오. 몽골 여행을 통해 커다란 거울 하나 선물 받았다. △이정숙은 정읍에서 출생했다. <수필과비평>으로 등단했으며, 국제PEN한국본부 전북지역위원회장과 온글문학회, 가톨릭문우회, 문예가족, 한국미래문화연구원 회원 등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지금은 노랑신호등> <내 안의 어처구니> <꽃잎에 데다>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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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10 18:49

산책길에서 기운을 받는다

유명한 황톳길을 걷기 위해 일찍 나서 오전 10시 30분쯤 강천산에 도착했다. 순창 '강천산 맨발 산책로'는 오래전부터 알려진 곳으로 사람들이 많이 찾는다. 요즈음 맨발 걷기가 화두다. 초저녁쯤 인근 산책로나 학교 운동장에서는 맨발 걷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줄을 잇는 진풍경이 벌어지곤 한다. 강천산 정취가 눈 부셨다. 나도 여러 사람 틈에 끼어 걸었다. 맨발로 황톳길을 처음 걸으니 발바닥이 깔깔했지만 접지 관절부분은 나름 시원했다. 계곡 옆으로 쭈욱 이어지는 길 주변에는 울창한 나무들이 늘어서서 그늘을 만들어 주었다. 숲에서는 은은한 향이 풍겨서 걷기는 아주 좋았다. 시원한 산들바람에 몸을 내맡기다 보니 어느덧 종점에 다다랐다. 구장군 폭포가 시원한 물줄기를 쏟아 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웅장한 풍경이라 사진으로 남겼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발길을 돌렸다. 맨발 걷기를 마친 후 세족장에서 발을 씻었다. 맨발 걷기 효능을 알리는 게시판이 눈에 띄었다. 제2의 심장이라 불리는 발이 신체와 연결되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앞으로는 반드시 '매일 맨발 걷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그동안 지척에 있으며 경사가 아주 완만한 건지산을 자주 올랐다. 나뭇잎 사이로 멀리 보이는 유난히 푸른 하늘을 보며 걸었다. 산길을 걷다 보면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 귀에 이어폰을 꽂고 '트로트'를 듣는 사람, 둘이 또는 끼리끼리 도란도란거리며 걷는 사람들 모두가 의욕이 넘쳐 보인다. 한참을 걷다 맨발로 걷는 부부와 마주했다. "안녕하세요, 맨발로 걸으면 불편하지 않아요?" 나는 인사를 건네며 궁금해서 물었다. "아니요. 너무 좋아요. 한번 걸어 보세요". "어떤 점이 좋은데요?" 하고 재차 물었다. "잠이 잘와요. 혈액 순환도 잘되는 것 같아요."라고 대답한 부부는 살포시 웃었다. 송천동에 산다는 그 부부가 맨발 걷기를 한 지 한 달이 다 되어간다고 했다. 요즘 나이가 들어서인지 주변 사람들과 건강에 대한 얘기가 다반사였다. 아내는 허리를 위해 구기 운동은 그만하고 걷기만 하라고 신신당부다. 언젠가 KBS <생로병사의 비밀>에서 맨발 걷기의 장점을 소개했는데, 이후 많은 사람이 맨발 걷기를 하고 있다. 건강은 다리서부터 시작된다고 한다. 우리나라의 맨발 걷기 대중화의 중심에는 '맨발 걷기 전도사'로 알려진 '맨발 걷기 국민운동본부'가 있다. 박동창 회장은 불면증으로 몇 달간 잠을 설치다가 맨발 걷기 첫날에 꿀잠을 잤단다. 2시간 정도 맨발 걷기를 했을 뿐인데 놀라운 결과라고 했다. 이후 5년 동안 맨발로 걸으면서 건강이 좋아진 것을 직접 체험하고 '맨발 걷기가 생명을 살리는 일'이라는 걸 실감했다고 덧붙였다. 그리고 감기를 달고 살았는데 감기도 걸리지 않게 되었고, 불면증과 어지럼증도 없어졌으며, 콜레스테롤 수치도 정상으로 회복됐다고 했다. 그는 맨발 걷기가 자기를 살렸다며 '맨발로 걷는 즐거움'이란 책을 출간하기도 했다. 그는 '수많은 말초신경이 모인 발, 매일 걸으면 몸 곳곳이 좋아진다며 처음부터 무리하면 안 된다고 당부까지 했다. 시간도 처음에는 10분, 20분 정도에서 하다 30분, 40분, 50분 차차 늘려 가야 좋다고 했다. 걷는 자세도 바르게 유지하며, 접지 시간이 매우 중요하다.'고도 했다. 그래서 나도 처음에는 가만가만 걸었다. 발바닥이 가시에 찔릴까 노심초사하며 길바닥을 주시했다. 때로는 작은 배낭에다 물, 우의, 간단히 먹을 것을 가지고 다녔다. 학교 운동장도 걷기 장소로는 아주 좋다. 함께 걷는 친구는 계절과 관계없이 맨발 걷기 후에 반드시 찬물로 발을 씻었는데, 이는 겨울 동상을 방지하는 수단도 된다고 했다. 바른 자세로 산책길 맨발 걷기를 하며 자연의 기운을 받는다. 새소리 풀벌레 소리 들으며, 계절을 느껴보는 것도 좋다. 맨발 걷기는 나의 정신과 육체 건강에 특효약이다. △하광호 작가는 '한국신문'으로 등단한 수필작가이다. 현재 전북문인협회 사무국장이다. 수필집 <그리움은 놓지 않는다>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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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4.03 18:16

탑사와 어울린 봄날

스트레스가 쌓인 주말이다. 둘째 사위와 딸들을 데리고 서둘러 마이산을 갔다. 외손자 뒷바라지에 지친 몸을 풀어주고 싶었다. 산과 들은 온통 꽃들의 향연이다. 남 마이산 쪽으로 향하니 입구는 벌써 차량들이 주차 대기 중이었다. 벚꽃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흐드러지게 핀 꽃들이 하얀 지붕을 만들었다. 가게 앞엔 5색 등불을 켜고 오가는 길손을 유혹했다. 약초 파는 곳을 지나니 겨울철 참나무에 매달려 녹색을 띠고 덩굴처럼 기생하는 약초 겨우살이를 파란 바구니에 담아 놓았다. 조금 위쪽으로 오르니 해물파전, 도토리묵, 산 더덕구이, 참나무 장작 돼지갈비구이 옆에 노릇노릇 구워진 메추리가 코를 자극한다. 옥수수 막걸리도 줄지어 서 있다. 숯에서 피어나는 연기를 내저으며 도토리묵을 장에 찍어 먹는 모습들은 봄꽃 놀이의 일품이다. 길 오른쪽 낮은 물막이 댐에 고인 물이 물받이를 타고 흘러내린다. 늘어진 벚나무 가지에 매달린 벚꽃들이 바람에 물결 속에서도 춤을 춘다. 전나무 푸른빛과 휘어진 허리의 물그림자가 출렁인다. 연못 가운데 금당사 5층 석탑도 보인다. 임진왜란과 병자호란 때 크게 파손된 것을 이 자리로 옮단다. 금당사 괘불탱화는 넓은 천 가운데 커다란 관세음보살을 두고 있다. 야외에서 큰 불교 행사가 있을 때면 걸고 예배했다. 가뭄 들 때는 탱화를 걸어놓고 기우제를 지내면 비가 내렸다고 한다. 넓은 저수지가 눈앞에 있다. '암마이봉'과 '수마이봉'의 귀가 보이고 흰 벚꽃 터널과 파란색 지붕의 찻집에선 오리배가 헤엄치니 지난해 마른 갈대가 머리를 숙이고 끄덕인다. 오리배 탄 사람들은 열심히 스마트폰에 담으며 산과 벚나무 물이 어우러지고 오리배 속에 청춘 남녀노소 해맑은 모습들이 물에 비친다. 마이산 석탑은 1885년 입산하여 솔잎 등으로 생식하며 이갑룡 처사가 30년에 걸쳐 쌓았다고 한다. 탑을 쌓을 때는 주변을 천연석으로 쌓았지만, 천지탑 등 중요한 탑들은 팔도의 명산에서 수집한 돌들이 한 두개씩 같이 쌓아 심묘한 정기를 담고 있다. 가공되지 않은 천연석을 이용하여 조형 양식으로 정성과 솜씨가 돋보인다. 탑군(塔群) 중에 천지탑 등은 바람에도 약간 흔들릴 뿐 무너지지 않는 경이로움을 느낄 수 있다. 특히 겨울철에 탑 꼭대기에 물 한 사발 떠 놓고 지극 정성으로 기도하면 고드름이 거꾸로 하늘을 향해 솟는 묘한 현상이 일어난다고 한다. 최초에는 120기의 탑들이었는데 지금은 80여 기만 남아 있다고 하니 긴 세월 속에 변화를 맞이했음이 짐작된다. 대웅전 넘어 탑사 왼편으로 보이는 벚꽃이 미쳐 잎이 피지 못한 나무들을 바쁘게 재촉한다. 탑에는 절대로 손을 대지 말라는 탑사 경고문 옆에 작은 물레방아가 도는 사이로 약수가 흐르고 있다. 파란 바가지로 기암에 놓여있어 물을 삼키니 가슴의 냉기가 목부터 가슴으로 흘러가는 것이 보이는 듯하다. 탑사 남쪽 마이산을 바라다보면 성인 키 네길 정도 웅덩이가 파인 홈이 있는데 인간의 힘으로는 도저히 오를 수 없는 곳에 두 무더기 돌탑이 안에 안치되어 있다. 저곳은 어떻게 올라가 쌓았을까 생각해보니 답 이 안 나오는데 인간의 무한한 능력이 경이롭게 느껴진다. 꽃과 사람들이 탑사와 어울려 행복한 봄날의 하루였다. △김종윤 수필가는 종합문예지 '대한문학' 으로 등단했다. 저서로는 <시나브로 가는 길> 등이 있다. 현재 장수문인협회 회장, 한국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등에서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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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20 18:46

신발에 대한 애증

나와 동행하며 나를 호강시켜 준 신발을 기억한다. 아니 신발이 나를 기억한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발자취라 한다. 신발은 내가 걸어온 비밀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으며 그 비밀을 아무에게도 실토하지 않는 착한 침묵으로 나를 지켜준다. 신발은 내 모습이며 나와 동행하는 유일한 친구다. 신발은 나의 아픈 곳을 미리 알고 내게 신호해 준다. 또 신발은 용케도 나의 옷을 돋보이도록 유혹도 한다. 초라해 보일 때는 굽이 높고 광채가 나는 금박이 하이힐이 나의 시선을 유혹한다. 그뿐아니라 하루를 끌고 가는 그림자처럼 나를 버리지 않는다. 오랫동안 병원신세를 지고 있을 때도 신발은 멀리 있지 않고 내가 퇴원할 때까지 내 옆에서 기다려 맨 먼저 위로해 주며 내 몸의 중심을 꼭 붙잡고 집으로 동행해 준다. 체중의 변화도 신속하게 감지하며 내가 편안하게 보행을 하도록 노력도 한다. 척추협착증 통증에 속도를 맞춰 내 집까지 기억하고 끌고 간다. 돌멩이나 움푹 파인 길도 용케 비켜 가는 마술사 같은 시력을 갖고 있다. 내가 기억하는 신발은 초등학교 입학 때부터다. 가슴에 옷핀으로 손수건을 접어 달아주더니 벽장에서 꽃무늬 고무신을 꺼내 주었다. 내 발이 신발 속으로 쏙 들어가니 헐렁했던 기억이 난다. 신발이 벗겨지지 않으려면 발가락에 힘을 주어야 한다는 걸 일주일 지나서야 터득했다. 여름방학이 되어서야 겨우 내 발과 고무신의 크기가 맞아 서로 사이좋게 놀았다. 고무줄놀이와 자치기, 숨바꼭질 때도 신발은 나를 벗어놓고 달아나지 않았다. 비가 오는 날 흙 범벅이 된 신발은 지푸라기 서너 개 똘똘 말아 빨래비누로 닦으면 광채 나는 신발은 나를 기쁘게 한 유일한 나의 짝궁이었다. 여름방학이 지나고 추석이 다가오면 시장에 다녀오신 어머니 가방에서 '색동 코고무신'을 꺼내면서 공부를 잘해야 또 사준다는 강제적 명령도 잊지 않으셨다. 중학교 교복을 입을 때도 검정 운동화를 사주셨고, 앞에 끈이 있는 멋쟁이 운동화는 고등학교 입학 기념으로 사주셨다. 현관 신발장은 별로 관심이 없어서 그냥 지나칠 뻔했다가 문을 열고 보니 수십 년 동안 내 흔적이 담긴 신발이 나를 반기듯 추억을 되살려 놓는다. 맨 꼭대기에 발목이 무릎까지 닿는 부츠가 흙 밟은 흔적도 없이 얌전하게 포개 앉아있다. 딸이 생일선물로 보낸 신발이다. 나이 들어 걷기도 힘든 엄마의 모습은 모른 채 딸 중심의 생각으로 보낸 선물이다. 딸에게는 잘 신고 있다고 늘 말한다. 가장 외로운 신발이다. 신발이 나를 싫어할 뿐 아니라 신발을 떠받쳐 줄 미니스커트도 옷장에서 사 라진 지 오래다.부츠 옆에 흰 고무신이 빛바랜 시간을 안고 틈바구니에 끼어있다. 자녀들 결혼 때 한복차림을 해야 하는 부모는 구두 대신 고무신과 버 선을 신어야 했다. 신발에 매일 고맙다고 말한다. 신발장에 내 신발이 있다는 것은 내가 살아 있다는 증거다. 사자(死者)의 신발은 죽음과 함께 사라진다. 슬픈 신발의 운명이지만 신발은 반항하지 않는다. 그래서 신발에게 "네가 있어야 내가 산다"고 눈인사를 잊지 않는다. 요즘 늘 나와 함께 함께하는 신발은 운동화다. 그래서 옷과 잘 어울리도록 운동화를 색깔별로 몇 벌 샀다. 편하게 노닐 때는 운동화가 나를 사드락, 사드락 끌고 다닌다. 이제는 내가 운동화의 눈치를 보면서 하루를 사는 몸이 되어 간다. 운동화와 친해졌으면 좋겠다. 신발이 나를 버리지 않는다면 건강한 사람으로 살 것이다. △이소애 시인은 한맥문학으로 등단했다.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샘문학동인, 전북시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보랏빛연가'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감성시에세이' 외 다수가 있고, 한국문학비평가협회작가상과 전북예총하림예술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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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3.13 18:58

[금요수필] 금고에 갇힌 신사임당

신사임당이 어디론가 사라졌다. 어려운 경제난으로 피해서 잠을 자는 것인지 아니면 어느 누군가 납치해 감금을 시켰는지 요즘 얼굴 보기가 어렵다. 신사임당 초상의 5만 원권 지폐가 2009년 6월 발행되었으니 벌써 16년째다. 신사임당은 우리나라 돈의 최초 여성 모델이어서 화제가 되었다. 남자가 아닌 여성이어서가 아니라 신사임당을 선정하는 데 일부 여성계 반발이 있었다. 나는 다음 3가지를 들어 찬성이었다. 아들 '율곡'을 훌륭하게 키워 역사적 인물로 만들었다는 것, '사임당 자체'가 시서(詩書)에 능통한 문장가였다는 것, 자신이 서화에 능통하며 현모양처였다는 것 3가지만 해도 5만 원권 지폐에 올릴 조건은 중분하다고 본다. 요즘 들어 손주들에게 용돈이나 세뱃돈을 주려면 신경이 쓰인다. 어른이나 아이 할 것 없이 5만 원권을 선호하고 있으니 누구를 나무랄 수도 없다. 금년 설날이었다. 손주들이 훌쩍 자라서 성인이 되었다. 할머니인 아내가 세뱃돈을 주면서 은근슬쩍 말을 건넸다. "언니는 고등학생이니 5만 원, 너는 중학생이니 3만 원이면 어떻겠냐?" 잠시 고개를 숙이고 있던 둘째 손녀가 하는 말이 '세뱃돈 주시는 것만으로도 감사하지만 이왕이면 신사임당을 받았으면 좋겠어요."라고 은근히 큰돈을 기대했다. 요즘은 유치원에 다니는 아이도 세종대왕을 내밀면 입을 삐쭉거린다. 적어도 신사임당 지폐 한 장은 주어야 빙그레 웃어 보이는 세상이니 도대체 이놈의 돈이 무엇이기에 사람의 마음을 사로잡는 것일까? 정부는 경제를 안정시키고자 안간힘을 쓰고 있다. 그러나 이런저런 것들이 발목을 잡고 있는 것이 문제다. 전 세계적으로 시장경제가 휘청거리는가 하면 국내에서도 여러가지 어려운 문제들이 맞물려 있으니 이를 어떻게 풀어야 할지 고민거리다. 그런데 불안한 자산가들은 일단 '현금확보'라는 비법으로 5만 원권을 인출하여 안방 금고에 가둬놓고 있는 실정이니 이걸 어찌하랴. 전년도 상반기 대비 5만 원권 환수율이 71%에서 16%로 급강했다고 한다. 이보다 더 큰 문제가 어디 있을까? 시장경제가 빈혈 증세에 허우적대고 있음은 분명하다. 5만 원권을 긴급하게 풀어가며 극약처방에 나서는데도 도무지 차도가 없어 보인다. 서민들은 물론 중소기업들까지도 못 살겠다고 아우성이니 걱정된다. 어디를 뚫어야 돈줄이 원활하게 돌아갈 것인지 머리를 맞대고 대책 마련에 고민을 해 볼 일이다. 하루빨리 나라도 탄핵 적국에서 벗어나 평온하고 경제도 살아나 신사임당이 금고 가득, 호주머니 가득 날개가 돋쳐 만발했으면 좋겠다. 어느 일간지에 나온 금년도 상위 소망 들을 소개 하면 다음과 같다. 우리 가족 건강하고 자녀들도 취업하여 행복한 매일 보낼 수 있고, 돈 많이 모을 수 있도록 도와주세요, 친구들 많이 만날 수 있게 해주세요, 여행 많이 가게 해주세요, 등이다. 집약하면 건강 + 행복 = 가족 모두 건강하고 웃음 속에서 행복하고 오래오래 함께 할 수 있게 해주세요다. 이글을 읽는 독자 여러분들도 반드시 이 소원이 이루어 지기를 소망한다. △임두환은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행촌수필문학회 부회장과 전북수필문학회 영호남수필문학회 이사를 역임했다. <뚝심대장 임장군> 등의 수필집을 출간했고 전북 수필문학상과 행촌수필문학상 등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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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20 18:46

[금요수필] 눈 내리는 날 아침

눈 내리는 날이면 누구에게나 하고 싶은 말이 하나 있다. 무슨 생각이 나느냐는 질문이다. 나이, 남녀, 태어나고 성장한 곳, 삶의 터전, 생활 방식과 취향에 따라 답이 다를 것이다. 난 펄펄 눈이 오는 날이면 몸과 맘이 포근해지는 고향 생각이 난다. 옛 가족과 작은 집, 친구와 마을 사람들, 산천과 들판이 내 가슴에 정情으로 차곡차곡 쌓여 있어 그럴 게다. 겨울밤이 깊어지려면 얼마나 남았을까? 골목, 집 앞 도로, 아파트 울타리 뒤 인도에 눈발이 흩날린다. 자동차 눈을 쓸고 앞 유리와 보닛(bonnet)을 골판지로 덮어 사방에서 밀어닥칠 센 눈바람을 막았다. 어릴 적 눈이 내리면 문구멍으로 밖을 내다보듯 몇 번 현관문을 열어봤는지 모른다. 대낮같이 쌓인 환한 눈발을 보고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눈을 떠보니 새벽 네 시 반, 눈은 내리다 잠을 잔 것 같은데 소복소복 쌓여 있었다. 좀 기다리다 영상 새벽기도회에 참석했다. 눈이 기도회에 나온 교우들의 발길을 막았는지 찬양 소리가 작게 들렸다. 내 맘과 귀는 찬송과 말씀, 기도보다 눈이 쌓인 밖에 가 있었다. 앞집에 잠을 깨울까 봐 눈을 이층계단부터 부삽으로 조심조심 긁어내리고 비로 쓸어 대문 밖으로 퍼냈다. 먼저 앞집 대문까지 쓸어 며칠 전에 눈 내린 날 빚을 갚으리라 생각하며 대문 밖에 나와 굽은 허리를 폈다. 눈은 어느새 앞집 김 사장님도 새벽잠을 일찍 깨웠는지 눈을 쓸며 나온 게 아닌가? 인사를 나누며 함께 골목을 쓸었다. 운동경기 패자처럼 마음이 언짢았다. 집 앞 인도를 같이 쓸었다. 김 사장님은 아파트 뒤 인도까지 쓸어주었다. 옆집 박 과장님도 앞서 싸리비를 들고 나왔다. 자기 집 앞과 인도를 쓸었다. 소리 높여 이른 아침 인사를 나누었다. 박 과장님 옆집에 사는 장 선생님도 인도를 쓴 뒤에 아들 출근차의 눈을 쓸며 인사를 했다. 도로 건너편 님도 집 앞이 도로지만 싸리비를 들고나오길 은근히 기다렸다. 느닷없이 삼십 년 넘게 이웃사촌의 정을 나누며 살다 이사 간 홍 선생님도 생각이 났다. 어릴 때 여덟 살 위면 벗을 하며 말을 놓았다. 홍 선생님은 더 나이 차이가 나지만 눈이 내렸다 하면 질세라 금세 싸리비 소리와 인人기척도 없이 쓸고 들어가 버리기가 일쑤였다. 새 이웃 김 사장님도 미안할 정도로 눈 내리는 날 아침이면 더 부지런하다. 우리는 이웃이 없어져 가는 도시 문화에 묻혀 살고 있다. 눈 내린 날 아침에 이웃 남정네가 넷이서 눈을 쓸며 인사를 나눈 건 이사 오고 처음이다. 서른세 해 만에 만난 정경이라 추억거리로 그려두고 싶다. 오늘 아침엔 어릴 적 눈 내린 고향, 아름다운 풍경인 겨울왕국이 세워졌다. 밤새 쌓인 눈이 내 맘에 고향처럼 포근한 정을 느끼게 했다. 남은 겨울도 들사평 마을에 두어 번 더 밤새 눈이 펑펑 내렸으면 좋겠다. △ 정석곤은 관촌초등학교 교장으로 정년해 <대한문학> 수필 등단했다. 안골은빛수필문학회 부회장을 역임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회원으로 <풋밤송이의 기지개> 등 수필집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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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13 18:28

[금요수필] 장군 멍군

장군멍군은 장기에서, 두 사람이 서로 대립해서 승부를 가리기 어려움을 비유하는 말이다. 이기려고 장을 치면 막아내고 멍을 부르니 승부는 어려울 수밖에 없다. 비는 농사에 필수적이다. 농촌뿐만이 아니다. 우리의 생활에 절대로 중요하다. 바라던 비가 오면 좋고, 바라지 않던 비가 내리면 싫다. 일기 예보도 잘 맞지 않는 소낙비는 느닷없이 내리기 때문에 우리를 당황하게 만들 때가 많다. 천둥과 번개를 동반하는 소낙비는 두렵다. 소나기구름은 여름철 달궈진 지면의 따뜻한 공기 덩어리 아래 찬 공기 덩어리가 파고들면, 따뜻한 공기 덩어리로 상승할 때 만들어진다. 그 속에 숨어있던 작은 물방울이 점점 크게 응축되어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지는 물방울이 소나기다. 갑자기 순간적으로 쏟아지는 것이 특징이다. 여행자나 나그넷길엔 곤욕을 준다. 소나기라는 말은 농작물이 타들어 가는 걸 애태우면서, 몰려오는 저 구름에 '비가 온다. 안 온다.' 하며 농부들이 '소 내기'를 했다는 데서 유래되었다는 유머가 있다. 소낙비가 내릴 때면, 재담 좋았던 선배가 들려준 시아버지와 며느리의 장군, 멍군식 대화가 생각난다. 며느리가 이웃 마을 잔칫집에 입고 나가신 시아버지의 모시 적삼을 잘 빨아 말려서 풀 먹여 곱게 다려드렸는데 행여라도 비가 와서 비나 맞지 않을까 하고 걱정이 되었다. 그런데 토방에서 쏟아지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던 며느리가 소낙비를 흠뻑 맞고 대문을 들어서는 시아버지를 보고 '아버님! 어디서부터 비를 맞았어요?' 하며 반갑게 맞았다. 그런데 비 맞은 장닭 신세가 된 시아버지가 화가 잔뜩 나서 '어디서부터 맞았겠냐? 상투 끝에서부터 맞았지.' 하시며 방으로 들어갔다. 스스럼없이 위로의 말을 올렸는 어이없게도 한 방 먹었다. 그 뒤로 마음이 개운치 않아 기회를 보고 있었다. 청명한 가을이었다. 마당에 멍석을 펴고 벼를 널어 말리는데 시아버지께서 외출하며 "새아가! 낮에 볕이 뜨거우면 벼를 뒤집어 널어라" 하고 일렀다. 기회라 생각한 며느리가 "내버려 두세요. 뜨거우면 자기들이 되돌아 누울 테죠." 하고서 부엌으로 들어갔다. 시아버지는 '장'을 쳤으니 '멍'으로 받는구나 하고 생각하며 말없이 대문을 나갔단다. 실수를 인정한 시아버지의 며느리 사랑 이야기였다. 장기를 좋아하는 두 사람이 있었다. 밥 먹는 시간, 잠자는 시간을 빼고는 하루 종일 장기를 두었다. 얼마만큼 두고 나면 싫증도 날 텐데, 장기판을 떠나질 않는다. 그 두 사람은 바로 장인, 장모였다. 둘 다 연세가 70을 넘어 특별한 소일거리도 없으니, 심심풀이로 장기를 두었다. 어쩌다 사위 내외가 서울 처가를 방문하면 아파트 현관까지 장기를 내려치는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두 분이 어떻게 하고계신가? 하고, 문을 살그머니 열고 들어갔다. 장인어른은 사위가 온 줄도 모르고 장모님에게 버럭 소리를 지른다. 소리 지르시는 대부분의 이유는 ‘한 수만 물러달라’는 것이다. 그러면 장모는 “아니, 사내대장부가 무슨 장기를 두면서 물러달라고 하느냐?”면서 물러주질 않았다. 그러면 장인 입에서 늘 나오는 말은 ‘치사하다’였다. 장기 실력은 두 분이 비슷비슷한데 장모는 총기가 좋아서 실수하는 법이 없었다. 그런데 장인은 성격이 급해 서두르다 꼭 코너에 몰려 장모님이 ‘장군이오!’ 하고 나오는데, ‘멍군’으로 대응할 수가 없다. 그러면서도 늘 소리를 지르는 분은 장인어른이셨다. 사위는 두 분이 서로 알콩달콩하면서 장기를 두는 모습이 그렇게 정겹고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나도 늙으면 아내와 장기를 두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아내가 절대로 물려주지 않아 오히려 싸움거리가 되었다. △신팔복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진안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행촌수필문학, 영호남수필문학회, 은빛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수필집 <마이산 메아리>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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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2.06 16:43

벚꽃 동네를 행화촌으로 바꾼 이야기

'행화촌'이란 말은 옛사람들이 주막집을 은유 한 말이다. 은유란 말은 암유(暗喩)란 말과 동의어인데, 그 '아름답게 숨겨짐'을 이미지로 씌운다. 이런 주막집이란 으레 길손 나그네가 가만가만 찾아들게 마련인, 적막한 시골길 외딴 길섶 어디쯤에 없는 듯이 자리한 칸막이 초막집이다. 외로움으로 마냥 눈시울 붉힌 주모 아낙 하나 덩그러니 뜰을 지키는 주막이다. 궁색한 나그네에게는 돈이 없어도 그냥 탁배기 한 잔 쯤은 넌즈시 정내미로 건네는 소박한 주막 말이다. 실바람으로 머릿결 살랑이는 청보리 이랑이 시야 가득 펼쳐지고, 언뜻 초막을 비껴 살구나무 한 그루 산뜻하게 서 있다. 느긋이 봄기운이 만창할 때 저녁노을 지피면 살구꽃 피고 이어서 막걸리 한 잔까지 연상되는 그런 정경이 우리네 추억으로 오버랩된다. 살구꽃에 얹히는 백야의 그림 한 폭으로 은은한 달빛 서리면 금상첨화일 것이다. 이때 보름달은 아니고 막 배불러 오는 상현달이 소슬한 초막에 어리비치면 더 좋을 성 싶다. 노을빛은 신선이 마신다는, 저 멀리 소동파의 적벽부에 언급되는 유하를 연상시킨다. 한국 고유의 서경이며 서정성 여문 한국 시골 동네의 정경은 그야말로 별유천지 비인간 시인 셈이다. 이 때 이호우의 시조 <살구꽃 피는 마을>이 가슴 출렁이며 읊조려지는 것이다. 살구꽃 핀 마을은 어디나 고향 같다./만나는 사람마다 등이라도 치고지고/뉘집을 들어서면은 반겨 아니 맞으리. 바람없는 밤을 꽃 그늘에 달이 오면/술 익는 초당마다 정이 더욱 익으리니/나그네 저무는 날에도 마음 아니 바빠라. 내 고향은 남원 덕과 만도리다. 산 겹겹 휘휘 둘러 시냇물은 산자락 감아 돌고, 안에 감춰진 시골 동네이지만 지금은 앞길 신작로레 살구나무를 줄줄이 심어서 일컬어지기를 행화촌이라 한 것이다. 그런데 몇십 년 전에 내가 주동하여 출향인들에게 모금해 벚나무를 심었었다. 벚꽃이 만발할 즈음 고향에 가면 너무 벅찬 환희에 휩싸이기도 했었다. 동구에 들어서면 우선 벌 소리 윙윙거리고 봄은 무르익어서 춘정이 이글거렸다. 그러나 얼마 후 나의 조부가 왜정 치하에서 독립운동한 사실이 밝혀지고 나 또한 독립유공자 유족으로 정부의 증서를 받은 이후에는 벚꽃 마을을 조성했던 사실이 부끄러워진 것이었다. 또한 동구에 호암시비공원湖巖詩碑公園을 축성한 뒤로는 그 부끄러움이 더했다. 꿈속에서도 부끄러움에 소스라쳤다. 벚꽃은 일본 국화가 아니던가. 시비공원은 임진, 정유왜란에 맞서 항 일 투쟁하던 선비들 시비로 세워졌기 때문이다. 고경명 장군을 비롯해 우리 선조 소산복 할아버지 등 항일 선비들 20여기 시비인 것이다. 그래서 다시 뜻을 세워 벚나무는 모두 베어내고 역시 출향인 모금으로 살구나무 동네를 조성했던 것이다. 벚나무 원산지는 제주도라 했고 살구나무 원산지는 중국이라 알려졌기로 이 교차된 아이러니로 인해 묘한 감정에 휩싸이기도 했다. 이제 그야말로 행화촌이 된 우리 동네는 이 전라도 땅에 자랑스런 마을이 된 셈이다. 살구꽃 핀 마을엔 배타도 아니고, 벽을 치고 지나는 동네가 결코 아니다. 술 익고 정 익는, 인간 정신이 샘솟는 동네다. 우리 동네에 산뜻한 주막집 하나 세우고 싶다. 오는 이, 가는 이 옷소매 잡고 술잔 나누고 싶다. 한국 고유의 인심을 모락모락 가꾸고 싶다. 그러나 시대가 시대인 만큼 그럴 순 없고, 잘 아는 시인 묵객 몇이라도 불러 살구꽃 그늘에 멍석 펴 놓고 술잔치 거나하게 벌이고 싶다. 내 인생 마무리될 즈음 팔순 잔치를 이렇게 한 번 벌려봐? 상상만 해도 마냥 즐겁다. 이 삭막한 세상 한 귀퉁이라도 인정이 꽃 피는 그런 그림 하나 그리고 싶다. △소재호 시인은 <현대 시학> 시 천료했다. 전북예총회장, 전북문인협회장, 석장문학관 관장 등을 역임했다. 녹색시인상과 성호문학상, 목정문화상 등을 수상했으며 시집 <압록강을 건너는 나비> <초승달 한 꼭지>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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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16 15:36

100세 타령

'9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오거든 사랑하는 마나님 때문에 못 간다고 전해라' 내 나이 벌써 망구(望九)가 되었다. 우리 부부가 사랑을 불태워 온 지도 어언 60년에 이른다. 십년이면 강산이 변한다고 하는데 이제 6번째 변하고 있다. 꽃피고 새우는 자연의 숨결 속에 덧없이 살아온 삶이었다. 빠른 세월의 무상을 느낀다. '인생은 역시 추억을 먹고 산다'는 의미를 되새겨 본다. 비록 지난날들이 무의미한 삶이요. 허무한 꿈이었고, 외로운 여행이라 할지라 알찬 생의 보람이라고 느낀다. '추억은 삶의 아름다운 꽃밭'이라고, 지나간 추억의 창문을 열면 고이 잠들고 있는 옛날 이야기가 꽃피어 오른다. 남쪽 나라 멀리 봄의 서곡이 울려오면 가슴 설레는 노오란 수선화가 고운 미소를 날릴 때 사랑의 노래를 불렀다. 파도치는 바다 기슭에서 이상에 불타는 청춘의 꿈을 태우기도 했다. 황혼에 물든 노을빛에 영혼의 노래를 불러보고 붉게 타는 낙엽 사이 흩어지는 시혼을 느꼈다. 그 영혼의 노래가 나의 고독을 달래 파도에 밀려간 추억들이 나를 새롭게 탄생시켜 가는지 모른다. 지는 꽃잎들이 이야기와 정처 없이 사라져가는 낙엽들의 속삭임 들어본다. 그야말로 신비로운 자연의 숨결에 젖어본다. 학창 시절 일곱 빛갈 무지개를 잡으려던 욕망의 나래를 펴보았고 학문과 지혜를 넓혀오던 세월이 덧없이 흘러갈 때 <까뮈의 시지프스>를 보면서 인생에 대한 고민도 해보았다. 교단에서 제자들에게 정의를 외치며 한 점 부끄러움 없이 살기를 갈망하였다. 윤동주의 '서시'를 가슴에 품고 살아온 세월에 참으로 무상과 하무를 느낀다. 2세들의 교육에 봉직해 온 부부교사였다. 그러나 외모나 성격과 달라 정말 엇박자로 살아온 인생이었다. 그래서 오히려 아웅다웅 조화를 이루며 살아가는 끈끈한 인연이었다 생각한다. 괴로운 일에도 번번이 맞지 않아 다툼이 따르기도 한다. 이제는 눈이 어두워져 청맹과니가 되어 가고 있는 것 같다. 하는 일마다 마땅치 않아 달달 볶아댄다. 정말 맹맹이와 달달이가 한 울타리에서 다투며 알콩달콩 살아가고 있다. 당신이 아니면 어디다 스트레스를 풀겠느냐? 는 아내, 있으면 원수덩이 같은 당신이지만 나가면 근심덩이가 된다는 푸념으로 마음을 달래본다. 참으로 오랜 생활 속에 절로 피어나는 사랑의 노래다. 기나긴 세월 사랑이 머물다 간 혼적들이 곱게 여울져 온다. 내 나이가 어때! 우리는 영원한 동반자! 인생은 꿈을 찾아가는 여행이라고 한다. 저물어가는 황혼의 노을빛 에 아름다운 추억을 되새겨가며 흘러가는 세월의 강물에 사랑의 노래 를 띄우고 싶다. 아리스토텔레스는 '희망이란 눈 뜨고 있는 꿈'이라 했다. 판도라에 마지막 남은 희망은 우리 인간에게 내려 준 신의 선물이다. 희망은 꿈꾸는 자의 몫이라 하지 않았던가? 희망은 인생의 어둠을 밝혀준다고 했다. 저물어가는 인생의 뒤안길에 서성이다 '문학예술'이라는 정원에 시詩와 수필이라는 꽃나무를 가꾸면서 텅 빈 가슴에 새로운 의지의 날개를 펼쳐보려고 한다. 해 저문 언덕에 누워 노욕을 버리지 못한 채 아직도 못다한 사랑의 노래를 부르며 쉬지 않고 희망의 노를 저어 가리라! '100세에 저세상에서 날 데리러 오거든 사랑하는 마누라와 함께 간다고 전해라!' △서상옥 수필가는 <대한문학> 수필, <백두산문학> 시로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와 전북수필문학회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월간한국시 전주시지회장 역임했다. 수필집 <사랑과 그리움이 메아리 쳐올 때>와 시집 <꽃무릇 연정>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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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9 18:35

[금요수필] 손톱

손톱이 부러졌다. 아니 손톱이 찢어졌다는 게 더 맞는 말이다. 어디에 걸려 이렇게 되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봐도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살갗을 파고든 손톱은 절반가량 찢어져 사선으로 비스듬히 덜렁거렸다. 손가락을 움직일 때마다 손끝이 쏙쏙아렸다. 옷을 입을 때, 머리를 감을 때도 날 선 면도날처럼 찢어진 손톱이 신경에 거슬렸다. 무엇이든 그 절실함을 모를 때는 그것의 존재와 고마움을 잊고 살아간다. 손톱이 그랬다.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푸대접받은 게 억울했던지 말썽을 피우기 시작했다. 손가락 중 쓰임이 제일 많은 집게 손가락이라 더 까다롭다. 시간이 가면 났겠지, 하고 임시방편으로 일회용 밴드로 감아 두었다. 그러나 손에 물 마를 날이 없는 집안일 때문에 일회용은 오래 배겨내지 못했다. 물에 젖은 밴드를 풀어보니 피부가 퉁퉁 부풀어 올라 있었다. 뾰족한 수가 생각나지 않아 다시 자랄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런 내 모습을 지켜보던 아들이 청소며 잔심부름을 도와주었다. 오래전 남편을 도와 사업을 할 때다. 그때 아장아장 세상을 향해 발을 떼기 시작한 두 살배기 아들은 팍팍한 내 삶에 단비처럼 커다란 기쁨이 되어 주었다. 사무실 하나에 방 한 칸이 전부였던 작은 공장은 매일 같이 시끄러운 기계들이 쉴 새 없이 돌아가는 위험한 곳이었다. 기계 때문에 밖으로 나올 수 없는 아들은 유치원에 간 누나가 돌아올 때까지 온종일 혼자서 놀아야만 했다. 착하고 유순한 아들을 보고 사람들은 부모가 바쁜 것을 아는 듯 얌전하다며 칭찬이 자자했다. 그러나 나는 그때 다른 아이들처럼 엄마 손잡고 마음껏 뛰어놀았으면 좋겠다고 생각하곤 했다. 우두커니 혼자 노는 단칸 방문을 열어 보면 아들의 친구는 달랑 장난감 로봇 하나뿐이었다. 그해 여름, 공장의 후텁지근한 기계 열 때문에 환기를 시킬 요량으로 방문을 조금 열어 놓았다. 그때 공장 한쪽에서 숨넘어가는 듯한 아이 울음소리가 기계소음을 뚫고 들려왔다. 황급히 뛰쳐나가 보니 아들이 공장 유리문 틈에 엄지손톱이 끼인 채 자지러지게 울고 있었다. 작고 여린 손톱에서는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선홍색 피는 아들의 새하얀 손가락 사이로 삽시간에 번져 나갔다. 파랗게 질린 아이는 마침내 울음소리도 못 내고 있었다. 아들의 작고 얇은 손톱은 바닥의 흥건한 피 위에서 종이배처럼 둥실 떠 있었다. 아이 손톱을 주워든 나는 슬픔을 느낄 새도 없었다. 부러진 손톱은 영양분이 바튼 논바닥처럼 쩍쩍 갈라지곤 하였다. 도무지 자라날 생각도 하지 않았다. 손톱 때문에 심사가 뒤틀리고 만사가 귀찮아졌다. 평소 이보다 더한 아픔도 참고 견뎌내던 때와는 달리 짜증이 나기 시작했다. 주위 사람들은 이제 손톱을 걱정하는 게 아니라 신경이 날카로워진 나를 더 경계하는 것 같았다. 떼어버리고 싶어도 뗄 수조차 없는 화근덩이는 점점 살갗을 파고 들더니 누런 고름이 잡혀갔다. '쇠갈퀴가 몸속 여기저기를 박박 긁어대는 것만 같다' 고중얼거리던 어머니 말씀이 떠올랐다. 천성이 부지런한 친정어머니는 손톱 두 개가 없다. 왼손의 새끼 손가락은 손톱이 비틀려 뭉뚝하고, 네 번째 약지는 아예 첫 마디가 잘려나 가고 없다. 어머니의 손가락은 내가 아주 어릴 때 공장 기계에 끼어 마쳤다고 했다. 그래서 어머니는 반지를 잘 끼지 않으신다. 아니, 반지를 낀다 해도 손가락이 뭉뚝해 예쁘지 않다. 아버지가 해주신 보석 반지들도 간직하기만 할 뿐 끼지는 않으셨다. 얼마 전 친정에 갔을 때였다. 어머니는 내가 자리에 앉기도 전 '파란색 보석이 행운을 안겨준다더라.'하며 몇 개 남은 반지 중 마음에 드는 걸 골라 보라고 했다. 내가 망설이고 있자 제법 알이 굵직한 반지를 선뜻 건네었다. 나는 평소 어머니가 아끼던 반지니 그냥 가지고 계시면 좋겠다고 말씀드렸다. 아침에 일어나니 허연 손톱 하나가 이불 위에 덜렁 빠져 있다. 벽에 걸린 달력에 빨간 동그라미 하나를 그렸다. 며칠 뒤면 친정어머니의 생신이다. △박경숙 수필가는 <계간수필>에서 수필 천료로 등단하였으며 전북 수필문학회 사무국장을 역임했다. 전북수필문학상, 산호문학상을 수상했으며 수필집 <미용실에 가는 여자>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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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5.01.02 17:00

[금요수필] 우리어머니 이태순 권사

어머니가 돌아가신지 한 달이 지났다. 골반뼈가 부러져 요양병원에서 6개월 가량 치료받으시던 모친이 임종하시기 전날, 배가 아프시다길래 저녁식사 대신 소화제랑 요거트와 과일을 드렸다. 다음날 새벽 당직의사로부터 고열과 저혈압에 염증수치가 너무 높아 위급하다는 전화를 받고 대학병원으로 옮기기 위해 서둘러 요양병원에 도착했다. 내 울부짖음에 어머니는 간신히 눈을 뜨고 입술을 달싹이시더니 그걸로 끝이었다. 향년 96세를 일기로 영면에 드신 것이다. 6·25동란과 혹독한 가난 속에서도 7남매를 하나도 안 죽이고 길러내신 어머니는 필자가 대학과 정부출연연구원으로 이어지는 바깥일을 마감하고 돌아왔을 때만 해도 고향에서 아버지가 세우신 교회를 지키며 독거하고 계셨다. 어머니의 건강은 두말할 나위 없이 효성이 지극한 자식들의 보살핌 덕분이다. 그런 점에서 필자는 학업과 직장을 핑계로 타국과 외지를 떠돌았으므로 가장 불성실한 자식인 셈이다. 퇴임하자마자 아내의 허락을 구한 후 남매들에게 뒤늦게나마 못다한 내 몫을 다하겠노라고 선언하고 귀향했다. 먼저 해야 할 일은 30년 전에 지어드린 고향집을 수리하는 일이었다. 내고향 순창 쌍치는 고도 300~400 m의 고지여서 겨울이면 유독 눈(雪)이 많고 춥다. 코와 발이 시릴 정도여서 단열을 위해 이십개가 넘는 크고작은 창문을 이중창으로 바꾸고 이제는 불필요한 작은 공간들을 합치는 공사였다. 고치다보니 욕심이 생겨 범위가 자꾸 커지고 그에 따라 비용은 계획의 배가 되고 말았다. 공사가 한창일 때 어머니는 서울에 사는 작은누나가 모셨다. 우여곡절 끝에 작년 말 공사를 마무리하고 딱 4개월 남짓 지날 무렵, 침대에서 주무시다가 화장실 가다 넘어져서 그만 골절상을 입고 말았다. 6개월간의 투약으로 치료할 수 있겠다는 대학병원의 진단에 따라 요양병원으로 옮겨 매일 주사약 처치를 받고 있던 참이었다. 치료경과도 좋아서 일주일 후면 완치를 확인하고 다시 걸을 수 있도록 도수치료를 예약해둔 상태였고, 어머니로부터 용기를 내시겠다는 다짐을 재삼재사 받아 뒀는데... 나는 허망할 뿐만 아니라 남매들에게 너무 미안했다. 호언장담했던 백수(百壽)는커녕 불과 일년반 만에 돌아가시게 한 것 아닌가. 나는 그날부터 원인을 알 수 없는 무기력증에 빠졌다. 식욕이 없어서 먹는 것도 시원찮은데 고질인 역류성식도염은 더욱 심해졌다. 어머니랑 살던 고향집 가기도 싫었다. 그러나 사망 한 달 이내에 주민등록지에 사망을 신고해야 했으므로 며칠 전에야 쌍치면사무소에 가서 신고를 마친 후 어머니 안부를 묻곤하시던 앞집 이웃을 찾아뵈었다. 나를 보자마자 대성통곡하시는 그 권사님 따라 함께 하염없이 울면서 문득 백수(百壽)가 내 욕심이 아니었던가 하는 반성이 일었다. 우리부모는 60년 이상 해로하시면서 금슬이 참으로 좋으셨다. 두 분이 다투시는 걸 단 한 번도 본 기억이 없다. 어머니가 아버지 얘기를 하실 적에는 늘 얼굴이 생기로 반짝이며 ‘네 아버지처럼 훌륭한 양반이 없다.’는 말을 빼놓지 않으시는 걸 즐거운 맘으로 지켜보곤 했었다. 그래그래 15년 동안 못 만난 아버지가 얼마나 보고 싶으셨을까. 이날 이후 내 식도염이 감쪽같이 사라졌다. △신형식 시인은 전북대 화학공학부 교수와 부총장, 한국기초과학지원연구원장 등을 역임했으며, 한국작가회의 회원·한국공학한림원 회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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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2.13 09:40

그리운 옛날

하늘 높은 가을, 내 가슴 속에는 오래도록 머물고 있는 작은 그리움 하나 자리하고 있다. 산이 바로 뒤에 있는 우리 집은 누가 산직이 집이라 이름을 붙여주지는 안 했지만, 자연스러운 산직이 집이었다. 아버지 살아계실 땐 하루아침도 거르지 않고 산을 돌아보고 오시던 모습 이 참 정성스러워 보였는데 아버님 돌아가시고 난 뒤부터는 그 일이 자연스럽게 우리 몫으로 넘겨졌다. 우리 내외는 그 정성의 반절도 안 되지만 아버님의 유지를 받들어 열심히 했다. 야트막한 산 오름은 부담스럽지 않아 좋았다. 조상님들의 묘를 둘러보며 부모님 묘 앞에서는 기쁘고 슬픈 사소한 얘기들까지도 작은 소리로 말씀드릴 수 있었다. 선산 밑에 살고 있는 나름의 작은 행복을 스스로 누리는 것이라 만족하며 살았었다. 선산으로 가는 길은 우리 집을 지나지 않고는 갈 수가 없다. 그래서 선산을 찾으려면 꼭 들러야 했다. 추석날 우리 집은 귀성객이 붐비는 대합실처럼 손님맞에 분주했다. 그 시절 식당은 지금 같지 않게 귀해서 객지에 사시는 분들의 대부분이 우리 집에서 점심을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었다. 그리고 아버님이 생전에 '손님을 잘 대접해 보내지 않으면 후회한다.'고 항상 이르신 가르침에 꼭 식사를 우리 집에서 하고 가시도록 했다. 특히 추석에는 멀리 사는 조카들 그리고 자녀들 까지 삼대가 넓은 마당에 가득하여 금세 축구장도 되고 잔디밭은 씨름판도 된다. 그렇게 모이다 보면 삼십 명이 넘을 때도 있었다. 산소를 다녀오는 동안 식사 준비가 미처 안 되었을 때는 내가 총지배인이 되어 손님들까지 합세해 안 쓰던 그릇까지 총동원되었다. 웃음꽃 까지 곁들여 왁자지껄한 분위기는 도깨비시장 같고 거실은 물론 방마다 식당 같은 분위기였다. 오랜만에 만나는 반가움에 얘기 꽃을 피우고 얽히고설킨 핏줄은 하나가 되어 같은 방향으로 흐르는 듯 진한 가족의 뜨거운 핏줄이 온몸을 타고 도는 듯 했다. 어떻게라도 식사를 해서 보내야 마음도 편안했던 시절이었다. 식사 후식으로는 집안 과일나무의 과일들을 대접하고 나면 여자들은 모두 주방에 들어가 설겆이를 하면서 그동안 못다 한 얘기들로 접시 가 뒤집어졌다. 피붙이 들이 함께 어우러져 서로를 보듬어 안는 진한 가족애로 무르 익었다. 이날이 지나면 언제 또 이렇게 동기간들이 모여 정을 나눌 수 있을까? 그듵이 떠나면 정거장 대합실처럼 붐비던 우리 집은 쓸쓸한 시골 간이역처럼 조용하다. 해마다 명절이면 온 집안에 가득하게 모여 정을 나누며 헤어짐이 아쉬워 손을 부여잡으며 작별을 서러워하던 따뜻한 손들이 그립다. 산더미처럼 쌓인 설거지 그릇을 치우며 깔깔거리던 여인들의 모습이 그 웃음소리와 함께 주방 안에서 맴돌고 있다. 언제 다시 그런 날들이 오려는지 그리움들을 가슴 한쪽에 곱게 묻어 두고 영원한 그리움인 것 같아 오늘도 나 혼자 산에 올라 신석정 당숙님의 유택 앞에서 '그 먼 나라를 알으십니까' 그리고 시비에 새겨진 '소년을 위한 목가'를 낭송해 보고 그 붐비던 옛날을 생각하며 터벅터벅 내려온다. 당질부 김호심은 당숙인 석정 선생님 시구가 너무 좋아 부안문화원에서 시 낭송 강좌를 진행하고 있다. 노인들 시 낭송 동아리 ‘풍경소리’ 시 낭송 강좌에는 ‘부안모네 발달 장애인 주간 보호활동 센터’에서 온 장애인들도 참여한다. △ 김호심 수필가는 신석정 시인의 당질부다. <한국문인>으로 등단했으며 행촌수필 이사, 석정문학관 운영위원, 부안문화원 시낭송 지도 강사이며 부안 문인협회 회장을 역임하고 부안향토문학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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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21 18:46

[금요수필]부끄러운 고백

아들이 내 귀에 대고 귓속말을 한다. “엄마, 야! 야! 하지 말고 그냥 수연아 하고 이름을 불러주세요.” 아들의 말에 뜨겁게 달구어진 숯덩이가 내 얼굴에 착 달라붙는 것처럼 화끈 거렸다. 아차, 번쩍 정신이 들었으나 이미 때는 늦어 말은 뱉어 졌고 주워 담을 수 없는 부끄러움만이 내 몫이 되었다. 지난 주말 조양 임씨 참의공파 십이세 (兆陽林氏 參議公派 十二世(秀番) 종인들이 모여 추천대 원옥동산에서 시제(時祭)를 지냈다. 전날부터 내린 비가 아침까지 오락가락 하였지만 100명이 넘는 많은 종인들이 참석 하였다. 시제가 시작되기 전 무리 속에 있는 며느리를 발견하고 내가 맡은 역할을 도움 받을까 싶어 이름을 불렀다. 그러나 나도 모르게 급한 마음으로 호명한 며느리의 이름은 야! 였다. 야!.... 야!..... 나의 무례한 호칭으로 아들은 아내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었을 것 같고 며느리는 순간 주변을 살피며 당황했을 것 같다. 내가 말하면 사람들은 어쩜 말도 그렇게 예쁘게 하느냐고, 역시 시인이라 말 하는 것도 다르다고 하는 소리를 자주 들어왔다. 사람의 인격은 말에서 나오고 천 냥 빚도 말 한 마디로 갚는다는 속담도 있으니 말의 중요성은 그야말로 한 사람의 품격을 대신하는 것뿐만 아니라 인생의 승패를 좌우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더구나 나는 우리말 순화를 위한 우리말 지킴이가 되고 싶은 사람이고, 예쁜 언어를 골라 쓰는 시인이고, 존중하며 배려해야 하는 문해 어르신들을 가르치는 선생이니 특별히 말을 신중하게 하여야 함은 당연한데 어쩌다 이런 실수를 또 저질렀는지 내 입을 톡톡 치고 싶었다. 바라만 보아도 예쁜 며느리가 내 허리를 혹은 어깨를 감싸며 어머님하고 속살댈 때면 정말 행복했다. 고부간의 갈등을 겪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건네 들으면 나는 웬 복이 그리 많아서 이렇게 상냥하고 착한 며느리를 보게 되었는지 감사했다. 결혼과 함께 따로 나가 살다보니 자주 만나는 건 어렵고 같은 교회를 섬기게 되어 만남이 이루어지는 주일이 더욱 기다려졌다. 처음 며느리에 대한 호칭을 뭐라 할까 생각하다가 책이나 드라마에서 봤던 것처럼 사랑스러움을 담아 ”아가야“ 하고 부르고도 싶었지만 그건 너무 고전적이고 진부하다는 생각이 들어서 독립된 개인으로 생각하여 아들과 딸처럼 이름을 불렀더니 친근하고 편안하고 정답게 느껴져 좋았다. 다정도 병이라 했던가! 과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처음 내가 며느리에게 야!라고 불렀던 날은 교회 식당에서 였다. 아들이 내 손을 잡고 한쪽 구석으로 가더니 ”엄마, 부탁이 있어요. 수연이한테 야!”하지 말고 그냥 수연아! 하고 불 러주세요. “ 엄마가 비 매너적인 사람도 아니고, 누구든 무례하게 구는 걸 싫어하는 줄 알면서 얼결에 한번 나온 걸 가지고 지적하는가 싶으니 서운하고 야속했다. ‘햐! 이놈 봐라 장가가더니 지 색시는 퍽도 감싸네.’ 하는 기분도 들고, 무엇보다 내 실수에 대한 무안함과 당혹감을 숨기고 싶은 마음만 급급했다. 놀부가 타던 박 속에서 느닷없이 튀어나온 도깨비 같은 이 황당한 상황을 나는 내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어서 아들의 부드러운 지적에도 상처가 되었다. 말이란 감정을 내포하고 있어서 조금의 차이만 느껴져도 감정을 상하게도 하고 좋게도 한다. 며느리가 느꼈을 참담함을 생각하니 쥐구멍으로 숨고 싶었다. 또 아들이 내게 말하기 위해 얼마나 머뭇거렸을까 생각하면 미안했다 어느 시어머니가 며느리를 향해 ”야! 하고 큰소리로 불렀는데 알아듣지 못한 며느리가 대답하지 않으니 시어머니가 신고 있던 신발을 며느리에게 벗어 던졌다는 이야기를 듣고 깔깔대며 웃었던 적이 있다. 하마터면 내가 그 시어머니처럼 될 뻔 했으니 생각만 해도 부끄럽다. 이렇게 부끄러운 고백을 하는 건 아들의 조심스런 부탁이 나를 돌아보는 기회가 되었고, 서로를 존중하는 따뜻하고 공손한 말은 가정에서부터 시작되어야 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최윤옥 시인은 계간 문예지 ‘자유문학’과 ‘시조문학’을 통해 등단했다. 전북문인협회, 전북시인협회, 전라시조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으며 저서로는 시집 ‘이만 사랑을 잠재우고 싶다’, ‘흔들릴 때 더욱 푸르다’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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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14 17:29

[금요수필] 어머니와 감나무

감이 주렁주렁 열려있는 가을 풍경은 모든 이들의 마음을 포근하게 한다. 담쟁이 옆 마당 한가운데에 놓인 감나무가 붉게 물들고 있다. 감 나뭇가지 위에 덩그러니 달린 주홍빛 속에 어머니의 얼굴이 떠오른다. 가을이 깊어져 가는 시월이면 떠오르는 얼굴, 그립고 보고 싶은 얼굴이다. 항상 밝게 웃고 계시는 어머니 모습이기도 하다. 어머니는 늘 과일을 즐겨 드셨다. 그 많은 과일 중에서도 항상 감을 너무 좋아하셨다. 그러한 어머니는 계절중에 감들이 풍성한 가을을 더욱 좋아하셨던 것 같다. 나이가 들면서 단감보다는 홍시를 좋아하셨는데, 감이 많이 나올 즈음에는 몇 박스를 구입해서 베란다에 넓게 펼쳐놓고 익어가기를 기다리며 한 개씩 드시며 즐기셨다. 그러시면서도 이웃에게 주고 싶은 마음이 앞서 항상 모두에게 골고루 나눠줬다. 남은 홍시는 냉동고에 넣어 놓고 여름 내내 얼어있는 감을 꺼내어 믹서로 갈아서 시원하게 자식들에게 주는 재미를 느끼며 살았던 분이기도 하셨다. 매년 가을이 되면 어머니를 만나기 위해 친척 이모들이 모이게 되는데, 찾아올 때마다 어머니을 위한 선물을 한아름 가져오시곤 한다. 그럴 때마다, 가져온 보자기를 풀어보면 단감, 홍시, 곶감 등 모두가 같은 감으로 선물한 것이다. 그 모습을 보고 우리들은 이모들과 서로 얼굴을 마주 보며 함께 함박웃음을 짓곤했다 우리는 앞에 놓인 감들을 보고, 어색한 모습으로 어머님께 물어보시면 그는 너무 기쁜 마음으로 이모들께 연신 고맙다고 인사를 건네며 행복해하는 모습으로 대답을 대신한다. 그리고 친척들이 가실 때면 어머니는 모두가 당신을 생각하는 마음에 감사와 감동으로 뜨거운 눈물을 글썽이기도 한다. 하지만 그렇게 정정하시고, 건강하시던 분이 갑자기 백내장 수술이 잘못되었는지 시력을 점점 잃어가면서 몇 년을 요양병원에 계시다가 돌아가셨다. 너무 슬픈 일이다. 자식들이 있어도 각자의 삶이 바쁘기 때문에 어찌하지 못하고 요양병원에 모시게 되어 너무 죄송스러운 마음으로 지낸 자식들이다. 지금도 가을에 주렁주렁 열리는 감만 보면 늘 보고 싶은 그리운 어머니가 생각이 난다. 코로나가 심각하던 시절, 그렇게 그리웠던 어머니를 보고 싶어도 한 3년 동안은 면회가 잘되지 않던 때에 우리들은 어찌할지 몰라 발을 동동거리기도 하며 면회 시간을 애타게 기다렸다. 어머님이 돌아가시고 나서 생각해 보니, 그때 차라리 집에서 모시지 못한 아쉬움에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눈시울을 적신다. 어머니는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불어도, 우리 모두를 지극 정성으로 키우셨다. 아무리 힘들어도, 진자리 마른자리 가리시며, 아들 딸이 시집 장가갈 때까지도 보살피고 키우신 어머니를 생각하니 더욱 죄송스럽고 송구한 마음뿐이다. 여러 자식이 있어도 한 부모를 못 모신다는 옛말의 뼈 아픈 교훈이 있음을 알면서도 어머니 한 분을 보살피지 못한 죄스러움에, 그때를 생각하면 지금도 온몸이 몸살을 앓을 때가 오곤한다 하지만 어머니 돌아가신 후 후회한들 무엇 하랴, 살아계실때 잘해야 했는데... 불효를 저지른 나는 꿈에서라도 뵐 수 있을까? 문득 손꼽아 기다려 본다. 이젠 그리운 어머니를 뵐 수 있는 기회가 현실로는 이루어 질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지만, 올해도 주홍빛으로 물들어가는 감 하나 하나에 모두 어머니 얼굴로 보이는 것은 영원히 잊지 못하는 추억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머니가 너무 보고싶기 때문일 것이다. 감이 풍성하게 열리는 시월이 되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단감, 홍시, 곶감 등을 가지고 산소에 꼭 인사를 하러 가야겠다. 이번엔, 마음으로만 달려가는 것 보다 혼자 어머니를 찾아가서 큰 소리 내어 울어보고도 싶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학박사이다.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와 <시조문학>을 통해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호원대 유아교육과, 우석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창의 숲 프로젝트 연구소 대표와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전주 걸스카우트 연맹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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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1.07 18:50

[금요수필] 인생의 짐

다섯 살 외손자는 눈만 뜨면 우리 집으로 온다. 우리 집에서 아침 먹고, 유치원 가고, 돌아오면 씻고, 저녁 먹고, 잠잘 때가 되어야 겨우 제집으로 간다. 작은딸은 결혼이 늦어져 우리 부부의 애를 태우다가 나이 마흔에 결혼하고, 이듬해 아들을 낳았다. 아이가 태어날 무렵, 작은딸이 옆집으로 이사 오면서 우리 부부는 자연스레 외손자 육아도우미가 되었다. 우리 부부의 일정은 손자에게 우선순위가 맞춰져 있다. 그러다 보니 여행은 고사하고 모임에 참석하는 것조차, 자유스럽지 못하여 불편할 때가 종종 있다. 더구나 내가 곁에 없으면 아내 혼자로선 씻기고 먹이는 일은 물론 같이 놀아주는 자체가 힘에 부치는 짐이 아닐 수 없다. 짐 없이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다. 살면서 맺어진 모든 인연도 알고 보면 짐을 주고받는 관계이므로 인생 자체가 짐이라는 생각이 든다. 가장이기 때문에, 부모이기 때문에, 자식이기 때문에 짊어지지 않으면 안 되는 인생 짐의 무게가 버거워 마음이 무겁고 힘들 때가 많다. 보통 사람들이 겪어내는 우리네 삶의 모습이다. 무거웠던 인생 짐을 적당히 벗어버린 노년엔 어떤 삶을 살아야 잘 살고 있다 할 수 있을까? 인생 후반전에는 건강, 돈, 친구 이 세 가지를 갖춰야 행복하다고 한다. 하지만 건강, 돈, 친구는 노년에 사는 재미, 늙는 재미를 누리기 위한 필요조건일 뿐 노년의 행복까지 책임지는 충분조건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행복은 자기만족이다. 삶의 보람을 느낄 때 자족감은 피어난다. 삶의 보람과 명분에서 더 건강하게 더 오래, 더 잘 살아야 하는 이유를 찾아야지 않을까? 짐이 남아 있다는 것은 아직 쓸모가 있다는 증표 아니겠는가? 바꿔 생각하면 짐을 모두 덜었다는 것은 “이제 쓸모가 다 했다”라는 뜻이니 짐이 없다는 것보다 더 슬프고 가혹한 말이 또 어디 있겠는가. 인생 짐의 무게가 한결 가벼워진 노년에는 아직 내려놓지 못한 적당한 무게의 짐이 내 삶의 의미일 수도 있고, 일상의 활력소가 되기도 한다. 손자 돌보는 일이 힘겨울 때면 나도 모르게 “저 애가 없었다면…”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지만, 이내 도리질하며 마음을 바꾼다. 만약, 지금까지도 결혼하지 못하고 중년이 되어버린 딸을 데리고 살아야 한다면? 설령 결혼했어도 자식 하나 없이 사위와 딸 단둘이서만 적적하게 살고 있다면? 그런 모습을 지켜보아야 하는 우리 부부의 마음은 어떠했을까? 생각만 해도 끔찍한 마음의 고통이 납덩이처럼 무겁게 짓눌러왔으리라. 아마 죽는 순간에도 편하게 눈을 감지 못할 여한이 되었겠지. 자식들의 결혼이 늦어지다 못해 아예 포기하고 사는 부모들이 흔한 세상이다. 그들에게는 미안한 이야기지만, 나는 늦깎이 손자 하나로 인생 짐의 버거움보다 더 고통스러웠을 멍에를 벗을 수 있었다. 오히려 다섯 살 외손주의 육아를 돕는 적당한 무게의 인생 짐에서 삶의 의미를 찾고 행복을 누리고 있었다. 하나님께서 '고통은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 찾아온다.'고 했다. 고통을 통하여 타인을 돕고 동정을 배우셨던 것처럼, 나도 도울 수 있는 그리스도인으로 변화되었다. △윤 철 수필가는 진안군 부군수 등 공직생활을 마치고 <에세이스트> 신인상으로 등단하여 전북수필문학회 회장을 역임하였고 현재는 전북문인협회 부회장으로 활동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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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10.31 18:53

[금요수필] 분꽃

저녁나절 살랑대는 바람에 마음 자락이 헛헛하다. 어려서부터 이 맘 때 쯤이면 가끔 콧물을 훌쩍이곤 했다. 특별히 뭔가가 서러워서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막연히 허전하곤 했다. 그럴 때 위안을 받은 것이 있다. 화단에 핀 분꽃이었다. 온종일 입 다물다 저녁나절이면 봉긋 피어나던 분꽃은 꼭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나는 큰 딸이면서도 어머니와 그렇게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어머니로서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딸이 그리 미덥지 않으셨는지 마음이 들지 않아 하셨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곰살맞게 굴지 못했다. 가까이 다가설라치면 자꾸 더 야단을 맞고 그것이 억울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분꽃은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까만 씨 속에 하얀 분이 쌀가루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서 결혼하고 아이도 낳아 엄마 노릇도 했다. 그런데 어머니는 나에게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보면 내 심정 알 것이다.'라고 말씀 하셨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딸이 없어서 그때 어머니의 심정을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리 서러움을 느끼곤 했을까? 어쩌면 내가 그렇듯 병치레로 마음고생할 것을 미리 암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리되리라는 암시였을까? 솔직히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날은 왜 그리 눈물이 났었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머니와 나는 어떤 인연이기에 이리 묘한 감정만 돌고 있는 것일까?. 어머니와 나는 꼭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꼭꼭 숨어있는 마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사이. 이제 그만 이런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데 아직도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렇게 눈물을 흘린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아직도 나는 술래라는 것…. 요양원을 지척에 두고도 자주 가지지 않는다. 어느 땐 요양원 근처까지 갔다가 건물만 바라보다 오기도 한다. 주변만 빙빙 거리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어린 시절 저녁나절을 생각하게 되고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난다. 마치 어머니의 냄새 같기도 하고, 내 눈물의 흔적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꾸중이 마냥 서럽기만 했던, 그 헛헛했던 날들의 기억이 왜 이런 감정으로 되살아날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 그리 싫지 않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자꾸 삭막해져가는 마음 구석에 오롯이 남아 촉촉함을 유지해 주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꼭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아픈 상처도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아픔이 있었기에 다른 일들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갈 활력이 돋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베란다에 '분꽃'을 심은 것도 그 감정을 더욱 깊이 느끼고 싶은 것 아닐까? 어쩌면 이제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심정인지 모르겠다. 요즘, 저녁녘이면 베란다에서는 어머니의 젖내가 물씬 풍긴다. 향기로운 젖 냄새에 기분이 좋아지면 뇌에서 건강한 호르몬이 분비되어 기분도 좋아지는 것 같다. 엄마의 젖 냄새와 함께 엄마 품의 편안함과 익숙함을 평생 기억하고 싶다. △김재희 수필가는 전북일보 신춘문예 수필부문에 당선됐다. 수필과비평을 통해 등단했으며 전북문인협회, 행촌수필문학회, 전북수필문학회, 수필과비평작가회의 회원으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그 장승이 갖고 싶다>, <꽃가지를 아우르며>, <하늘밥), <쉬어가는 물레방아> 등이 있다. 행촌수필문학상, 수필과비평문학상, 전북수필문학상, 전북문학 상수상을 수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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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8.08 18:37

[금요수필]외할머니와 복숭아

큰아들 내외가 힘겨운 듯 끙끙거리며 들어왔다. 자식들이 가져온 것들을 보면 어느 계절인지 알 수 있다. 오늘은 상자 안에 볼연지 붉게 칠한 복숭아다. 수줍은 새색시처럼 예쁘다. 나는 복숭아를 보면 외할머니를 만난 것 같다. 복숭아는 과식을 해도 탈이 없어 좋아한다. 할머니는 복숭아 과수원을 하셨다. 그래서 나는 여름이면 복숭아를 많이 먹으면서 자랐다. 복숭아 농사는 여름 한 철이라 온 식구들이 눈코 뜰 새 없이 바쁘다. 오늘은 애지중지 키운 딸을 시집보내는 날 같다. 새벽에 일어나 복숭아를 따서 포장해 예쁜 상자에 넣어 동네 모정 앞에 세워둔 자동차에 실어 보내야 하루 일손이 끝난다. 잘 가라 손 흔들며 수건으로 땀을 닦는다. 나는 어려서부터 과수원 일이 참 힘들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도 할머니는 바구니에 복숭아를 한 아름 담아 집집마다 나눠 주면서 우리 아이들의 여름방학이 시작되면 전화를 하셨다. “얘야! 복숭아 따는 날이니 아이들과 함께 와서 가져가거라." 세월은 흘렀지만 지금도 애틋한 할머니의 목소리가 들려오는 것 같다. 출가한 외손자까지 챙기시는 할머니셨다. 복숭아는 비타민A와 C, 펙틴질이 풍부한 알칼리성 식품으로 면역력을 키워주며 피로를 풀어주는 유기산, 간 기능 개선과 혈액순환 개선 및 피부미용, 기능 개선에도 좋아 여름철 과일 중 황제라고 불리고 있다. 그걸 많이 먹고 자라서 지금까지 건강하게 지내는지도 모른다. 나는 외가에서 태어났으며 6.25도 외가에서 보냈다. 여름방학이 되면 책을 짊어지고 외가로 달려갔다. 온 식구가 과수원에서 생활하다 보니 나도 과수원에서 지냈다. 어느 날 저녁 밤하늘 별을 보면서 과수원 움막에서 지냈다. 외할머니는 모기장 안에서 심청전을 재미있게 읽어 주셨다. 그리고 「춘향전」의 이야기에 밤이 깊어 가는 줄도 몰랐다. 할머니는 부채질을 해주시며 '넓고 넓은 바닷가에 오막살이 집 한 채, 고기 잡는 아버지와 철모르는 딸 있다...'는 노래도 불러주셨었다. 60년 세월이 흘렀지만 지금도 어제인 듯 눈에 선하다. 세월은 가도 추억은 남는다는 말이 새삼스럽다. 할머니는 노래를 부르시다 바스락 소리가 나면 멈추셨다. 그리고 내가 무서울까 봐 할머니는 나를 꼭 껴안아 주시고 한참 뒤에 손전등을 켜고 기침 소리를 내니 보자기를 든 사람이 도망치고 있었다. "할머니, 복숭아 도둑이지요?" "아니다. 동네 청년들이 저녁에 놀다가 배가 고프니 '서리'하러 온 것 같구나." 도둑이 아니라서 졸였던 가슴이 확 풀렸다. 할머니는 소탈하고 겸손하며 정이 많으셨다. 세월은 훌쩍 지나갔어도 할머니에게서 받은 따뜻한 정은 아직도 내 마음 안에 살아 숨 쉬고 있다. 언제나 다정다감했던 외할머니는 아직도 나의 가슴 속에 살아계신다. 지금은 그 '서리'를 '도둑'이라 한다. 그만큼 세상이 각박해졌다. '서리'는 전통 시대 풍습의 하나로 여름철에 가장 많이 하며 주로 밭에서 했다. 남의 물건을 훔친다는 점에서는 '도둑'이라 할 수 있지만 일반적인 도둑과는 성격이 다르다. '서라'는 행위의 주체가 여러 명이며 재미로 하는 것이고, 규모가 작은 먹을거리에 한정된다. 그러므로 장난끼 서린 일종의 놀이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어른들은 그 행위에 대해 묵인해주는 것이 관행으로 되어 있다. 여름에 복숭아를 보면 틈틈이 동화책을 읽어 주시면서 자장가를 불러 주셨던 외할머니 모습이 그리움으로 밀려온다. △김금례 수필가는 <수필시대>를 통해 등단했다. 그는 한국문인협회, 전북문인협회, 전북수필문학회, 가톨릭문학회, 한국미래문화회원 가톨릭 신앙체험공모 사랑상, 행촌수필문학상, 전주시 시민강좌시장상을 수상했다. 저서로는 수필집 <꿈의 날개를 달고>, <꿈의 날갯짓>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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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25 18:05

[금요수필] 내겐 모두 아름다운 빛

새벽녘, 산책을 하다 보니 물안개가 호수가의 새들과 속삭이는 풍경이 너무도 정겨워보였다. 초여름의 연초록 나뭇잎들은 손짓하며 아침인사를 나누고 또 다른 세상에 다시 태어난듯함을 느끼며 감사함으로 시작하는 하루이다. 내가 문학인이 되어 시와 수필을 만나게 되었던 날은 운명처럼 만난 선생님이 계셨기에 가능한 일이었고 인생의 길을 안내해주는 그 분 덕분에 시야도 넓어질 수 있었다. 이런 세상을 인연이라고 이야기하지만 나는 늘 감사한 마음이 앞서는 걸 잊지 않는다. 처음 선생님과의 만남으로 시조와 마주할 수 있는 순간에는 자연 앞에 초라한 나 자신을 발견했다. 소슬하게 불어오는 바람소리를 느끼며, 감히 글로 표현 할 수 있다는 것에 절로 입에서 탄성을 부르고 놀라움으로 숨을 쉴 수 있었다. 글의 표현에 대한 부족함에 목매이며 답답한 나날을 보내고 있었기에 실망도 크게 다가오곤 했다. 부족함을 스스로 알아가는 나날엔, 단어 하나 하나에 모두 숨결이 있음을 매일 느끼며 겸손함도 배우게 되었다. 글의 소중함과 시인들에게 위대함을 배우게 되는 날이기도 하다. 시조는 시작부터 마음의 고통과 고뇌로 느끼면서 시작되곤 했다. 혼자만의 만족이 아닌, 독자들의 공감을 이끌어 내기란, 여간 힘든 작업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 어려움의 길을 가기 위해, 욕심을 내어보는 내 자신이 부끄럽기 조차하지만, 그 어렵고 힘든 길이기에 꼭 가보고 싶었다. 그 누가 말했던가. 독자들의 공감을 얻기 위해 시조 쓰기란, 산모가 아이를 낳듯이 산고의 고통을 느껴야 좋은 시조를 쓸수 있다고. 시조를 쓸 때마다 원인 모를 슬픔이 다가오고 마치 한에 서린 듯 눈물이 나오기도 하는 등 감정의 변화는 이상하리만큼 목구멍이 뜨끈해지고 가슴이 먹먹하기도 하였으니까. 시조를 쓰면서 내 나이와 비슷한 시인의 고통스러운 호소에 위로를 받았다. 적어도 나 혼자 고통스럽진 않다는 생각이 들어서이다. 시조가 어떻게 위로가 되었는지, 어떤 시조들이 내 인생의 희망을 주었는지 말이다. 나만 힘든 것 같고 내 인생만 유달리 버겁게 느껴졌을 때 시조와 얼굴을 마주하면 언제부터인지 살아있음에 감사하게 되었다. 그래서 더 시조와 한마음이 되었다. 시조는 응축의 미로 진실을 표현한 거라면 수필은 나에게 산소 같은 숨구멍 이였다. 사람 사는 냄새가 인생을 글로 표현할 수 있어 좋아하곤 했다. 어렸을 때, 해질 녘이면 엄마 뒤를 종종 따라다녔다. 어머니와 함께했던 소소한 이야기들을 잊지 않고 일기로 쓰곤 했는데, 지금도 그 일기장을 볼 때마다 눈물이 쏟아지곤 했다. 외로움에 숨죽이고 울 때 마다 꼭 껴안아주시던 어머니도 지난 봄에 돌아가셨다. 나는 이러한 순수한 내 삶의 한 부분을 글로 쓰고 싶었다. 여름날에 대나무로 만든 돗자리처럼 시원하고 담담한 이야기로 독자들에게 공감을 줄수 있는 부드러운 글로 오래도록 펼쳐주고 싶다. 이러한 인생의 희노애락의 이야기들을 수필로 쓸수 있기에 또 다른 기쁨을 느낄 수 있어 늘 감사한 마음이다. 때론, 이러한 작은 아픔들이 감동을 받게 되고 글의 원동력이 되기도 했다. 이렇 듯, 늘 나에게는 시조와 수필이 모두 아름다운 빛이 되었다. 순수한 표현들을 어떻게 살아 숨 쉬게 할 수 있을지, 또한 독자들에게 어떻게 공감이 될 수 있는 글을 쓸수 있을지, 많은 고민이 되기도 하다. 그래서 시조와 수필을 쓰면서 하나의 심장을 도려내듯이 조심스럽게 한 발, 또 한 발 씩 내딛으려 한다. 앞으로 인생을 마무리 할 때까지 따뜻한 표현으로 아름다운 시와 수필을 써 보려한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학박사이다.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와 <시조문학>을 통해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호원대 유아교육과, 우석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창의 숲 프로젝트 연구소 대표와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전주 걸스카우트 연맹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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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7.11 17:27

[금요수필] 마음의 풍경

어제부터 비가 촉촉하게 내린다. 풀과 나무들은 가뭄의 단비를 만났으니 마냥 반가울 것이다. 일요일 아침에 등산을 하니, 시원한 공기가 가슴속으로 깊이 스며들었다. 멀리보이는 모악산 능선에는 안개구름이 자욱이 펼쳐져 있었다. 먼 산의 안개 속에서 고향의 모습이 아련히 떠올랐다. 싱그러운 계절을 맞이하니 새삼 사색에 잠기게 된다. 산에 올라오니 산새의 푸르른 풍경이 무척이나 아름다웠다. 건넛집 나무에서 새들의 지저귐이 있었다. 그 새들의 소리가 마음을 달래주기에 충분하였다. 세상을 살아가면서 사람들로 받은 마음의 상처를 어떻게 치유하며 삶을 살아가야 하는지, 한동안 멍하니 먼 산을 바라보며 뒤안길을 돌아본다. 마음 한곳에는 항상 응어리로 남아있었던 것들이 메아리처럼 들려오고 그것들을 담아서 덜어내고픈 마음이 답답함으로 앞선다. 그 아무것도 아닌 것들 때문에 가슴 아파하는 시간들 속에서 헤메이는 것이, 그저 한줌의 의미 없는 것에 대한욕심인 것을, 부질없는 세상살이를 부여잡고 허비하는 시간들, 이모두가 아쉬움으로 스쳐 지나간다. 내 자신을 찾을 수 있는 시간들을 만들고 싶다. 그 시간들을 되찾고 싶은 마음들이 저 깊은 곳에서 울려 펴지며 심금을 울리는 소리로 나에게 전율처럼 들려온다. 사람들은 때로는 외로워서 누군가를 그리워하고, 때론 필요에 의해서 관계를 맺으면서 살아가기도 한다. 하지만, 무의미한 관계에서 여러 사람들을 만나고 헤어지는 것은 참으로 슬픈 만남일 것이다. 사적인 만남마저도 이익만을 추구하며 사람을 만나는걸 보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서로가 관심과 따뜻한 마음으로 애정을 가지고 관계를 맺는다면, 이 또한 얼마나 소중하고 귀한 아름다운 만남이 아니겠는가. 사람 때문에 아파하지 마라. 모두의 마음을 얻기 위해 내 마음을 도려낼 것도 애쓸 필요도 없다. 몇 사람은 흘려보내고 또 몇 사람은 담으며 그렇게 사는 것이 인생이다. 그 또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라며 ‘김 재선’ 시인님은 마음을 달래주었다. 인생길에 곳곳에 숨어있는 인간관계들, 살포시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그 사랑 돌려주며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바쁜 인생이고, 결국에는 모두 지나간다. 어떤 기쁨은 내 생각보다 빨리 떠나고 어떤 슬픔은 더 오래 머물지만... 기쁨도 슬픔도 결국에는 모두 지나가는 것이다. 이러한 지혜로운 삶을 배우게 되는 시간에 감사한다. 인간을 품어주던 자연도 때로는 조용히 혼자 있고 싶어 한다. 정신없이 마구 달려가다 주위를 둘러보면 허망하게 되는 것이 인생이고, 그 무엇보다도 삶의 여정을 즐기면서 사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기도 하다. 지금 살고 있는 여기. 그날이 그날 같은 보잘것없는 일상이지만 곁에 있는 이들과 눈 맞추고 보듬어주고 마음껏 품어주는 지금 현재의 만남들이 축복인 것이다. 저 멀리에서 풍경소리가 내 귀가에 잔잔하게 들려온다. 이 또한 아름다운 인생이 아니겠는가. 유월 첫날, 시작된 햇살이 내 마음을 향해 정원에 핀 수국꽃들이 설레임으로 다가와 바람 과 함께 사라진다. 긴 하루가 지나고 서쪽하늘로 붉은 노을빛이 물들다. 바다도 덩달아 일렁인다. △이종순 수필가는 문학박사이다. 월간 종합문예지<문예사조>와 <시조문학>을 통해 수필가와 시인으로 등단했다. 호원대 유아교육과, 우석대 교육대학원 유아교육과 겸임교수로 활동하고 있다. 현재 창의 숲 프로젝트 연구소 대표와 아이가 크는 숲 예솔 대표를 맡고 있으며 전주 걸스카우트 연맹 부회장으로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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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6.06 16:59

직박구리 부부

우주의 생태계는 만물이 거의 암수로 나누어져 짝을 이루며 살아간다. 하찮은 미물에서부터 큰 동물에 이르기까지 아침이면 까치가 요란하다. 창문을 열고 내다보면 까치 두 마리가 짝을 지어 날아다니면서 짖어대는데 그것도 해가 동쪽에서 비스듬히 중천을 향해 올라가면 소리는 끊기면서 눈에 잘 띄지 않고 어디론가 날아간다. 지난번 문인화를 교습받으러 다닐 때 이야기다. 선생님 댁은 양옥 이층집이었는데 남향으로 앞에 잔디를 깐 정원이 있었다. 그곳에는 여러 가지 정원수가 심어있었는데 아침이면 매일 직박구리 한 쌍이 날아와서 노닌다고 하셨다. 한 마리가 이쪽으로 날면 또 한 마리가 쪼르르 따라 날고 저쪽으로 날면 또 쪼르르 따라 날면서 아주 금실이 좋아 보인다고 하셨다. 그해 초여름, 직박구리 부부가 키가 조금 큰 박태기나무에다 둥지를 짓기 시작하는 것을 보며 우리는 마음이 설렜다. 둘이 무슨 깃털 같은 것을 물어 오는가 하면 어떤 때는 지푸라기 같은 것도 물어 와서 동그란 모양을 형성해 가고 있었다. 티끌 모아 태산이라더니 어느새 직박구리 둥지가 반도 더 완성되어 가는 모습을 보며 마음속으로 퍽 가상하고 기뻤다. 그들도 본능적으로 새로운 생명을 부화시켜 대를 이어갈 요량으로 박태기나무를 선택한 것으로 보였다. 그런데 해마다 여름이면 태풍이 불청객처럼 불어오는데 그들의 둥지도 비껴가지 않아 여지없이 피해를 주었다. 밤새 불어대는 강풍이 창문을 흔들어 대더니 둥지 주변의 우거진 나무들을 강하게 흔들어 대니 무성한 초록 잎들이 못 견디며 아우성을 치고 무척이나 소란스러웠다. 조금 두려웠던 밤이 지나고 아침이 밝았다. 아침이 되니 또 언제 그랬냐는 듯이 하늘은 차분히 개인 얼굴로 우리를 맞이했다. 나는 그동안 연습한 그림을 지통(紙筒)에 말아 넣고 가벼운 발걸음으로 선생님 댁을 방문했다. 그런데 우리를 맞이하는 선생님의 표정이 왠지 침울한 듯 느껴졌다. “선생님, 직박구리들이 둥지는 다 지었는가요?”라고 물었더니 “아니요, 어제 태풍에 그만 산산이 부서져 잔디 위에 떨어져 있었어요”하며 안타까운 표정을 보였다. ‘아 그래서 선생님 표정이 그렇게 어두웠었구나.’ 나는 직감하며 위로의 말을 전했다. “아 고 귀여운 것들, 그 옆에 튼튼한 금목서에다 집을 지었으면 그런 낭패를 보지 않았으련, 쯧 쯧 쯧” 하시며 선생님도 혀를 차셨다. 그 뒤로 직박구리 부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래서 보고 싶은데 볼 수가 없었다. 생각할수록 가습이 아려온다. 그렇게 서운한 마음으로 여러 날을 보냈다. 직박구리는 봄이면 두세 개의 알을 낳고 암컷이 약 2주 정도를 품어 새 생명을 탄생시킨다. 그런데 거의 완성되어 가던 둥지를 잃은 직박구리 부부는 어디로 떠난 것일까? 얼마나 실망했을까? 이 계절 얼마나 가슴이 아팠을까? 자연의 섭리는 언제나 순환하고 진화하기에 그들은 또 다른 나무에 부지런히 집을 지으려 소재들을 물어 나르며 둥지를 지을 것이다. 한 번의 실패를 교훈 삼아 더욱 튼튼한 나무에다 둥지를 틀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간절히 두손 모아 기도한다. △배순금 수필가는 전주교대, 원광대 교육대학원에서 석사과정을 마쳤다. 지난 1975년부터 글쓰기를 시작해 ‘새교실 대상’을 수상했으며 전북여류문학회 회장, 전북시인협회 지역위원장, 지초문예 회장을 역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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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2024.02.22 17: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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