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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것과의 대화] 국악인 홍성덕



 

어느 시대에서나 고달픈 사람들의 지친 삶을 달래주고 그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문화적 창구가 있다. 시대적 환경에 따라 그 창구는 변하지만 한 시대의 복판에서 대중들과 호흡해온, 이른바 대중예술의 힘은 참으로 크다.


 

여성국극. 요즈음 세대들에게는 그 이름도 낮설지만 이 역시 한시대 대중예술의 절정을 이루었던 서민들의 출구다. 여성국극은 형식으로는 창극을 일컫지만 굳이 ‘여성국극’이라 이름 붙인데에는 각별한 의미가 있을터이다. 여성국극은 여자들로만 구성된 창극단을 이른다. 예술적 기량이야 남녀가 따로 있을 수 없지만 사회 각 분야가 그렇듯이 국악판 역시 남성중심이었던 시대, 여성국악인들이 남성중심의 창극단과 별도로 ‘여성국극단’을 만들어 판을 열기 시작한 그 깊은 뜻에 우리는 새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이름만으로도 전설적인 임춘앵은 물론, 박록주며 조금앵, 김소희나 박귀희까지 한시대를 풍미했던 여성명창 명인들이 모두 나서 만든 이 여성국극은 당시 남성 중심의 창극단을 능가하는 인기를 누렸다.


 

관객들은 이들 남장 여성 배우들이 열연하는 이 창극을 보며 가슴 설레이고, 울고 웃었다. 여성국극이 급격히 쇠퇴하기 시작한 것은 60년대부터다. 세련된 서구문화의 공세에 짜맞춘듯한 연기와 늘 한결같은 레퍼토리, 거기에 단원들이 하나둘씩 떠나가버린 창극판은 더이상 관객들에게 희망과 위안을 주는 창구가 되지 못했다. 


 

그리고 이제 세기도 바뀌어버린 2000년대. 반세기를 훌쩍 넘어선 지금 그 아련한 추억속에서만 존재하는 여성국극을 오늘의 공연무대에 다시 복원하려는 사람이 있다. 


 

국악인 홍석덕씨(61). 그는 여성국극단인 서라벌국악예술단 단장이며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 단장이다. 예순을 넘긴 나이의 그는 여전히 곱고 열정적이다.


 

국악인 부모의 외딸로 태어나 오로지 국악에만 바쳐온 그의 생애. 국악판에 쏟아온 그의 열정만큼이나 아름답고 치열한 창극 부활에의 꿈은 이 화려하기만한 현대공연예술 무대에서 다시 새롭게 피어나고 있다. 


 

“현대 공연예술 무대에서 창극, 특히 여성국극은 시대에 맞지 않는 요소를 갖고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지나간 시절의 한 부분 쯤으로 여겨지는 것이 당연하지요. 그러나 우리 전통음악과 연극적 요소를 어우러내는 창극이야말로 우리 전통예술의 현대화가 지닌 가능성을 살려내는 그릇일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그는 사라져가는 여성국극을 되살리기 위해 80년대 중반부터 홀로 나섰다. 스승뻘 되는 선배들도 간신히 명맥만 이어오고 있는 전통국극 부흥에 나섰지만 그의 작업은 늘 외롭고 힘들었다.


 

경제적인 여건으로도 그렇지만 창극을 할 수 있는 국악인, 특히 여성국극을 내세운 마당에 여성배우들만으로 단체를 구성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었다. 외국에서 밀려들어오는 뮤지컬이며 오페라무대의 그 화려한 기세속에서 촌스럽고, 어색하게만 보이는 창극배우를 지원하는 젊은 세대들은 더욱 드물었다.


 

“다행스럽게도 내 뜻을 따라주는 제자들이 있었고, 동료들도 큰 힘이 되었습니다.”


 

86년 창단한 서라벌국악예술단은 수년동안 그가 발품팔아가며 문화계 인사들과 기업가, 동료들과 제자들을 찾아다니며 이루어낸 결실이었다.  성자 이차돈, 견우와 직녀, 햇님 달님, 옛사랑, 춘향전, 안평대군, 별헤는 밤 등 수많은 창극이 만들어져 무대에 올려졌다.


 

‘지금이 어느땐데 국극이 먹혀들어가겠느냐’고 등돌려 이야기하던 사람들도 그를 다시 보기 시작했다. 88올림픽축하공연을 기점으로 외국 초청공연도 뒤를 이었다. 늘 재정적 어려움으로 시달렸지만 국극을 살려냈다는 보람과 가슴 벅찬 희망으로 그는 즐거웠다고 했다.


 

94년에는 KBS국악대상이 그에게 안겨졌다. 중국 뉴질랜드 독일 베트남 미국 러시아 미국 그리고 노르웨이 오슬로 국립음악대강당에서 가진 김대중대통령 노벨 평화상 수상 축하공연까지 서라벌예술단은 세계 각국의 번듯한 공연장에 올려져 가뜩이나 자존심 센 외국의 관객들을 감동시키고 열광시켰다.


 

96년 호주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공연이나 97년 독일 프랑크푸르트 오페라하우스 공연에서는 외국공연에 까다롭기만한 관객들의 기립박수를 여러차례나 받아내기도 했던 그는 정작 제나라에서는 흘러한 옛노래 쯤으로 치부되거나 잊혀져가고 있는 여성국극이 첨단 공연예술을 끼고 사는 외국 사람들을 감동시켰다는 사실에 뜨거운 눈물을 흘렸다고 털어놓았다.


 

그는 지난 연초 전북도립국악원 창극단장으로 부임했다. 털어놓고 이야기하자면 그는 하루 24시간이 바쁠 정도로 서라벌국악예술단을 꾸리기에도 바쁘다. 직접 단원들을 지도하고 작품을 만드는일에도 나서야하는데다 기획이며 재정확보까지 전반적인 운영을 맡아야 하는 그로서는 도립창극단 단장 제의가 부담스런 고민일 수 밖에 없었다.


 

“고향을 떠나 있은지 수십년이 되었지만 늘 고향은 가슴속에 있었어요. 도립창극단일을 제의받았을때 고민이 없지 않았지만 결정하는데에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습니다. 결국 여성국극 부활도 국악의 뿌리가 깊은 내 고향이 나에게 안겨준 과제였음을 잘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


 

그는 요즈음 서울과 전주를 옆집삼아 오르내린다. 아무리 일정이 바빠도 도립창극단의 창극 연습에 소홀하지 않는 그의 낮과 밤은 따로 없다. “이제 보십시오. 창극은 우리 전통예술의 새로운 가능성으로 현대 공연무대에서 제자리를 찾을 겁니다.”


 

단원들과 함께 연습을 시작한 그의 서릿발 같은 호통이 연습실 창을 넘었다.  객석을 꽉메운 관객들의 마음을 다잡아 냈던 50-60년대 공연무대. 그에게는 그 시절이 더이상 추억이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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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정 kimej@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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