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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잘 가시오, 사랑과 감사의 건물이여

 

 

 

  학교 구 건물이 헐리게 되었다. 새 건물이 세워졌으니 낡은 건물을 철거해야 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새 건물에서 생활하게 되었으니 여러 가지로 편리하고 마음도 밝게 되었으니 구 건물은 이제 귀찮은 존재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굵은 빗방울에 젖어 가는 구 건물을 바라다보면 죽음을 앞둔 생명체를 바라보는 것 같은 안타까운 마음이 생김을 어쩔 수 없다.  

   지난 날 저 건물 안에서 아이들과 함께 웃고(합격으로) 울고(억울한 낙방으로) 뛰고(체육 대회) 성질내고(학습에 태만하여) 달래고(자포자기의 경우) 고민(진로 선택)하던 일들이 어느 구석에 독한 먼지로 쌓여 있지는 않을까? 

 

  지난 날 어렵던 시절, 쌀을 어깨에 메고 와 서무실에서 아이의 수업료를 치르던 무거운 발자국의 흔적은 건물 어디에 남아 있을까?

  지독한 가난에 눈물짓던 세일러복 소녀의 눈물은 어느 곳의 얼룩으로 남아 있는 걸까?

 

  저 건물 안에 지난날의 미스 골드(김), 미스 투(이), 미스 제비(박), 미스 킹(왕), 미스 차이나(진), 미스 핸드(손)  들의 고운 미소는 어느 천정에 무늬가 되어 있을까?

  까르르 웃던 고운 소녀들의 웃음은 어느 기둥에 감겨 빛을 내고 있지는 않을까?

 

  만우절의 거짓이 드러나 얼굴 붉히던 그 고움은 복도에서 아직도 서성거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지각하여 몰래 뒷문을 열던 조심스런 발자국 소리는 어느 바람이 되어 휘잉 지나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이 많은 것들이 이제 해체되면 어디에 무엇이 되어 나타나게 될까?

 

 '사랑한다 ○○아' 낙서가 지워지지 않은 벽돌은 어느 지하에 묻혀 소녀의 꿈자리를 오가게 되는 것일까.

  고운 목소리와 예쁜 몸짓과 아름다운 목소리는 어느 소녀의 가슴에 꽃이 되어 피어나게 되는 것일까.  

 

 구 건물의 철거와 함께 무너지고 가버리는 추억들이 너무 아쉽고 안타까워 7월 19일 3시부터 성심 가족들과 관심있는 분들을 모시고 간단한 다과회를 연다. 많은 동문들과 전?현직 교사들이 모여 이야기꽃과 우리들이 사랑했던 일과 추억들을 꽃처럼 피워 낼 것이다. 모처럼 반가운 얼굴들이 모여 '너냐?' '나다.' 하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행복해 질 수 있을 것이다.

 

 구 건물을 그런 대로 살려 박물관으로 삼을 수 있다면 그래도 나을텐데 너무 사치스런 생각일 바에야 한번 건물이라도 돌아볼 일이다.

 구 건물은 우리에게는 살아 있는 생명체나 다름없다. 그렇지 않다하더라도 인격을 부여하여 최상의 경의를 표하고 싶다.

  잘 가시오, 사랑과 감사의 건물이여.

                                                    

 

 

/허경택 (전주 성심여자고등학교 교감, 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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