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학창시절은 가난과 자연, 그리고 나 자신과의 싸움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6·25전쟁이 발발한 이듬해부터의 초·중학교 시절 5·l6 이후 60년대 후반까지 이어진 고등학교·대학교 학창시절을 생각하면 할수록 배고픔의 고통이 되살아난다.
그러나 이같은 여건속에서도 흔들림 없이 학교를 마칠 수 있게 한 원동력들이 있었다.
가난한 초등학교 시절 참사랑을 심어준 은사님 한 분이 떠오른다. 1학년 담임이셨던 장소례 선생님이다. 1951년 혹독하게 추운 날이었다. 아직 겨울방학을 며칠 남긴 그 날도 금강 제방을 타고 넘어오는 바닷바람은 아침을 때우지 못하고 등교하는 가난한 아이들의 얼굴을 사정없이 때려치고 있었다.
가난하기로는 으뜸인 나. 구멍난 고무신에 장갑은 커녕 손 넣을 호주머니조차 없는 덜렁한 홑바지를 걸친 등교 길이었다. 강바람은 이런 나를 봐주지 않고 더 세차게 몰아쳤다.
손가락 마디마디 동상에 걸려 퉁퉁 부어오른 손이며 찬바람 맞은 파리한 얼굴에 금방이라도 떨어질 듯한 빨간 코를 본 선생님께선 이런 나를 그냥 보아 넘기지 않으셨다.
"아이고 이게 무엇이냐. 세상에 이런 꼴로 학교를 보내다니…”
그리고 나를 끌어안으셨다. 당신의 목도리 속으로 내 언 손을 넣어주시며 그 따뜻한 가슴에 내 얼굴을 감싸주신다.
이 뿐이 아니었다. 아침밥을 거르고 등교하는 날이면 용하게도 알아 차리고 당신의 도시락 뚜껑에다 귀한 쌀밥을 덜어 내 앞에 내밀어 주신다. 보리밥도 제대로 못 먹던 시절, 선생님의 흰쌀밥은 꿀떡 맛이었다.
이 두고두고 잊지 못할 사랑의 선물! 가난한 제자에게 편애 없던 선생님의 덕으로 우등상을 받을 수 있었다.
50년대의 대명사가 된 가난은 청소년기인 중·고등학교 시절에도 이어져 어머니가 싸주시는 도시락은 언제나 날려놓고 먹기엔 부끄러운 꽁보리밥이었다. 그래서 나의 점심식사 장소는 늘 뒷산 대나무 숲이 된다.
책이 귀한 시절, 중학교 이인식 교장선생님의 유별난 독서교육은 나로 하여금 책벌레 별명을 얻을 정도로 책을 읽게 했다. 도서관에서 빌린 책을 꽁보리밥 씹으며 읽던 시절이 엊그제 같다. 섹스피어의 햄릿이며 입센의 인형의 집, 빅톨 위고의 쟝발잔등을 읽고 우유부단한 주인공을 탓하고 감히 여성해방과 배고픔의 비극을 논하는 문학청년의 꿈도 이 때 키웠던 것이다.
나의 학창시절에 잊혀지지 않는 또 한가지. 모선생님 과목시간만 되면 손목이 아프도록 필기만 하는 것이다. 그 것도 학생대표로 하여금 대필을 통해서 말이다.
하다하다 참지 못한 나는 "선생님 손목 아파 못쓰겠습니다”거침없는 반기는 선생님의 다이어 슬리퍼로 따귀를 맞았지만 그일 이후로 역사시간이 매우 재미있는 시간이 된 것을 생각하면 예나 지금이나 학습의 효과는 담임선생님들의 수업지도 기술에 달려 있다는 것은 변함이 없다.
요즘 청소년들이 가난했던 나의 학창시절을 읽고 무슨 꿈같은 이야기냐고 반문할 지 모른다.
그러나 그리움으로 떠올리며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당시 청소년들의 학창시절을 오늘날 청소년들의 학교 생활에 비교할 때 가치 있고 의미 있는 모습들이 어른거린다. 그 것은 강한 체력과 정신력으로 큰 용기를 가지고 정정당당함으로 가난과 수시로 찾아오는 어려움을 극복하는 학창시절이었다는 것이다.
/황현택(군산 흥남초등학교 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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