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이라면 누구나 단군의 신화로부터 나라의 뿌리요 원천인 백두산을 그리워하면서 영상으로만 본 천지를 밟아본다는 일념으로 그것도 연중 볼 수 있는 확률이 가장 높다는 지난 여름 삼복더위에 관광에 나선 것이다. 중국 심양·연길을 거쳐 백두산에 올랐으나 기대가 너무 컸던지 그리도 기대하던 천지는 운무에 쌓여 볼 수가 없었다. 맥없이 내려와서도 미련을 버리지 못한 우리 일행은 일정을 미루고라도 꼭 봐야 한다는 생각으로 다음날 재차 시도했으나 천지가 허락지 않을 것 같아 다음을 기약하고 그 곳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일행 대부분이 70세전후의 나이여서 다시올 수 있을까를 염려하면서도 남의 땅이 아닌 우리 땅 개성, 평양을 통해서 다시 올 수 있다는 희망을 안고 아쉬움을 달랬다.
금방이라도 손에 잡힐 듯한 압록강 하류의 섬‘위화도’(고려말 우리땅 발해를 회복하고자 정벌에 나섰다가 이성계가회군한 곳) 지척에 있는 호산 장성을 따라 중국쪽으로 깊숙이 들어온 압록강 지류에서 북한 경비병에게 마음의 선물을 하고 손을 흔들어 줄 수 있는 것으로 마음의 위안을 삼고 귀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어야 했다.
1953년 55개 소수 민족중유일하게 반자치권을 부여 받았으나 실질적으로는 시와 성 중간에서 형식상 자치를 유지하고 있는 연변 자치주. 모든 외부 간판 한자위에 한글을 병용한 것이 그나마 꿈에 그리던 우리의 옛 고구려를 보는 것 같아 벅차오르는 가슴을 느낄 수가 있었다.
중국에 우리교포가 200여만명으로 추산된다. 연변 자치주에만 85만명, 연길시에 33만명이 집단 거주하고 있다. 100년전 천재나 기아에 허덕이던 이들 선대들은 함경도, 평안도에서 두만강 압록강을 넘어 이주, 척박한 황무지를 손발이 터지고 피멍이 들도록 개간하면서 삶의 터전을 마련했던 것이다.또 일제의 탄압을 피해서 강제 추방을 당해 이곳 간도로 쫓겨온 사람까지 가세 아주 힘들게 살아왔다.
36년 일제 강점기에 우리 독립선열들은 일제의 무자비한 총칼에 맞서 온몸으로 저항하면서 고초를 겪었다. 이 지구상에서 유례가 없는 일제의 악질적인 생체실험 현장을 직접 보면서 순국선열들에 대한 죄스러운 마음을 가눌 수가 없었다.
세계 어느 민족이나 교포 보다도 가장 우리의 고유 풍습과 문화 언어를 생활속에 깊숙이 뿌리내리며 전승시키고 있는 그들의 노력이 다시한번 가슴을 뭉클하게 만들었다. 흔히 본토인의 문화관습에 동화되고 중화 되는게 상식이라는데 이들은 지금도 뚜렷하게 우리의 전통을 그대로 간직하고 보존해 오고 있는 것이다.
잠자던 사자 중국이 개혁·개방을 부르짖으면서 경제개발을 서두른 때가 엊그제 같은데 지금 중국은 세계경제의 중심무대로 떠오르고 있다. 그 중에서도 연변 자치주의 연길은 하루가 다르게도시발전을 거듭하고 있다는 설명을 들었다. 특히 일제치하 우리 독립군의 상징이었던 용정주변의 일송정, 해란강 등을 둘러보면서 다시한번 독립군 선각자들의 발자취와 거룩한 희생정신을 되새겨보는 기회를 가졌다.
우리 동포·형제들이 일제에 한을 품고 온갖 고생을 겪으며 피와 땀으로 일구어 온 연변을 주차간산격으로 바라보면서 우리의 조선족 돕기가 말로만 되뇌일 것이 아니라그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이 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자고다짐하면서 미완의 백두산 천지 관광을 아쉽게 끝낼 수밖에 없었다.
/최준용(전 전북도공무원교육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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