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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오월, 딸과의 짧은 대화 - 이경한

이경한(전주교육대학교 사회교육과 교수)

오월의 산하에 생기가 넘친다. 하지만 오월은 우리 현대사의 질곡이 고스란히 새겨져 있는 달이다. 4월의 껍데기가 사라지기도 전에, 군사 쿠데타에 그리고 다시 신군부 세력에 의해 우리의 민주화는 뭉개지고 뒷걸음질을 칠 수밖에 없었다. 오월은 이렇듯 우리 현대사의 소용돌이의 중심에 서 있는 달이다.

 

중학교에 다니는 딸이 전교생이 소풍가서 글짓기를 한다고 말한다. 그는 글짓기의 주제가 ‘오월’일거라고 미리 짐작해본다. 그래서 그에게 ‘오월하면 뭐가 생각 나냐?’고 물었다. 딸은 ‘수학여행’, ‘꽃’, ‘신록의 계절’, ‘스승의 날’, ‘가족의 달’ 등을 애써 떠올렸다. 이 주제들로 글을 쓴다면 무슨 내용을 쓸 것인지 재차 물었다. 딸의 얼굴을 보니, 별로 쓸 말이 없다는 표정이다. 딸의 눈치를 보니 나에게 뭔가를 잔뜩 기대하고 있는 얼굴이다. 화제를 바꿔, 딸에게 ‘오월하면 광주에서 있었던 일 중 생각나는 것 없냐?’라고 물었다. 딸은 나의 말에 ‘광주민주화운동’이라고 답한다. 너무 빠른 반응에 놀랐다. 내가 다시 물음을 던지기도 전에 ‘사회시간에 배웠다’고 앞질러 말을 늘어놓았다. 기특하여, ‘광주민주화운동이 어떤 날이냐?’고 물었다. 딸은 ‘광주에서 있었던 민주화 운동이다.’라고 말했다. 이 대답을 다시금 확인해보니 그는 그 단어를 풀어서 말을 했을 뿐이었다. 딸에게 너무 기대를 했나보다고 생각하다가, ‘그럼 그렇지, 요즘 애들이 뭘 알겠어.’라고 마음속으로 뇌까려보았다.

 

그렇다. 오월의 광주는 역사 교과서 속의 사건쯤으로 그들에게 인식되어 가고 있다. 1980년 광주에서 많은 사람들의 희생을 바탕으로 오늘의 풍요를 누리고 있음을 그들이 알아주길 바라는 것은 무리일 수 있다. 군부독재 세력에 분연히 맞서 일어난 사건, 전국의 민중들이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를 외쳤던 사건이 그들에게 점점, 아니 이미 화석화된 정의로 자리잡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광주민주화운동을 가슴으로 느끼기보다는 머리로써 인식하는 세대이다. 광주의 외침이 오늘 나의 삶에 연속되고 있음을 느끼기에는 역부족이다. 그러나 슬프지는 않다. 그들이 광주를 온전히 잊더라도 이미 민주화가 그들의 몸에 체화되어 있고, 날마다 자신들이 처한 일상의 삶속에서 광주민주화운동을 펼칠 것이기 때문이다.

 

딸과 함께 한참이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아니, 한참이나 내가 딸에게 말을 했다. 딸은 글짓기 주제가 ‘오월’이면, 오월의 민주화 운동에 대해서 글을 쓰겠다고 했다. 그가 나의 말을 얼마나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그러나 그가 글을 써보겠다고 한 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한다. 부질없는 줄 알면서도, 장난기가 발동하여 딸에게 어떤 내용을 쓸 거냐고 물었다. 딸은 ‘걱정마, 잘 쓸 테니까’라고 짧은 말을 남기고 자리를 일어났다. 잘 쓰는 것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모르겠지만, 딸의 당찬 모습이 맘에 들었다. 그런 후, 나는 아직 딸에게 글짓기 주제를 묻지 못했다. 그러나 묻지 않으려 한다. 그가 나에게 한 말처럼, ‘잘 썼을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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