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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언대] 어느 노인의 향내

송경태(전주시의원·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

이른 아침 사무실을 들러 서류를 정리하고 난 뒤 “과연 오늘 첫 이용자는 누구일까?”하는 기대에 찬 마음으로 커피 한 잔을 마시고 있었다. 이때 힘찬 노크소리와 함께 은은한 향수 내음이 풍기는 노신사 한 분이 들어오셨다. “누구세요?”라는 나의 물음에 노인은 대답대신 하모니카로 흘러간 유행가 두 곡을 연이어 멋들어지게 불러주었다. 노신사의 연주솜씨는 음악을 잘 모르는 나의 귀에도 보통솜씨가 아닌 듯 들렸다. 연주를 끝낸 노신사는 “나는 걸인으로서 한 푼 두 푼, 얻어서 생활하는 사람인데 그저 얻기가 미안해서 내가 할 수 있는 하모니카를 불어주고 구걸을 청한다”고 말했다.

 

최근 힘들어져서 가정이 파탄된 자, 사고로 불구가 된 자, 직장 폐업으로 일자리를 잃은 자 등등 생활이 어려운 사람이 무척 늘어난 것 같다. 일주일에 한사람 꼴은 찾아온다. 흉년에는 곳간을 열어야 된다는 아버지의 말씀대로 나는 가능한 한 그들을 거저 돌려보내지 않는데 그 많은 걸인들 중에 오늘처럼 대가를 치르고 도움을 받겠다고 나서는 멋진 할아버지 걸인은 처음이다.

 

나는 노신사에게 주스 한 잔 건네면서 “할아버지, 하모니카 솜씨가 보통이 아니신데요”라고 하면서 “과거 악사를 하셨습니까?”라고 물었다. 그러자 노인은 신이 나서 “시끄럽지 않으시다면 다른 솜씨를 보여 줄 수도 있다”고 하면서 “이것이 색소폰이라는 나팔인데 주스를 얻어 마신 감사의 표시로 한 곡 연주해 주고 싶다”고 하셨다. 할아버지가 연주해주신 곡은 배호의 마지막 잎새와, 내가 알지 못하는 서양 영화 음악의 주제가인 듯한 곡을 연주하셨는데 떨리는 음률, 흐느끼는 듯한 노인의 나팔소리는 잊었던 옛일이 떠오르고 멀리 있는 벗을 생각나게 하기에 충분했다.

 

지금 우리는 사회문제 중에 해결 곤란한 문제의 하나로 노인문제를 들고 있다. 가족 내에서의 대화 단절, 젊은 세대와의 견해 차이, 경노효친사상의 결여 그리고 의약기술의 발달로 인간의 수명은 날로 늘어나는 데 비해 문화와 사회적 가치관이 확립되지 못한 것이 노인 문제의 큰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노인들은 가정에서 가족의 일원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귀찮은 존재로 절락하여 외로움과 무료함을 참다못해 밖으로 나오게 된다. 그 결과 지금 전주 경기전 일대는 노인의 무료함을 달래는 노인들만의 거대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지 이미 오래다. 이로 인해 퇴조로 일대 노인들의 유동인구는 봄, 여름, 가을에는 약 1만명이 넘는 숫자가 모인다고 하니 조그마한 소도시 인구와 맞먹는 숫자다.

 

언젠가 경기전을 지나가다 정자 밑 평상에 자리 잡은 노인들의 얘기를 들을 수 있었다. 왕년에 군 대표 씨름 선수로 출전했다가 3등을 하는 바람에 송아지밖에 못 타왔다면서 은근히 힘자랑을 하는 노인은 수전증을 앓고 있어 손에 쥔 젓가락이 위태로웠고, 젊어서 금광을 하면서 돈을 포대로 실어 날랐다는 노인은 목욕을 얼마동안이나 안 했는지 찌든 악취가 내 고개를 돌리게 했다. 면장을 지냈다는 노인은 아들이 외국에 가서 떵떵거리고 사는데 본인은 외국이 싫어서 시골에서 풍을 맞아 거동이 불편한 할머니와 살고 있다고 하셨다.

 

우리 친구 부모들의 경우를 보아도 이와 유사한 경우가 허다하다. 70~80년대 중반 건설경기 붐으로 건설업체는 전성기가 시작됐으며 신흥 부자가 많이 나타났다. 하지만 20여 년이 지난 지금, 당시 신흥 부자들은 비합리적인 재투자, 경영능력 부족, 혹자는 도박으로 그 재물을 소실해 버려 부호의 명단에서 이름이 사라진 이도 많다.

 

문득 한 선배가 생각난다. 대전에서 사업을 하는 시각장애인 선배인데 근면, 성실하고 헛돈을 안 쓰기로 이름이 난 사람이다. 그의 어머니 팔순 잔치에 초대되었을 때, 동생들과 제수씨, 여동생들까지 들락날락 하면서 그에게 상황을 보고 하는 것이었다. 지금 몇 명이 다녀갔고 누구누구가 새로 왔다. 술이 모자랄듯하여 다시 추가 주문했다. 고기는 충분한데 떡이 어떨지 모르겠다는 등등. 나는 형님이라서 동생들과 제수씨 , 조카들한테까지 대우를 받고 인정받는 그 시각장애인 선배가 너무 부러웠다. 내가 “형님은 대단하시오. 아우들과 제수씨가 저리 잘하니 말입니다”고 물으니 선배는 “이 모두가 돈 덕이라네. 돈 힘이란 말일세. 이번 팔순 잔치에 모든 비용을 내가 부담했거든”이라고 말했다.

 

과거에 화려했던 시절을 보낸 신흥 부자들이 어느 허름한 대포 집에 모여 앉아 경기전 정자 밑 평상에 앉은 노인과 마찬가지로 나도 과거엔 종업원이 몇 명이었네, 하면서 옛 이야기를 하고 있을 동료들의 모습이 그려진다. 그렇지 않아도 국가 경제가 어려워지고 사회 경제의 불황이 심해짐에 따라 서민들의 생활도 큰 어려움이 예상된다.

 

오는 10월 2일은 노인의 날이다. 우리는 금번 노인의 날을 맞으면서 앞에서 얘기했던 색소폰을 불던 그 노신사 할아버지의 인생사를 거울삼을 필요가 있을 것이다.

 

/송경태(전주시의원·전북시각장애인도서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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