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진경(전주덕진경찰서)
기승을 부리던 무더위가 끝나고 시작 된 가을비가 내린다. 비가 내려도 참 징글맞게도 장맛비처럼 계속 내린다. 사실 올 여름은 잠시 잠깐 인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비는 내리고 또 내려 어느덧 사람들의 얼굴에 근심의 먹구름조차 몰고 왔다. 그래도 구름에 가려서 그렇지 비 온다고 해 안 뜨랴! 뜨고 지는 해 속에 이루어지는 세상사 모든 일정 역시 마찬가지다. 아무리 비 내려도 만날 사람 만나야 하고 할 일은 또 계속 되는 법이다.
피할 수 없는 모임이 있어서 비 내리는 정류장에서 버스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뵙기에도 연세가 지긋해 보이시는 할머니 여섯 분이 또 굉장히 무거워 보이는 배낭을 메고 봉고차에서 내리셨다. 어디 일 다녀오신 듯한 할머니들은 내리는 비를 피해 힘들게 정류장 의자에 거의 몸을 내려놓으시다시피 앉으셨다. 할머니 여섯 분의 동일한 목적지는 여기까지이고 여기서부터 각각의 댁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다시 또 가야 하는 모양이다.
비 오는 버스 정류장은 두말할 나위 없이 서러운 곳이다. 날씨라도 좋다면 여유 있게 거리 의 사람도 보며, 귓가에 꽂힌 이어폰으로 들려오는 음악에 취한 젊은이의 흥얼거리는 소리와 몸짓까지도 엿보며, 미소라도 지을 수 있다. 반짝이는 가을 햇살이 지나는 버스의 차창에 꽂힌다면 새삼스럽게 세상이 참으로 빛나 보일 수도 있다.
그러나 막상 비가 온다면, 비 오는 날의 낭만은 사실 비 없는 곳에만 있다. 내리는 비를 절대 맞지 않을 안전한 찻집의 창가나 집의 거실 그리고 자가용 안에서 비 오는 풍경을 내다볼 수 있는 곳에서만 비 오는 날의 수채화 같은 풍경이 있는 법이다. 그 비를 맞으며 걷는다 해도 비옷이나 우산 그리고 또 함께 걷는 누군가가 있을 때만 낭만적이다. 오는 비 맞아가며 일상을 꾸려야 하는 보통의 서민들에게 가장 서러운 곳을 뽑으라면 단연 버스 정류장이다.
비 때문에 늦어지는 버스를 기다리는 사람들과 버스에서 내릴 사람들을 마중 나와서 기다리는 이들, 택시를 기다리다 못해 버스든 택시든 걸리기만 하면 타려고 기다리는 이들 등으로 버스 정류장은 말 그대로 시장 속은 저리가라 할 만큼 아수라장이었다. 그 정신없는 가운데에서도 할머니들은 흙 묻은 장화를 빗물에 닦느라 분주하셨다. 오랜 경험이다. 장시간 지친 운전사들에게 흙이 잔득 묻은 장화를 신고 올라온 할머니들만큼 만만한 시비 거리가 어디 또 있겠는가! 사람들 많은 데서 날씨 좋은 날에도 눈치 보이는데 이렇게 궂은 날에는 하물며 얼마나 타박을 받을까 싶으니까 그 망신을 조금이라도 비껴가기 위해 열심히 신발을 닦고 계시는 중이다.
이 난리법석 와중에 눈에 딱 걸린 풍경이 있었다. 버스 정류장 바닥엔 분명 이렇게 쓰여 있었다. “버스 정차, 주차금지” 그 큼지막한 글씨를 덮고 서 있는 것은 버스들이 아니었다. 그 글씨를 덮고 서 있는 것은 트럭이나 승용차들이었다. 물건을 내려야만 하는 트럭은 그렇다 치고 왜 승용차들이 저렇게 줄을 잇고 있나? 하고 바라보니 의문은 오래가지 않았다. 학생들이나 사람들을 데리러 온 차들이 먼저 와서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그 덕분에 버스들은 정류장과는 거리가 먼 도로 한 가운데 설 수 밖에 없고 마음 급한 사람들은 오는 비를 다 맞고 길 한가운데에까지 뛰어 나가 버스를 타거나 아예 비를 맞으며 길 가운데에 서서 버스를 기다려야만 했다.
버스가 정류장으로 버스가 들어오길 학수고대하며 고개를 빼고 기다리던 나 역시 버스가 올 때마다 그 비를 다 맞으며 이리 뛰고 저리 뛰며 행선지를 확인하기 위해 뛰어 다녀야 했다. 사람들이 이리저리 뛰어 다니고 길 가까지 나와서 서성거리던 이 모진 풍경을 승용차 안에서 내다보던 고급 승용차 안의 뒷좌석 아주머니와 눈이 딱 마주쳤다.
나는 불쾌한 눈총을 운전자에게 보냈으나, 젊은 운전수는 당신이 뭔데 하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러자 나대신 옆에 계시던 나이 드신 어른이 큰소리로 나무라셨다.
“ 이 많은 사람들이 기다리는 버스가 와야 할 자리에 승용차가 버티고 서 있으면 되겠어? 왜 보면서도 몰라? 글쎄!”
잘못된 상황이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는데도 경찰관으로서 신속하게 대처하지 못한 내가 부끄럽고 그분들께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우리는 내가, 나의 가족이, 내가 사는 곳이 조금이라도 불편하거나 불이익이 발생하면 “권리”라는 단어를 내세우며 거세게 항의하고 심지어는 무리를 이루어 관철 될 때까지 투쟁하는 단결력을 보이기도 한다. 내가 불편했을 때 권리를 내세워 주장했듯이 나도 정해진 규칙과 질서를 지켜서 남들에게 불편함을 주면 안 된다. 거창하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아량을 베풀자는 것이 아니다. 함께 살아가는 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서의 최소한의 질서는 나에게 불리할 때도 지켜야 한다. 규칙이라는 것이 나에게 불리하면 안 지키고 유리할 때만 지킨다면 그것을 규칙이라고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옷과 신발에 묻었던 흙들을 씻어내면서 그 비를 다 맞으며 길 한 가운데에 서 계시던 할머니들이 행여 감기에 걸리신 것은 아닌지 염려스럽다.
/김진경(전주덕진경찰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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