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의관(한민족통일포럼 전라북도 지회장)
제 2차 세계대전 때 영국은 패전의 위기에 처해 있었다. 막강한 군사력으로 유럽을 정복한 히틀러는 마지막으로 영국의 목에 칼끝을 내밀었다. 런던시가지 폭격, V2유도탄 공격, 잠수함의 영국 상선 무차별 격침, 영국 정예 30만 명 대군이 롬멜 사하라 전차군에 패해 델케르크에 포위당하고 있었다. 영국의 패망이 눈에 보이는 순간, 처칠이 등장했다.
세계 최강의 해군력을 자랑했던 영국을 이 지경으로 몰락시키는데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말솜씨 좋은 챔벌린이 집권한지 3년 만에 벌어진 일이었다.
처칠은 수상직에 오르자 방공호 속에서 벌벌 떨기만 하고 있는 챔벌린에게 기회를 주었다. 전시대책반의 위원으로 자리를 만들어 전쟁 공포증에서 벗어나게 만들었다.
처칠이 영국으로 하여금 승전국의 위치에 서도록 만든 것은 바로 역지사지(易地思之)였다. 형편없는 말 장난꾼 정적 챔벌린을 매장시키지 않았던 정치력이 돋보이는 장면이다.
처칠을 그릇이 크고 대인(大人)이라서 정적 챔벌린과 역지사지 했을까? 아니다.
처칠은 날카로운 성격에다가 격정적인 사람이다. 그는 국내문제보다는 세계외교무대에서 선이 굵직한 일들이 그의 눈앞에 펼쳐졌기에 죽은 목숨에 불과한 챔벌린의 목에 칼을 대지 않았던 것이다.
모택동과 등소평
두 사람은 처음부터 끝까지 역지사지 했던 동지이면서 정적이었다. 모택동은 별난 성격의 인물이었다. 주변 인물 가운데 국민으로부터 신망을 받게 되면 여지없이 처형했다. 한국전쟁의 영웅 팽덕회, 공군으로서 중국군을 장악했던 임표를 비롯해서 무수한 인물을 교묘한 정략으로 희생시켜 버렸다. 그러나 유독 등소평에게는 예외였다.
모택동의 삼면홍기 노선에 반대를 했던 유일한 최고 정치국원이 등소평이었다. 3전 4기를 허용했던 것은 모택동의 역지사지였다. 명군이며 최고의 지식인이었던 유소기 마저 처형해 버렸던 모택동은 등소평에게만 역지사지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모택동으로 하여금 계속 차원 높은 외교무대를 마련해 주었던 주은래로 해서 등소평의 입장을 생각해 주었던 것이 중국의 역사를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 대미국, 대소련, 대인도와의 외교전을 책임 맡았던 주은래와 등소평은 결의형제였다. 모택동으로부터 숙청명령이 내릴때마다 군원로들로 하여금 구명을 하도록 했고 모택동과는 역지사지의 생각을 하도록 만들었던 것이다.
30년 전만 해도 세계 최빈국이었던 중국이 세계 최부국의 꿈을 꾸면서 베이징 올림픽 개최를 목전에 두고 있다. 김정일의 굼뜬 말마따나 상전벽해(桑田碧海)가 되어버린 중국의 기적은 정치인 모택동과 등소평의 역지사지에서 만들어진 기적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
두 사람은 한국정치사에서 무려 40년간 두개의 기둥으로서 역할을 하고 있다. 툭하면 으르렁거리는 면모를 보이지만 사실은 두 인물 사이의 역지사지가 한국의 정치 역사를 만들어 왔다고 보는 것이 옳을 것이다.
두 인물이 엮어온 정치사에서 왜 처칠이나 등소평처럼 역사를 전진시키는 영웅이지를 못했는가?
이승만의 건국, 박정희의 민족중흥과 조국근대화를 이루어낸 거보(巨步)를 두 김씨는 오그라들게 했거나 막심한 국력낭비를 가져온 그들의 시대였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김영삼의 주먹구구식 정치, 김대중의 상업고등학교식 주판알 굴리기 정치였기 때문이리라.
처칠과 등소평식으로 먼 미래를 향해 국가의 웅지를 그물질 하는 식견이 없었기 때문이고 정적들을 향해 역지사지 하는 그릇이 못 되었기 때문이 아닐까.
/이의관(한민족통일포럼 전라북도 지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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