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원복(국립전주박물관 관장)
전통문화 형성에 있어 나라 밖의 영향은 문화의 속성상 어느 민족도 자유로울 수 없다. 우리 옛 그림을 살핌에 있어 조선후기 진경산수나 풍속화만이 참된 우리 그림이고 정형산수인 중국풍의 남종화는 단순한 모방이나 아류로 봄은 큰 잘못이다. 문화와 예술에는 국제성과 토속미가 공존한다. 국제적 흐름에 적극적, 능동적으로 동참하여 새로운 독자성을 이룩함이 민족의 문화역량이다.
금년은 19세기 조선화단에서 묵포도로 이름 높은 옥구의 최석환(1808- 1883이후)과 '남도산수화의 종장(宗匠)'인 진도의 소치 허련(1808-1893)이 탄생한지 2백주년이 되는 해이다. 두 화가 모두 호남 출신으로, 특히 소치는 이른바 지식층 그림인 남종화의 거장으로 생존 당시부터 명성이 지대했다. 몇 차례 소규모 소치 기획전이 열렸지만 국립광주박물관에서 그의 예술세계와 생애를 조명하는 대규모 특별전인 '남종화의 거장, 소치 허련 2백년'(2008.7.8-8.31)을 개최하니 이는 문화사적 의의를 지니는 쾌거가 아일 수 없다.
김정희는 편지 글에서"우리나라의 누추한 습관을 깨끗이 씻어 버렸으니 압록강 동쪽에는 이에 비교할 그림이 없다."라 극찬했다. 오늘날 전해온 묵서 중에는 대원군 이하응이 쓴'소치서화대방가(小癡書畵大方家), 민영익이 쓴 현판'운림소치묵신(雲林小癡墨神)', 정인보는 추사가 소치를'묘수(妙手)'로 지칭함이 언급되었고 최순우는'원말 사대가풍의 산수 그림 중에서 시골티를 활짝 벗은 가작을 남긴 지식인 화가'등 긍정적 평가가 이어졌다.
소치가 산 말기화단은 왕조의 말폐상과 열강의 각축 등 내우외환으로 범벅된 시기이나 이런 와중에도 미래를 향한 바람직하며 긍정적인 일련의 움직임도 엄존한다. 소치 그림세계는 묵란과 서예에 집중한 추사의 회화 창작의 욕망을 구현해준 그리고 그가 꿈꾸던 세계를 소치가 현실에 형상화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말년 매너리즘으로 양식화된 그림을 제외하면 설득력이 있는 이야기이다.
소치는 탄탄한 이론을 바탕으로 많은 고서화를 접하고, 실제로 수집하며 감식안을 키웠으며 오랜 세월 쉼이 없이 붓을 잡았다. 시서화를 아우른 학문과 예술의 일치로 필법과 구도에 있어 남종화의 법통을 이어 자신의 모습으로 개진했다. 때론 끝이 달아서 무디어진 몽당붓[禿筆]을 사용해 먹 위주의 거칠고 분방한 필치에 담청과 담황 가채로 강약의 조화를 이룬다. 그림과 글씨가 동가를 이루며 속기가 배제된 청신하며 유현한 분위기의 조촐하면서도 맑고 담박한 그림세계이다.
남종화로 대변되는 문인화는 전통을 맹목적으로 고수하거나 답습함이 아닌, 법고창신(法古創新)과 청출어람(靑出於藍)이 말해주듯 과감하게 새로운 시도를 꾀해 자신만의 화경(畵境)을 이룩함에 그 진정한 의의가 있다. 이점에서 조선의 남종화는 동양화가 아닌 우리 그림, 한국화가 된다. 오늘날 소치를 되새기는 의의 또한 다름 아닌 이 점에 있다.
▲ 이관장은 서강대학교 사학과 석사·박사과정을 마치고, 국립중앙박물관 학예연구사를 시작으로 국립공주박물관장, 국립청주박물관장, 국립중앙박물관 미술부장, 국립광주박물관장을 지낸 뒤 현재 국립전주박물관장로 활동하고 있다.
저서로는 「나는 공부하러 박물관 간다」, 「한국의 말 그림」, 「회화」 등 10여편의 공저가 있다.
/이원복(국립전주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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