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전기사 다음기사
UPDATE 2025-12-20 19:25 (Sat)
로그인
phone_iphone 모바일 웹
위로가기 버튼
chevron_right 오피니언 chevron_right 기고
일반기사

[기고] 김주열과 4월 혁명 - 한병옥

한병옥(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

 

4.19혁명으로 고착된 4월 혁명은 3.15부정선거에서 비롯된 것이 사실이다. 이승만 자유당 독재 권력이 영구집권을 꾀하면서 30~40%의 사전 투표도 모자라 3인조, 5인조 선거는 물론 당시 민주당 성향 투표자에게는 투표용지를 주지도 않은 채 선거를 강행하였다.

 

발단은 마산이었다. 사전투표용지가 발각되면서 부정선거 무효와 부정선거 다시하라는 구호가 등장하는 시위가 시작되었고 이 시위대를 경찰은 물대포와 총을 앞세운 무력으로 진압했다. 이 과정에서 7~8명이 죽고, 수십 명이 다쳤으며 수백 명이 연행되어 고문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마산시민은 좌익용공분자들의 난동으로 몰려 숨조차 쉴 수 없는 동토가 되었다.

 

이상한 것은 한 명의 행방불명자가 생긴 것이다. 전라북도 남원사람 김주열이라는 17세 소년이 시위에 참여했다가 사라져 버린 것이다. 공산주의자의 가족이 될까봐 아들?딸이 죽었어도 입도 벙긋 못하게 된 마산에 김주열의 어머니 권찬주여사가 나타나 아들을 찾기 시작했다. 골목골목 집집을 누비면서 아들을 찾던 어머니는 마침내 그 엄혹한 권력에 맞서 '내 아들을 찾아내라'에서'내 아들을 살려내라'고 외친다. 이 과정에서 마산 시민들은 김주열을 모르는 사람이 없게 된다.

 

27일 후인 4월11일 지치고 절망한 어머니가 남원군 금지면을 향하여 버스에 몸을 실었는데 마산의 중앙부두에서 오른쪽 눈에 최류탄이 박힌 참혹한 시신 한 구가 떠 오른다. 허종 연합통신 기자가 삼엄한 경찰의 경계를 뚫고 그 시신을 찍었고 마산 시민들은 삽시간에 시신이 안치된 마산 도립병원으로 몰려가 독재정권을 규탄하기 시작했다. 아들딸이 죽었어도, 어떤 고문에 의해 만신창이가 되었어도 공산주의자가 될 수 없어 울분을 가슴에 묻어야 했던 분노까지 포함해 '독재정권 물러가라'는 구호가 시작 되었다. 4월 혁명이 결발된 것이다.

 

이 불길은 삽시간에 전국으로 번졌고 4월18일 고려대 학생들의 시위대를 정치깡패들이 짓밟으면서 4월19일 전국이 불길에 휩싸였다. 4월26일 드디어 자유당 독재의 총수 이승만이 하야하고 미국으로 도망갔다.

 

역사에 가정이 없다지만 4월11일의 김주열 열사 부활이 없었다면 영구집권을 노린 자유당 이승만 정권은 몇 년을 더 이 땅을 지배했을지 모르며 3.15마산의거는 용공분자들의 난동에 그칠 수밖에 없었다. 당연히 이 땅의 역사에 4.19혁명은 없었다. 이것은 결코 가정이 아니다.

 

마산의 2차 의거가 시작된 4.11 김주열 열사 부활에서 4.26 독재 권력 종식까지의 기간이 4월 혁명이며 이 4월 혁명의 기폭제이자 도화선이 되었던 사람이 김주열열사 였고, 그래서 그는 영원하면서 유일한 4월 혁명의 상징적 인물이면서 이 땅 민주주의의 최선봉에서 훗날 군사 독재 정권에서의 민주화 운동을 이끌어 간 민주의 꽃이며 횃불이시다.

 

그 김주열은 전라북도 남원에서 낳고 배우며 자랐던 금지면 옹정리 선산에 잠들어 있으며 그 모역은 전라북도와 남원시가 주도해 지금 공원화 사업이 진행 중에 있다.

 

간 뉴라이트 계열을 비롯한 지극히 일부에 속한 몰지각한 사람들이 이승만을 건국의 아버지로 추앙하려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고 4.19를 데모로 매도·폄하하려 하고 있다.

 

이 땅에 또 다른 4월 혁명이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한 마음으로 축원한다.

 

/한병옥(김주열열사 기념사업회)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다른기사보기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 400
오피니언섹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