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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향에서] 문인과 육필 - 김년균

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

육필이란 본인이 직접 쓴 '글씨'를 말한다. 그러나, 직접 썼다고 하여 모든 글씨에 '육필'이라는 의미를 두지는 않는다. 육필이란 적어도 글씨를 쓴 분이 사회적으로 명망을 떨친다거나, 또는 역사에 남을만한 인물이라던가 하여, 보존할 가치가 있어야 할 것이다.

 

우리집에는 박두진, 김동리, 김구용의 육필이 벽에 걸려 있다. 구상, 김상옥, 박재삼의 육필도 있었으나 이사다니며 잃어버렸다. 박두진 육필은 80년대 초던가 선생님이 살아계실 때 친척에게 부탁하여 구했고, 김동리, 김구용의 육필은 두 분이 스승이어서 자주 만났으므로 자연스레 손안에 들어왔다.

 

이 육필을 응접실에 걸어두고 수십년을 지낸다. 특별히 관심있게 관찰하기 보다는, 눈길 한번 못주고 지내는 날이 많다. 하지만 그것이 걸려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언제나 마음이 든든하다. 배우들의 얼굴이나 화가의 그림처럼 예쁘거나 멋있지 않고 종이조차 누리끼리하게 바랬어도, 뒤에서 밀어주는 후원자처럼 든든하게 느껴진다. 이것이 육필의 묘미인지도 모르겠다.

 

하긴, 추사의 육필인 '세한도'에 대해선 요즘 시인들이 작품을 많이 쓴다. 금방 기억나는 시인만 해도 유안진, 이가림, 유자효 씨가 있다. 그들은 '세한도'를 대상으로 작품을 썼는데, 모두 문학상을 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다. 귀한 육필을 보면 신기한 감흥이 솟구치나 보다.

 

얼마 전에 한국문인협회에서 '문인육필전'을 개최했다. 황금찬 김남조 이호철 성춘복 김후란 허영자 오세영 김승옥 등, 원로문인에서 중견문인까지 130여명이 참여했고, 모두들 자신의 시나 산문을 붓으로 족자에 썼는데, 각기 필적이 다르기 때문에 전시장은 그야말로 축제의 장이 되었다. 이 육필들을 후대의 문학연구가들이 문학사료로 쓸 수 있도록 협회에 기증해 달라고 했더니, 한 분도 반대하지 않았다.

 

문인의 육필은 자신의 필적일뿐, 문학작품은 아니다. 문학작품이라면 서점이나 도서관 등에 비치하여 보존할 수 있겠지만, 육필은 그럴 자리가 없다. 육필을 관리하고 보존할 기관이나 단체 등을 찾을 수밖에 없는데, 조그만 전시관은 몰라도, 마땅한 곳이 없는게 우리의 현실이다. 그러니, 작가의 서가나 친지의 응접실 같은 곳에 걸어둘 수밖에 없는데, 세상살이란 한 집에만 오래 살 수 없는 것이라서, 혹은 이사다니며 찢겨지고, 혹은 자식이나 손자들이 장난질하며 부서뜨리고, 이래저래 결국 없어지기 마련이다. 하거늘, 문협 같은 기관에서 보존해 준다면 얼마나 다행한 일이겠는가.

 

현대문학 백주년기념 행사로 한국문인협회에서 '작고문인 육필전'을 작년에 개최한 바 있다. 그런데 문인의 '육필' 구하기가 어찌나 힘들었던지 십년은 감수할만큼 애간장 태웠던 기억이 새롭다. 백방으로 수소문하여 육필을 가진 분들을 찾아냈지만, 그분들도 잘해야 한 두점 가졌을 뿐이고, 그것조차 잃어버릴까 두려워서였던지 바캍에 내놓기를 주저했다. 전시회의 취지를 열심히 설명하여, 이광수 한용운 홍명희 서정주 박목월 박두진 박종화 유치환 황순원 김광균 신석정 김동리 설창수 윤석중 이원수 구상 김상옥 김구용 정비석 김춘수 등, 40여 명의 육필을 전시할 수 있었는데, 이 전시회가 문단 안팎의 비상한 관심을 끌었던 모양이다. 원로시인 김남조 선생께서 "전시회를 연장할 수 없느냐"고 전화를 주신 일이 잊혀지지 않는다. 그만큼 귀한 전시회였기에, 한 사람에게라도 더 보이고 싶은 욕심에서였으리라.

 

문학은 삶에 대한 깨달음을 주는 학문이다. 문인은 글(작품)을 통해 인간의 마음을 밝히는 빛을 만든다. 문인의 글씨는 그 빛을 만드는 도구다. 그 글씨엔 문인의 혼이 담겨 있다. 문인의 육필은 그래서 귀중하다.

 

/김년균(한국문인협회 이사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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