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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신성성에 무게 두는 의견도 존중을 - 이동희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 관장)

 

 

태조 어진 전주봉안 600주년을 기념해 추진했던 구본 발굴 계획이 지난 3월 10일 문화재청 사적분과위원회에서, '구본 존재 여부가 불확실하고, 신성시하고자 묻은 것을 파헤치는 것은 옳지 않다'고 하여 불허되었다.

 

현재의 태조어진은 1872년(고종 9)에 모사한 것이다. 「어진이모도감」에 의하면 이때 구본을 세초하여 백자항아리에 넣어서 경기전 정전 뒤 북계상에 묻었다고 한다. 그간 이러한 '세초매안(洗草埋安)'을 놓고 물에 씻어낸 것인지, 아니면 물에 씻어 태웠다는 것인지 의견이 분분하였다. 묻었다는 위치도 북계상(北階上)이라고만 되어 있어 막연한 감이 있었다.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진 구본을 봉안하는 방법에는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구본을 궤안에 봉안해 두는 것이다. 또 하나는 세초매안하는 것이다. 세초매안하는 이유는 궤에 봉안했을 때 먼지가 쌓이고 좀이 스는 등의 문제가 발생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세초매안은 물에 씻어 태워서 묻는 것을 말한다고 생각된다.

 

또 어진의 크기로 보아 구본을 태우지 않고 백자항아리에 넣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어진을 말아서 봉안하지, 접어서 봉안하리라고는 생각되지 않기 때문이다. 따라서 단정할 수는 없지만 구본의 존재를 기대하기란 어렵다고 본다. 그러나 발굴을 통해 백자항아리와 봉안장치물이 찾아질 수 있고, 세초매안에 대한 학술적 접근이 가능할 수 있다.

 

매안 위치와 관련해서도, 「조선왕조실록」에 의하면 어진 구본을 정전 북계상에 묻는 것은 관례였다. 경기전만의 일이 아니었다. 태조어진 구본의 세초매안을 논할 때도 원종(인조의 아버지) 어진을 영희전 북계상에 세초매안하자는 논의가 같이 이루어졌다. 따라서 왜 태조어진 구본만을 발굴해야 하는지 논리가 있어야 하지만, 한편으로는 여러 사례를 통해 북계상이 지칭하는 매안위치를 찾아가는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문제는 어진 구본의 신성성이다. 이런 논의가 있기 전에도 '왜 자꾸 발굴을 하려하는가, 태조임금이 편히 쉬게 좀 놓아두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어진 구본의 역사적 가치를 우선하여 발굴을 추진했지만, 이와 다른 어진의 신성성에 무게를 두는 시각도 존중되어야 한다. 필자도 소극적이지만 백자항아리에 끌려 어진 구본 발굴에 동의했던 한 사람이다. 발굴은 불허되었지만, 이런 과정을 통해 경기전의 신성성은 더해졌다.

 

/ 이동희(전주역사박물관 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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