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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②시인의 계약 위반

신성호 사회복지사(임실 사화복귀시설 '동행')

 

솔직히 백일장이 목적은 아니었다. 주로 시설에서만 생활하는 회원들에게 나들이를 시켜주고 싶어서였다. 1박2일, 거기다 숙소가 호텔이라지 않는가 말이다. 기대했던 것처럼 행사 당일 버스에 오른 회원들은 한껏 들떴다. 그들을 바라보는 나 또한 내 속셈이 빗나가지 않아 만족스러웠다.

 

관광과 교육으로 짜인 첫날 일정을 마치고 백일장이 열리는 둘째 날을 맞았다. 예정시간이 지났건만 행사는 시작되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늘에 앉아 있는 회원들을 보다, 지금 이 시간이 회원들에게 좀 더 의미 있는 시간으로 기억됐으면 하는 바람이 들었다. 더불어 좀 더 승부욕을 갖고 살기 위해서는 백일장에서 한번쯤 상 타는 기쁨을 누려보는 것도 좋겠다 싶었다. 그런 의도를 갖고 처음으로 '포섭'한 이가 윤섭(가명)씨였다.

 

"윤섭씨! 우리 계약 하나 합시다."

 

"무슨 계약요?"

 

"내가 평소에 시 좀 쓰거든요. 대신 써 줄 테니까 1등하면 상금으로 과자파티 한번 합시다. 어때요?"

 

"그거 불법 아녀요?"

 

"물론 불법이죠. 근데 우리가 1등하면 좋잖아요. 그러니까 그냥 해요. 나 믿고…."

 

계약은 쉽게 이뤄졌지만 회원들이 마실 물을 사오는 동안 그것은 파기되고 말았다.

 

"윤섭씨! 원고지 주세요."

 

"전 벌써 다 썼어요. 다른 사람들 거 쓰세요."

 

"계약 했잖아요. 내가 써 줄 테니까 그걸로 냅시다."

 

"국장님, 전 그냥 제가 쓴 걸로 낼게요."

 

우리 회원이 1등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 눈멀어 몇 번이나 더 계약을 강조하며 대신 써주겠다고 억지를 부렸지만, 윤섭씨의 고집을 꺾지는 못했다. 윤섭씨가 쓴 시를 읽어보는 둥 마는 둥 하며 다른 회원에게 다가갔다. 다행히 2명과 계약이 이뤄졌고, 30분도 채 안돼 2편의 시를 썼다.

 

시상식은 정신장애인들이 듣기 싫어하는 풍물공연에 이어 시작됐다. 우리 회원들 중 3명이 입상했다. 이제 남은 것은 1등과 2등. 내가 써 준 시가 적어도 2등은 될거라 확신했다. 내 예상은 빗나가지 않았다. 2등 5명 중 내가 대신 시를 써준 2명의 이름이 불려졌다. '그러면 그렇지' 하며 '자뻑'에 빠진 순간 내 귀를 의심할만한 일이 벌어졌다. 1등 당선작에 윤섭씨 작품이 뽑힌 것이다. 시상 후, 윤섭씨는 자신의 시 '봄'을 차분한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아침에 일어나 담배를 피우며/River Hill 창밖을 내려다 본다/멀리 버스들이 무심히 오고가는데/군산에서의 추억이 머리를 스친다/어제는 채만식 선생에 대해 들었다/무던히도 가난하고 아팠구나/창밖 멀리 금강이 흐릿한데/호텔 뜰의 늦은 철쭉이 유난히 붉다

 

1등 상금은 20만원이나 되었다. 윤섭씨가 20만원을 다 내겠다는 것을 말려 10만원만 내게 하고, 2등 상금을 보태 회식을 했다. 그 후 몇 번이나 윤섭씨에게 시를 써보라고 권유했지만, 그때마다 그는 웃기만 했다. 지금, 윤섭씨는 사무실 창밖으로 보이는 평상에 앉아 동료들과 카츄사 시절 이야기를 하며 하루를 보내고 있다.

 

/ 신성호 사회복지사(임실 사화복귀시설 '동행')

 

※ 이 캠페인은 전라북도·전북일보·국가인권위원회 광주인권사무소가 공동으로 진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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