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희재 (전 전라북도 행정부지사)
▲ 무주군 무풍에서 꿈을 키우다
증곡(曾谷) 황인성(黃寅性) 전 국무총리는 무주군 무풍면 증산리에서 1926년 11월 10일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매우 영특하고 담대했으나 무풍소학교를 졸업한 후 가정형편이 어려워 전주 등으로 유학을 하지 못하고 대구 백화점에 도어보이로 일하면서 주경야독(晝耕夜讀)끝에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였다. 6·25전쟁을 맞이하여 한강방어전투, 지리산 토벌작전 등을 겪으면서 수없이 사선(死線)을 넘은 바도 있고, 5·16 군사혁명정부에서는 조선전업사장과 조달청장을 역임하였으나 강력한 민정참여 요청을 끝까지 거절하고 군에 복귀하여 1968년 육군소장으로 예편했다.
▲ 행정가이며 정치인, 그리고 민간 CEO
1973년 국무총리 비서실장을 거친 후 전라북도지사에 임명되었고 1978년 교통부장관에 이어 1985년 농림부장관을 역임하였다. 1988년 4월에 아시아나 항공 초대사장으로 취임하여 사상 유례없는 가장 짧은 기간내에 세계적인 모범항공사로 발전시켜 경제계에서도 큰 족적을 남겼다. 정치참여에 대한 강력한 고사에도 불구하고 무주·진안·장수지역에 출마하여 황색바람 속에서도 제11대, 12대, 14대에 국회의원으로 당선되었으며, 1993년에는 문민 정부 초대총리에 취임하여 우루과이 협상 파고를 원만하게 극복하고 금융실명제 도입 등 개혁활동에 앞장섰다.
▲ 전북발전의 기틀을 만들다
1973년 10월23일 전라북도지사로 부임하여 가난과 좌절에 빠진 전북의 낙후를 탈피하기 위해 도정지표를 '밝은 사회, 부강한 내고장'으로 정하고 '황총화'와 '황 컴퓨터'란 별명으로 5년 2개월의 지사직을 수행하면서 지역발전을 크게 앞당겼다. 특히 전북의 공업화 추진을 도정의 제1 목표로 삼고, 익산과 군산에 공업단지를 조성하였으며, 전주~군산간 도로 4차선 확장, 내장산·덕유산 국립공원 조성, 계화간척지 조성, 전주철도 이설 등을 추진하였다. 전 국민을 놀라게 했던 1977년 이리역 열차 폭발사고를 원만하게 수습하여 익산시 시가지 정비도 앞당겼다.
▲ 언제나 전북사랑에 앞장서다
황인성 전 총리는 지사직을 떠난 후 장관과 국회의원, 총리직 등을 수행하면서 전북의 인재육성에 적극적이었으며, 전주~무주 4차선 도로확장, 동계U대회유치, 용담댐 수몰민 보상 등 전북발전과 관련된 지원을 아끼지 않았다. 무엇보다도 가장 큰 의미는 전북지사 재임시 부안 계화도 간척사업 현장을 수없이 다니면서 200만 전북도민의 미래의 꿈인 새만금사업을 최초로 구상하고 후에 농수산부장관 재임시 새만금의 오늘이 있도록 기반을 닦은 것이다. 그리고 전북애향운동본부를 창설하고, 재경도민회장을 역임하면서 전북사랑운동에 적극 앞장섰다.
▲ 전북의 큰 별이었던 황인성 전 총리
전 공직자의 사표(師表)이면서 전북도민의 큰 별이었던 황인성 전 국무총리가 84세로 지난 10월11일 서거하였다. 고인은 전북을 사랑한 공로로 1999년 전북애향운동본부에서 '애향상'을 수상했고, 2005년에는 재경전라북도민회가 제정한 제1회 모악대상을 받았다. 황인성 전 총리가 떠나는 날, 영결식장과 대전 국립묘지 안장식에는 각계 각층의 애도와 추모사가 이어지고 국화 헌화가 줄을 이었다. 이제 대전 국립 현충원에 영원히 잠든 황인성 전 국무총리의 족적들이 우리 도민 가슴속에 깊숙이 새겨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 전희재 (전 전라북도 행정부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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