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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이솝은 왜 토끼에게 낮잠을 자게 했을까

이호선 (수필가·문학박사)

이솝의 우화들을 희화화한 여러 그림 중에서 내가 단연 좋아하는 그림은 낮잠 자는 토끼 그림이다. 산 정상에는 거북이가 우승기 왼 손에 잡고 오른 손 주먹 쥐고 하늘을 찌르며 승리의 함성을 지르는 그 아래쪽으로 너무나 평화롭게 만족스럽게 낮잠을 즐기고 있는 선수복 차람의 토끼 한 마리. 두 팔 머리 뒤로 재껴 접은 팔목위로 머리 얹어 베개 삼고 하늘을 안았다. 굽어 세운 왼쪽다리 무릎 위엔 오른쪽 다리 얹어 조금은 까딱거리고 있지 않나 싶고 입가엔 어쩜 침이라도 한 줄기….

 

물을 것도 대답할 것도 없다. 너무나 유명한 토끼와 거북이의 등산경주 우스개 그림이니까. 동물 중에서 산 오르기 시합에선 당할 짐승 없으리라는 토끼다. 일본의 "토끼 앞에 오르막 고개"라는 속담은 우리의 "식은 죽 먹기" 로쯤 쓰일 법 한 그런 토끼의 상대가 동물 중에서도 하필이면 느리기로 손꼽는 거북이라니. 도대체 말도 되지 않는, 상상할 수도 없는 이런 대진표를 두고 '귀모토각'(龜毛兎角: 거북이 털 나고 토끼에 뿔 생긴다)이라 하는 걸게다. 이 귀토대결을 성사 시킨 이솝은 그래서 천재로 귀재로 대접 받는 걸게고.

 

하지만 이솝의 천재성은 더 좀 유현하고 오묘한 그의 철학적 비유법에서 찾아야지 싶다. 이때 떠오르는 말이 "두루미 천년에 거북이 만년"이다. 과연 만년을 사는 거북이가 천년도 못사는 토끼를 시샘하고 투기하고 분노할 필요가 있는 것일까. 어쩜 쏜살같이 튀어나가는 토끼의 등 뒤에다 거북이는 격려의 손시늉을 보냈을지도 모른다. "먼저 가시게". 그리고 김천택(金天澤)의 시조쯤 중얼거렸을 법도 하다. "잘 가노라 닫지 말며 못 가노라 쉬지 마라(중략)… 가다가 중지 곳 하면 아니 감만 못하리라" 그러면서 거북이는 안으로 번지는 비웃음과 역겨움의 구토를 억누르려 무진 애를 쓰리라. "미련한 녀석, 네 짧은 생애에 빨리 달린다고 몇 개 산이나 넘을 것 같니? 내 수명은 일 만년이야. 그러니 나는 또 새로운 산을 향하려는데 너는 이미 땅에 묻혀 잠자고 있겠구나". 그러므로 잠자는 토끼의 저 그림에서 우리는 삶의 유한적 길이의 장단에 부딪쳐 넘어진 욕심의 파편을 상징하는 철학을 읽어야 한다.

 

물론 토끼의 교만과 나태와 방심을 질타하고 문책하는 보편적이고 상식적 교훈의 채찍을 놓아서도 안 된다. 하지만 여기서도 우리는 토끼의 반전을 후원하는 쟁론에 귀 기울이는 애정을 기대하고 싶다. 가령 이런 상상 말이다. 출발신호와 함께 신나게 한참을 달렸던 토끼는 갑자기 전혀 거북이의 흔적이 보이지 않는데 대해 가슴 시린 동정심을 갖게 된다. "그래, 거북이의 자존심도 살려줘야지". "자기 가족에겐 물론이요 소속하고 있는 조직과 단체와 모임에서도 그가 너무 비참한 존재가 되게 해서는 안 되지". 그런 아량과 연민과 인애의 마음이 그의 질주에서 힘을 빼고 낮잠의 자세로 바꿔 놓은 것. 어쩌면 거북이가 토끼 곁을 어슬렁 지날 때, 미소 머금은 곁눈질로 격려를 보냈을 법도 하고. 물론 패배까지 자초하지는 안했을 것이지만 저런 심리적 방황에다 허비한 정력으로 그만 깜빡 잠이 들고 말았는지도….

 

그렇다면 우리 전북, 전북인은 과연 어느 편인가 생각해 본다. 태산이 높다 한들 하늘 아래 뫼라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 리 없다는 오로지 그 일념으로 높이와 길이와 속도에 상관없이 마냥 끝까지 오르고 마는 거북이 도민성인가. 아니면 나보다 못한 약하고 힘없고 가난한 자를 그냥 두고 보지 못하는 측은지심으로 경쟁 속에서도 동정과 자비로 손해 보고 상처 입고 패배도 자청할 줄 아는 토끼의 도민성인가. 봄 여름 가을엔 모정, 겨울엔 사랑방에 나그네 재우고 먹이고 노자 줘 보내던 전라도 자선문화의 본가인 전북. "임금이 어디 있니 나는 모른다"는 격양가(擊壤歌)의 본고장 같던 곳. 그곳이 지금은 출발점에 선 거북이 나라 같기만 하다. 캄캄하다. 누구 죄인가.

 

/ 이호선 (수필가·문학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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