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찬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예술사업부장·공연감독)
최근 국내 공연시장의 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공연시장을 주도했던 대형 뮤지컬 등이 주춤하는 사이 순수예술이 약진하고 있다. 이런 변화는 10년 전의 사항과 정반대의 입장으로 그 원인은 외국 대형 뮤지컬의 한계와 창작 뮤지컬의 부재로 관중들의 높아진 눈높이에 부합하지 못한 측면이 있다. '명성황후'처럼 창작에서 보완까지 몇 년의 숙성과정이 필요한데 아직까지 국내 창작 뮤지컬은 그 부분을 채워주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라 판단된다.
의상도 유행주기가 있듯이 공연 예술도 유행에 민감한 반응을 보인다. 확성기에 의해 증폭된 기계음에 의존하는 뮤지컬이나 크로스오버 공연에서, 인간의 감성에 호소하는 순수예술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는 것이 공연시장의 유행주기를 보여주는 예이다.
순수예술은 대중예술과 반대의 개념으로 그 경계가 모호하지만 순수한 예술적 동기에 의하여 창조되고 오로지 예술을 위해서만 있어야 한다는 예술 지상주의의 예술을 가리킨다.
대중예술은 충동적이고 시대의 변화에 따라 새로운 장르가 생겨나고 사라진다. 대중예술은 장르에 따라 세대를 뚜렷이 구분 짓고 그 유형의 주기는 갈수록 짧아진다. 부모와 자식간 음악 취향도 서로 이해하지 못하듯 그들이 받아들인 그 시기의 음악만이 존재하게 된다.
현대사회는 고도의 물질문명 발달로 더 빠르게 더 첨단화된 시대를 살고 있다. 전화번호를 암기하는 시대에서 휴대폰의 등장으로 암기라는 표현이 사라지듯 사고 및 감성의 영역이 좁아져 가고 있고, 일상생활은 물론 취미생활을 할 때에도 누구나 더 빠른 것을 원하고, 그렇지 못할 경우 도태되는 세상에서 살아가고 있다. 하지만 속도라는 것은 과연 과학과 기술의 발달이 가져다 준 '마스터-키'일까?
최근 이런 빠름의 현상에서 느림의 의미를 일깨우는 슬로우 운동이 일종의 유행처럼 퍼져가고 있다. 1986년 이탈리아에서 패스트푸드에 대한 반대 의미에서 슬로우 푸드에서 시작하여 다양한 분야로 발전하고 있다. 최근 전주 한옥마을도 국제슬로시티연맹으로부터 슬로시티(Slow City)로 지정됐다. 도내에서는 처음이자 국내 7번째, 세계적으로 133번째, 인구 5만 이상의 도시 중에서는 세계 최초다. 첨단기기에 둘러싸인 생활환경, 오염된 자연환경, 패스트푸드 등에서 벗어나 전원적 삶을 구가하고 느리지만 인간의 감성을 되찾고 진정한 삶을 되찾고자 하는 것이다.
공연시장에도 슬로우 아트(Slow Arts) 바람이 일고 있다. 빠르고 기계적 보조 장치에 의존하는 패스트 뮤직에서 복고적이고 오직 화음과 멜로디를 통해서, 혹은 가공하지 않은 순수한 표현만으로 올려지는 공연이 호조를 보이고 있다. 작년 한 해 대형 공연 티켓회사의 통계를 보면 최근 몇 년간 호조를 보이던 뮤지컬과 대중 공연이 주춤하고 클래식, 발레 등 순수예술의 판매가 증가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빠르게 살아가는 현대인에게 조금의 여유를 갖고 스스로 즐길 수 있는 느림의 미학이 필요하다.
지금까지 숨 가쁘게 살아왔다면 이제부터는 자신만의 여유를 만들어보자. 조금만 관심을 가지면 즐길 수 있는 공연이 많이 있다. 여유를 가지고 슬로우 아트에 빠져보자.
/ 이 찬 (한국소리문화의전당 예술사업부장·공연감독)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