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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자연과 문화, 그리고 박물관

곽동석 (국립전주박물관장)

'끝없이 펼쳐지는 논 사이로 송림에 덮인 낮은 구릉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는 풍경을 보게 된다. 녹색 물결 사이로 농가의 만두 모양 초가지붕만이 포플러 나무숲에 둘러싸여 여기저기 보일 듯 말 듯 한 것도 놓칠 수 없는 정경이다.' (1920년대 말 어느 일본인이 묘사했던 전라북도의 지리 풍속 중에서)

 

국립중앙박물관 산하에는 모두 11곳의 소속 국립지방박물관이 있다. 여기에 근무하는 학예연구직들은 상당한 프라이드를 가진 전문직들이지만 엄연히 신분은 국가공무원인만큼 항상 타 지역으로의 발령을 각오하고 생활해야 한다. 이곳저곳 옮겨 다니다 보면 가정적으로는 마이너스이지만 그 보다 더 큰 보상도 따른다. 직접 생활하면서 얻게 되는 지역 문화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가 그것이다.

 

십수 년 전, 영남의 경주박물관에서 전주박물관으로 발령받았을 때의 첫 인상이 아직도 새롭다. 익산을 지나 전주에 가까워지면서 주변의 환경이 급변하는 게 아닌가. 마치 신천지에 도착한 듯 눈앞에 펼쳐지는 새로운 모습들, 끝없이 이어지는 넓은 평야와 낮은 구릉, 그 너머로 보이는 지평선, 그것은 경이로움 그 이상의 무엇이었다.

 

불상이 전공인 필자는 삼국시대 불상의 조형적 특징을 고구려는 상승하는 기세, 백제는 정교하고 둥근 맛, 신라는 거친 맛으로 규정하곤 한다. 이러한 현상은 삼국 미술 전반으로 확대할 수 있지만 과연 그러한 근본적인 차이점이 어디서 비롯되었는지는 설명하기 어려웠다.

 

여기에 답을 준 것이 약 3년에 걸친 전주 생활이었으니, 주변 자연환경은 그 지역의 문화 정체성, 심지어 인성까지 규정한다는 사실이다. 태풍도 장마도 가뭄도 신기하게 피해가는 온화한 날씨, 끝없이 펼쳐지는 평야, 여기서 생산되는 풍부한 물산들……. 여기서 농업문화의 전형이 완성된다. 이는 곧 백제 미술의 정교하고 섬세한 아름다움과 둥근 맛을 낳게 하였던 동인이었으며, 그 전통은 한옥·한식·한지·소리로 대표되는 예향 전주의 정체성으로 이어진다.

 

정반대로 서양 문화의 모태인 그리스 문명은 지중해의 척박한 자연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에서 싹텄다. 식량 확보를 위한 약탈과 활발한 교역은 궁극적으로는 상업문화를 낳게 하였다. 그리스 사람들에게 자연은 신이 내린 축복이 아니라 극복해야 할 대상일 뿐이었다.

 

국립 지방박물관의 존재 의미는 조사 연구와 전시를 통한 그 지역의 정체성 규명에 있다. 1998년 전주박물관에서 '옛사진 속의 全北'이라는 특별전을 처음 개최한 이후 매년 시·군별로 전북의 역사문물 특별전을 열고 있는 것도 이런 이유에서다.

 

3년간의 전주 생활 이후 필자는 공주로, 서울로, 또 청주로 옮겨 다니면서 또 다른 지역적 정체성과 마주하였다. 그러면서도 전주에서의 기억들이 뇌리를 떠나지 않는 것은 그 만큼 문화적 충격이 강했기 때문일 것이다. 김제로 문상 갔을 때 원래 집안의 땅이 저기 저 (지평선) 끝에서 여기까지라던 어느 직원의 자랑스러운 설명, 김해 평야를 지나면서 이것도 평야냐며 지었던 야릇한 표정들, 그래도 제법 이름난 영남의 어느 해장국집에서 한술 뜨고는 곧바로 나와 버렸다는 푸념들, 이 모든 것들이 살아보지 않으면 이해할 수 없는 소중한 전주의 추억들이다.

 

다시 찾은 전주박물관이 결코 낯설지 않은 것은 십수 년 전 직접 몸으로 체득했던, 자연과 문화 그리고 박물관이라는 정체성의 상관관계에 대한 성찰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 곽동석 (국립전주박물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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