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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천막에서의 마지막 오후

조지훈 (전주시의회 의장)

 

봄볕이 천막 안으로 들어옵니다. 나른함도 따라 들어옵니다. 벌써 104일째입니다.

 

이곳에서 크리스마스를 보내고, 새 해를 맞이했고, 이제 봄을 느끼고 있습니다.

 

4번째 전주시의회 의원이 되고, 과분하게도 의장이 된 후, 제가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할 일에 대한 고민을 했습니다. 지나온 10여년의 활동도 돌아봤습니다. 10여년동안 전주시가 달라지고 변화된 것도 많지만, 저는 그 세월동안 처음 시의원으로 출마했을 때의 문제의식과 치열함을 담아내었는지, 저를 필요로 하는 시민들의 마음을 제대로 대변했는 지 고민했습니다.

 

전주시 뿐 아니라 대부분의 중소도시가 대한민국의 신자유주의 광풍에서 자유롭지 못했지만 변변한 기업이 없고 산업 기반이 취약한 전주에서, 자영업자의 몰락과 재벌마트의 공룡화가 한꺼번에 눈에 들어왔습니다. 온통 불균형이었습니다. 오늘도 효자동에 입점할 예정이라는 한 SSM에서 준공검사가 끝나자 조경수가 사라졌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옵니다.

 

'지방의원으로서 아무 것도 할 수 있는 것이 없어 무모하다'는 지인들의 만류에도, 계란으로 바위를 치면 계란은 깨지지만 바위에 흔적은 남는다는 심정으로 이마트 옆에 천막을 쳤습니다.

 

정치권력보다 더 힘 센 자본권력 앞에 천막은 발가락의 때처럼 아무것도 아니었겠지만, 저는 이 안에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꼈습니다. '동전 장보기'에 써달라며 비닐봉지에 한 보따리의 동전을 모아온 부부, 돼지저금통을 들고 온 초등학생들, 이마트에 왔다가 천막을 보고 부끄럽다며 편지를 남기고 간 중학생, 대형마트 문제를 토론 주제로 삼아 모듬으로 찾아온 고등학생들, 김밥·된장국에 김치전까지 장만해 오셨던 아주머니들, 시레기국을 뜨겁게 보온병에 담아 오신 경로당 할머니들, 주전자에 사골국을 끓여 오셨던 동네 형님들, 동전을 모아와 '동전 장보기'에 앞장서고 있는 교회들과 단체들…. 저는 천막에서 많은 손님들을 맞으며 희망의 싹을 보았습니다.

 

겨울철, 천막 건너편 상가 화장실에서 시리다 못해 아프게 차가운 수돗물에 이를 북북 닦으며 지금 이 마음을 죽을 때까지 잊지 말자고 다짐했습니다. 천막안에서 그동안 피상적으로 알았던 대형마트가 발생시킨 문제들(비정규직의 양산, 유통체계의 균열, 자영업자들의 계속된 몰락, 중소도시 상권의 붕괴 그리고 외국의 사례)에 대해 고민하고 연구했습니다.

 

그리고 전국 시군자치구 의장단협의회를 통해 이 문제를 전국으로 알렸습니다. 한국슈퍼마켓협동조합 대표단, 전국상인연합회 대표단 등과 함께 민주당 대표를 만나 사안의 심각성에 대해 토론하기도 했습니다. 감사하게도 대형마트 영업시간 단축과 품목제한을 주요내용으로 하는 '유통법 개정안'이 발의되었고, 민주당 당론으로도 채택되었습니다. 전국 228개 기초의회에서는 '영업단축을 요구하는 공동행동주간'도 확정했습니다.

 

이제 또 다른 싸움이 시작되었습니다. 이 법안의 통과와 더 구체적인 활동을 위해 그동안의 천막생활을 마감하려 합니다. 바쁜 의정활동에도 천막에서 밤을 같이 새우며 응원해주신 전주시의원님들, 계절이 바뀌는 긴 시간동안 지친 내색 없이 함께 해 주신 시민활동가와 참여자들께 머리 숙여 감사의 말씀을 전합니다.

 

봄 입니다. 어디선가 날아온 파리가 천막 안에서 위태로운 비행을 합니다. 저는 이제 넉달동안 저를 지켜준 작은 공간을 스스로 허물고 나갑니다. 하지만 자꾸만 천막을 되돌아보게 됩니다. 정말이지 오늘은 잠을 이룰 수 없을 것 같습니다.

 

/ 조지훈 (전주시의회 의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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