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재영 (전 대통령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
봄을 시샘하던 꽃샘추위가 물러나면서 봄비가 내리고 그 끝을 마무리하듯 서늘한 바람이 불어온다.
아파트 정원 개나리와 목련·벚나무 꽃들을 보면서 잠시나마 방사능이니 중금속으로 오염된 황사니 하는 말들을 잊을 수 있다. 특히 전주시 시화(市花)인 개나리를 보니 시민들의 고상함, 끈기, 그리고 협동정신이 봄기운과 함께 가슴 깊이 느껴진다.
이 곳에서 온몸과 마음으로 사회에 헌신하고픈 용솟음이 더욱 강해짐을 느끼며, 어느 평일 오후 오랜 만에 덕진공원을 찾았다. 아직 나들이 할 때가 아닌지 사람들이 그다지 많지는 않았다.
이곳 저곳을 거닐다가 남문 쪽에 이르자 바람막이가 된 양지바른 쪽에서 노인들이 장기를 두고 있다. 어수선한 가운데 가끔 고함이 들리고, 삿대질이 오가는 품새로 보아 훈수꾼들이 한바탕 거들고 나선 모양이다. 잠시 후 큰 소란이 가라앉고 각자 자기 위치로 돌아가 다시 작은 말다툼을 하기 시작한다. 분위기로 보아 더 큰 싸움이 일어날 것 같지 않고 끼어들 자리도 아닌 것 같아 걸음을 옮겼다.
음악분수대를 지나 다시 정문 쪽을 향하다가 우리 고장의 자랑이자 법조계의 삼성(三聖)으로 불리는 세 분의 동상이 모셔져 있는 곳을 찾았다. 그곳 벤치에는 정확히 노인 넷이 앉아 담소를 나누고 있었다. 잠시 쉬어갈 요량으로 그 분들에게 방해가 되지 않을 만큼 적당히 떨어진 곳을 찾아 자리를 잡았다.
국내 법조인들이 가장 존경하고 귀감으로 여긴다는 김병로·김홍섭·최대교 세 분의 온화한 모습이 따사로운 햇살에 미소를 짓는 듯했다. 저토록 온화한 인품이건만 강직한 성품이 후대까지 전해오는 걸 보면 뭔가 남다른 점이 많은가 보다. 올곧은 처신으로 법조계의 엄격함과 온정을 보여주신 분들이라 새삼 존경심이 샘솟았다.
노인들은 나를 의식하지 않고 대화를 나누었다. 주로 한 사람이 주도하며 시사(時事)에 관한 말을 하는데 두 사람은 맞장구를 치거나 자기 의견을 짧게 내놓는 정도였다. 나머지 한 사람은 반은 졸면서 가끔씩 동조하듯 실없는 웃음을 흘려줄 뿐이다. 대화하는 자리에 있기는 하지만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것 같다. 그래도 졸린 눈을 떠 귀를 기울일 때는 제법 진지한 표정이었다.
바로 그 순간 문득 '소통의 부재'란 말이 떠올랐다. 불과 네명이 앉아 대화하고 있지만 단순한 대화와 소통은 다른 차원의 문제로 느껴져서다.
여러 형태의 통신수단이 발달되면서 사람들은 더욱 활발한 의사소통이 가능해졌다고 하지만, 여전히 많은 사람들은 대인관계에서 화합보다는 갈등의 골이 더 심해졌음을 느낀다고 한다. 그 갈등의 요인은 대단히 다양하고 복잡해서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다.
하지만 갈등 해결의 핵심은 배려와 이해심이 아닐까 한다. 자신의 뜻을 꺾더라도 상대 주장이 옳다면 기꺼이 수용하려는 진지한 자세와 용기도 필요하다.
장기판을 두고 왜 노인들이 다투는 지 자세한 이유는 모른다. 다만, 법조 삼성 아래서 정담을 나누는 노인들은 소통의 아름다움에 대해 많은 것을 알고 또 그 방법까지도 터득하고 있는 것은 확실해 보인다.
덕진공원에서 목격한 두 장면이 집에 돌아가서도 자꾸 오버랩되는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원활한 소통이 얼마나 중요한 가 하는 점을 보여주고 있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 이재영 (전 대통령직속 중소기업특별위원회 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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