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춘택(4·19혁명 국가 유공자 )
4·19혁명은 민주주의 역사를 바로 세운 국민운동이었다. 1960년 3월 15일 제4대 정·부통령 선거 때 이승만의 장기 집권을 위한 부정선거에 항거해서 일어난 혁명이다.
일제 36년 동안 우리 국민은 교육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 광복 후 남북 분단이 되더니 북한의 도발로 6·25 한국전쟁이 터졌다. 그래서 그때는 한글을 깨우치지 못한 문맹자가 많았다. 선거벽보나 투표용지도 아라비아 숫자보다는 막대기호로 표시해야 쉽게 알 수 있었다. 그러니 민주주의 선거의 4대 원칙인 직접·비밀·보통·평등이란 의미를 어찌 알 수 있었겠는가! 정·부통령선거 투표일이 가까워지면서 정부기관은 이웃과 3인조를 조직하여 투표장에 가도록 하였다. 투표장에는 여당인 자유당 참관인만 앉아 있으니 거리낌 없이 공개투표를 했었다.
경남 마산에서는 투표일에 대리투표가 행해졌다. 투표용지를 받지 못한 유권자들이 항의를 한 것이 첫 시작이었다. 당시 남원 금지중학교를 졸업하고 마산상고 입학시험을 치르러 간 김주열 학생이 시위에 참가하여 행방불명이 되었다. 한 달이 다 되는 4월 11일 마산 앞바다에서 김주열 군의 시체가 떠올랐다. 그 소년의 눈에는 경찰이 쏜 최루탄이 그대로 박혀 있었다.
새 학년이 되자 학교는 모두 개학하였다. 김주열 군의 죽음이 알려지자 그 것이 기폭제가 되어 학생들이 부정선거를 규탄하며 거리로 나설 준비가 되었다. 부정선거 규탄 데모는 4월 4일 전북대학교에서도 700여 명의 학생들이 교정에서 데모를 하였다. 그러나 사전 정보를 입수한 사복 경찰관들의 출동으로 학생들이 교문 밖까지는 나가지 못했다. 그러나 그 기사가 4월 5일자 전북일보에 보도되자 시민들은 더욱 술렁이기 시작했다.
4월18일, 고려대 학생들이 국회의사당 앞에 모여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위해 궐기하고 시위 도중 정치깡패들의 피습으로 많은 학생이 부상을 당했다.
4월 19일, 조간신문에 이 기사가 보도되자 서울시민과 학생들은 일제히 거리로 뛰어나와 "자유당 정권 이승만은 물러가라!"를 외치며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에 돌입했다. 시위대는 국회의사당을 거쳐 경무대(청와대 전신)로 향했다. 경찰은 최루탄과 총을 마구 발사하여 수십 명이 사망하고 부상자가 발생했다. 하지만 서울시민들의 함성과 시위도 물러서지 않았다. 이 소식이 퍼진 다음날 4월 20일은 전국적으로 고등학교 학생들까지 합세하여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시위가 들풀처럼 번졌다. 이에 정부는 계엄령을 선포하고 시위를 억제하려 했으나 국민들의 분노를 꺾을 수는 없었다.
드디어 4월 26일 이승만 대통령은 국민이 원한다면 대통령직에서 물러나겠다는 성명을 발표하게 되었다. 이날을 가리켜 '국민이 승리한 날'이라 하며 우리 국민의 가슴에서 민주주의란 꽃이 피기 시작했다.
4·19혁명은 세계사와 연관해서도 생각할 수 있다. 영국의 명예혁명(1688~1689)은 제임스 2세를 폐위시키고 권리장전으로 왕권을 제한하여 양당 의회정치로 발전하고 입법과 언론의 자유를 선포했다. 프랑스 대혁명(1789)은 절대왕정을 타도하는 과정에서 자유·평등·박애정신을 담은 인권선언으로 모든 권한은 국민으로부터 나오지 않으면 행사할 수 없다고 했다.
이런 면에서 4·19혁명은 정치적으로는 자유와 평등, 민주에 대한 국민의 열망을 나타낸 운동으로서 세계사의 한 페이지로 남아 있다. 4·19혁명이 있었기에 이 땅에 민주주의로 독재가 사라진 것이다.
/ 황춘택(4·19혁명 국가 유공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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