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문철(한국농어촌공사 정읍지사)
아버지가 그렇게 일을 시킨 이유를 이제야 알겠다. 그 때의 아버지 표정은 지금도 잊을 수 없다. 초등학교 다닐때 아버지는 "애비가 못 배웠으니 깡통이라도 차서 너는 가르칠랑게"라며 나에게 정성을 쏟았다. 또 사람 됨됨이를 첫째 생활관으로 꼽으셨다. 동네 어르신을 보면 인사는 꼭하라고 말씀하셨다. 나는 칭찬 한 번 듣고 싶었지만 아버지는 그저 밋밋하게 "너는 9남매의 장남이고 집안의 장손이니까 모든 걸 잘해야 한다"가 전부였다.
서운했지만 내색할 수도 없었다. 난 그럴 수밖에 없었던 아버지의 속마음을 세월이 한참 지난 후에야 짐작할 수 있었다. 아버지는 못배워서 글을 몰랐던 것이다. 그런 아버지가 친구들보다 아들을 빨리 두어서 자부심이 대단했다. 중학교 2학년때 동네 정미소에서 쌀 한 가마니(80kg)를 지게로 지어 오라고 하셔서 지게로 지니까 정미소 주인이 "그놈 다 컸네"라고 말했다. 그 말을 들으신 아버지는 환한 웃음을 보였다. 그 후로부터는 추수가 끝나고 벼 가마를 지게로 져서 나르는 일을 아버지 혼자서 감당하셨는데, 나는 이웃집에서 작은 지게를 빌려다가 작대기를 두 손에 움켜쥐고 땅을 짚은 다음 허리에 힘을 주며 조심스럽게 일어섰다.
성취감이란 작은 것에서 더 아름답게 빛나는 법이다. 아버지는 그 후로 나를 대하는 눈빛이 달랐다. 당시 추곡 수매 벼 한 가마의 무게는 54kg 남짓으로 그다지 무거운 게 아니었다. 그렇게 나에게 지게질을 가르쳐 주신 아버지는 "일이란 배워서 안 하긴 쉬워도 안 배우고 하려면 못한다"고 하셨다.
학교에서 돌아오면 망태기 또는 지게를 지고 논둑길로 달려가서 지천으로 번진 풀을 베어왔다. 끈기 덕분에 가을 벼베기 할 때 진가를 발휘했다. 낫질을 할 때 낫에 너무 힘을 주지 않고 벼 포기를 부여잡고 탄력있게 끌어당기면 벼가 한 아름씩 내 품에 안겼다. 그러나 벼베기 일당은 어른들의 반 값을 받아 속은 상했지만 스스로 돈벌이 한다는 자부심이 대단했다.
그 순간, 아버지와 친구분들의 표정이 그렇게 밝아 보일 수가 없었다. "허허, 우리 아들 보았지! 이제 장정이 다 되었네."
필자는 고등학교 졸업 후 사기업에 있다가 지금은 한국농어촌공사 정읍지사에 근무하고 있다. 그로부터 어느덧 삼십오년, 참 지난한 세월이었다. 지금 시골 땅에선 논에 물을 가두고 못자리하고 모내기를 준비하는 계절이 됐다. 그 때 당시에는 쟁기로 초벌·두벌·세벌 갈고 난 뒤 써레질 하고 괭이로 논고르기 하며 모심는 때다. 나는 물 댄 논바닥을 맨발로 밟는 감촉을 잊을 수 없다. 굳이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지 않아도 어느땐가 흙으로 돌아갈 각오가 돼 있다. 내게 늘 가슴에 사무치는 아버지의 품 속 같다. 아버지는 온몸으로 9남매를 가르치기 위해 샛별지는 새벽, 라면에 계란하나 풀어서 드시고 나가는 모습을 나는 가끔 보았다. 소 앞세우고 쟁기지고 문 앞에 나서고 나면 날이 저무는 저녁까지 흙과 더불어 평생을 살아오신 아버지의 삶이 바로 가르침이었다.
여기에 술 한 잔 드시면 '홍도야 울지마라' 가 아버지의 십팔번이었다. 나도 노래를 좋아한다. 내가 그 노래를 부를때면 아버지가 노래 부르던 모습이 절로 생각난다. 내게 주어진 일이 소외된 이웃에게 다가서는 것이라면 그 일에 남은 정성을 쏟고 싶다. 그리고 내 아들에게도 전해주고 싶다. 어버이날을 맞아 내 아버지의 가르침대로, 쟁기를 잡고는 앞만보고 가라고….
/ 김문철(한국농어촌공사 정읍지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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