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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고] 23년만의 장례식

김성주 (전북도의회 환경복지위원장)

 

5월의 하늘은 눈이 부시게 푸르다. 5월29일 서울대학교 아크로폴리스광장. 필자의 대학 동기이자 감방 동기인 안치웅의 초혼제가 열렸다.

 

잠깐 다녀온다며 집을 나선 후 소식이 끊긴지 무려 23년만에 치르는 장례식이다. 시신 없는 관에는 성경책과 경제학개론 한 권이 대신 넣어졌다. 그가 무수히 지나다녔을 교정에는 영문 모르는 까마득한 후배들이 그 앞을 무심히 지나쳤다. 노동기본권을 부르짖으며 스스로를 불사른 전태일의 어머니, 고문으로 숨진 박종철의 아버지, 최루탄에 쓰러진 연세대생 이한열의 어머니가 그의 마지막을 지켜봤고 그의 선후배 동료들이 함께 했다.

 

필자가 치웅이를 처음으로 만난 것은 85년 대우어페럴사건이었다. 저임과 장시간 노동에 시달리던 10대 후반 여성이 대부분인 구로공단의 섬유업체 대우어페럴에서 일하던 이들이 노조를 만들고 회사측에 일당 100원 인상을 요구했다. 회사는 노동자들이 농성에 들어가자 구사대를 동원해 농성장을 에워싼 채 물과 전기를 끊어버렸다.

 

"배고파 못살겠다"며 무려 6일 동안 아무 것도 먹지 못하고 있던 여동생 같은 노동자들을 위해 우리는 구속을 각오하고 돕기로 결심했다. 최소한의 갈증과 배고픔을 면해 주기 위해서, 아니 그들이 결코 혼자가 아니라는 것을 확인시켜주기 위해 빵과 음료수, 의약품을 짊어진 채 경찰의 삼엄한 경계망을 뚫고 2미터가 넘는 공장 뒷문을 넘어 농성장으로 진입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이내 구사대들에게 끌려나와 각목과 쇠파이프와 발길질을 수없이 당한 채 거꾸로 '폭력죄'로 구속되었다.

 

우리는 그렇게 만났다. 치웅이는 남원에서 태어나 광주에서 고교를 다니고 서울대 무역학과에 입학한 후 민주화운동에 뛰어들었다. 교도관들이 새색시라고 부를 정도로 인상만큼이나 순진하고 착한 청년이었다.

 

교도소에서 출소한 후 복학하여 학교도 마친 치웅이를 마지막 만난 것은 88년 올림픽이 열리던 해 봄이다. 앞으로 서로 할일에 대해 격려하고 헤어진 지 얼마 후 그가 갑자기 사라졌다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집에서 아침을 먹고 잠깐 나갔다 온다고 한 후 소식이 끊긴 것이다.

 

이후 치웅이 부모는 자식이 언제 돌아올 지 몰라 문을 잠그고 잠들지 못하는 세월을 무려 23년이나 보내야 했다. 이제는 눈물조차 말라버린, 이제는 돌아오리라는 희망조차 접어버린 피눈물나는 세월을 견뎌온 것이다.

 

그 사이 의문사위에서도 여러 차례 조사를 벌였지만 끝내 사실을 밝혀내지 못하다가 치웅이가 사찰대상이었다는 어느 기관원의 진술에 따라 뒤늦게 2010년 민주화운동 관련 행방불명자로 인정되었다. 그가 살아 있다면 나처럼 아이 둘 쯤은 낳았을 것이고 머리에 흰머리도 희끗희끗 생겨났을 것이다.

 

그가 살았던 세월만큼 다시 지나 그와 다시 마주한다. 이 순수하고 순진한 청년에 닥친 어둠의 그림자를 우리는 아직 밝혀내지 못했다. 이제 치웅이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에 쉴 곳을 마련했다. 평생 약자를 위해 살고자 했던 그의 옆에는 망루에 올랐다가 비극적으로 세상을 떠난 용산철거민 5명이 잠들고 있고 그 위에는 서울대 물리학과를 그만두고 성수동 공장에서 일하던 중 산재로 사망한 대구의 조정식이 함께 하고 있다.

 

치웅이 쉴 공간을 마련해주고 난 후 그 날의 농성노동자와 구속대학생은 처음으로 마주했다. '노동자라는 이름을 자랑스럽게 만들어줘서 고맙습니다.' '꼭 한 번 보고 싶었습니다.' 우리는 서로 이름도 모르고 얼굴 한 번 본 적 없지만 같은 목표아래 싸웠다.

 

우리는 잊고 살았다. 우리가 호흡하는 자유로운 공기가 어디에서 온 건지 까마득히 잊고 살았다. 사람 때문에 용기를 얻고 사람 때문에 실망한다. 민주주의는 구호가 아니라 사람들의 삶 속에 숨 쉬고 있음을 다시 25살 청년 안치웅의 순진한 눈망울로 인해 깨닫게 된다.

 

오월의 하늘은 그래서 눈이 시리게 푸르다.

 

/ 김성주 (전북도의회 환경복지위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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