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로가기 버튼
일반기사

2. 전주 덕진공원의 기념물

친일 잔재에서 동학·법조3성까지…과거와 현재 이어주는 역사 공간

 

'전주 덕진공원은 친일파들이 만든 공간일까'

취향정과 취향정비. (desk@jjan.kr)

전주에 사는 사람들에게 덕진공원은 친숙하지만, 이같은 의문을 품는 이는 많지 않다. 덕진공원을 산책하다 보면 의외로 비석과 동상 등 기념물이 많이 세워져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여기엔 우리가 몰랐던 한국의 근·현대사의 숨은 이야기가 녹아 있다. 관심이 없다면 그저 그곳에 있는 돌 하나에 지나지 않지만, 조금 관심을 가져보면 비석에 새겨진 글씨, 동상의 얼굴 등이 보이기 시작한다.

 

▲ 취향정기 비석

 

사람들이 비석을 세우는 것은 아마도 무엇인가를 후세 사람들에게 알리고 싶어서일 것이다. 비석에는 문자로 된 기록이 있다. 비석을 세운 목적, 비석을 세운 시기, 비석을 세운 사람들이 누구인지 드러난다. 결국 비석은 과거에 살았던 사람들과 현재의 나를 연결시켜준다.

 

덕진공원에 들어가면 연못가에 취향정이 있다. 취향정은 덕진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건물이다. 이 취향정 앞에 비석이 있다. 덕진공원에서 가장 오래된 이 비석의 내용을 확인하면 덕진공원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최영희장군공덕비. (desk@jjan.kr)

 

이 비석은 취향정기(醉香亭記)로 시작되는데, 취향정을 건립하게 된 과정을 기록해놓은 것이다. 이에 따르면 1917년 박기순(朴基順)에 의해 세워졌다. 그는 자신의 회갑을 기념하여 지금의 덕진공원에 취향정을 건립하고 취향정과 이를 포함하고 있는 이동면 검암리 1280번지 6414㎡에 전주면사무소에 기부하였다. 이 사정을 비석을 세워 기록해 놓았던 것이다.

 

그런데 이 비석을 자세히 살펴보면 글자 두자가 마모되어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왜 이 두 글자가 마모되었을까? 비석에는 '○○육년신미춘소석박기순기(六年申未春小石朴基順記)'라고 되어 있는데 여러 가지 정황을 미루어 추정해 보면 마모된 글자가 '대정(大正)'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대정은 바로 일제강점기 일제가 썼던 연호다. 일제강점기에는 연대를 표시할 때 반드시 일본의 연호를 쓰도록 하였다. 여기서 대정육년(大正六年)은 1917년에 해당한다. 말하자면 대정은 바로 일제의 잔재인 것이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후세에 누군가 대정이라는 글자를 지워버렸던 것이다.

 

당시 박기순은 전주에서 제일가는 부자였으며 유지로 대접받고 있었다. 또한 아들인 박영철(朴榮喆)은 일본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일본군으로 있다가 뒤에 익산군수, 강원도지사, 함경북도 지사 등을 역임하였고 말년에는 중추원참의를 지냈다. 다시 말해 이들은 일제강점기에 재산과 권력을 가지고 있으면서 일제에 적극 협력했던 친일파였던 것이다.

 

그런데 바로 이러한 친일파들이 만든 덕진공원이 전주에 사는 사람들의 가장 편한 안식처가 되었다. 이러한 사실을 알고 기분 좋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바로 역사적 사실이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사실이 있었다는 것을 결코 잊지 않고자 하는 것일 것이다. 덕진공원이 친일파에 의해 만들어졌다는 사실을 아는 것과 그렇지 못한 것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존재한다. 이와 관련해 2005년 8월 9일 친일잔재청산을 위한 전북시민연대가 취향정이 친일파 박기순에 의해 세워졌다는 내용을 설명하는 안내판을 설치하기도 했다.

 

▲ 최영희장군공덕비

 

덕진공원의 정문인 연지문을 거쳐 들어가면 그네가 나온다. 이 그네를 지나 오른쪽으로 연못을 따라 가다보면 '최영희장군공덕비(崔塋喜將軍功德碑)'라는 비석을 만날 수 있다. 이 비석은 덕진공원에서 취향정기 비석 다음으로 오래된 것이기도 하다. 이 비석은 1958년 전주시민들이 추진건립위원회를 결성해 세운 것이다. 최영희장군은 1922년 서울에서 태어나 일본에서 공부한 뒤 해방이 되자 국군창설에 참여하여 헌병사령관 등의 요직을 담당하였다. 그는 6·25 한국전쟁에서 낙동강 작전의 전세역전의 결정적인 계기를 마련하기도 하였으며 이후 국군 제1사단장과 제8사단장을 역임하였다. 이후 그는 제8사단장으로서 전주에 주둔하여 삼남지구사령관을 겸하면서 빨치산을 토벌하는 일에 주력하였다.

 

그렇다면 왜 이 비석이 덕진공원에 세워지게 되었을까? 그것은 당시에 덕진공원에 제8사단이 주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전라북도는 빨치산들이 가장 활발하게 활동한 지역이었다. 한국정부는 전쟁이 휴전협상으로 소강상태가 되는 상황에서 빨치산토벌에 치중하게 된다. 그리고 8사단에게 전북지역을 관할하는 임무를 맡도록 한다. 그리고 이 8사단이 바로 이곳 덕진공원에 주둔하였다. 이러한 이유 때문에 지금의 자리에 최영희장군의 공덕비가 세워진 것이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한국전쟁시기에는 덕진공원 경내에서 군인들의 천막이 즐비하고 오고가는 군인들의 군화발 소리가 요란하였을 것을 짐작해보면 세월의 무상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과거의 일들이 모두 사라진 것처럼 보이지만 비석이라는 형태로 남아 우리에게 역사의 흐름을 짐작하게 한다.

 

▲ 덕진공원을 근현대사 역사교육의 공간으로

 

덕진연못은 후백제를 건국한 견훤이 도성방위를 위해 늪을 만들면서 시작된 것으로 전해졌다.

 

그 역사를 따지면 1000년에 가깝다. 동국여지승람에 따르면 '전주부의 지세가 건(乾)이 공허하여 기맥이 흘러나간다. 이런 까닭에 도성 서쪽에 있는 가련산에서부터 동쪽에 있는 건지산을 이어 큰 뚝을 쌓아 완성했다.

 

이를 덕진(德津)이라 불렀다'라고 하여 조선시대 둑이 만들어졌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후 일제강점기인 1917년 박기순이 덕진공원을 조성하였고, 1974년에는 전주시가 현대적인 공원으로 재정비하였으며 이후 전주시가 주축이 되어 여러 차례 정비를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덕진공원은 역사, 문화, 생태, 환경 등 실로 무궁무진한 콘텐츠를 가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전주시민의 의식 속에 편안함과 안식을 주는 공간으로 자리잡고 있다. 이러한 분위기 속에서 덕진공원 명소화사업이 진행되고 있다. 이는 충분히 가치있고 의미있는 일이라고 여겨진다. 그렇게 하려면 덕진공원 명소화 사업에 앞서 덕진공원에 세워져 있는 각종 기념물을 알리는 사업도 포함되어 진행되는 것이 바람직하다. 덕진공원 내에는 현재 비석 동상 등 16개의 기념물이 있으며 덕진공원 주변에도 많은 기념물들이 위치해 있다. 이러한 기념물들은 주로 전주 또는 전북, 대한민국의 근·현대사를 고스란히 담겨있다. 따라서 이 기념물을 활용해 전주시민들에게 자신들과 직접적으로 연결된 근현대사를 알 수 있는 계기를 만들어주고, 더 나아가 학생들에게 근현대사를 현장감 있게 설명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드는 게 무엇보다 필요하다. 이러한 기념물만을 대상으로 해설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 일과 덕진공원을 소개하는 안내서에 이 기념물을 설명하는 내용도 포함돼야 한다. 이렇게 된다면 근·현대사에 대한 인프라가 취약한 전주임을 고려할 때, 매우 긍정적인 효과를 가져올 것이다. 이제 우리가 덕진공원에 세워진 수많은 기념물을 다시 한번 눈여겨보고 그것들이 갖는 역사를 되새겨 봐야 할 것이며, 더 나아가 그것들을 우리의 역사문화자산으로, 역사문화콘텐츠로 활용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

 

/ 이병규(동학농민혁명기념재단 연구조사부장)

전북일보
다른기사보기
저작권자 © 전북일보 인터넷신문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개의 댓글

※ 아래 경우에는 고지 없이 삭제하겠습니다.

·음란 및 청소년 유해 정보 ·개인정보 ·명예훼손 소지가 있는 댓글 ·같은(또는 일부만 다르게 쓴) 글 2회 이상의 댓글 · 차별(비하)하는 단어를 사용하거나 내용의 댓글 ·기타 관련 법률 및 법령에 어긋나는 댓글

0/ 100
최신뉴스

군산새만금 글로벌 K-씨푸드, 전북 수산업 다시 살린다

스포츠일반테니스 ‘샛별’ 전일중 김서현, 2025 ITF 월드주니어테니스대회 4강 진출

오피니언[사설] 진안고원산림치유원, 콘텐츠 차별화 전략을

오피니언[사설] 자치단체 장애인 의무고용 시범 보여라

오피니언활동적 노년(액티브 시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