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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 이완용과 익산의 묘 터

명당이 그를 거부했나…후손들이 폐묘

이완용 묘터로 추정되는 익산 낭상면 내산동 일대, 지금은 가묘도 사라지고 석재 채취 현장으로 변해있다. (desk@jjan.kr)

몇 해 전, 방영된 TV프로그램이 불현듯 떠올랐다. 아나운서는 도심 속 청춘들에게 다양한 인물들의 사진을 보여주며 '누군가?' 라며 물었고, 그에 대한 대답을 간단히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이었다. 그 인물 속에는 연예인, 운동선수, 현직 정치인, 항일 의사 등이 포함되어 있었으며, 오래된 흑백사진 한 장과 함께 '이완용'이란 팻말이 의미심장하게 제시되었다.

 

"한 번도 안 들어봤어요. 의사 였나?"/ "정치인?"/ "마음이 부드럽고 착한 사람?"/ "음, 무얼 팔았는데 무엇을 팔았던 사람인데…"/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던 사람이지 않았을까요?"

 

1910년 8월 22일, 대한제국과 일본 제국 사이에 맺어진 합병조약은 대한제국의 내각총리대신 이완용과 제3대 한국 통감인 데라우치 마사타케가 형식적인 회의를 거쳐 조약을 통과시켰으며, 조약의 공포는 8월 29일에 이루어져 일제 강점기가 시작되었다.

 

1926년 2월 12일, 이완용은 1926년 2월 12일 세상을 떠났다. 1858년에 태어나 68세까지 살았으니 천수를 살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질긴 목숨 모질도록 이어나갔다 해야 할까? 그때 당시 평균 수명이 40세도 안 되던 시점이었으니 그는 부귀영화와 함께 장수까지 누린 셈이다.

 

당시 '경성일보'에 의하면 "사이토(齋藤實) 총독 등 1300여 명의 조객이 참석한 가운데 극도의 애도 속에" 장례식이 열렸다. 일제 강점기 고종과 순종의 국장을 제외하고 조선인의 장례로는 가장 성대하고 장엄했다고 한다. 또한, 일제는 이완용의 업적을 높게 사 그의 장례식을 기록영화로 만드는 촌극을 연출하기도 했다.

 

이완용은 사후를 대비하여 유명한 역학자들을 동원, 최고의 명당자리를 찾게 했다고 한다. 물론 자신의 치적으로 인해 사람들의 왕래가 빈번한 곳이 아닌 첩첩산중을 방불케 한 곳이 조건으로 내걸렸음은 두말할 나위가 없다. 그리하여 그 당시 산세가 험하고 깊어 사람이 찾아오지 않는 전북 익산시 낭산의 명당자리를 그가 차지하게 되었다.

 

▲ 베일에 싸여진 묘터

 

풍수지리의 지관들은 명당에도 꼭 임자가 있다고 주장한다. 아무리 돈이 많고 권세가 있어도 덕을 쌓지 못하면 명당자리가 있어도 보이지 않고 또, 설상 찾아서 쓴다더라도 이변이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의 묘터는 전국에 몇 개가 진 묘냐 가짜 묘냐 라는 의문에 휩싸였다. 묘에 대한 행방이 무수한 억측만 낳았을 뿐 위치가 정확하게 밝혀지지 않았던 것이다. 또한 그의 묘는 여러 개라는 추측들도 난무했다. 이러한 추측들이 난무한 이유들은 여러 가지가 있었겠지만 첫째로, 민족 반역자에 대한 감정으로 그의 시신이라도 벌하기 위해서였을 것이며 둘째로, 일제의 비호아래 최고의 권력을 휘둘렀던 그였기에 값비싼 부장품이 많을 거라는 지레짐작이었을 것이다. 이 궁금증은 1979년, 이완용이 죽은 지 53년 만에 밝혀진다. 그의 후손이 인부 10여명을 동원 직접 발굴하고 시신을 화장함으로써 밝혀진 것이다. 그가 진짜 묻혔던 자리는 오지로서 신선이 내려와 춤을 추는 모습을 갖춘 명당자리임이 드러났다.

 

익산 낭산면 내산동에 위치한 성인봉 중턱, 좌청룡 우백호인 좌우 산맥이 계곡을 이루는 중간 자리에 위치한 이완용 묘는 익산 최고봉인 미륵산과 맞절을 하고 있는 자리였다. 봉분 뒤로는 나무들이 빽빽이 둘러쳐서 있어 시신이 편안하게 잠들게 한다는 명당 중 명당.

 

▲ 아카시아 뿌리가 그의 심장을 겨누다

 

1979년 4월, 서울에 사는 증손자 형제와 손주며느리들이 찾아와 인부 10여 명을 동원, 폐 묘한 뒤 유골은 거두어 화장하여 인근 장암천에 띄워 보냈다 한다. 하지만 지관들의 주장처럼 명당자리가 사람을 가리는 걸까? 당시 묘 터에는 잡초와 아카시아 뿌리들이 묘 터 깊숙이 뿌리박아 묘의 형태를 명확히 구분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또한, 아카시아 뿌리가 마치 시신의 심장을 파고드는 형태를 띠었으나 관은 뚫지 못했다. 명당의 기운이 아니었다면 그의 관은 제 모습을 남겨놓았을까?

 

작업에 참여한 인부들은 봉분이 일반 묘와 달리 크고 상석 등이 잘 다듬어져 있어서 옛날 권세 있던 사람의 것으로만 추정했을 뿐 이완용의 묘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관의 모습이 드러나자 관 뚜껑에 빨간 글씨로 '조선총독부 중추원부의장 정이위 대훈위 후작우봉이공지구(朝鮮總督府 中樞院副議長 正二位 大勳位 侯爵牛峯李公之柩)'란 글씨가 선명하게 씌여져 있어서 매국노 이완용의 묘란 것을 알 수 있었다한다.

 

묘에는 이완용 부부가 합장으로 묻혀 있었고 그의 관은 53년의 세월이 지났지만 원형이 썩거나 손상된 흔적이 없었다고 한다. 또한 세간의 관심과는 다르게 부장품으로는 생시에 입었던 관복과 평상복 서너 벌을 비롯, 그의 일생동안의 행적이 기록된 지석(20×30Cm)뿐이었다.

 

지관들의 말대로 너무 많은 죄를 지어서 명당이 안보인 것인지, 아니면 명당이 그를 거부해서 이변이 일어났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는 그의 후손들의 손으로 폐 묘 되어 화장된 채 강물에 뿌려지는 신세가 되었다.

 

/ 김성철 문화전문시민기자(우석대 한국어센터 강사)

 

※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을 지원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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