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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방학

 

'내일이면 방학이다! 오늘은 대통령을 뒤로 모셔두고 국민교육헌장을 외우는 순서대로 집으로 간다!' 풍남초등학교 4학년6반 김순재 담임선생님 말씀이다. 시작되는 겨울방학, 남부시장을 끼고 전라북도 전역에 발이 되어주는 배차장에서 김제, 정읍, 부안, 고창 이름표를 왼쪽 가슴에 단 완행버스를 올라탄다.

 

쑥고개 넘어 금천을 지나 김제군 금구면 금구리 449번지 할머니 집으로 장기투숙차 떠난다. 충청도 조치원이 고향인데 이곳으로 시집와 말투가 서울식이라 모두 서울할머니라 부른다. 자그마한 체구에 강단이 분명해서 무섭기 조차한 우리할머니, 사시는 곁으로는 가족으로 이어진 세분의 할머니가 걸어서 5분 안에 모여 산다.

 

추운날이 다가도록 걷혀지지 않는 이불동굴이 있는 곳, 샘을 가운데 두고 옆집에 사는 담배 잘태우시는 가운데집 할머니는 입체적4D를 갖춘 스토리텔러다. 깊은 밤 남산 꼬깔봉을 넘어오는 촛불하나가 있는데 집 앞 팽나무 밑까지 내려오더라…. 가까이 가서보니 호랑이 꼬리에 초가 말려있어, 담배하나주면 안잡아먹지…, 싸리재 저수지 언덕 옆에 무덤가에 저 외눈박이 물새가 우는 사연 등.

 

다음은 앞집에 살아서 앞집할머니라 불리는 키가 크신 할머니다. 치마를 오른쪽으로 감아올려서 허리띠를 질끈 동여 멘다. 저고리 소매 걷어부쳐 장고채 꼬나들면 소여물 속 콩대도, 아궁이 부지깽이도, 지난여름 장마 때 처마 끝에 비 받아 뒷간재로 광나게 닦아낸 찬장 속 놋수저도 나와서 춤을 춘다. 앞집할머니, 그 시절 서울 워커힐에서 공연문의가 왔을 정도다.

 

그 다음 학다리 건너 살아 다리건너할머니다. 남쪽으로 방향을 하고 높은 곳에 자리한 집이다. 하늘색이 칠해진 격자창이 길게 쳐있는데 키발을 딛으면 바깥풍경이 72미리 삼남극장 시네마스코프 영화 속 한 장면이다. 로마 시가지를 내려다보는 네로처럼 온 동네가 한눈에 들어온다. 창을 사이에 두고 따뜻한 방과 매서운 바깥바람은 밤새 얼마나 싸웠는지 포화 속 얼음 궁처럼 성에로 피워 놨다. ET의 손가락이 되어 창에 찍으면 금새 녹아내리는 물방울은 창틀에 돋보기로 변신해 잠시 머물다 스며 사라진다.

 

그 방에는 당숙의 서재가 있다. 보물섬에서 생고생하는 걸리버, 거꾸리와 장다리 아빠 김성환씨, 고바우영감 동생 코주부 아저씨, 장발장 삼촌을 둔 소공녀, 틴틴의 사부 홍길동, 석가모니 친구 손오공 등 해마다 찾아올 때까지 그들은 그곳에서 기다리고 있다. 이렇게 유년의 겨울방학은 서울할머니 집을 베이스캠프로 하고 세분 할머니 집을 오가며 여물어갔다.

 

함석으로 달아맨 채양 처마 끝, 지난 여름방학 잠자리채 둘러메고 왕거미 집을 찾던 자리에는 고드름이 길이 재며 걸려있다. 포근한 날씨에 똑똑 덜어지는 소리에 발맞춰가며 할머니 따라 장에 가는 날! 박하사탕에 튀밥도 튀고, 바늘 사러간 만물상 벽에 기대있는 하얀 광목에 미국국기 바탕을 두고 손에 손잡는 짙은 청색마크가 선명히 찍힌 밀가루 푸대가 돋보인다. 겨울밤 우주전쟁을 치루는 화로를 웃묵에 두고 대청마루 콩나물시루 물 내리는 소리에 때맞춰 서생원 오줌 싸는 긴 겨울밤에 손주는 샤갈의 눈내리는 마을의 주인공이 되어 꿈길 위를 날아다닌다.

 

이제 타임머신은 밤낮길이가 없어진 동지날과, 캐롤이 사라진 크리스마스를 사이에 두고 완산소방서 신호등 사거리에 멈춰선다. 옆에 서있는 노란색 학원차 몸통에 이렇게 써있다. '자물쇠학원'이라고. 그 학원 건너편에 빠삐용 학원을 차리면 어떨까?

 

처마 없는 육면체, 꽃 없는 시멘트 덩어리 속에서 꿀 찾아 붕붕거리며 들랑거리는 일벌처럼 살아가는 우리의 아들딸의 겨울방학은 어디쯤에 왔을까? 자물쇠학원에 갇혀있을까? 미국사람 밥해먹고 사는 집에 가서 살다보니 김치 맛을 잊었을까?

 

만리장성 중국어학원에 진시황되어 자고 있진 않을까? 스티브잡스 일기장에 찍힌 날씨를 보고 한국의 계절을 읽을까…?

 

나는 오늘도 할머니와 같이 지내온 그해 겨울방학 속으로 들어갈 준비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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