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가 죄 없는 이들을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는가. 영화가 끝나고도 관람객들은 한동안 일어나지 않았다. 비교적 객관적인 시각에서 접근하여 토벌대와 양민의 관계를 사실적으로 보여 주는 데 일정 부분 성공했다는 느낌이 전해 왔다. 가슴 저린 감동으로 관객들이 4·3 사건을 생각하게 만든 작품이었다.
특히 이들을 죽음으로 내몬 것은 '미군과 미군정 당국'이라는 마지막 자막은 영화 전체를 되돌아보게 했다. 그렇다면 과연 진실은 무엇이었을까.
의문 속에 '한라산'의 작가 현길언의 증언을 접하게 되었다. 제주 4·3 사건은 항쟁사가 아니라 수난사라고 보아야 한다는 것이 현 작가의 주장이다. 현 작가는 4·3 사건 당시 아홉 살의 나이로 제주 남원읍 수당리에 살다가 가족들과 20여 일간 피난살이를 했고 일가친척들이 수난을 당한 당사자다. 그런 그가 4·3 사건은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맞선 저항사가 아니라 제주도민의 수난사라고 증언한 것이다. 그가 쓴 장편 '한라산'은 그 과정 속에서 제주도민의 삶을 생생하게 다루고 있다.
이청준은 2003년 간행된 '신화를 삼킨 섬'에서 4·3 사건은 수평적 관계가 수직적 관계로 변할 때 발생하는 지배와 피지배의 역학 구도에서 발생했다고 말했다. 두 작품은 4·3 사건으로 인한 민초들의 희생을 중심에 두고 있다는 점에서 유사한 현실인식을 보여 줬다.
하지만 우리가 경험한 사실이나 진실이 그대로 역사에 기록되는 것은 아니다. 4·3 사건은 뒤이어 일어난 6·25와 무관한 것이 아니다. 이는 한반도를 두고 권력 투쟁의 장으로 만든 거대한 정치세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여기서 한 가지 다시 생각해 볼 것이 2005년 러시아 사회정치사문서보관소에서 발견된 스탈린의 편지이다. 이 문건은 체코의 클레멘트 대통령에게 전하는 구두 명령으로 당시 프라하 주재 소련대사에게 보낸 스탈린의 편지이다. 이 편지에는 6·25 때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 소련대사 말리크가 왜 참여하지 않았는가를 설명한 부분이 있다.
여태까지는 소련대사가 안전보장이사회에 출석하지 않는 바람에 미국 주도로 유엔군 파병이 결정되었다는 것이 학계의 중론이었다.
하지만 이 문건은 스탈린이 미국을 한반도 전쟁에 끌어들이기 위해 회의에 불참한 것으로 되어 있다. 그 결과 미국과 중국의 대결구도가 만들어져 유례를 찾기 힘든 대규모 살육전이 진행됐다. 전쟁 기간 300만 명에 가까운 인명이 살상되었는데 이는 1·2차 세계대전에서 입은 피해 규모를 훨씬 넘어서는 것이었다. 소련의 입장에선 중국과 미국을 한반도에 붙잡아 둠으로써 유럽에서의 자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할 수 있었다. 6·25의 배후에는 스탈린의 세계전략이 작동하고 있었고 김일성은 그 전략에 이용당했을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권력을 장악한 사람들의 정치적 목적에 의해 무고하게 희생당한 민초들. 영화 '지슬'이 토벌대를 피해 산에 숨어든 사람들의 갈등과 고통을 박진감 있게 그려낸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왜 이런 사건이 발생했는지에 대한 의문은 생략되어 있다. 그 결과 관객들은 사실의 말단만 보고 전체를 해석하고 판단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된다.
잘잘못을 놓고 편 가르기를 시작하면 서로가 할 말이 많을 것이다. 식자들이 더 깊이 민초들의 체험의 현장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다. 4·3 사건의 진실이 동굴 속에 갇혀 의문을 증폭시켜 나간 만큼 역사가 왜곡되고 그때 희생당한 민초들은 또다시 정치 권력의 이용물로 전락할 우려가 높다. 4·3 사건 때 투쟁을 해야 할 이유도 몰랐고 힘도 없었던 민초들이 당한 고통과 희생을 잊지 않고 기록하는 것은 후대의 의무이다.
영화 '지슬'은 남북분단으로 인한 정치적 분열과 갈등의 과정을 보여 줌으로서 한국현대사가 나아가야 할 방향을 짚어 주었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한반도만이 아니라 세계사적 관점에서 그리고 파편적인 인식에서 총체적인 인식으로 시야를 넓혀야 한다는 사실을 알려 주었다는 점에서 영화 '지슬'은 깊이 음미할 가치를 지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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