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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군산 중앙초 - 일제 저항정신 면면히…야구 명문학교로 '발돋움'

지·덕·체 전인교육 선도…올해 104회 졸업식 / 정계 거목·군산상고 야구부 출신 등 다수 배출

▲ 현재 군산 중앙초 전경.

△학교가 걸어온 길

 

1907년 문을 연 군산 중앙초등학교(교장 박동수)는 올해로 개교 106주년을 맞았다. 학교 개교 당시 공립 군산보통학교 인가(4년제)를 받은 학교는 1921년 수업 연한이 6년제로 바뀌었다.

 

1938년 소화공립심상소학교로 교명이 바뀌고, 광복 이후 1946년 다시 중앙공립국민학교로 개명됐다.

 

일제강점기, 일본인 학생과 조선인 학생을 격리해 교육하는 풍토에 중앙초는 조선인 학생들만이 다니는 학교로 인식됐다. 이는 우리나라 고유의 문화와 전통을 유지·계승하는 순효과도 있었지만, 일본인 학생에 비해 여러면에서 차별을 받게 되는 역효과를 불러오기도 했다.

 

이에 중앙초 학생들은 인근 일본인 학교 학생들과 자주 충돌을 빚기도 했다고 전한다. 당시 인근 월명산 아래 신흥동부터 해망터널로 연결된 군산내항 매집지 일대가 모두 조계지였다. 당시 일본인은 이처럼 번듯한 평지에서 살았고, 조선인은 인근 산자락으로 내쫓겨 초라한 움집에서 하루하루 어렵게 살았다.

 

일제는 인근 내항을 통해 조선의 곡물 등을 수탈했다. 현재도 내항의 접안시설로 사용 중인 뜬다리는 당시 가설한 것으로 수탈의 상징과도 같은 유산이다.

 

이 같은 일제의 억압적 통치에 반발, 독립을 쟁취하기 일해선 민중들의 자발적 항거인 1919년 3.1운동을 기점으로 학교는 역사의 소용돌이에 직접 맞닥뜨렸다.

 

아직 솜털 보송보송한 중앙초 학생들은 거리로 나와 '대한독립 만세'를 외치며, 나라잃은 설움을 표출했다.

 

이 와중에 당시 학교 건물이 전소되는 시련을 겪기도 했다.

 

다행히 광복을 기점으로 학교는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1951년 가람 이병기 선생은 자신이 지은 노랫말을 통해 학교의 앞날을 축복하기도 했다.

 

이후 학교는 전교생이 4000~5000여명에 이르렀고, 1963년 야구부를 창단하면서 지·덕·체를 아우르는 전인적 교육을 선도하는 명문 학교로 발돋움했다.

 

2007년 개교 100주년 행사에서는 재학생과 학부모 등 500여명이 참여한 가운데 기념식 및 체육대회를 열기도 했다.

 

군산역 이전으로 학생 유치에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중앙초는 자랑스러운 역사와 전통을 이어나가기 위한 새로운 도약을 꿈꾸고 있다.

 

한편 학교는 올해 104회 졸업식을 열었으며, 현재까지 거쳐간 학생은 모두 3만1768명이다.

 

△학교를 빛낸 인물

군산중앙초는 정치계 거목과 '역전의 명수'로 불리는 군산상고 야구부 출신을 다수 배출했다. 11살 어린나이에 3.1운동에 투신한 김판술(10회) 전 보건사회부 장관이 대표적 정치인이다.

 

그는 일본 교토제국대학을 졸업하고, 1954년 3대 민의원 선거에서 군산지역구로 출마해 정계에 입문해 5, 11대 국회의원을 지냈다.

 

1961년 장면 내각에서 보사부 장관을 역임한 그는 한국 근현대사의 굴곡과 격랑을 헤쳐온 우리 의정사의 산증이다. 대한민국 헌정회 원로회의 의장을 역임했다. 그는 국회의원 시절 미군정의 농지개혁을 비판하고, 국민방위군 사건을 질타해 '대쪽'의원이라는 별명을 얻기도 했다.

 

강현욱(43회) 전 전북지사는 서울대 정치외교학과를 졸업하고, 15·16대 국회의원, 환경부장관과 전북지사, 국무총리실 새만금위원회 공동위원장을 거쳐 현재 학교법인 조선대 이사장, 새만금 명예 자문관으로 활동하고 있다.

 

그는 특히 새만금위원회 위원장으로 재직하는 동안 세계 최장 방조제(33.9km) 준공, 새만금 종합개발계획(MP) 및 수질대책 수립, 투자유치 등 새만금사업의 기틀을 확립하는데 많은 기여를 한 것으로 평가받고 있다.

 

대내외적으로 신망이 두텁고, 국제감각이 뛰어난 그는 전북지사 시절 미국 LA에서 연 농수산물 특판행사에서 229만8000달러의 현장판매와 200만달러의 수출계약 실적을 올리기도 하는 등 세계 속에 전북의 위상을 확립하는 공을 세우기도 했다.

 

법조계에서는 신상규(54회) 전 광주고검장이 눈에 띈다.

 

서울대 법학과를 졸업, 사법고시 21회를 통해 법조계에 입문한 그는 창원·인천지검장, 광주고검장을 역임하고 현재 법무법인 동인에서 변호사로 활동하고 있다. 2011년에는 학교법인 동덕여학단 이사장으로 선출돼 교육계로까지 외연을 넓히고 있다.

 

1963년 창단한 중앙초 야구부는 전국대회에서 3차례 우승을 차지한 야구 명문이다. 특히'역전의 명수'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군산상고의 전성기를 일군 선수들 중 상당수가 중앙초 출신이다.

 

대표적 인물로는 김성한(63회) 한화 이글스 수석코치를 비롯해 신경현(80회·한화), 정대현(83회·롯데), 이대수(86회·한화) 등 30여명이 프로와 대학에서 선수 및 지도자로 활약 중이다.

 

김성한 코치는 중앙초 야구부 1세대로서 군산상고, 동국대를 거치면서 투수와 타자를 겸했다.

 

그는 한국 프로야구가 시작된 1982년에 해태 타이거즈(현 기아) 선수로 프로에 입문, 불같은 공격력으로 해태가 한국시리지를 7번이나 제패하는 데 커다란 역할을 했다.

 

14년간 해태에서 뛰는 동안 그는 1338경기에 출장, 통산 타율 0.286, 781타점, 762득점, 207홈런을 기록했다. 1985, 1988년 패넌트레이스 최우수선수(MVP), 1992년 올스타게임 최우수선수, 골든글러브(6회), 홈런왕(3회), 타점왕(2회), 최다안타(2회) 등을 기록했다.

 

2004년 기아타이거즈 감독을 역임한 그는 현재 해태 시절 은사인 김응룡 한화 이글스 감독의 부름을 받고, 같은 팀에서 수석코치로 선수들을 지도하고 있다.

 

정대현은 자타가 공인하는 한국의 대표 투수이다. 그는 2008년 베이징올림픽에서 한국이 사상 첫 금메달을 획득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당시 결승전서 3-2로 앞선 9회말 1사 만루 위기서 등판, 병살타로 마무리하며 상대인 쿠바에 피눈물을 안긴 주인공으로 명성이 자자하다.

 

2000년 시드니올림픽을 시작으로 WBC대회까지 국가대표만 14년째이다.

 

군산교육의 산실로 꼽히는 중앙초는 수많은 교육자를 내기도 했다.

 

중앙초 교장을 역임하기도 한 김영배(52회) 전 교장, 노용주(56회) 군산 산북초 교장 등이 있다.

 

특히 현 박동수(58회) 교장은 2012년 모교로 부임, 제자이자 후배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데 전력을 다하고 있다.

 

△도약을 위한 노력

중앙초는 발명교육센터를 운영해 발명에 관심과 소질이 있는 인재를 키워나가고 있다.

 

올해 도교육청 '아토피예방중심학교'로 지정되면서, 인성과 건강을 두루 갖춘 학생을 육성하는데도 힘을 아끼지 않고 있다. 하지만 현실은 녹록치 않다.

 

박동수 교장은 마지막 교직생활을 모교에서 마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면서도 한편으로는 부담감도 갖고 있다.

 

한때 전교생이 4000명이 넘던 시절은 간데 없고 현재는 전교생이 177명에 불과한 현실이 버겁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희망도 있다. 인근 옛 군산역 일대에 개발붐이 불고 있어서다.

 

대규모 아파트단지가 새롭게 들어설 예정으로, 구도심 활성화를 위한 각종 사업이 가시화되고 있는 것이 그나마 다행스럽다.

 

박동수 교장은 "학교 설립 초기에는 항일 운동의 구심점 역할을 했고, 현대에 들어와서는 프로야구를 대표하는 인물을 다수 배출한 중앙초는 전북을 대표하는 학교"라며 "학생들이 훌륭한 선배들처럼 국가 동량으로 성장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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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국 psy2351@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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