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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민우 대통령직속 청년위원장은

숱한 실패와 도전…벤처인들의 멘토

남민우 청년위원장(51)은 익산시 여산면 제남리에서 태어나 이리중, 전주고를 거쳐 서울대 기계공학과를 졸업했다.

 

평범한 농가에서 태어난 남 회장의 어릴 적 꿈은 힘든 농사일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소박한 것이었다. 서울대학교 기계공학과에 진학한 것 역시 시대가 변해도 계속 필요한 안정적인 직업을 갖겠다는 생각에서였다고 한다.

 

전주고 재학시절 그는 대학입시 예비고사에서 340점 만점에 325점을 받아 이과 전국 수석을 할 만큼 공부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그는 1983년 대우자동차에 입사해 엔진 시험장비를 개발하는 업무를 맡았다. 이후 결혼도 하고, 안정적인 생활을 이어가는 듯 싶었으나, 남 회장은 대기업이 자신의 꿈을 마음껏 펼칠 수 있는 무대가 아님을 느꼈다. 결국 장비 국산화 개발의 새로운 꿈을 안고 중소기업으로 자리를 옮기게 되는데, 이곳에서 또 한번 좌절을 경험하게 된다. 스카우트를 제의할 때 약속했던 국산화 개발은커녕 장비 수리의 업무만 수행해야 했던 것이다. 더 이상 물러설 곳은 없었다.

 

사업할 자금도 없었고, 처음부터 창업을 꿈꿨던 것도 아니었지만 막다른 골목의 끝에서 최선의 선택은 스스로 회사를 차리는 것이었다. 창업은 남민우 회장의 마지막 선택이었다. 1991년 코리아레디시스템이라는 소프트웨어 수입 업체를 설립하여 사업 기반을 다진 뒤, 1993년 다산기연이라는 현재의 다산네트웍스 모체를 설립했다.

 

그의 사업 인생 20년은 한마디로 '4전 5기'였다. 창업 후 1년간은 잠도 이루지 못하며 죽기살기로 버텼고, 이후 사업이 탄탄대로를 걸었지만, 1997년 운명처럼 외환위기를 맞으면서 치솟는 환율로 거래처에 대금지급을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다행히 거래 업체와의 협상으로 대금지급을 6개월간 유예 받으면서 직원 12명을 이끌고 실리콘밸리로 가 1년간 기술컨설팅을 제공하며 빚을 갚을 수 있었다.

 

이때 미국에서 인터넷 붐을 목도하고 한국으로 돌아와 시작한 사업이 바로 네트워크 통신장비 개발 사업이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는 남민우 회장을 다시금 비즈니스 현장으로 이끌었다. 경영권을 재인수한 이후 남 회장은 글로벌 금융 위기 속에서 또 한번 뼈를 깎는 고통을 이겨내며 다산네트웍스의 체질을 강화했고, 이를 발판으로 2010년에는 설립 이후 최고의 실적을 달성하기도 했다.

 

다산네트웍스와 청년위원회 사무실 벽에는 '하고자 하는 자는 방법을 찾고, 하기 싫어하는 자는 핑계를 찾는다'는 문구가 곳곳에 붙어 있다.

 

그는 지난해부터 벤처협회 회장직과 청년기업가정신재단 활동을 통해서도 많은 젊은이들과 벤처 기업인들에게 멘토링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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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병기 bkweegh@jjan.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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