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연장을 찾을 때마다 늘 그랬다. 공연 시간에 임박해 빈자리 없는 주차장을 헤매다 차를 대고 허둥지둥 공연장으로 들어서면 티켓에 쓰여진 객석 번호를 찾느라 자라목을 한 채 두리번거리기 일쑤고, 자리를 찾아 앉았다 싶으면 함께 간 친구와 수다는 커녕 프로그램북 한번 제대로 읽을 여유도 없이 객석 조명이 꺼지는 날이 부지기수다. 정숙함을 요하는 장르의 공연이라도 보는 날엔 왜 그리도 유난히 마른기침은 쏟아지는지.
그런데 이와 같이 서투른 공연관람객도 더할 나위 없이 여유롭게 공연을 즐길 수 있는 매력적인 공간이 우리 가까이에 있다. 교교한 달빛을 조명삼아 산을 닮은 처마자락의 부드러운 곡선을 무대 배경삼아 관객과의 거리를 코앞 1m까지 좁히며 소통의 즐거움과 몰입의 밀도를 높인 전통한옥의 대청마루와 야외마당 공연이 그것이다.
△600년 역사 '전주향교'가 달빛 가득한 공연장으로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한 전주향교. 조선시대 지방 양반 자제의 교육을 위해 세워진 학교로 1992년 사적 제379호로 지정됐다. 중층으로 구성된 만화루를 지나 일월문을 열고 들어서면 가운데 공자·맹자 등의 위패를 모신 대성전(전라북도유형문화재 제7호)과 양쪽 좌우로 동무와 서무, 그 뒤로 학생들을 가르쳤던 명륜당과 기숙사였던 동재와 서재, 그리고 계성사 등의 건물이 보존된 곳이다.
경건하기만 할 것 같은 전주향교가 때로는 어느 공연장 못지않은 최고의 한옥 야외무대로 쓰임새를 달리하기도 한다. 공연이 이루어지는 공간은 '대성전 앞 뜨락'이다. 대성전은 앞면 3칸, 옆면 2칸에 맞배지붕 양식의 군더더기 없는 간결함이 멋스러운 건물이다.
지난 10월3일부터 5일까지 대성전 뜨락에서는 전주세계소리축제 초청공연이 있었다. 한국, 터키, 시리아의 전통음악을 한자리에서 만날 수 있는 공연과 평소 쉽게 접할 수 없는 '정가와 범패의 밤' 과 '산조의 밤' 등이 열렸다. 특히 4일에 있었던 한국전통현악기 앙상블 '여류(如流)'와 네이(ney, 이슬람 관악기) 명인 쿠드쉬 에르귀너, 시리아의 전통 보컬리스트 와에드 부아순, 전통타악기 연주의 명인 피에르 리고풀로스가 함께한 더블빌(동시공연) 공연은 뜨락을 가득매운 내·외국인 관람객들의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다. 일찍 온 관객도, 공연 내내 덜 잠긴 수도꼭지마냥 띄엄띄엄 입장하던 일부 지각생들조차도 다른 이 눈치볼 것 없이 편안하고 자유로운 자세로 공연을 즐겼다. 최소한의 경관조명과 한지등만을 활용해 대성전의 아름다움을 부각시킨 무대연출은 가을밤, 고즈넉한 한옥의 멋과 어우러져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긴 여운을 남겼다.
△잠시만요, 판소리 한자락 듣고 가시게요
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8호, 전주시 완산구 교동에 위치한 '학인당'은 인재 백낙중 선생이 1905년 궁궐 건축에 참여한 도편수와 대목장 등 연인원 4280명의 공사인원을 투입해 2년 8개월간 백미 8000가마의 공사비를 들여 완공한 전주한옥마을의 대표 고택이다. 해방 이후에는 백범 김구 선생을 비롯한 임시정부 요인의 숙소로 사용되기도 했던 유서 깊은 공간이다.
하지만 정작 학인당이 판소리 공연에 가장 최적화된 공간을 품고 있음을 알고 있는 이는 많지 않은 듯 하다. 학인당 대청은 조선말 전주대사습경연이 일제에 의해 강제로 폐지되자 그 명맥을 잇기 위해 판소리 공연에 적합한 구조로 설계됐다. 2층 높이에 달하는 높은 천장, 청중 100여 명이 동시에 관람할 수 있는 한옥 3채 규모의 넓이. 또 그만한 높이와 넓이를 감당하기 위해 들보 7개를 사용한 '칠량(七樑)집'은 그렇게 탄생했다.
과거 소리꾼들에게 최고의 공연장이었던 '학인당 대청'은 오늘날 여전히 명창들의 공연장으로 구애의 대상이다. 전주 학인당 국악제를 비롯해 전주세계소리축제의 판소리 다섯바탕, 산조의 밤 공연 등이 이 곳에서 판을 벌였으며, 올 해에는 임현빈(수궁가), 김미나(적벽가), 박지윤 & 모보경 명창(춘향가)을 비롯해 유수정(흥보가), 조주선(심청가) 등 젊은 소리꾼들까지 더해져 100년 세월의 더께가 정겹게 내려앉은 역사 속 시공간을 내일로 이어나가는데 힘을 보태고 있다.
△대청문은 캔버스, 마당은 잔치집
올 한해 도내 곳곳의 한옥에서는 매주 토요일 저녁마다 신명나는 소리판이 벌어졌다. 한옥자원활용 야간상설공연의 일환으로 전주를 비롯해 남원, 익산, 고창, 임실 등에서 다양한 형태의 한옥을 무대로 한 야외공연들이 진행됐다. 특히 전주한옥마을 소리문화관과 익산 함라면 함라마을 이배원 가옥에서는 한옥의 정취를 고스란히 맛볼 수 있는 마당창극과 퓨전 마당극이 올려졌다.
전주한옥마을 초입에 자리한 소리문화관은 판소리의 보존과 계승을 위해 전주시가 건립한 문화시설로 한옥 4동이 ㄷ자로 놓여있다. 지난 5월 부터 10월 첫째주까지 매주 토요일 저녁 8시 마당창극 '천하맹인이 눈을 뜬다' 공연으로 관객을 맞이했다. 팔작지붕의 늠름한 본관 한옥을 주요 무대로 활용했으며, 본관의 대청문은 공연의 줄거리를 설명하는 영상의 스크린도 됐다가 그림자극이 펼쳐질 때는 배경막으로, 주막집 장면에서는 여행자들이 묵어가는 숙소의 방문으로, 매 장면마다 역할을 달리하며 관객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연못 위 정자, 놀이마당을 빙 둘러싼 회랑의 복도, 특히 본 무대 앞에서 관객석으로 T자형 돌출무대를 런웨이처럼 길게 빼 출연진들의 등퇴장 동선으로 적극 활용한 점은 장면전환이 수월치 않은 한옥공연의 단점을 보완해 입체적이고 역동적인 장면을 만들어냈다는 평을 받고 있다.
등록문화재 263호로 지정된 익산 함라마을 옛 담장길은 소담한 토석담이 주를 이룬다. 마을 이야기들을 나즈막이 속살대며 지나가는 담장 위 바람을 따라 걷노라면 금새 이배원 가옥(전라북도 민속문화재 제37호)을 마주할 수 있다. 1917년, 함라면의 대표적인 만석꾼이었던 이배원이 건립한 가옥으로 현재는 안채와 사랑채, 그리고 주위의 토석 담장만이 남아 있다. 사랑채는 내부를 개조해 원불교 교당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배원 가옥'에서는 함라면의 만석꾼 삼부자 이야기를 소재로 한 마당극 '함라 삼부잣집 잔칫날'이 올려졌다. 부유한 만큼 나누는 데에도 아낌이 없었던 만석꾼 삼부자의 이야기가 주된 배경. 콘서트 형식의 퓨전 마당극으로 해설자가 거간꾼처럼 배우들과 관객들을 이어주며 잔칫집을 연상케하는 흥겨움을 이끌어내고 객석과 무대가 앉은 채로 손 내밀어 악수를 청해도 될 만큼 가까워 관객들의 공연 참여도와 몰입도가 높았던 점들은 한옥 야외마당이라는 장소가 선물한 큰 장점이라고 보여진다.
답답하고 정형화된 실내 공연장이 아닌 바람과 하늘과 때로는 야속한 빗줄기까지도 고스란히 공연의 일부가 되는 한옥 야외공간에서의 공연은 전문 공연장이 아닌 탓에 다소간 불편하고, 세련된 서비스는 부족했을지언정 관객들에게 색다른 즐거움과 감동을 선사하는 데는 성공한 듯하다. 공연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과 일탈의 즐거움을 제공하는 의미 있는 시도가 더욱 많아지기를 기대해본다.
송은정 문화전문객원기자(전주문화재단 문화사업 홍보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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