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업인 집념·건축가 철학·주민들 협조 '돈 버는 예술도시'
일본 나오시마 섬을 현대미술의 명소로 만든 것은 예술을 사랑하는 한 기업인의 집념과 세계적인 건축가의 철학, 지역 주민들의 이해와 협조였다. 자치단체가 기업 유치를 통한 경제 활성화에만 열을 올리는 사이 문화와 예술은 구색 맞추기 용으로 밀려나고 있으나, 나오시마는 그런 사례와는 거리가 멀었다. 베네세 그룹 후쿠다케 소이치로 회장과 건축가 안도 타다오는 토사와 광물 채취로 황폐된 나오시마를 '문화'라는 산소호흡기를 달아 소생시켰다. 여기에 주민들의 적극성까지 더해지면서 전 세계 애호가들의 '문화의 성지'가 됐다.
△ 3명의 세계적 작가만을 위한 미술관
지중미술관(혹은 지추미술관)은 클로드 모네, 월터 드 마리아, 제임스 터렐 등 세계적 작가 3명의 작품만을 위한 세계 최초의 지하 미술관이다. '땅속에 있다'(地中)는 이름처럼 능선을 훼손하지 않기 위해 이 거대한 미술관을 지하에 파묻은 발상이 놀랍다.
작품은 9점에 불과하지만 또 전부는 아니다. 안도 타다오의 건축물 자체가 이미 거대한 작품이기 때문이다.
안도 타다오는 콘크리트 재질이 건물 바깥 면에 드러나도록 하는 '노출 콘크리트'로 공간을 재해석한 것. 자연스럽게 건물 안으로 스며든 빛에 걸린 선(線)이 곳곳에 드리워지면 인간과 자연의 일체감을 느끼게 해준다.
먼저 '빛의 마술사'라 불리는 제임스 터렐의 시대별 빛 연작을 만났다. '오픈 필드'에서 가이드의 지시에 따라 형광색 파란 스크린이 보이는 계단에 올랐다. 문득 뒤를 돌아봤을 때 나타난 건 네온 사이로 비추는 직사각형 빛이다. 그 순간 "와" 하는 탄성이 나왔다.
또 다른 작품'오픈 스카이'에서는 관람객들이 대리석 벤치에 앉아 천장의 대형 유리창을 통해 하늘을 바라보면서 자연과 내가 하나가 되는 경험을 한다.
모네의 수련 그림 5점이 걸려 있는 '모네의 방'은 모네에 대한 경배에 가깝다. 신발이 아닌 실내화로 갈아 신어야 들어갈 수 있는 이 방은 온통 하얀색이다. 천장을 통해 햇빛이 스며 들고 전시장 바닥에 주사위처럼 생긴 백색 대리석 70만 개가 촘촘히 박혀 있다.'카라라 비앙카'라는 이 하얀 대리석은 미켈란젤로가 조각에 사용한 것과 같은 재질이다. 조명기구 없이도 천장에 들어온 햇빛과 벽과 바닥에서 반사된 빛을 통해 모네의 수련을 감상할 수 있다. 날씨에 따라 모네의 작품이 달리 보인다는 점은 매력적이다.
월터 드 마리아의 '타임, 타임리스, 노타임'에도 관람객들의 발길이 끊이질 않았다. 극장식 계단에 14t이나 되는 까만 둥근 화강암이 가운데 버티고 있고 양 옆엔 27개의 목재 조형물이 벽면을 장식한다. 천장 일부에 유리벽이 덮여 있어 햇빛에 따라 대리석 공이 전혀 다른 이미지를 연출했다.
△ 기업·예술가·주민이 일군 '아트 하우스'
혼무라 지역의 버려진 집 7채를 미술작품으로 개조한 '이에 프로젝트'도 흥미로웠다. 주민들과 예술가들이 협업을 통해 고택을 현대작품으로 재탄생시켰다는 점에서 의미가 컸다.
특히 '미나미데라'는 꼭 들러야 할 곳 중 하나다. 안도 타다오가 개조한 이 허름한 절에 제임스 터렐은 빛을 숨겨놓았다. 미나미데라 벽에 손을 대고 내부로 걸어가다 보면 한 치 앞도 안 보이는 암흑을 경험하게 된다. 앞·뒷사람의 음성에 의존해 발을 옮기다가 겨우 의자에 앉아 정면을 바라보게 되더라도 캄캄한 건 마찬가지였다. 인간의 눈이 암흑에 적응하는 시간은 10분 안팎. 뒤늦게 가느다란 푸른 빛이 천천히 드러났다. 각자의 내면에 자리 잡은 어둡고 캄캄한 '길'을 마주하다 희망을 발견한 듯한 인상을 받았다. 이에 프로젝트 1호 작품인 마야지마 타츠오의 '카도야'는 주민들의 참여로 빛을 발한 작품이다. 타스오 미야지마의 '시간의 바다 98'는 캄캄한 방에 일부 공간에 물을 채워 1부터 9까지의 디지털 숫자를 띄워 놓은 것. 5세부터 95세까지 다양한 연령층의 주민들이 띄워놓은 디지털 숫자가 깜빡거리며 불을 밝히고 있었다. 각자의 처지에 따라 전혀 달리 보이는 상황으로 받아들였다.
유명 화가가 돌을 갈아 그린 전통화와 소금창고로 쓰던 곳에 아크릴로 그린 현대화를 건 '이시바시'도 인상적이다. 천정 맞닿은 곳부터 바닥까지 그려진 폭포수를 보고 있노라면 벽을 뚫고 나올 것만 같다. 요시히로 수다의 '고카이쇼'는 본래 '기원'으로 바둑을 두는 장소였다. 스다 요시히로는 뜰에는 동백나무를 심고 다다미 방 안에는 만든 동백꽃 조각 등을 두어 진짜와 가짜, 허와 실이 대칭되도록 구성했다.
△ 베네세하우스·이우환미술관 등도 '문화성지'
안도 타다오는 평소 "지중 미술관이 닫힌 공간에서 작품과 건축이 서로 긴장관계를 형성하는 정적인 공간이라면, 베네세하우스는 자연과 건축이 경계를 넘어 자유롭게 소통하는 동적인 공간"이라고 했다. 호텔과 미술관을 절묘하게 결합시킨 '베네세 하우스'는 세토내해를 캔버스 삼아 이국적인 풍광을 선물한다. 건물 안팎에는 영국의 가장 영향력 있는 생존 작가로 꼽히는 데이비드 호크니를 비롯해 베니스비엔날레 황금사자상 수상자인 브루스 나우먼과 잭슨 폴록, 백남준 등 세계적인 작가들의 작품들로 채워져 있다.
베네세하우스, 지중미술관과 명소로 꼽히는 이우환미술관 역시 한국인들에게 자부심과 부끄러움이 함께 들게 하는 곳이다. 세계적인 작가와 어깨를 나란히 하는 이우환의 미술관을 일본인이 제안했다는 점에서다. 안도 타다오의 설계로 '만남의 방', '침묵의 방', '그림자 방', '명상의 방'으로 구성된 이곳은 20여 점의 회화와 조각 등을 통해 그의 작품 세계를 파노라마처럼 펼쳐놓았다. "미술관이 본다는 것을 넘어선 생과 사가 결부된 우주적 공간이길 원했다"는 이우환의 평소 철학이 반영된 공간으로 해석됐다. 기자단은 외국 지인들에게 혼무라 지역을 안내하는 이우환을 만나는 행운도 누렸다. 예술이라는 긴 방랑에 심취한 작가의도전은 아직도 현재 진행형인 듯 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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