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국제질서 변화 무지 주권 잃었던 우리의 역사 과거 교훈 잊어서는 안돼
그러나 동양에서는 19세기 중국이 서양세력에게 굴욕을 당할 때까지는 외교의 개념이 서양과는 달랐다.
서양에서는 1648년 ‘웨스트팔리아 조약’을 통해 국가의 크기나 종교에 관계없이 모든 국가가 불가침적인 주권을 가진다는 원칙이 확립되었으나 동양에서는 19세기까지도 패권국인 중국에게 모든 나라들이 조공을 바치는 관계여서 대등한 국가간의 외교라는 것이 성립될 수 없었다.
작은 나라는 큰 나라를 섬기고 큰 나라는 작은 나라를 돌봐준다는 “사대자소”와 조공을 바치고 답례를 하는 “조공회사”가 대중국 관계의 원칙이었고 이에 반하면 대국의 징벌이 있을 뿐이었다.
1637년 1월 30일 조선의 인조가 송파나루에서 단상의 청 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땅에 머리를 박는 ‘3배9고두례’를 하며 대국에 항거한 것을 사죄하는 치욕을 당한 “삼전도의 굴욕” 이 이러한 냉엄한 관계를 잘 나타내 준다.
조선과 일본, 유구, 월남, 태국 등 중국의 주변국들은 상하 관계의 국제질서 속에서만 살아 온 셈이다.
이들 주변국들간 상호 관계는 중국 중심의 큰 질서 안에서 “교린”이라는 대등한 교류가 있을 수 있었으나 매우 제한된 범위의 관계라서 외교라고 할 수도 없는 것이었다.
1842년 아편전쟁을 계기로 이러한 중국 중심의 동양국제질서가 무너지고 서양식 외교개념이 지배하게 되었다. 이미 임진왜란 이전부터 서양과 제한된 범위 내에서 교류를 해온 일본은 이를 빨리 간파하고 ‘脫亞入歐’의 기치를 내세워, 사대질서 관념에서 탈피하지 못한 조선 등을 어렵지 않게 식민지화 하였다.
2차대전 이후에는 미·소 대결을 거쳐 미국 중심의 국제질서가 확립되었으나 중국의 부상과 일본의 보통국가화로 인해 미국이 동북아에서 압도적인 지위를 얼마나 지속할 수 있을지 의문시된다.
이에 따라 한국이 다시 19세기말~20세기 초와 같이 강대국 패권경쟁의 희생양이 될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낳고 있다.
희생양이라는 것은 한국이 다시 주권을 잃을 우려가 아니라 북한이 중국의 영향권에 더 확고하게 들어감으로써 북한이 사실상 우리와 관계가 없는 땅이 될 것이라는 우려이다.
이러한 점에서 우리에게 외교는 전쟁과 평화의 문제가 아니라 통일의 문제라는 차원임을 인식하게 된다.
통일을 위한 외교에서 전쟁과 평화는 국제관계의 상황이면서 또 외교의 수단이기도 하다. 19세기 ‘전쟁론’의 저자 클라우제비츠는 “전쟁은 정치(외교)의 한 방법” 이라고 했지만 우리에게는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러한 논리가 적용되지 않는 상황이다.
우리는 비스마르크의 독일과는 달리 통일외교의 수단에서 전쟁을 배제해야 되니 한 손을 묶고 싸워야 되는 형편이다. 평화적인 수단으로만 통일을 달성해야 하는 우리에게 통일의 시간이 허락될 것인지도 불명확하다.
미국이 통일에 협조적일지도 불확실한 상황에서 외교정책을 결정하는 위정자와 이를 선출하고 감시하는 백성들의 외교에 대한 깊은 이해와 책임이 더 강조되어야 한다.
외교나 국제질서의 변화에 무지해서 주권까지 잃었던 과거를 가진 우리는 역사에서의 교훈을 되새기며 불행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경계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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