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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동학농민군 지도자의 후손- 김개남 장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후손 '역사교과서 왜곡'에 맞서

양반에게 엄혹…박경리 소설 '토지' 모델 / 체포된 뒤 이틀 만에 재판 없이 참혹한 죽음 / 증손자, 교학사 상대 명예훼손 소송 준비 중

▲ 정읍 산외면 김개남 장군 생가터에서 증손 김종기 씨가 ‘김개남 장군 고택터’ 안내판을 가리키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2주갑을 맞은 2014년. 두 갑자가 지나는 동안 우리나라에 많은 변화가 있었다. 봉건왕조 국가에서 일제강점기와 군사독재를 거쳐 민주주의 국가로 거듭났다. 하지만 변하지 않는 것이 있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만들고픈 국민의 마음은 예나 지금이나 다르지 않다.

 

120년 전 동학농민혁명은 미완성으로 막을 내렸다. 이뤄지지 않은 사랑이 아름답다고 했던가. 많은 사람들이 동학농민혁명의 정신을 인용하고 있다. 특히 오는 6·4지방선거에 출마 예정인 많은 지역 정치인들이 출사표를 던지면서, 동학의 정신을 언급하고 있다.

 

하지만 아직도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움직임이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 때문에 동학농민혁명 지도자의 후손들은 두 번 울어야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 제정이 이뤄지기 전까지 ‘동학 난’, ‘민란’ 등으로 폄하돼 후손으로서 자긍심을 갖지 못했다. 가난의 대물림에다가 제대로 배울 수 있는 형편도 못된 후손들은 눈물을 곱씹어야 했다.

 

가까스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최근 역사교과서 왜곡 문제 등으로 후손들은 ‘역사전쟁 2라운드’를 벌이고 있는 상황이다.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귀하고, 사람 사는 세상’을 꿈꾸던 김개남 장군의 후손들이 겪고 있는 역사전쟁에 대한 이야기를 들여다본다.

 

△전라좌도 호령하던 김개남

▲ 김개남

김개남 장군(1853~1894)은 전봉준·손화중 장군과 더불어 동학농민운동을 이끌었던 3대 거두다. 전라좌도를 호령하던 그는 박경리의 소설 ‘토지’의 모델이 될 만큼 매력적인 캐릭터를 가지고 있다.

 

하지만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 가장 급진적인 강경파로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급진적 성향을 보여 후대에 많은 오해를 낳고 있다.

 

1894년 8월 평양전투에서의 대승을 전기로 청을 굴복시킨 일본은 조선의 내정에 노골적인 간섭을 시작한다. 이 때 남원 일대를 장악하고 있던 김개남 장군은 좌도의 농민군 7만명을 남원에 집결시켜 대회를 열었다. 전봉준·손화중 장군은 후일을 도모코자 대회를 만류했지만 김개남 장군은 한번 흩어지면 다시 합하기 어렵다며 두 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다.

 

그는 봉건세력과의 타협을 철저히 거부했다. 실제 그는 집강소 시기에 자신이 관할하고 있는 전라좌도의 양반들을 가혹하게 정치했다.

 

화산 같은 김개남 장군의 폭발성과 추진력은 그의 가장 큰 매력이었으나, 동시에 한계이기도 했다. 세상을 바꿔보자는 분기에 기름을 부었지만 혁명의 대세가 기울자 그의 성격은 독으로 작용했다.

 

하지만 그는 두말 할 것 없이 동학농민운동을 이끈 일등 공신이다. 동학농민혁명이 미완에 그쳤기 때문에 그를 둘러싼 오해가 증폭되고 있다는 게 유족들의 주장이다.

 

△항변 없는 죽음… 역사 논쟁으로

 

전주화약 이후 집강소 시기나 2차 농민혁명 때 보여준 김개남 장군의 다소 격한 행동들이 상대적으로 부각돼 포악함 또는 냉혹함이 그의 기질을 형용하는 어휘가 되고 말았다.

 

이는 김개남 장군의 경우 전봉준 장군과는 다르게 유언과 판결문 한 장 남기지 못하고 세상을 떠난 점이 많은 영향을 끼쳤다는 게 유족들의 설명이다.

 

1894년 12월 1일 측근의 고발로 체포된 김개남 장군은 농민군 지도자 중에서 가장 잔혹하고 전격적으로 처형됐다. 전라감사 이도재는 김개남 장군의 위력에 위축돼, 그를 서울로 압송 중 농민군에 의해 탈취 당할 위험이 있다는 핑계로 아무런 재판 과정 없이 체포 이틀 후에 서교장에서 참수했다. 1894년 12월 3일의 일이었다.

 

그의 시신은 남원 일대에서 핍박받은 양반 토호들에 의해 짓밟혔고 그의 간을 꺼내 씹기도 했다고 한다. 그의 머리는 서울로 이송돼 서소문 밖에서 3일간 효시됐다. 8척 장신에 호령을 하면 앞산이 쩌렁거렸다는 무골은 판결문 한 장 남기지 않은 채 갔다. 입과 입으로 전해온 김개남 장군의 진짜 모습은 어렴풋한 신화와 함께 과격한 모습이 양존하고 있다.

 

이 때문에 최근 역사왜곡 논란에 휩싸인 ‘교학사 교과서’에는 김개남 장군에 대해 “(동학농민군의 지도자인) 김개남은 (중략) 반대하는 자들에 대해서는 살육과 약탈을 허용하였다. 이는 결과적으로 전세를 불리하게 만들었다”(184쪽)고 서술했다. 이는 동학농민군에 대한 왜곡된 서술이라는 게 민족문제연구소의 지적이다. 전세가 불리해진 것은 김개남 때문이 아니라 일본군의 개입이 결정적이었다는 것이다.

 

김개남 장군의 증손인 김종기씨는 이 교과서를 보고 어안이 벙벙했다. 김개남 장군이 양반 계층에 대해 엄혹하게 대한 것은 어디까지나 봉건적 폐단을 바로잡는 차원에서였고, 오히려 민중 대부분은 그런 김개남 장군을 열렬히 지지했다.

 

김씨는 동학혁명의 본거지인 전북 지역에서도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학교가 있다는 사실에 더 놀랐다. 전주의 상산고는 지난해 12월 31일, 교학사 교과서를 지학사 교과서와 함께 역사 수업에 사용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상산고 동문회를 비롯해 전북 지역 및 전국의 시민·사회단체들이 강하게 반발했다.

 

상산고는 일주일 뒤에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철회했고 교학사는 뒤늦게 교과서 내용을 수정했지만, 유족들의 마음에 지울 수 없는 상처가 남았다. 김씨는 현재 교학사를 상대로 명예훼손 소송을 준비하고 있다.

 

△“동학정신, 역사왜곡 막아”

 

▲ 김개남 장군 증손자 김종기 씨(왼쪽)와 고손자 김호영 씨.

“가난은 참을 수 있었다. 하지만 동학농민혁명에 대한 왜곡은 참을 수 없었다. 가난은 대물림돼도 부끄럽지 않으나, 역사 왜곡이 대물림되는 것은 용납할 수 없다.”

 

김종기씨의 이 한마디는 우리나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모두 담고 있었다. 김씨는 “역사는 살아 움직이는 생명으로, 역사왜곡에 맞서 싸울 수 있는 가장 큰 힘은 시민들”이라고 했다.

 

올해 초 대한민국 사회를 달군 ‘교학사 교과서’ 역사 왜곡 논란에서, 결국 전국 수 백개 학교 가운데 한 곳만 교학사 교과서를 채택한 것은 ‘깨어있는 시민’들의 양심적 행동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그의 설명이다.

 

그는 “교학사 교과서 채택을 막기 위해 나선 사람들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하고, 비록 이들의 얼굴은 잘 알지 못하지만 역사왜곡을 함께 막아낸 동지다”면서 “같이 싸워준 사람들에게 다시 한번 감사의 말을 전하고, 이들에게서 동학의 정신을 엿 볼 수 있었다”고 말했다.

 

이어 그는 “우리나라가 혼란의 시기를 겪고 있는 것은 지도자 계층의 그릇된 역사인식 때문이다”면서 “국민에게 올바른 역사관을 알려주고, 올바른 역사관을 가진 국민이 많아지게 되면 이를 바로 잡을 수 있다”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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