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팽목항 부둣가에서

▲ 서호련 남원언론문화복지재단 감사
지난 27일 오후 말로만 듣던 팽목항을 찾았습니다.

 

먹먹한 가슴을 안고 그냥 앉아 있는 것 보다 그곳에 가면 죄스러움이 좀 풀리고 가슴이 좀 트일 것 같아서였습니다. 남원에서 꼬박 2시간 반이 걸렸습니다. 진도대교, 울돌목에서부터 곳곳에 이순신장군의 전승지 푯말이 보입니다. 여느 때 같으면 가슴이 부풀고 자랑스러운 길입니다. 그러나 오늘은 길 따라 노랑 리본 매달린 패잔병들이 가는 길 같았습니다. 노량 앞바다에서 장군기를 흔들며 독전하다가 적탄에 맞고 최후를 마친 장군의 자존의 길이 아니라 수많은 어린 생명들을 유기한 채 속옷만을 입고 홀로 배에서 탈출한 영혼 없는 선장의 비겁한 길을 우리는 가고 있었던 것입니다.

 

팽목항에는 바람이 세차게 불고 궂은비가 내리고 있었습니다. 하늘이 흘리는 자비의 눈물인지, 아기 잃은 엄마들의 분노의 눈물인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우비를 입고 부둣가에 지켜 서있는 경찰관은 대구에서 왔다고 했습니다. ‘사고 지점이 어디인가요’ 라고 물으니, 바로 저 앞 불을 밝히고 있는 선박들을 가리키면서 ‘저 보이는 섬 뒤쪽’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무슨 소식이 없느냐고 재차 물었더니, 두 시쯤 어린 아이 한 명의 시신을 수습한 것 같다 했습니다. 이날 수색 작업은 난항인 것 같았습니다. 진도해상에 내리는 비와 2~3m에 이르는 높은 파도 때문에 구조팀이 어려움을 겪고 있다고 했습니다.

 

팽목항 선착장 기다란 양측 길에는 대한민국의 거의 모든 구호단체와 종교단체, 그리고 의료기관, 언론사들이 천막을 치고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파란 우의를 걸쳐 입은 10여 명의 여경들이 비를 맞으며 열을 지어 순찰을 돕니다. 사람들은 오고 가도 말하는 사람은 없고 표정들은 모두 침통합니다. 또한 길 양옆 천막에는 음료수, 라면, 국수, 빵, 우유, 바나나 등 과일을 쌓아 놓고, 그리고 식판에 음식을 담아 방문객들을 접대하는 자원봉사자들의 손길이 바쁩니다.

 

유가족들이 자리 잡고 있는 진도체육관은 팽목항에서 멀지 않는 곳에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곳에 들리지 않았습니다. 아직도 차가운 바닷 속 선실에 같혀 생사를 알수 없는 115명의 어린생명들을 애타게 기다리는 가족들을 만나 우리가 뭐라고 무슨 위로의 말을 할 수가 있겠는지요.

 

세월이 약이 라기도 하고 한국 사람들은 몇 달 지나면 다 잊어버린다고도 하지만 이번 참사는 세월이 가도 잊혀서는 아니 될 국가적 재앙입니다. 전반적으로 이 나라에 뿌리 내리고 있는 부조리와 불법 등 사회악, 그리고 정신적 해이를 밑바닥에서부터 개조하지 않으면 이런 일이 또 일어나지 않는다고 누가 말하겠습니까. 그동안 경제규모가 커져 세계에서 몇 째 안 되는 경제대국이라고 자랑도 치지만 누구를 위한 경제대국입니까. 지금 우리의 실상이 모래성 위에 집을 지어놓은 허상에 불과한 것이 아닐까요. 하루 속히 허상을 깨어 우리 민국 본연의 자세로 회귀되어야 합니다.

 

이 나라에 이제 혁명이 필요합니다. 국민적, 정신적 혁명 말입니다. 무고한 우리 애들의 희생이 헛되지 않으려면, 이번 희생이 이 혁명의 서곡이 되어야 합니다. 이 희생이 이 사회전반에 깔려있는 부패와 부조리, 그리고 위선을 하나씩 개조 개혁하는 계기가 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그 주검들이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찬 물을 마시고 꽁보리밥을 먹더라도 허울 좋은 경제대국이 아니라,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는 자랑스러운 도덕국가 대한민국이 되었으면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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