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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지역별 유적지와 기념사업 - 무안·함평] 일본군·관군, 각종 기록과 함께 바다에 농민군 수장

고막교서 나주 수성군과 치열한 전투 / 절반만 온전히 복원, 안내표지판 없어

   
▲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함평의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농민군이 전사한 고막교(古幕橋)에서 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이 당시 상황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동학농민혁명 당시 무안·함평의 농민군과 나주 수성군 사이에서 치열한 전투가 벌어져 수많은 농민군이 전사한 고막교(古幕橋). 보물 제1372호로 지정된 이 다리는 현재 절반만 온전히 남아있고, 절반은 원형과는 상이하게 복원돼있으며 동학농민운동과 관련된 안내표지판조차 없다.

 

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고막교가 무안·함평 지역의 동학농민혁명사를 상징적으로 대변한다고 했다. 지난 2004년 동학농민혁명 참여자 등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으로 명예회복을 이뤄냈지만, 아직까지 이 지역에서는 제대로 된 조명을 받지 못하고 있다는 설명이다.

 

무안·함평지역 동학농민혁명은 배상옥 장군을 중심으로 고부나 삼례, 공주 지역 등에 못지 않은 규모와 인원들이 활약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그러나 활동했던 만큼의 역사적 평가를 받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바로 이웃한 장흥과 나주는 치열한 항쟁이 벌어져 사료 등이 많이 발굴된 편이지만, 전투의 외각지대에 있던 무안·함평은 일본군과 관군이 농민군과 함께 각종 기록과 자료를 바다에 쓸어 넣었다.

 

△무안·함평지역 동학사

 

백창석 무안문화원장은 무안지역 농민운동이 1862년부터 시작됐다고 설명했다. 당시 전국에서 농민 봉기가 일어났는데 전국 70여개 고을 중에서 전남 지방은 무안을 포함한 18개 지방에서 봉기했다.

 

이때 무안의 박창응 등이 농민들을 소집해 진정서를 올리고 관에 항의하고 감영에 들어가 소를 올렸는데 도리어 잡혀서 태형을 받고 감옥에 갇혔다. 이렇게 시작된 무안 농민들의 부정에 대한 항의와 올곧은 정신은 1892년 11월의 삼례집회나 1893년 2월의 서울 집회 등에서 나타났다.

 

특히 1894년 3월 백산 집회 때는 전라도 53개 고을 중에서 33개 지방의 동학농민군이 운집했는데, 동학농민혁명 관련 기록에 따르면 참여한 지방 중에서 장령 급이 제일 많이 참여한 곳이 무안이다.

 

농민 자치 시기에는 청계면 청천리 달성 배씨 사당인 청천사에 집강소를 세워 탐관오리의 징계, 신분해방운동과 사회신분제의 폐지 추진 등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졌다.

 

2차 봉기 때에도 무안 농민군은 삼례에 집결하려 했지만 일본군에 의한 배후 세력이 끊어질 것을 염려해 북상하지 않았다. 이어 11월 20일에 나주성 공격에 참여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함평 농민군은 무안 지역 농민군과 긴밀한 연계 속에서 활동을 전개했다. 1894년 11월 무안 농민군이 나주를 향해 진격하다가 함평의 고막포 일대에서 나주수성군과 격전을 치를 때도 함평의 농민군이 참여했다. 당시 함평 동학군을 이끌었던 지도자는 대접주 이화진, 김경옥, 이춘익, 이재민 등이다.

 

△‘창포장수’ 배상옥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 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청포장수 울고 간다.’

 

이 노래는 조선 후기에 구전되던 민요로 전봉준이 주도한 동학농민혁명의 실패를 슬퍼하는 농민들의 처절한 절망을 담아냈다. 무안에도 이와 비슷한 노래가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민중의 절망대신 구체적인 동학의 대장을 지칭하는 노래로 전해져 온다.

 

‘새야새야 파랑새야/ 녹두밭에 앉지마라/ 녹두꽃이 떨어지면/ 창포장수 울고간다.’

 

기존의 노래와 다른 것은 ‘청포장수’를 ‘창포장수’로 표현한 점이다. 창포장수는 창포만을 중심으로 동학군을 이끌고 활약하며 ‘호남하도거괴(湖南下道巨魁)’라 불려 졌던 무안의 대접주 배상옥 장군을 일컫는다. 창포는 포구로 무안에 문화를 전파하는 해상통로 구실을 했다. 지금은 간척이 되어 농경지로 활용되고 있지만 간척되기 전에는 드넓은 뻘밭으로 인해 각종 해산물이 지천으로 났던 곳이다.

 

배상옥 장군은 이 일대를 중심으로 농민의 시위나 혁명을 주도했고 혁신적이고 개혁적인 남접 활동을 이어갔다. 그는 전남 서남부 일대를 장악하고 청계면 청천리에 집강소를 설치해 동학의 정신을 구현했다. 또한 해제면 석용리에 거주하면서 포교활동을 했고 그곳에 연병장을 설치해 혁명군을 훈련시켰다.

 

△주요 유적지

 

붉은 고개= 무안읍 성남리 초당대학교 인근 국도 1호선이 지나는 길에 나지막한 고개가 있다. 무안에서 목포로 가는 길목인 이곳은 ‘붉은 고개’로 불린다. 무안지역 주민들의 구전에 따르면 동학농민혁명 당시 매복해있던 일본군에게 몰살당한 농민군의 피가 이곳을 물들였다고 한다.

   
▲ 동학농민혁명 당시 집강소로 쓰였던 것으로 알려진 청천재.

청천재= 청계면 청천리에 있는 달성배씨 제각인 청천재는 집강소가 설치된 곳으로 알려져 있다. 이곳이 집강소였다는 데는 이견이 있지만, 당시 동학농민혁명을 배척했던 유교 집안에서 배상옥 장군의 명예훼복을 알리는 문서를 제각에 걸어놓은 것으로 볼 때, 상당한 상관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삼의사비= 무안군 해제면 석산 마을 인근에 있는 삼의사비는 최장현, 최기현, 최선현을 기리기 위해 만들어졌다. 이들은 동학농민군을 모아 마을 인근에서 훈련을 시켰고, 배상옥 장군과 함께 나주성 전투에 나섰다가 붙잡혀 처형당했다.

 

● 배종열 무안동학기념사업회 고문 "혁명정신 계승 안돼...우리 사회 중심 잃어"

   

“우리 사회가 중심을 잡지 못하고 흔들리고 있는 것은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제대로 이어지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배종열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고문은 대한민국 사회에 사상적 기반이 빈약하다고 꼬집었다. 부당한 권력과 압력에 맞서 일어섰던 동학농민혁명 정신이 ‘빨갱이’와 동일 선상에 놓여 평가받고 있는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다는 설명이다.

 

“동학농민혁명군의 후손들은 일제시대에는 독립운동에 참여하고, 해방이 돼서는 민주화 운동을 펼쳤습니다. 반면 농민군을 탄압했던 후손들은 친일파가 됐고, 해방 후에는 민주화 운동을 탄압했어요.”

 

배 고문은 이같은 일들이 지금도 자행되고 있고, 동학농민혁명을 왜곡하려는 시도가 계속되고 있다고 했다. 이를 바로 잡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동학농민혁명을 바로 알리는 일이 시급하다고 진단했다.

 

이 때문에 배 고문은 지난 2011년 출범한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 초대 이사장을 맡았다. 다른 지역에 비해 시작은 늦었지만 무안동학농민혁명기념사업회는 가장 활발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는 평가다.

 

“아직 갈 길이 멀지요. 무안 지역에는 제대로 된 기념시설조차 없는 상황입니다.”

 

배 고문이 가장 공을 들이는 부분은 ‘동학농민혁명 문화콘텐츠 자원화’다. 우선 기념공원을 조성하고, 유적지를 연계한 답사 프로그램 개발 등을 통해 무안의 동학농민혁명을 알린다는 계획이다. 또 청소년들에게 보다 쉽게 동학농민혁명을 알리기 위한 ‘교육콘텐츠’ 개발에도 힘을 쏟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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