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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의 발자국

▲ 진창선 문학평론가
교육이 인간을 인간답게 가르치는 것이라면 무릇 도(道)를 닦는 것과 무엇이 다를까. 그래서 교사란 모름지기 성직자임을 명심하라고 교사론 첫머리에 계율처럼 제시한 것은 아닌지. 경에 이르기를 ‘난초 향은 하룻밤 잠을 깨우고 좋은 스승은 평생의 잠을 깨운다’고 했는가 하면 파격을 통해 예술의 대도를 닦아 놓은 추사 선생은 사제간의 깊은 인연을 눈 속의 푸른 소나무와 고가(古家)로 비유한 그림이 ‘세한도(歲寒圖)’라고 한다.

 

그러나 오늘의 한국 공교육은 ‘교실이 무너지는 소리가 들린다’고 빗발 같다. 두루 알다시피 교육은 가정과 학교와 사회가 제 몫을 다하면서 조화를 이룰 때 가장 바람직할 것이다. 그래서 교육은 환상적일수록 이상(理想)이라 일컫는다. 국가의 운명은 청년 교육에 달려 있다고 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울림을 준 지론은 오늘따라 인간화 시대를 맞아 정녕 실천 덕목으로 되새길 만하다. 예로부터 어머니는 최초의 스승이라 일러 왔는가 하면 헤르바르트 역시 한 사람의 양모(良母)는 백인의 교사에 필적한다고 역설했다.

 

한편 사회란 개인의 꿈과 희망을 실현하는 일터이다. 곧 창조 활동을 하는 무대이기 때문에 인간은 사회적 주체요 또한 사회적 존재다. 덧붙이면 건전하고 정의로운 사회야말로 인류의 이상이요 백성들로 하여금 편안함과 안정된 일상과 더불어 즐거움을 함께 하는 광장(廣場)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국가사회의 융성한 발전을 위해서는 무엇보다도 백년지대계인 교육이 우선이다. 그래서 사람은 사람에 의해서만 사람이 될 수 있다고 강조한다. 때문에 교육 제도의 중대함도 여기에 있다. 그럼에도 한국교육은 ‘입시’에만 매달려서 전인교육은 뒷전으로 밀리고 오직 지식 쌓기와 문제풀이 훈련으로 점수만 높여 어렵사리 줄서기로 대학 관문의 통과와 함께 새삼 선택의 잘못을 되돌아본다. 하지만 오늘날 우리 교육의 위기는 큰 강물이 홍수로 잠시 흐리고 있을 따름이다.

 

예로부터 지덕(知德)을 배움으로 쌓으며 제자 사랑도 선비정신의 전통이다. 무릇 교육은 곧 학교가 중심이며 국가 대업이다. 생명을 중히 다스리는 업(業)이라면 교직과 농업 곧 농부와 교사는 성스럽다는 면에서는 같지 않을까. 농작물은 농부의 발걸음 소리를 듣고 자란다고 한다.

 

한편 배우는 학생들은 모로매 스승의 가르침과 사랑의 감화를 통해서 지식을 넓히고 진리를 깨치며 그리고 심신 수련과 더불어 꿈을 키워 간다. 그러기에 교사는 촛불과 같은 존재로 사랑과 정성으로 학생을 계발하기 때문에 일찍이 ‘선택된 스승은 위대한 교육이다’라고 했다.

 

어느 석학의 글 가운데 ‘우리는 예수보다 유다에 어필한다’는 표현이 정작 내 자신을 돌아보게 한다. ‘반성(反省)’을 통해서 너무도 인간적인 삶의 교훈을 보여 주었기 때문이겠다. 긴 세월이 흘렀는데도 35년간의 교단 생활에서 잘못 다스렸던 부끄러움이 책장을 펼치다 보면 문득 잡힐 듯 떠오른다. 첫째 어려운 것은 어렵다고 쉽게 풀어 주었는가. 또 모른 것은 모른다고 이해를 구하고 성실히 익혀서 곧장 일러 주었던가.

 

한편 어려운 환경으로 외롭게 지내는 제자를 찾아 뜨겁게 안아 주었는가. 또한 성적으로 부질없는 차별화는 없었던가. 굽이굽이 부끄럽기는 해도 다시 업으로 주어진다면 더욱 ‘참삶’으로 다스릴 것이다. 그리고 세월 따라 다정한 얼굴들이 별처럼 떠오르면 청마(靑馬)의 시와 함께 나란히 동무하리라.

 

-사랑하였으므로 행복(幸福)하였네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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