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학농민혁명은 최제우가 창시한 동학사상을 바탕으로 우리나라를 침탈하려는 외세를 물리치고 당시의 봉건적인 사회질서가 안고 있는 문제점을 해결하기 위하여 일어난 기층민의 개혁운동이다.
동학농민혁명의 가장 큰 의의 중 하나는 농민들이 직접 봉기했다는 사실이다. 물론 앞에서 이끌었던 사람들이 있지만, 흙을 일구던 농민들의 손으로 직접 쓴 역사의 장이었다. ‘일어서면 백산(白山)이오, 앉으면 죽산(竹山)’이라는 말은 흰옷을 입고 죽창을 든 농민들이 산에 모였던 장면을 묘사한 것으로, 자발적으로 모인 농민들의 수가 얼마나 많았는지를 실감 나게 보여주는 기록이다.
지난해 12월 21일, 김제시 금산면 원평리에 있는 원평 집강소가 개·보수를 거쳐 제 모습을 다시 찾은 것은 그렇기에 더욱 뜻깊다. 집강소는 농민군이 장악한 지역의 읍면 단위에 설치되어 개혁과 행정, 치안 등의 업무를 보던 자치 기구이자 그들이 모이던 건물을 가리킨다. 집강소에서는 누구든 서로를 접장(接長)이라고 부르고 맞절을 하는 등 신분 타파를 실천하였고 빈민구제 활동을 펼쳤다. 원평 집강소는 동학농민혁명만큼이나 굴곡진 역사를 가지고 있다. 1882년 처음 지어질 당시에는 정면 4칸, 측면 2칸의 초가였다. 1894년, 백정 출신으로 원평 학원마을에 살던 동록개라는 사람이 대접주 김덕명을 찾아가 “신분 차별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 달라”는 말과 함께 농민군에게 헌납했다. 이러한 사실은 기록뿐만 아니라 주변 주민들이 직접 증언하고 있다. 1955년생인 김수연 씨의 이야기를 옮겨본다.
“그냥 그 건물이 김덕명 할아버지한테 좋은 세상 만들라고 백정이 줬다고 허고, 동학 허는 사람들 본부로 쓰면서 녹두장군이랑 거기를 본부로 썼다고 하든디.”
원평 집강소의 역사가 입에서 입으로 서너 세대를 이어온 것이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는 수류면사무소로 사용되었고 해방 이후 기와집으로 보수하면서 마루, 문, 벽 등이 변형되었다. 1930년대에는 원불교 불법연구회가 사용하였고 1950년대부터 1991년까지는 개인이 주거하는 집이었으나, 그 이후에는 폐가로 방치되었다. 이후 원평 집강소임이 확인되면서 2012년 김제시가 문화재청에 긴급 매입신청을 하고 2015년에 개·보수를 거쳤다.
원평 집강소는 원래의 모습을 되찾고 동학농민혁명의 숭고한 정신이 깃든 문화유산으로 돌아왔다. 이제 많은 사람들이 찾아가야 한다. 비록 시골에 있는 작은 초가건물이지만 그곳에서는 뛰는 심장으로 새로운 세상을 꿈꾸었던 사람들의 숨결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그곳에는 그 꿈을 보여주는 문구가 있다.
‘사람, 다시 하늘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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