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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영원한 약속 ③

삽화=권휘원 화백

1938년 2월 찬옥은 신문지상에서 ‘현제명 내전 음악회’라는 기사를 읽었다.

 

당시 조선 내 최고의 음악가 현제명 선생이 전주에 와서 음악회를 개최한다는 기사였다. 반갑고 흥분되었다. 현제명 선생에 대해서는 여러 사람으로부터 말을 많이 들어 잘 알고 있었다.

 

현제명이 평양 숭실전문학교에서 음악을 전공한 후 처음 얻은 직장이 바로 전주신흥학교였다.

 

대구 기독교 집안 태생이었던 현제명은 평양에서 기독교계 전문학교를 졸업하고 전주로 내려와 같은 기독교계 중학교에서 교편을 잡게 된 것이다.

 

영어와 음악, 두 과목을 담당했다. 학교 앞 서문교회에 다니면서 소녀가극단을 지도하기도 했다. 전주유치원 교사 양신선 씨와 결혼하고 미국인 선교사 후원으로 미국유학을 갔다가 귀국, 연희전문 교수로 있었다. 양신선의 막내 여동생이 찬옥과 가까이 지내는 친구였다.

 

그때 전주신흥학교는 신사참배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폐교 처분을 받아 문을 닫고 있는 상태였다. 그래서 첫 직장이었던 학교에 들러 실의에 빠져있는 교사들과 관계자들을 위로하고, 처가 어른들에게도 인사드릴 겸 전주에 와 음악회를 개최하는 것이라고 했다. 전주에 온 김에 다음에는 광주까지 가는 일정도 잡혀 있었다.

 

찬옥은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다. 현제명 선생을 금구학교로 모셔 보자는 착상이었다. 정승철, 테라다 교장과 상의했더니 기발한 구상이라며 적극 추진하라고 당부했다. 특히 교장은 자기 자신도 이 은상 작사, 현제명 작곡 ‘그 집 앞’을 부를 줄 안다며 “현 선생이 오시면 학교의 영광”이라고 좋아했다.

 

현 선생의 처제를 통해 교섭한 결과 예상 밖으로 쉽게 승낙을 얻어냈다. 현 선생도 금구학교를 알고 있고 광주 가는 길에 한 시간 정도 시간을 낼 수 있다는 통보가 왔다. 당시 30대 후반으로 왕성한 활동을 하던 현제명은 우리 음악 보급운동을 적극적으로 벌이고 있던 때였다.

 

찬옥은 기뻤다. 학교에 강당이 없었기 때문에 별 수 없이 전교생을 운동장에 모아놓고 음악회를 열었다. 교장이 현 선생 소개 말씀을 한 다음 정승철이 풍금을 쳐 반주하고 당대의 최고 테너가 자신이 작곡한 가곡들을 불렀다. ‘그 집 앞’을 부를 때는 교장도 함께 불러 음악회가 절정에 이르렀다.

 

제자들에게 최고의 선물을 주었다는 자부심으로 찬옥은 뿌듯하기 그지없었다. 교장은 자기 교장 재임 중 최고 행사였다고 자랑스러워했다. 그러나 오노다는 시종일관 못마땅하다는 표정으로 아무 말 없이 행사를 지켜보고 있었다.

 

호사다마였다. 며칠 후 도 학무과에서 교장, 정승철. 최찬옥에게 출두하라는 통지가 왔다. 세 사람이 학교 음악회를 주관, 주최했다며 시학관이 경위를 조사했다. 분위기가 아주 위압적이었다. “대일본제국의 교육정책에 정면으로 위배되는 행위”였다고 몰아세웠다.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눈치 챈 교장은 책임은 전적으로 자기에게 있다며 정승철은 자기 지시로 풍금을 연주했을 뿐이라고 변호해 주었다. 찬옥도 이번 행사는 자기가 현제명 선생을 잘 알아 개인적으로 추진한 것으로 교장과 정승철은 책임이 없다고 옹호했다.

 

정승철은 “지금 모든 보통학교에서 전 학년에 걸쳐 조선어를 가르치고 있는데 조선어 가곡 음악회를 한 번 연 것을 부당한 것으로 취급하는 것은 납득하기 어렵다”며 논리적으로 맞섰다. 그러나 시학관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열흘이 지나 징계 및 인사 조치 내용이 통고됐다. 테라다 교장에 대해서는 3개월간 매월 20% 감봉, 정승철에 대해서는 2개월간 매월 10% 감봉, 최찬옥은 권고 사직. 더욱이 테라다 교장은 벽지 신설 학교로 전보됐다.

 

최찬옥은 테라다 교장에게 진심으로 미안했다. 자기 때문에조선에 대해 이해가 깊은 교육자가 희생됐다는 죄책감이 들어 교장의 손을 잡고 눈물을 삼켰다. 테라다는 오히려 자기는 괜찮다며 자기 잘못으로 찬옥이 교단을 떠나게 됐다고 미안해했다.

 

정승철은 의연한 자세를 잃지 않고 징계조치가 지나치게 가혹하다고 항변했다. 승철은 이번 조치의 핵심은 학무당국이 음악회를 악의적으로 확대해석해 테라다를 축출한 데 있다고 단정했다.

 

음악회 개최를 밀고한 오노다는, 친 조선적인 테라다의 동태를 감시하기 위해 학무당국이 배치한 밀정 교사로 알려졌었다.

 

조선인들 사이에 그런대로 신망을 얻고 있는 테라다를 제거하려고 당국은 그 전부터 여러 차례 기회를 노려 왔던 것이다.

 

결과적으로 학교에 초유의 징계 파동을 몰고 온 음악회로, 서로 뜻이 맞았던 테라다, 정승철, 최찬옥은 헤어지게 됐다. 찬옥은 불과 9개월 만에 교직에서 물러나고 말았다.

 

그동안 정들었던 아이들과 이별하고 교정을 떠나자니 눈물이 앞섰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일제의 틀 안에서 보람을 느낄 수 없는 교사생활에서 벗어나는 해방감이 가슴을 시원하게 했다. 〈계속…〉

 

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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