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승철 교장이 별세한 지 2년 가까이 흘렀다. 하루는 어머니 최찬옥이 아들 한 대희를 조용히 불렀다. 넓은 아파트에는 모자 밖에 없었다. 며느리는 친구들과 어울려 해외 패키지여행을 떠나고 없었다.
어머니는 오늘따라 곱게 차려 입었다. 아들이 어머니 미수 때 해드린 옥색치마에 연분홍 저고리를 입고 있었다.
어머니는 96세의 극 노인이지만 아직도 살결에 주름이 적고 치매기 같은 것도 전혀 없었다. 기품이 있었다.
“임 서방 댁이 해준다고 하지만 며느리가 차려주는 밥만 못하구나. 요즘 입맛이 없네.”
임 서방 댁은 한 대희의 누이동생이다. 같은 아파트단지 안에 살고 있어 올케가 여행간 사이 아침 저녁으로 들려 친정어머니 밥상을 차려드리고 있었다.
“임 서방 댁도 음식을 잘 하는데요. 밥맛이 없으셔도 일부러라도 많이 잡수세요.” 한 대희는 어머니의 건강이 걱정됐다.
“한 의원!……” 어머니가 어조를 바꾸었다. 어머니는 어려운 이야기를 꺼낼 때에는 아들이라도 존칭을 쓰곤 했다. 한 대희는 심상치 않음을 느꼈다.
어머니가 저런 차림새로 존칭을 쓰며 무겁게 말문을 여는 것을 보고 한 대희는 ‘유언 같은 말씀을 하려고 하나’ 그런 예감이 들었다.
“예, 어머니 말씀하세요. 말씀대로 하겠습니다.”
“내가 몇 가지 당부할 게 있어서…꼭 그렇게 지켜주어야 해.” 예감대로 유언을 말씀하실 모양이었다.
“예에 약속드리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한 대희는 긴장됐다.
“내가 항상 말한 대로 인덕을 가지고 집안을 다스려야 해. 덕불고라고 하지. 사람은 신의가 있어야 하고……서로 믿을 수 있어야 해.”
오늘은 평소에 말씀하시던 “덕문에서 살면 궁궐에서 사는 것 못지않게 복되고, 신의가 있는 사람은 만석꾼 못지않게 부자다.”는 비유는 안하셨지만 덕성과 신의, 이것은 어머니가 가르쳐온 가훈이었다. 한 대희도 이것을 좌우명으로 삼고 살아왔다.
“정욱이 내외도 잘 가르치고……” 정욱(正旭)은 한대희의 아들로 중앙에서 고위직 공무원으로 있다.
“예, 어머니 손자가 아들보다 더 반듯합니다. 마음을 놓으세요.”
한대희는 어머니가 저렇게 강조하시는 ‘인의’를 유훈으로 삼아야겠다고 다짐했다. 어머니는 말할 것을 미리 정리한 듯 차분하게 당부를 이어 나갔다.
“내가 죽거들랑……” 다소 긴장의 끈을 풀었던 한 대희가 다시 귀를 세웠다.
“내가 죽거들랑 화장해서 수목장으로 해주어. 수목장이 깨끗하고 좋아 보이더라고.”
“아버지 곁으로 가셔야지요. 그렇게 모시려고 하는데요.”
“싫다. 정읍 선산은 멀고, 너와 정욱이가 자주 찾아올 수 있는 가까운 데 수목장으로 해주어.”
“어머니 뜻대로 하겠습니다.”
어머니는 안도하는 듯 긴 숨을 쉬고는 벽에 걸린 대형 가족사진을 한참 쳐다보았다. 다음 말을 하기 위해 숨을 고르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어머니가 입을 열었다.
“한 의원,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 듣고 어미를 너무 탓하지 말고 마음 아파하지 말아라. 내가 저승으로 갈 마당에 지금 나 혼자 알고 있는 비밀을 너에게만 털어놓으니……한 의원은 이것을 어느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고 혼자만 알고 있어야 한다.”
한대희는 신경이 곤두섰다. 아버지와의 비밀? 정 교장선생과의 로맨스? 숨겨놓은 재산? 순간 별별 생각이 다 떠올랐다. 그러나 침착하게 어머니의 비밀이야기를 들어보기로 했다.
“그럼요. 걱정하지 마시고 모두 말씀하세요. 제가 어머니 앞에서 약속합니다.”
어머니의 안면과 입가 근육이 실룩거리고 입에서 침이 흐르는 것이 보였다. 어머니는 머뭇머뭇 하다가 결심한 듯 입술에 힘을 준 뒤 말했다.
“사실은…사실은 네가 너의 아버지 아들이 아니고 교장선생의 핏줄이다. 한 씨가 아니고 정가다.”
“옛 ?” 한대희는 외마디 소리를 질렀다.
“쉿!” 어머니는 아들의 외마디 소리를 듣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도 입을 다물라고 둘 째 손가락을 입술에 갖다 댔다.
한대희는 청천벽력 같은 이 폭탄선언에 경악하지 않을 수 없었다. 어안이 벙벙해 말문이 막혀버렸다. 도대체 믿어지지 않는 이 말에 머리가 한동안 띵했다.
“어머니, 뭐라고 하셨어요?” 대희가 할 수 있는 말의 전부였다.
“………” 아들이 놀래는 것을 충분히 이해한다는 표정만 짓고 있을 뿐 어머니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어머니, 무슨 말씀을 하신 거예요.”
“묻어버려도 될 일을 내가 괜히 입 밖에 내 너를 괴롭게 만드는구나. 내가 망령이 든 게지.”
한대희는 연신 한숨을 짓고 있는 어머니의 침울해진 노안을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어머니의 말을 듣고 너무 놀라 죄스럽게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대희는 마음을 다잡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더 들어 보기로 했다.
어머니는 과거사를 담담하게 풀어놓았다. 그러면서 지금도 교장선생과의 인연을 소중하게 간직하고 있다고 말했다.
“한 의원이 이 어미를 이해해 주면 고맙겠네.”
어머니의 이야기가 끝나자 아들은 어머니의 지난날들에 대한 이해, 자기 출생의 비밀을 처음 알고 난 다음의 충격, 이런 것들이 함께 북받쳐 흐느꼈다.
“그러지 말래도.” 어머니가 달랬다.
얼마 후 평생 처음 흘리는 눈물을 훔치면서 아들이 말했다.
“어머니, 잘 알았습니다. 말씀 잘하셨어요. 약속을 지키겠습니다. 저 혼자 알고 살아가면 될 일입니다.”
평정을 되찾은 후 모자는 대화를 계속했다. 한대희가 몇 가지 궁금한 점을 물었다.
“교장선생님도 이 사실을 생전에 알고 계셨나요?”
“알고 있었지. 네 아버지 너 열두 살 때 세상을 뜨신 다음에는 나 혼자 큰 집 살림 꾸려 나가고 너희 남매 키우느라고 정신이 없었지. 그러다가……”
어머니의 이야기가 끊어졌다가 이어졌다.
“그러다가 네가 고등고시 합격한 직후……” 어머니가 울먹여 말이 또 끊겼다가 잠시 후 계속됐다.
“합격한 직후 기쁨을 함께 나누고 싶어 교장선생을 20여 년 만에 만나 대희가 당신의 아들이라고 털어놓았지. 이 사실을 둘이서만 알고 있기로 약속하고. 그 양반은 믿을 수 있는 사람이었지.”
이제 수수께끼가 풀렸다. 교장선생이 왜 대희에게 친조카같이 혈육같이 대해주었는지, ‘내가 죽으면 한 의원과 한 의원 어머님께 꼭 알려드려라’고 유언처럼 말했는지.
“어머니, 그러면 임 서방 댁도 교장선생님 혈육인가요?”
“아니다. 게는 한가다. 너를 낳고 8년이 지나 우연찮게 임신해서 걔를 낳았지. 조물주의 조화란 정말 모를 일이더라. 정말 모를 일이야. 그런데 씨가 같은 남매보다 배가 같은 남매가 더 낫지 않으냐. 생각하기 나름이지만.”
어머니의 이 말에 대희는 웃음이 나왔다. ‘그렇다! 내가 한가면 어떻고, 정가면 어떠냐?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자식인데……임 서방 댁이 한가면 어떻고 정가면 어떠냐? 어머니 뱃속에서 나온 같은 자식인데.’
한대희는 모든 일을 대범하게 받아들이기로 결심했다. 가슴이 후련했다. 〈계속…〉
장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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