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 역사를 살펴볼 때, 이 ‘풍운지회’의 대표적인 예로는 정조와 정약용의 만남을 꼽을 수 있다. 정조의 꿈은 조선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인재를 육성하고 외세에 침탈 당하지 않는 나라를 만들어 백성을 부유하게 하고 국가재정을 안정시키고자 하였다. 그러한 정조의 꿈과 만났기 때문에 정약용은 학자로서뿐 아니라 관료로서 업적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이다. 정약용이 살았던 18세기 후반과 19세기 전반의 조선시대는 정치와 사상이 큰 전환기를 거치던 시기였다. 이런 과정 속에서 실용주의 사상을 펼친 정약용은 당시의 조선사회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사회 전반적인 개혁이 필요하다고 생각했으며 정조를 도와 조선개혁에 앞장섰다. 정약용은 ‘털끝 하나인들 병들지 않은 분야가 없다. 지금 당장 개혁하지 않으면 나라는 반드시 망하고 만다. 오래된 나라를 새롭게 만들어야 한다’라고 하며 그의 저술인 <경세유표(經世遺表)> 를 통해 개혁을 주장하였다. 경세유표(經世遺表)>
국가와 사회의 전반적인 개혁을 제시한 <경세유표> 는 관직 및 지방행정조직 체제의 개편, 신분과 지역에 따른 차별을 배제한 인재등용책, 자원의 국가관리제 실시, 토지제도 개혁, 부세제도 합리화 등 당시 사정을 염두에 둔 안을 다루고 있다. 이 책에서 제기되고 있는 개혁안들은 사회 체제의 근본적 개혁이 반드시 이루어져야만 가능한 것들로 조선 후기 실학자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려 한 이상사회를 밝혀내는 지침서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정조의 든든한 후원 아래 왕성히 활동을 하며 요즘으로 말해 청와대 비서실의 요직에서 있던 그가 천주교를 가까이 했던 것이 빌미가 되어 목숨만을 간신히 부지한 채 세 번의 유배를 갔다. 형제가 참혹하게 죽임을 당하고 가족과 생이별을 하는 절망 속에서도 유배기간 동안 바른 정치와 민생향상의 개혁적인 대안을 제시하며 연구를 진행해 500여 권의 저작과 경학연구서 232권을 비롯해 2500여 수의 시와 문장 등 뛰어난 저술을 남겼다. 경세유표>
자신을 알아주는 임금을 위해 최선을 다한 정약용은 정조와 뜻을 함께하며 정치에 대해 민(民)이 중요한 존재임을 거론하고 ‘정치라는 것은 바로잡는 것이다(政也者正也)’ 라고 정의했다. 정약용의 위대함은 절망 속에서도 미래를 준비하였다는 데 있다. 하지만 조선의 국운이 그 뿐이었는지 정약용 나이 38세에 정조는 48세로 생을 마감하였다. 만약에 정조가 오래 살았고 정약용이 재상까지 벼슬을 했다면 어떠했을까. 정조와 더불어 꿈꾸고 발전하며 만들었을 그들의 미래와 우리의 과거는 역사속에 아쉬운 상상으로 남아있고 작금의 통탄할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또 한번의 위대한 풍운지회(風雲之會)를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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