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내가 예민한가 / 자기검열에 빠지고 / 발화의 기회 잃게돼
“어, 잠깐만” 책을 읽다 나도 모르게 소리를 쳤다. 적지 않은 당황스러움에 휩싸였다. 이 소설이 3인칭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사실을 105페이지, 소설의 절반 정도를 읽었을 때 깨달았다. 거의 모든 페이지에 등장하는 ‘김지영씨’라는 4글자를 왜 인식하지 못했을까.
잠시 책 읽기를 멈추고 소설에서 한 발자국 빠져나왔다. 나는 충분히 몰입해 있었다. 내가 겪은 경험이 아니었음에도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들, 나는 ‘김지영씨’라는 글자 위에 ‘나’를 덮어 읽고 있었다.
조남주 작가의 <82년생 김지영>은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살아가는 게 어떤 의미인지를 묘사한 소설이다. 대통령에게 노회찬 정의당 대표가 선물해 화제가 된 책이자 올해 약 7달간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기도 하다. 베스트셀러가 크게 의미를 갖지 않는 동네서점 ‘북스포즈’에서도 꾸준히 사랑받고 있는 책 중 하나다.
김지영은 1982년생 여성 가운데 가장 흔한 이름이다. 소설 속 김지영씨는 불우한 어린 시절을 보내지 않았으며, 가정폭력의 희생자도 데이트 폭력의 희생자도 아니다. 지극히 평범한 삶을 살아온 여성이다. 하지만 여자라면 한 번쯤 겪게 되는 성차별과 과한 농담을 견디며 살았고, 아이를 낳은 후에는 개체성을 상실한 채 ‘엄마’로 호명되고 있는 여성이기도 하다.
“김지영씨는 얼굴형도 예쁘고 콧날도 날렵하니까 쌍꺼풀 수술만 하면 되겠다며 외모에 대한 칭찬인지 충고인지도 계속 늘어놓았다. 남자 친구가 있느냐고 묻더니 원래 골키퍼가 있어야 골 넣을 맛이 난다는 둥 한 번도 안 해 본 여자는 있어도 한 번만 해 본 여자는 없다는 둥 웃기지도 않는 19금 유머까지 남발했다. 무엇보다 계속 술을 권했다. 주량을 넘어섰다고, 귀갓길이 위험하다고, 이제 그만 마시겠다고 해도 여기 이렇게 남자가 많은데 뭐가 걱정이냐고 반문했다. 니들이 제일 걱정이거든. 김지영씨는 대답을 속으로 삼키며 눈치껏 빈 컵과 냉면 그릇에 술을 쏟아 버렸다.”
작가는 왜 주인공 시점이 아닌 관찰자 시점을 택했을까. 소설의 일화가 주관적인 견해가 아닌 객관적인 사실임을 보여주기 위해서 관찰자를 내세운 게 아니었을까. 어쩌면 익숙하다는 이유로 당연시되는 이야기들을 밖으로 꺼내기 위해서 필수 불가결했던 걸지도 모른다.
언젠가부터 불편함을 이야기하기 어려워졌다. ‘예민충’이나 ‘프로불편러’라는 딱지가 붙기 시작하면서 “정말 내가 예민한가?” 자기검열에 빠지게 되고, 결국 많은 이들이 발화의 기회를 잃게 되었다. 묻고 또 물어야 하는 사안이 묻히지 않도록 작가는 외부의 목소리를 빌렸으리라. 공교롭게도 소설 후반에 등장하는 화자는 ‘내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세상이 있었구나’라며 자기반성에 빠지는 40대 남성 정신과 의사이며, 조남주 작가는 시사교양 프로그램 작가 출신이다.
책 <싸울 때마다 투명해진다> 에는 이런 구절이 등장한다. “내가 구상하는 좋은 세상은 고통이 없는 세상이 아니라 고통이 고통을 알아보는 세상이다. 이는 아주 일상적으로는 끼니마다 밥 차리는 엄마의 고단함을 남편과 아들이 알아보는 것이고, 음식점이나 경비실에서 일하는 사람과 눈을 마주하는 것이다.” 싸울>
특별한 경우일지 모르지만, 북스포즈에서 <82년생 김지영>을 찾는 손님은 여성보다 남성이 2배 많았다. 지난주에도 남성 손님이 이 책 4권을 주문했다. 쉽게 사라지지 않을 김지영이지만 그녀의 삶을 가만히 헤아리는 또 다른 김지영들이 더 많아질 것 같아 마냥 씁쓸하지는 않다. /노유리 북스포즈 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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