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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여립 생가는 전주 동문 밖이다

▲ 박이선 소설가
최근 정여립에 대한 논의가 활발해지는 것 같아 반가운 마음이다.

 

조선 기축옥사의 주인공 정여립은 우리 지역뿐만 아니라 조선을 대표하는 사상가로 재조명되어야 할 것이다.

 

하지만 역모를 꾀했다는 이유로 정여립에 대한 긍정적 자료가 거의 없고 그나마 임진왜란을 겪으면서 잃어버린 것이 많았다. 현재 참고할 수 있는 자료는 조선왕조실록과 기축록, 연려실기술, 혼정편록, 대동야승 등의 문집이다. 이 가운데 가장 신뢰성 있는 자료는 공식적 국가기록인 조선왕조실록이라 할 것이다. 정여립로를 만들고, 동상을 세우고, 생가를 복원하는 것은 좋지만 얼마나 고증을 거치고 있는가 하는 점에서 염려스럽다.

 

일각에서는 완주군 상관면 월암리에 그의 생가가 있었다고 한다. 역적의 집을 허물고 파서 연못을 만들었기 때문에 상관면 월암리에 파쏘가 있고 봉우리 이름이 파쏘봉이라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월암리 앞에는 여덟 호 가량 거주하는 쌍정리라는 옛 마을이 있었다. 지금이야 전주천에 제방공사를 하여 강둑이 높고 반듯하게 되었지만 과거엔 뱀이 가는 것과 같이 구불거리는 사행천(蛇行川)이었다.

 

쌍정리 바로 앞까지 강물이 거세게 몰아쳐서 부서지는 소(沼)가 있었고, 신리터널 못 미친 지점에 또 하나의 소가 있었다. 이 소는 인공적으로 판 것이 아니라 강물의 흐름에 따라 자연적으로 생긴 것이고 월암리에 인공적으로 판 소는 없었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도 그것을 파수(破水 또는 把守)라 하고 그 위에 있는 봉우리를 파수봉(破水峰 또는 守峰峰)이라 불렀다. 파수봉에 올라보면 슬치재를 감시할 수 있고 멀리 군산까지 바라볼 수 있을 정도로 전망이 좋다.

 

정여립의 집은 전주성 밖, 성내, 금구에 세 곳 있었다. 성 밖은 본가이고 성내는 용무차 거처하는 곳이었으며 금구는 처가가 있는 곳이었다. 연려실기술과 혼정편록은 ‘정여립의 아버지 정희증이 대대로 전주 남문 밖에서 살아왔다’고 하였으나, 조선왕조실록은 ‘선조(先祖) 때부터 전주 동문 밖에 거주하였는데 가세가 한미하였다’고 기록하였다. 전주성 동문을 나서면 중노송동과 마당재를 지나 안덕원에서 진안과 고산 쪽으로 길이 이어진다.

 

본가를 찾는 방법은 ‘전주 동문 밖에 거주하였는데(조선왕조실록)’, ‘왕기가 전주 동문 밖에 있었다(조선왕조실록)’, ‘전주를 왕래하게 되면 역적의 집이 큰 길 가에 있으므로 찾아가 만났으며(기축록)’, ‘당시에 정여립이 전주성 동쪽에 거처하고 있었는데(택탕집)’, ‘그가 살던 곳도 영문(營門)과 겨우 30리 정도밖에 떨어져 있지 않은 상태였다(택당집)’는 기록들을 검토하는 것이다.

 

전주 남문 밖 상관면 월암리는 관찰사가 지내던 영문으로부터 20리 밖에 되지 않는다.

 

또 전주 동문 밖 송광사의 승려 성희가 삼일암에서 역모의 또 다른 모주 길삼봉과 모의하였고, 정여립의 누이가 진안 소리실로 시집갔다는 설과 정여립이 활동하다 죽은 죽도가 소리실 옆이라는 점을 두고 볼 때, 그의 생가는 임실로 통하는 남문 밖이 아니라 진안으로 통하는 동문 밖일 가능성이 높다.

 

정여립의 생가를 찾는 것이 중요하지만 고증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일이다. 보다 신중한 접근을 권유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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